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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추수감사절] 감사하는 한 사람 (눅 17: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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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하는 한 사람 (눅 17:11~19)


지금은 농경사회가 아니고 도시화된 생활 환경과 문명속에 살고 있기 때문에 추수감사주일이라는 것이 조금 거리가 멀게 느껴지는 감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 그러나 추수라고 하는 것은 꼭 농사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이 세상에서 수고하여 얻는 모든 것이 다 추수하는 의미에서 폭넓게 적용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추수 감사라는 말 보다 개인적으로는 범사 감사주일이라고 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현대인들은 감사하는 마음이 참으로 희미해졌습니다. 
받은 은혜나 사랑과 축복에 대하여 감사할 줄 모르고 삽니다. 그 대상이 사람이든 하나님이든 감사하는 마음보다는 원망 불평의 소리가 더 크게 들리고 있습니다. 주어진 것 있는 것에 대한 감사보다 없는 것에 대한 불평의 소리가 더 크다고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다른 짐승보다 더 나은 면이 있다면 감사할 줄 안다는 것일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를 모르거나 배은 망덕하는 사람을 두고 짐승만도 못한 (?)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얼마나 감사하는 삶을 살았는지 한 번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중국인들이 태평성대를 누리던 때는 요임금과 순임금 시절입니다. 그래서 살기 좋은 시절을 요순시절이라고 말합니다. 그 요임금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당시에 중국백성들이 불렀던 노래 중에 격양가(擊壤歌)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그 내용은 "경전이식(耕田而食)하고 천정이음(穿井而飮)하니 제은어(帝恩於)하여 하관언(何關焉)" 이라는 노래입니다. 해석하면 "우리가 밭을 갈아서 밥을 먹고 우물을 파서 물을 마시는데 임금의 은혜가 내게 무슨 상관이냐" 라는 내용입니다. 

임금이 나라를 잘 다스려 자신들이 태평 세월을 보내고 있음을 모르고 자신의 힘으로 평안한 시절을 살고 있는 것으로 착각하여 임금의 은혜가 나와 무슨 관계가 있느냐는 노래입니다. 어쩌면 우매하고 어리석은 우리 인생의 모습이 아닌가 싶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 크고, 온통 그 은혜 가운데 살고 있으면서도 으레 그런 것인 줄 알고 하나님의 은혜 속에 살고 있다는 생각을 못할 뿐만 아니라 아예 잊어버리고 내가 똑똑하여 잘 사는 것으로 착각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처음부터 끝까지 감사이며 모든 것이 다 감사일뿐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 된 증거가 범사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감사한 맘을 잊고 살다가 추수 감사절만 되면 갑작스럽게 감사를 생각하는 그런 모습은 부끄러운 것입니다. 추수 감사절 뿐 아니라 항상 감사합시다. 그리고 항상 감사할 뿐 아니라 범사에 감사해야 합니다. 

옛날 나라도 개인도 가난하고 궁핍한 시절 식량난이 심했을 때 어디 가서 목구멍 풀칠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저 하루 세끼 밥만 굶지 않고 먹을 수 있으면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열심히 감사하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들은 하루 밥 세끼 먹을 수 있는 것은 별로 감사할 조건이 못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어떤 더 큰 감사의 조건이 자신에게 생기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회복해야 할 것은 하루 세끼 밥 먹을 수 있는 것에 감사하는 마음입니다. 따지고 보면 인간의 삶의 현장에서 어느 부분 어느 것 하나님의 도움 없이 살 수 있는 것은 아무 곳에도 없습니다. 
나의 삶의 현장에 구석구석 하나님의 도움의 손길이 배어 있고 그 은혜로 말미암아 여전히 살건만 감사하지 못하는 것은 사람의 어리석음과 인색함 때문일 것입니다. 

본문에 감사하는 한 사람과 감사하지 않는 아홉 사람에 대하여 기록되어 있습니다. 
열 명의 나병 환자들이 있었습니다. 나병은 사람들로부터 많은 편견과 오해를 받은 병입니다. 그것은 저주 받은 병으로 인식되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병은 나병만이 아니고 모든 병이 저주를 받아서 생기는 것입니다. 
열 명의 병자들이 주님을 만나서 긍휼히 여김 받기를 원했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그들 모두에게 제사장에게 가서 몸을 보이라고 하셨고 그들이 제사장에게 보이러 가는 중에 병고침을 받았습니다. 열 명 모두 주님의 긍휼로 병 고침을 받았습니다. 그들이 원했던 긍휼히 여기심이 나타난 것입니다. 

인생은 하나님의 긍휼함을 얻어야 삽니다. 
육신적인 한센씨 병은 현대의학에서 완전히 치료가 가능한 병입니다. 그러나 죄악의 나병은 현대 의학으로 치료될 수 없습니다. 영적인 나병에 걸려 완전히 죽을 수밖에 없는 인생들이기에 하나님의 인자와 긍휼이 아니면 안 됩니다. 그러기에 시편기자는 시 86:15-16절에서 “주여 주는 긍휼히 여기시며 은혜를 베푸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자와 진실이 풍성하신 하나님이시오니 내게로 돌이키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주의 종에게 힘을 주시고 주의 여종의 아들을 구원하소서” 라고 기도하였습니다. 

