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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모퉁이의 머릿돌 (벧전 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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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퉁이의 머릿돌 (벧전 2:4~8)


(벧전 2:4)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에게 나아와
(벧전 2:5) 너희도 산 돌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
(벧전 2:6) 경에 기록하였으되 보라 내가 택한 보배롭고 요긴한 모퉁이 돌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벧전 2:7) 그러므로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건축자들의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
(벧전 2:8) 또한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이 되었다 하니라 저희가 말씀을 순종치 아니하므로 넘어지나니 이는 저희를 이렇게 정하신 것이라

성경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그를 믿는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단순히 예수라는 분이 역사가운데 실재 있었고 갈보리에서 죽으셨으며 부활하셔서 하나님 우편에 앉으셨다는 것을 인정하면 되는 것일까요?  믿음이 단지 예수님에 대하여 단편적인 지식을 가지고 인정하는 것이라면 귀신들도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약2:19에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라고 말씀합니다. 그렇지만 귀신은 구원받지 못합니다. 귀신들은 예수에 대한 지식은 많으나 예수를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믿음은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 8절에는 '..그들이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므로 넘어지나니..'라고 말씀합니다. 문맥상 믿는다는 말과 순종한다는 말을 함께 사용하고 있습니다. 믿는다는 말의 핵심에는 순종이 담겨 있습니다. 
  
우리가 부모님을 사랑한다면 의무감에 마지못해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순종은 즐거운 일입니다. 그처럼 하나님을 신뢰하고 사랑하면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어렵지 않습니다. 믿음이 있으면 당연히 순종이 따라오게 됩니다.

본문에 건축자라고 불리는 이스라엘 사람들은 산돌이신 예수님을 거부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이 주신 율법을 자랑했습니다. 구약의 말슴을 해석하고 가르치는 일에 열심이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이 보내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거절했습니다. 하나님은 직접 당신의 외아들을 이 땅에 보내셔서 사람들과 친밀한 관계회복을 원하셨는데 이스라엘백성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버렸습니다.
유대인들의 시각으로는 율법이 하나님과의 관계보다 소중했습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죄사함과 의롭게 됨, 구원을 선물로 주시고자 하셨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며 하나님이 주시는 영생을 선물로 받기보다는 자신들의 노력으로 율법을 지켜서 하나님앞에 의로운 모습으로 당당하게 서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자들은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고 산돌이신 예수님을 기초로하여 아름다운 건물로 그 인생이 세워집니다.  그러나 건축자라고 불리우는 이스라엘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지 아니하고 버렸습니다. 하나님이 모퉁이의 머릿돌로 삼으셨는데  유대인들에게는 버린바되어 부딪치는 돌과 걸려 넘어지게 하는 돌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걸려 넘어지게 하는 사람을 가리켜 실족하게 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예수님이 걸려 넘어지게 하는 역할을 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 부딪치고 걸려 넘어지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실제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독선을 꾸짖으시며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마23:33)"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수시로 바리새인들에게 직설적으로 공격하셨습니다. 예수님께 실족한 그들이 결국 예수님을 증오하여 십자가에 매달아 죽이지 않았습니까? 
  
제자들이 어느날 예수님께 다가와 말슴드렸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이 말슴을 듣고 걸림이 된 줄 아시나이까?(마5:12)" 예수님의 대답은 무엇입니까? "심은 것마다 내 하늘 아버지께서 심으시지 않은 것은 뽑힐 것이니 그냥 두라.(마15:13)"  예수님은 실족하게 하는 시험을 통해서 하나님 아버지께서 심지 않은 자들이 제거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당대에 유대나라에서 가장 유력한 그룹입니다. 유대사회는 그들에 의해 움직인다고 말해도 과장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바리새인들과 손을 잡으면 훨씬 사역하시기에 부드럽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바리새인들과 정면으로 대립하시며 그들을 실족하게 하셨습니다. 물론 바리새인들이 위선적인 신앙을 소유하는 등 문제가 있기도 하지만 주님은 의도적으로 저들을 실족하게 하시려 한 것처럼 보여집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바리새인들의 고집스런 사고와 오만한 습관이 너무 굳어져서 쉽게 변화되지 않을 것을 주님은 아셨습니다. 부드럽게 말씀하셔서는 절대 참 믿음을 품고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는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강력한 말씀으로 도전하신 것입니다. 오로지 회개만이 소망이기 때문에 회개를 강하게 촉구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불순종하며 믿음을 거부했습니다. 오히려 강력한 말씀에 반발하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려고 대적하는 일에 앞장섰습니다. 불신앙을 드러내고 멸망을 선택한 것입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중에 니고데모나 아리마대 요셉같은 이도 있습니다. 그들은 회개하고 신실한 믿음을 가지고 순종함으로 구원받고 존귀한 길을 걸어갔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교회안에 들어오지만 하나님의 사람이 아닌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이상하게 진실한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며 실족합니다. 그래서 신앙의 뿌리가 뽑히고 교회와 하나님께로부터 아주 멀어지고 맙니다. 저는 처음에 제가 하나님의 말씀을 잘못 전해서, 실수해서 사람들이 실족한 줄 알고 몹시 자책하고 괴로와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 그분들은 자신의 삶의 방식이 진리의 말씀과 반하고 맞서기 때문에 진리의 말씀이 귀에 거슬린 것입니다. 그래서 회개하기보다는 곧바로 교회의 모든 면에 비판적인 자세를 취하다가 결국 교회를 떠나는 것입니다. 
  
