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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은혜 (롬 3:2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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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은혜 (롬 3:20~28)


지난 주간 우리는 신문을 통해서 아주 충격적인 소식을 접했습니다. 과거 큰 재벌의 회장을 지낸 한 분의 자살 사건을 우리가 접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한국 야구위원회 총재를 7년이나 역임하면서 한국 야구 발전에 큰 공을 세운 분이라고도 합니다. 그는 또 많은 훈장도 받은 분입니다. 산업 발전을 위해 노력했기에 석탑산업훈장, 금탑산업훈장, 벨기에 왕실훈장 등 수많은 훈장을 수여받은 분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유서에서 회사 부채가 많아서 경영이 어렵다고 기록을 해 놓았다고 합니다. 그의 자살원인은 감당할 수 없는 회사 부채, 그 빚 때문에 결국은 자살을 택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저는 신문을 읽으면서 엄청난 죄의 빚을 진 인간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그가 세상적인 이 회사의 부채를 감당하지 못해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면, 엄청난 죄의 빚을 지은 인간의 모습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의 인간의 모습은 죄의 빚을 진, 휘청거리는 모습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지난주일 성경에서 놀라운 선언을 들었습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은 자도 없다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 데에 빠르며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다.”는 말씀을 우리가 묵상했습니다. 죄의 노예된 인간의 절망적인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러분! 유대인들은 율법을 자랑하지만 그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할뿐 죄를 해결할 능력을 제공하지 못한다는데 에 율법의 한계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 20절 말씀을 다시 한 번 읽어봅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합니다. 우리가 율법이 없을 때에는 그것이 죄인 줄 몰랐습니다. 그런데 율법이 있음으로 그것이 죄인 줄 알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어두운 곳에서 생활하다보면 무엇이 있는 줄 잘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밝은 등을 켤 때 ‘아! 내가 있는 이 어두운 곳에 이렇게 쓰레기도 많고, 더러운 것이 많구나.’하고 발견하게 됩니다. 어찌 보면 율법은 빛과 같습니다. 율법의 빛 앞에서 우리가 죄인임을 깨닫게 됩니다.

한국에서 중국으로 공부하러 가던 스님이 있었습니다. 먼 길을 가다보니 날이 어두워졌습니다. 잠을 청하기 위해 한 동굴에 들어갔습니다. 동굴에 들어가 잠을 자는데 더운 날씨에 땀을 흘려서 몹시 목이 말랐습니다. 깜깜한 데 옆에 혹시 뭐가 없나 하고 더듬어보니 물그릇이 하나 놓여 있습니다. 그 안에 물이 담겨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물그릇을 집어서 아주 시원하게 잘 마셨습니다. 그리고 아침이 되어서 해가 떠올랐는데 어제 무슨 물을 먹었나 하고 봤더니 물그릇은 없고 해골바가지가 옆에 놓여 있었습니다. 그 해골에는 빗물이 떨어져서 썩어 있는 것이었습니다. 깜깜한 데에서는 그것이 해골바가지인지, 빗물인지 몰랐습니다. 밝은 빛이 비추니 ‘아이고, 내가 이런 걸 먹었네.’하고 깜짝 놀란 것입니다.

율법이 이 땅에 오기 전까지는 그것이 죄인 줄 몰랐습니다. 율법이 와서 하는 일은 ‘이것이 죄다, 아니다.’를 깨닫게 하고 구분하게 합니다. 그러나 율법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죄라고 지적은 해주지만 그 죄를 해결할 능력이 없습니다. 우리가 죄의 종이 되어서 살아가지만 그 죄의 고리를 끊을 수 있는 힘이 없습니다. 여기에 인간의 절망이 있습니다. 이 절망에 빠진, 죄의 종 된 이 희망 없는 인간들에게 이제 한 줄기 빛이 비추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한 의라고 오늘 성경은 설명하고 있습니다. 

성경 본문 21절을 다시 한 번 읽어봅니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율법과는 별도로 하나님의 한 의가 인간에게 나타났습니다. 이 하나님의 한 의라는 것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이 인간에게 열어주신 새로운 구원의 길입니다.