감사하러온 사마리아인 한 사람 
주님의 긍휼하심은 열 명의 나병환자 모두에게 동일하게 나타났습니다. 열 명이 다 깨끗함을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다시 돌아와 예수님께 감사를 드린 사람은 사마리아 사람 한 사람 뿐이었습니다. 15-16절에 보면 “그 중의 한 사람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예수의 발 아래에 엎드리어 감사하니 그는 사마리아인이라” 라고 했습니다. 

자신의 나은 것을 느낀 이 사람은 가던 길을 돌이켜 먼저 예수님께 찾아왔습니다. 본문은 그가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사례하였다고 했습니다. 사례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유카리스톤은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구원의 은총에 대한 감사를 표현할 때 쓰는 말입니다. 
그는 유대인이 아닌 사마리아 사람입니다.
사마리아는 주전 722년에 앗스루에 의해 함락된 이후 이방인들과 혼혈되었습니다. 그래서 혈통의 순수성을 자랑하는 유대인들이 볼 때 이방인들과 같이 취급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아홉은 어디에...
예수님은 열 명이 다 고침을 받았는데 어찌하여 사마리아 사람 한 사람이냐고 한탄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감사하는 사람을 일컬어 “이 사마리아 사람 외에는 ...” 이라고 한 것을 보면 아홉은 유대인들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유대인들로 추정되는 나머지 아홉 명은 예수께로 와서 최소한 감사의 표시도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17절에서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라고 감사하지 않는 다른 아홉에 대하여 불만족스러운 심경을 표현하셨습니다. 은혜는 다 같이 받았지만 감사하는 사람은 한 사람 뿐이었습니다. 
아홉은 어디로 갔습니까?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서 깨달아야 할 것이 무엇일까요?. 

① 감사는 신속히 해야 합니다. 
만사는 다 때가 있습니다. 감사해야 할 때 감사해야지 사이다를 김이 다 빠진 후에 마시는 것처럼 지난 다음에 감사하는 것은 진정한 감사라고 할 수 없습니다. 
시119:60절에 보면 “주의 계명을 지키기에 신속히 하고 지체하지 아니하였나이다” 라고 고백하였습니다. ,감사나 인사를 해야 할때 하지 못하고 욕을 다 먹고 난 다음에 하는 행위는 어리석은 행위입니다. 아마도 열사람 중 신속히 와서 감사한 한 사람 빼 놓고는 모두 나중에 해야지 ... 하며 제사장에게 갔을 것입니다. 

아마 그들 중에는 제사장에게 가서 나았다는 진단을 받고 다시 와서 예수님께 사례를 하려고 했을 지도 모릅니다. 또 어떤이들은 너무 기뻐서 가족에게로 달려갔을 지도 모릅니다. 우선 가족에게 기쁨소식을 알리고 나중에 예수님을 찾아뵈어야 하겠다고 생각한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만일 그랬다면 주님이 그들의 그런 마음을 모르실리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선순위의 문제입니다. 
제사장에게 가는 것도 중요하고 가족에게 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은 나중에 해도 될 일 들입니다. 우선 주님을 찾아 감사해야 신선한 감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우선 다른 일보고 나중에 와서 감사하는 것은 그 감사의 의미가 절반 내지는 완전히 감소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런 감사를 받기를 원치 않으신 것입니다. 

② 감사는 구체적 믿음으로 해야 합니다.
감사하러 돌아온 한 사람 그에게서 믿음을 발견합니다. 그것은 감사하는 믿음입니다. 어쩌면 우연으로 돌렸을 수도 있습니다. 자신이 병 나은 것이 우연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고쳤다는 확신을 가질만한 근거가 되는 이야기가 없습니다. 

병 고침을 받았으니 가서 제사장에게 보이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냥 제사장에게 보이라는 것입니다. 병고침을 받을 것이라는 것을 암시했을 뿐 직접적인 언급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한 사람 사마리아 사람은 자신의 병이 나은 것이 예수님 때문이라는 것을 믿었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로 돌아와서 사례한 것입니다. 감사는 믿음입니다. 그 믿음이 구체적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인생을 살아오면서 여기 까지 살아온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생각이 되어집니까?
믿음이 필요합니다. 그렇다는 믿음이 필요하고 그런 믿음이 있으면 구체적으로 사례하십시오. 하나님께 사례하십시오.

어느 교회에서 매년 감사절기가 되면 교인들에게 미리 헌금봉투를 나누어주고 작정헌금을 하는 시간을 가졌다고 합니다. 그 교회 목사님은 그것을 예배 시간에 꼭 발표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한 장로님이 30만원을 작정했는데 목사님이 그만 잘 못읽어서 300만원 작정하였다고 잘못 발표해버렸습니다. 순간 그 장로님은 깜짝 놀라며 당황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무 말하지 않고 나중에 발표된 300만 원을 기꺼이 헌금하셨습니다. 