목사가 교회에 들어오는 모든 사람을 다 붙잡기 위해 현실과 타협할 수는 없습니다. 진리의 말슴을 전하기보다 사람들이 듣기 좋아하는 말씀만 전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는 안됩니다. 사람들이 모두 실족하고 떠나간다 할지라고 진리를 선포할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요6장에 보면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중에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실족한 사건이 기록되었습니다. '제자중 여럿이 듣고 말하되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잇느냐 한대 예수께서 스스로 제자들이 이 말씀에 대하여 수군거리는 중 아시고 이르시되 이 말이 너희에게 걸림이 되느냐..그때부터 그의 제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요6:60,61,66)
  
예수님을 따르던 많은 제자들이 예수님의 메세지를 듣고 한꺼번에 실족하여 떠나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으시고 남은 열 두제자들에게 "너희도 가려느냐?" 하셨습니다. "제발 너희만은 나를 버리지 마라."하신 것이 아닙니다. "너희도 가고 싶으면 가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많은 군중들이 열광하는 것에 아무 관심이 없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세를 불리려는 욕심이 전혀 없으셨습니다. 그래서 부드럽게 말씀하시기보다 직설적으로 말씀하시고 사람들을 많이 잃으셨습니다. 
  
여러분, 교회에 와서 좋은 말만 들으려고 하시면 실족하십니다. 교회는 좋은 말만 하는 곳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곳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때로는 우리의 심령과 골수를 찌릅니다. 쪼개기까지 합니다. 의사가 칼을 가지고 몸을 수술하면 아픕니다. 간호사가 주사바늘만 찔러도 아프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수술하려고 심령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면 시원하기보다 당연히 아픕니다. 그렇지만 참고 견뎌야 치료가 됩니다. 병든 우리의 영혼이 새롭게 되고 우리의 삶의 변화됩니다. 
  
딤후4장3절에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따르리라.'하였습니다. 오늘 이 시대를 두고 하는 말씀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하기 보다 자기의 귀를 만족시켜줄 스승을 찾아 다닙니다. 진리에 귀기울이기 보다 허탄한 이야기에 마음을 빼앗깁니다. 그러다가 참 믿음을 잃어버립니다. 자기도 모르게 불순종의 함정에 빠져듭니다. 

예수님은 고향사람들도 실족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자라난 곳 나사렛에 가셨습니다. 말씀을 가르치고 기적을 행하시기 위해 나사렛에 가셨습니다. 그런데 고향 사람들의 반응이 어정쩡했습니다. "이는 그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그 어머니는 마리아,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라 하지 않으냐? 그 누이들은 다 우리와 함께 있지 아니하냐? 