새로운 구원의 길. 로마서 1장 10절에 보니까 “복음에는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한다.”고 나와 있습니다. 여러분! 그러면 이 복음은 무엇입니까? 이 하나님의 한 의를 나타내는 복음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죄의 절망에 빠진 인간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셨고, 그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심으로 인간에게 구원의 길이 활짝 열리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래서 우리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되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바로 이 사건은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오기 전에 인간은 어떤 모습으로 살았습니까? 우리는 죄악의 노예 되어서 살았습니다.

로마서 3장 23절 말씀을 다시 읽어봅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이것이 우리 인간의 절망적인 모습입니다. 여의도에 73년도에 ‘빌리 그래함’ 목사님이 오셔서 설교할 때 이 말씀을 많이 인용하셨습니다. 우리는 죄인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거룩한 영광에 다가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죄의 담이 막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말은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창조하실 때 원래의 형상이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만드실 때 당신의 형상대로 만드셨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죄가 들어오고 우리가 범죄함으로 하나님의 형상의 아름다움을 다 상실해 버렸습니다. 그 아름다운 영광의 형상을 마귀에게 다 빼앗겨 버렸습니다. 인간들은 처절한 모습 가운데 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한 의를 우리에게 나타내주셨습니다. 그것은 이미 율법과 선지자들이 예언한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는 구약에서 예언되었던 사건이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참으로 율법을 신봉하는 유대인들만이 아니라 모든 이방인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차별이 없는 하나님의 한 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나오는 자마다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구원받는 길이 활짝 열려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더더욱 이 구원의 길은 어떤 제한이 없습니다. 어떤 차별이 없습니다. 이것은 모든 만민을 위해서 활짝 열려있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본문 24절 말씀을 다시 읽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사건입니다.

특별히 의롭다 함을 얻은 것은 죄가 없다고 인정받은 것입니다. 내가 죄인으로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는데 대통령이 어떤 특사를 내려서 그를 무죄하다고 선언해 주는 것이 바로 의롭다 함을 입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학적으로 칭의라고 하고 저스티피케이션(justification)라고 부릅니다. 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죄 없다고 선언해 주시는 것입니다. 의롭다고 인정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하나님의 은혜의 사건인 것입니다. 만민을 위해서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길이 활짝 열려지게 된 것입니다. 이것을 가리켜 에베소서 2장 8절에서 사도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바로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로 거저 값없이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이것을 2가지 용어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속량이라는 말로 이 구원의 사건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본문 24절에 보니까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우리가가 의롭다 함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 속량이라는 말이 예전 성경에는 구속이라고 표현되어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속량으로 인해서, 속량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습니다. 이 속량이라는 말은 시장에서 값을 치르고 무엇을 사는 것입니다. 대가를 치르는 것, 식당에서 음식을 먹었으면 음식 값을 치르는 것이 속량, 구속인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어원을 살펴볼 수가 있습니다.

예전 노예가 용인되던 시절에 사람들은 노예를 부리다가 이 노예가 마음에 안 들거나 돈이 필요하면 시장에다가 이 노예를 팝니다. 노예를 세워 놓고 가격을 매겨놓았습니다. 사람에게 돈을 매긴다는 것이 잘못된 것이지만 이런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러면 누군가 와서 필요한 노예의 값을 치르고 그 노예를 사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나가던 돈 많은 한 사람이 너무 몸이 연약하고 병든 노예를 보고 너무 불쌍했습니다. 그래서 주인과 흥정하고 노예의 값을 치르고 그 노예를 삽니다. 그리고 그 노예에게 자유를 줍니다. “나는 너를 노예로 쓰기 원치 않는다. 너는 이제 자유인이다. 나는 너의 값을 다 치렀다.” 하고 선언합니다. 이것이 바로 속량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죄의 종이었습니다. 마귀의 종이었습니다. 우리는 죄의 엄청난 부채를 지고 만날 허덕이며 파멸과 고생 가운데 살아가고 있었지만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십자가 위에서 우리의 죄 값을 다 치러주셨습니다. 우리대신 그 죄 값을 다 치러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자유한 사람으로 만들어 주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바로 속량의 의미입니다.