얼마 뒤 이야기를 전해들은 목사님은 장로님께 미안하다고 사과를 하셨습니다. 그러자 장로님은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목사님, 저는 제가 30만 원짜리 감사인생인줄 알고 30만원 헌금하려고 했는데 하나님께서 목사님 입을 통해 300만 원짜리 감사인생이란 것을 알게 해주셨습니다. 사실 몹시 당황했습니다. 그 날 밤 하나님께 이 문제를 놓고 기도하는데 기도하면서 가만히 헤아려 보니 제 인생이 30만 원짜리가 아니라 300만 원짜리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300만 원짜리 인생을 만들어주신 하나님께 감사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인생의 값을 높여주신 목사님께 감사드립니다." 넘치는 감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것입니다.

믿음입니다. 감사는 믿음으로 해야하고 구체적으로 그 믿음의 행위가 구체적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만일 고침 받은 한 사람이 예수님께 감사한 마음만 가지고 그냥 돌아갔으면 그도 감사하지 않은 아홉 사람과 다를바 없을 것입니다. 

③ 감사는 겸손으로 해야 합니다. 
감사하는 사람은 예수님께로 와서 겸손히 엎드려 사례하였습니다. 죽을 죄인이 구원받았으니 겸손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대체로 교만한 사람은 감사할줄 모르는 사람입니다. 반대로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은 교만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교만해지면 하나님도 잊어버리고 감사도 잊어버립니다. 신명기 8:12-14절에 보면 “네가 먹어서 배불리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하게 되며 또 네 우양이 번성하며 네 은금이 증식되며 네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 두렵건대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하노라” 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신 8:17절에 보면 “또 두렵건대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내 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 할까 하노라” 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십일조나 감사헌금을 드릴 때 먼저 겸손해야 합니다. 많이 바칠 수 있게 되었다면 적게 바치는 사람보다 은혜를 더 많이 받았음으로 더 겸손해야 합니다. 교만한 마음으로 드리면 드리고도 복을 받지 못합니다. 

이제 한 사람의 사마리아 인처럼 우선의 감사를 드리는 믿음이 됩시다. 
골 3:15절에 보면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평강을 위하여 너희가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또한 너희는 감사하는 자가 되라” 라고 했습니다. 
감사는 명령입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감사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주님을 바라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떤 환경 속에서도 주님을 바라보면 감사할 마음이 생깁니다. 주님을 바라보지 않기 때문에 불평과 불만이 가득해지고 감사한 마음이 없어집니다. 이 사마리아 인이 돌아와 주님께 사례한 것은 그의 마음이 주님을 바라보는 믿음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주님 바라보는 마음이 되게하여야 합니다. 주님이 지신 십자가를 생각하면 오늘 나의 현실이 불평이 있을 수 없습니다. 

대하 20:12절에서 여호사밧 왕이 적의 침략을 받아 국가적 위기 처했을 때 “우리 하나님이여 저희를 징벌하지 아니하시나이까 우리를 치러 오는 이 큰 무리를 우리가 대적할 능력이 없고 어떻게 할 줄도 알지 못하옵고 오직 주만 바라보나이다” 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대하 20:21절에 보면 여호사밧은 “백성으로 더불어 의논하고 노래하는 자를 택하여 거룩한 예복을 입히고 군대 앞에서 행하며 여호와를 찬송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 감사하세 그 자비하심이 영원하도다 하게 하였더니...” 라고 말했습니다. 

즉 주만 바라본 그에게는 감사가 생겼습니다. 그래서 그는 백성들에게 “여호와께 감사하세” 라고 찬양하게 한 것입니다. 주님을 바라보면 감사할 조건이 생깁니다. 그리고 그 감사의 찬양을 시작할 때 하나님의 천사들이 나타나서 적군을 다 물리쳐 주었습니다. 세상을 바라보면 감사할 수 없습니다. 주님을 바라 보십시오
십자가에 지신 주님만 바라봅시다. 나를 위해 가시 면류관 쓰시고 물과 피를 다 쏟아서 생명을 주신 주님만 바라봅시다. 
마음과 생각을 주님께로 돌이켜 그에게로 가까이 가십시오. 그래야 감사할 수 있고 감사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축복이 나타납니다. 돌아와 사례한 사마리아 인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첫째는 믿음의 인정 즉 칭찬을 받았습니다. 
둘째는 병 고침의 완전한 보장을 받았습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사람의 유형에 속합니까? 긍휼을 받고도 감사치 않는 열사람의 속에 속합니까? 아니면 주님께로 돌아와 감사로 사례한 이 사마리아인의 유형에 속합니까?
우리를 향해 베푸신 주님의 크신 긍휼과 은총에 대해 깊이 감사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피를 흘리시고 살을 다 찢어 주셨습니다. 성찬 예식은 날 위해 물과 피를 다 찢어 나누어주신 주님을 기념하는 예식입니다. 주님께서 십자가를 통해서 나의 죄를 씻으시고 질병의 굴레에서 자유케 하심을 묵상함으로 성찬 예식을 거행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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