그런즉 이 사람의 이 모든 것이 어디서 났느냐?" 하고 예수를 배척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않음이 없느니라." 하시고  사람들의 기대와는 달리 아무 능력도 행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엘리야와 엘리사 시대에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있었으나 하나님의 능력을 보지 못하고 오히려 사렙다 과부나 나아만 같은 이방인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였음을 상기시켰습니다.  그러자 고향 사람들은 분이 가득해서 예수님을 산 낭떨어지까지 끌고가 밀져 떨어뜨려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고향 사람들은 말씀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순종하려는 의사가 애초에 없엇습니다. 단지 기적을 행하는 예수님을 구경하려고 나온 것입니다. 자신들의 선입견으로 예수님을 판단하고 존경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 자신들의 인생을 맡기려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고향 사람들에게 능력과 기적을 보여주시기 보다는 준비되지 못한 마음에 은혜가 임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우치는 것이 시급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너희가 내세우는 유대인이라는 혈통은 아무것도 아니다. 나아만 장군이나 사렙다 과부는 이방인이지만 믿고 순종하므로 하나님께 큰 은혜를 받아 치유받고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고 살아났다. 너희도 은혜를 받으려면 오만한 마음을 내려놓고 겸손히 믿음을 품어라.' 하신 것입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쥐꼬리만한 지식이 있다고 오만한 자세로 말씀을 판단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말씀 전하는 설교자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받지 못하고 외적인 조건을 따라 판단하고 말씀에 마음을 열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실족하게 되어 있습니다. 어떤 말씀앞에서도 믿음의 반응을 보이지 못합니다. 어떠한 하나님의 역사를 보고도 불순종으로 일관되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그 시대에 예수님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실족했습니다. 예수님의 가족들도 예수님으로 인해 실족했습니다. 막3:21에 보면 '예수의 친족들이 듣고 그를 붙들러 나오니 이는 그가 미쳤다 함일러라.' 예수님의 가족들은 사람들의 말만 듣고 예수가 미쳤다고 생각하고 붙잡아다 감금하려고 했습니다. 성경은 예수님의 형제들까지도 예수를 믿지 아니하였다고 증언합니다. 예수님은 가장 가까운 가족들에게 까지 거부당하고 불신당했습니다. 예수님이 가족들의 요구에 맞추기보다는 하나님아버지께 순종하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당신께서 가장 사랑하시는 사람들도 실족하게 하셨습니다. 요11장에 마르다 마리아 나사로가 등장합니다. 이들은 예수님과 아주 가까운 사이였습니다. 예수님은 이들 남매를 무척 사랑하셨습니다. 하지만 나사로가 중병에 들었다는 소식을 듣고 예수님이 취하신 행동은 의외였습니다. 아주 심각한 상태임을 아시면서도 이틀을 더 유하셨습니다. 사람이 사느냐? 죽느냐? 하는 촌각을 다투는 긴박한 상황에서 예수님은 일부러 시간을 끌며 지체하십니다. 그리고 베다니에 도착하셨을 때는 이미 나사로가 죽은 뒤였습니다. 마르다와 마리아는 예수님을 원망합니다.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일찍 오셨으면 기별을 받고 바로 오셨으면 살 수 있었는데 왜 이제 오셨느냐?는 말입니다. 
  
마르다와 마리아는 마음이 상했습니다. 예수님이 자신들을 끔찍이 사랑하시기에 상황을 이해하고 모든 것을 제쳐두고 당연히 곧바로 달려올 줄 알았는데 그러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그들이 기대하였던대로 반응하지 않으셔서 실족한 것입니다. 
  
오늘날도 예수님이 자신의 생각대로 움직여주지 않아 실족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내가 원하는 타이밍에 내가 원하는 방식대로 기도응답해 주시지 않으면 사랑하지 않는것으로 단정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내가 기대한 방법대로 기적을 일으켜 주지 않으면 능력이 없는 것으로 단정하고 등을 돌리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 자체가 불신앙입니다. 우리가 주님께 순종할 마음이 없기 때문에 순종할 자세가 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참 믿음을 드러내지 못하는 것입니다. 

침례 요한도 잠간이나마 예수님때문에 실족할뻔한 적이 있습니다. 감옥에 갇혀 있던 요한이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 묻습니다. "오실 그이가 당신입니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려야 합니까?" 요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고 성령께서 예수님위에 비둘기처럼 임하는 것도  보았습니다. 그래서 이제껏 확신에 차서 '보라 세상죄를 지고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외쳤습니다. 메시야라는 확신속에 그 길을 예비하는 사명을 감당하는 일에 인생을 쏟아 부었습니다. 

그런데 왜 흔들리고 있습니까? 감옥에 갇혀 사람들의 말을 들으니 혼란스러운 것입니다. 당신을 위해 모든 것을 쏟아 부었는데 예수님은 한번도 면회오시지도 않았습니다. 게다가 사람들이 와서 하는 말이 '그분은 당신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삶을 삽니다.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고 안식일도 지키지 않습니다. 금식하는 일도 없습니다.'  그래서 혼란에 빠지고 의심한 것입니다. 침레요한의 질문에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맹인이 보며 못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먹은 사람이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먀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예수님때문에 실족하지 않아야 복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우리가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우리 인생의 귀중한 기초석이 될 수도 있고 부딪치는 돌, 걸려 넘어지게 하는 바위가 될 수도 있습니다. 무조건 신뢰하고 믿음으로 순종하면 예수님은 우리 인생의 소중한 모퉁이의 머릿돌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불신하고 순종하지 아니하면 예수님때문에 걸려 넘어질 수 있습니다. 어정쩡하게 믿음 아닌 것을 내세우며 믿음이 있노라고 착각하여 부끄러움을 당하지 말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내 생각과 달라도, 내 방법과 달라도, 내 방식과 달라도 전적으로 신뢰하고 목숨을 다하여 순종하므로 믿음을 인정받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인생이 아름답고 튼튼한 건물로 세워지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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