여러분! 그러고 보면 우리가 얼마나 가치 있고 존귀한 존재인지 모릅니다. 창세기에 보면 야곱이 외삼촌 라반의 집에 가서 20년 동안 일하다 돌아오는데 처음에 가서보니 라반 삼촌에게는 레아와 라헬이라는 딸이 있는데 동생인 라헬이 매우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래서 라헬을 연모하게 되고 7년 동안 무보수로 일을 하면 라헬을 준다고 하자 열심히 일을 했습니다. 그래서 결혼을 하고 신방에 들었는데 아침에 깨어보니 그 옆에는 언니 레아가 누워있는 것입니다. 깜짝 놀라서 항의를 했더니 우리 동네에는 동생을 먼저 주는 법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7년을 더 일하게 되었습니다. 라헬을 위해서 모두 14년 동안 무보수로 일을 합니다. 그 당시에는 결혼을 할 때 딸에 가정에 지참금을 주고 그 딸을 데려오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야곱은 14년의 긴 세월 동안 자기의 모든 임금을 지참금으로 내어준 것입니다. 라헬이 얼마나 예뻤으면 야곱이 그런 일을 할 수 있었을까? 여러분 중에  만약 여러분의 아내를 얻기 위해 14년 동안 무보수로 일을 하라고 하면 일을 할 사람이 있을까요? 저만 같아도 다시 한 번 생각해 봐야겠습니다. 그런데 라헬이 얼마나 존귀하고 아름다웠으면 야곱이 그 대가를 치렀을까요?

바꾸어 생각해 봅시다. 그러면 오늘 죄의 종 된 우리들을 위해서 누군가가 대가를 치르셨는데 그 분이 엄청난 대가를 치르셨습니다. 조금의 모욕 정도가 아닙니다. 채찍에 맞는 정도가 아닙니다. 그분이 십자가에 달리시고 피를 흘리시고 그 분의 생명을 우리를 위해서 내어주기까지,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희생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얼마나 가치 있는 존재입니까? 내 생명과 예수님의 생명이 맞바꾸어진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백화점에 가서 물건을 사면 천 원짜리, 만 원짜리, 십만 원짜리가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바로 예수님의 생명과 맞바꾼 존재들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얼마나 놀랍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내가 죽어야 할 자리에, 내가 저주받아야 할 자리에 그리스도께서 내 대신 죽으시고 저주를 감당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요, 값없이 주어진 구원입니다. 우리의 구원이 값없이 거저 주어진 것 같지만 여기에는 엄청난 대가가 치러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속량이라는 말로 이 사건을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 바울이 설명하는 용어가 있습니다. 화목제물입니다. 본문 25절 말씀을 읽어 봅니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심으로 자신이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화목제물이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화해의 제물이 되셨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죄의 담이 가로막혀 있고 인간은 하나님의 진노를 사서 하나님과 교제할 수 없는데 예수님께서 화해의 제물이 되심으로 인간이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고,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막힌 담이 허물어졌다는 의미입니다.

여러분! 레위기 16장에 보면 구약에 한 제사의 방법이 소개됩니다. 대 속죄일이 되면 1년에 한 번씩 대제사장이 성소보다 더 깊은 지성소에 들어가게 됩니다. 들어갈 때 그냥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염소와 송아지를 잡아서 그 피를 가지고 들어갑니다. 그리고 법궤 위에 있는 시온소에다가 그 피를 바릅니다. 그 피를 바름으로써 백성의 모든 죄가 용서받는 예식을 치르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그 당시의 속죄제물, 화목제물이었습니다. 레위기 16장 18절에 보면 “그는 여호와 앞 제단으로 나와서 그것을 위하여 속죄할지니 곧 그 수송아지의 피와 염소의 피를 가져다가 제단 귀퉁이 뿔들에 바르고” 라고 나옵니다. 이것이 바로 화목제물의 출발입니다. 바로 인간이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해서는 누군가의 피가 뿌려져야만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화목제물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그 속성상 두 가지 속성을 가지고 계십니다. 첫째 하나님은 공의로우십니다. 죄를 용납하지 않습니다. 죄에 대해서는 반드시 심판이 따릅니다. 죄라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지 생각해 봅시다. 신문에 보니까 작년인지 재작년인지 충남 태안에 800년 동안 바다 속에 묻혀 있다가 쭈꾸미잡이선에 의해서 발견된 보물선이 있었습니다. 수천 개의 도자기, 귀한 작품들이 아주 많아서 그 값어치가 수백억에 이른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제 신문에 보니까 그곳에서 나온 것들 중에 나무에 새긴 장부들이 있다고 합니다. 경상도에 있는 누군가가 한양에 있는 김대감에게 보내는 양식, 어떤 뇌물, 이런 내용들이 다 기록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800년 동안 그것이 묻혀 있었습니다. 아무도 모를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800년 후에 드러났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 앞에서는 비밀이 없습니다. 죄는 반드시 씻겨야 합니다. 나는 그 죄를 짓고 잊었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잊어버리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참 무섭다고 생각했습니다.

여러분! 그 죄는 바로 이제 공의로우신 하나님에 의해서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동시에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인간에게 무서운 형벌을 내리실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용서하고 싶으셨습니다. 그래서 이 공의와 사랑의 속성이 서로 충돌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어떤 방법을 찾았는가하면 당신의 하나밖에 없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그 죄의 대가로 내어주셨습니다. 우리가 받아야 할 죄의 형벌을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대신 받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놀라운 용서의 선언이 주어졌습니다. 이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방법을 통하셔 화목제로 예수 그리스도를 내어주신 것입니다. 그 분이 흘리신 피를 통해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가 화목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의 사건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속량의 사건을 일으키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심으로 우리 죄가 용서받고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화해가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의 피, 그 보혈이 너무 귀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피는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9장 22절에 보니까 “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한 1서 1장 7절에 보니까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의 보혈은 너무나 능력이 있는 피인 것입니다.

어떤 교회에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교인들이 100여명이 조금 안 되는 개척 교회였는데 어떤 한 권사님은 목사님이 설교하실 때 예수님의 피에 대한 설교를 많이 하면 좋겠는데 그 피 설교를 안 하는 것이 늘 불만이었습니다. ‘목사님은 왜 보혈 설교를 저렇게 안 하시나?’하고 늘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목사님이 성지순례에 가시느라 주일에 한 번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 교회는 장로님이 안 계셔서 고참 되신 권사님이 강단에 서 설교를 해주십사 부탁을 받게 되었습니다. 권사님이 잘되었다며 피에 대한 설교를 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주보에다가 “예수님의 피”라고 제목을 적어놓고 일주일 동안 열심히 준비했습니다. 그리고 주일날 강단에 올라섰습니다. 설교할 시간이 되어서 올라가서 교인들을 보니까 교인들의 수십 개의 눈이 자기를 째려보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보는 순간 당황했습니다. 원고가 보이지 않고 식은땀이 흘러내립니다. ‘이거 어떡하면 좋은가?’ 그런데 생각나는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래서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이런 설교를 했습니다. “여러분! 피에는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개피, 소피, 닭피, 돼지피, 그런데 제일은 예수님의 피입니다.” 그리고 내려왔다고 합니다. 설교는 바로 했지만 당황해서 설교는 짧게 끝내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피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늘 찬송을 부릅니다. “나의 죄를 씻기는 예수의 피 밖에 없네 다시 성케 하기는 예수의 피 밖에 없네” 그리스도의 보혈이 여러분을 죄의 고리에서 끊을 수 있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죄의 배후에는 마귀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우리 인간의 힘으로는 그 죄를 끊어버릴 수가 없습니다. 인간의 죄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만이 끊을 수가 있습니다. 보혈이 얼마나 존귀한지 모릅니다.

여러분! 어떤 장로님이 노년에 병환을 얻으셔서 이제 병으로 고생하시다가 마지막 임종의 순간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목사님이 찾아가서 장로님이 편안하게 주님의 품으로 갈 수 있도록 임종예배를 드리고 마지막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가시기 전 장로님의 얼굴에 불안한 빛이 떠나지 않습니다. 불안하고 우울하고 그 빛이 너무 어두운 것이었습니다. 너무 안 되어서 장로님께 칭찬을 했습니다. “장로님! 걱정하지 마세요. 장로님은 누구보다 더 착하게 사셨고요, 구제도 많이 하셨고, 선행도 많이 하셨어요. 장로님은 주님 앞에 가면 칭찬받으실 거예요. 걱정하지 마세요. 편안하게 임종을 맞이하세요. 장로님은 예배당도 3채씩이나 헌당하셨잖아요. 헌금도 얼마나 많이 하셨어요. 걱정하지 마세요.” 그런데 그 장로님의 얼굴에 불안이 가시지 않습니다.

목사님이 계속 생각하다가 다시 장로님께 말씀드렸습니다. “장로님! 예수님의 피가 장로님의 모든 죄를 씻어주셨습니다. 장로님의 죄는 다 용서받으셨습니다. 걱정하지 마시고 편안히 주님의 품에 돌아가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말씀드렸더니 그제야 장로님의 얼굴에 불안이 가시고 평안한 얼굴로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마지막 주님 앞에 설 때에 다른 것 다 필요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공로로 여러분이 주님 앞에 설 수 있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보혈이 바로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 보혈이 얼마나 귀한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 보혈은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거저 우리에게 주어진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가 위대하다고 생각합니다. 세상에 종교가 많이 있지만 딱 두 종류의 종교 밖에 없다고 합니다. 기독교를 제외한 다른 종교들, 그 종교들은 무조건 하라고 합니다.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 유교에 보면 인사를 잘 해라. 뭘 해라. 불교에 가도 뭘 해라. 염불을 해라. 하라는 것이 많습니다. 구제를 하고 선행을 하라. 그런데 기독교는 그렇지 않습니다. 기독교는 그 복음이 이미 이루었다고 말합니다. 이미 이루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모든 대가를 다 지불하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위해서 할 일을 다 했다. 내가 다 이루었다. 다 끝났다.” 예수님의 마지막 임종의 순간에 하신 말씀이 “다 이루었다.”입니다. 내가 너희의 죄 값을 다 치렀다. 내가 너희의 구원을 다 이루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내 능력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어떤 선행이나 공로를 쌓음으로 내가 주님 앞에 가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흘리신 그 피의 공로를 내가 믿음으로써 의로워지고, 믿음으로써 죄가 용서받고, 믿음으로써 구원을 얻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의 복음의 진수인 것입니다. 성경말씀을 읽어봅니다. 

본문 27절, 28절입니다.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냐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사람이 구원받는 길, 의로워지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습니다.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 것입니다.

두 개의 법이 있습니다. 율법이 있고 믿음의 법이 있습니다.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할 뿐 인간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에는 역부족입니다. 오직 믿음의 법만이 우리를 주님의 앞에, 우리를 구원의 길로 인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자랑할 데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행위를 자랑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야고보서를 읽고 오해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습니다. 이제 구원받은 사람은 그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형제를 구원하고 선행을 행하고 착한 일도 하고 좋은 일도 많이 하십시오.

그러나 좋은 일을 해서 구원받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 때문에 구원받는 것입니다. 그것을 믿는 자에게 구원이 따라오는 것입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다 이것이 너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다” 구원은 선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돈 주고 사는 것도 아니고 착한 일을 많이 해서 구원받는 것도 아닙니다. 이것을 오해하지 마십시오. 그러나 진정으로 예수의 보혈을 알고 구원받는 사람은 정직하게 살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죄의 고리를 끊어버리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살아계시고 내 안에 성령님이 임재해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그 은혜를 기억하며 살아야 합니다.

평창에서도 아주 시골인 염안리라는 곳에서 제가 어릴 때 자랐는데 기수라는 친구가 있었습니다. 지금은 어른이 되었을 것입니다. 저와 나이가 똑같은데 이 아이가 생일만 되면 그 어머니가 옆집에 사는 형에게 매년 선물을 가져다줍니다. 그 이유가 있었습니다. 한번은 개천에서 멱을 감는데 이 아이가 수영을 잘 못하면서 깊은 곳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물이 돌아가는 곳에서 끌려들어가는 것입니다. 죽어가는 이 아이를 보고 동네 형이 뛰어 들어가서 이 아이를 살려주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그 어머니가 그 형에게 얼마나 고마워하는지 모릅니다. 기수의 생일만 되면 꼭 그 형에게 선물을 합니다. 옷도 사다주고 과일도 사다주고 떡도 해다 줍니다. 볼 때마다 감사한 것입니다. 만약 그 때 아이가 죽었다면 생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곡소리가 났을 것입니다. 그 아들의 생일을 맞이할 때마다 늘 감사를 표현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이것을 생각하면서 정말 우리는 이 그리스도의 사랑에 얼마나 감사하고 있는가? 그리스도가 내 대신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내가 죽을 자리에서 살림을 받았다면 내가 평생토록 마음에 은혜를 새기면서 살아가야하지 않겠나 생각합니다. 

오래 전 이야기인데 미국 미시간 주에서 한 유람선이 침몰되어서 287명이 죽은 일이 있었습니다. 그 때 그 호수 옆을 지나가던 ‘에드워드 스팬서’라고 하는 아주 유명한 수영선수가 있었습니다. 이 선수가 그것을 보고 뛰어 들어가서 배와 육지 사이 700M를 오가면서 17명을 구출해 주었습니다. 상상이 되십니까? 수영선수이기에 가능한 일입니다만 17차례 계속 왔다 갔다 하면서 17명을 구출해 내었습니다.

하지만 스팬서 본인은 탈진이 되어서 장애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 후 그는 휠체어를 타고 일생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가 병들어 살다가 마지막 죽기 1년 전에 기자가 와서 물었습니다. “당신은 그 오래 전 비극적인 밤 이후에 어떤 일이 가장 기억에 납니까?” 그러자 그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 17명 중에 단 한 사람도 내게 찾아와서 감사를 표현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 일이 너무 충격이었다는 것입니다. “육신적으로도 힘들지만 정신적으로 너무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어떻게 17명 중에 한 사람이라도 와서 감사하는 사람이 없을까?” 그는 그 때부터 큰 병을 얻었습니다. 시름시름 앓다가 결국 장애인으로 세상으로 떠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이만큼 우리들은 감사에 인색합니다. 오죽했으면 예수님의 말씀에 “10명의 문둥병자가 고침을 받았는데 어찌하여 9명은 어디 가고 너 한 명만 와서 감사를 표현하느냐?”고 말씀합니다. 멀리 갈 것도 없습니다. 2003년에 아름다운 철도원으로 알려진 ‘김행균’씨의 사건이 있었습니다. 영등포역에 기차가 막 들어오는데 한 어린아이가 선로 밑에 떨어졌습니다. 곧 죽을 위기였습니다. 그 때 이 김행균 철도원이 뛰어 들어가서 그 아이를 건져내었습니다. 하지만 자기는 열차에 다리가 잘려 버리고 말았습니다. 몇 년 후 기자가 찾아와서 물었습니다. “혹시 그 아이의 부모님이 와서 감사하였습니까?” “아니요! 아무도 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찾아드릴까요?” “아니요, 이야기하지 마십시오. 오죽하면 그랬겠어요. 제게 찾아오지 못할 이유가 있었겠죠. 아마 저의 쾌유를 위해서 기도하고 있을 것입니다.” 크리스천인 그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얼마나 감사에 인색한지요. 두산그룹의 회장은 회사의 경제적인 부채를 해결하지 못해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엄청난 죄악의 부채를 주님께서 다 짊어지시고 해결해 주셨다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값없이 하나님의 은혜로 엄청난 구원의 선물을 주시고 우리의 죄를 해결하셨다면 그 은혜가 얼마나 큰 것입니까? 오늘도 이 은혜를 우리 마음 깊이 새기고 정말 주님 앞에 감사하며 찬양하며 살아가는 우리의 생애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내가 여호와께 무엇으로 보답할까?’ ‘하나님이 내게 주신 이 은혜가 너무나 크고 놀라운데 무엇으로 보답할 수 있을까?’ 오늘 이것을 생각하면서 하나님 앞에 감사함으로 한 걸음 한 걸음 인생의 발걸음을 옮기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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