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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첫사랑 (계 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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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사랑 (계 2:1~7)


[에베소 교회의 심부름꾼에게 이렇게 써 보내라. ‘오른손에 일곱 별을 쥐시고, 일곱 금 촛대 사이를 거니시는 분이 말씀하신다. 나는 네가 한 일과 네 수고와 인내를 알고 있다. 또 나는, 네가 악한 자들을 참고 내버려 둘 수 없었던 것과, 사도가 아니면서 사도라고 자칭하는 자들을 시험하여 그들이 거짓말쟁이임을 밝혀 낸 것도 알고 있다. 너는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고난을 견디어 냈으며, 낙심한 적이 없다. 그러나 너에게 나무랄 것이 있다. 그것은 네가 처음 사랑을 버린 것이다. 

그러므로 네가 어디에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해 내서 회개하고, 처음에 하던 일을 하여라. 네가 그렇게 하지 않고, 회개하지 않으면, 내가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겠다. 그런데 네게는 잘 하는 일이 있다. 너는 니골라 당이 하는 일을 미워한다. 나도 그것을 미워한다. 귀가 있는 사람은, 성령이 교회들에 하시는 말씀을 들어라. 이기는 사람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주어서 먹게 하겠다.’]

• 잃어버린 첫사랑

‘첫사랑’이라는 제목을 보고 가슴이 설레는 분들이 계신지 모르겠습니다. 아무런 설렘도 없다면 번뇌의 불꽃이 꺼진 도인이거나, 세상살이에 지쳐 열정을 잃어버린 목석일 터입니다. 첫사랑은 꿈결처럼 왔다가 안개처럼 흩어집니다. 저는 이번 주 내내 첫사랑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어떤 아련한 이야기를 기대하시는 이들이 있다면 실망을 안겨드릴 것 같습니다. 저는 70년대 중반 생전 처음으로 교회에 나갔던 청년 시절을 떠올리고 있습니다. 

그때 제게 세계는 ‘닫힌 문’처럼 느껴졌습니다. 저는 마치 세상 모든 곳에서 출입금지 명령을 받은 사람 같았습니다. 그러다가 교회에 처음 나가게 되었고, 예수라는 사나이와 인사를 나누었고, 점차 그의 존재의 신비에 끌려들어갔습니다. 인간 혼의 거대한 산에 부딪힌 느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산은 난폭하거나 거만하지 않았습니다. 그분을 통해 이 세상의 표면의 질서와는 다른 이면의 삶이 있다는 사실을 배웠고, 어느 순간 ‘길’을 찾았다는 확신이 찾아왔습니다. 그것은 참으로 신비한 깨달음이었습니다. 이분께 내 생을 맡기는 것보다 더 멋진 일이 없다는 사실을 자각하는 순간 저는 아주 편안해졌습니다. 

하지만 ‘그 길’은 안락과 편안이 보장된 길이 아니라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았기에 저는 자주 비장해졌습니다. ‘존귀 영광 모든 권세 주님 홀로 받으소서/멸시 천대 십자가는 제가 지고 가오리다’, ‘아골 골짝 빈들에도 복음 들고 가오리다’ 찬송가를 부를 때마다 실존적 두려움이 엄습하곤 했습니다. 내가 돌아설 수 없는 길로 가고 있구나 하는 아뜩한 느낌도 들었습니다. 그때는 참 미숙한 게 많은 때였습니다. 그 때에 비하면 세상을 바라보는 저의 관점은 많이 변했습니다. 성경의 그 장엄한 세계를 전체적으로 가늠할 수 있는 눈도 다소 열렸습니다. 

예수님에 대해서도 더 많이 알게 되었고, 영의 세계에 대해서도 더 깊은 이해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근 30여 년을 목회자로 살아오면서 사람살이의 현장에서 벌어지는 복잡한 일들의 속살도 들여다 볼 줄 알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을 위로해야 할 때와, 꾸짖어야 할 때, 그리고 홀로 내버려두어야 할 때도 어느 정도는 분별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가을 제 마음은 쓸쓸합니다. 마치 제 속이 텅 빈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어느 순간부터 아골 골짝에 갈 맘이 사라졌습니다. 

멸시 천대 십자가를 지려던 장한 열망도 접었습니다. 하루하루 주어진 일상을 성실히 채워가는 데 급급하고 있습니다. 모든 일이 익숙해지면서 예수와 만났던 그 첫 순간의 뜨거운 마음, 주님의 교회를 위한 열정이 조금씩 퇴색되어감을 느낍니다. 참담합니다. 한 주 내내 ‘첫사랑’을 떠올리면서 떠오른 것은 ‘처음 사랑’을 버렸다고 책망 받았던 에베소 교회입니다. 

• 든든한 교회, 하지만? 

오늘의 본문 말씀은 소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보내는 편지 가운데 일부입니다. 계시록 2장과 3장에 나오는 일곱 교회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사도들의 영향력이 감소하고 있던 상황에서 신자들의 영성적 상황이 어떠했으며 교회 공동체가 어떤 문제들과 씨름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묵상해야 할 교회는 에베소 교회입니다. 

소아시아의 서쪽 해안에 있던 도시 에베소는 로마의 지배를 받던 아시아 주의 수도였습니다. 그곳은 다양한 종교의 중심지였고 특히 대지의 여신인 아르테미스(다이아나)와 황제 숭배의 중심지였습니다. 사도 바울이 그곳에 와서 복음을 전한 것은 대략 50-55년 사이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사도 요한도 생애의 마지막 시기를 이곳에서 보낸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지금도 그곳에는 사도 요한 기념 교회의 유적이 남아 있습니다.

바울은 그곳에서 근 3년 가까이 머물렀던 것으로 보입니다. 늘 새로운 선교지를 찾아 길을 떠나곤 했던 그로서는 이례적인 일이라 하겠습니다. 바울은 그곳에서 대단한 영적 영향력을 발휘했습니다. 누가는 사람들이 “바울이 몸에 지니고 있는 손수건이나 두르고 있는 앞치마를 그에게서 가져다가, 앓는 사람 위에 얹기만 해도 병이 물러가고, 악한 귀신이 쫓겨 나갔다”(행19:12)고 전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주께 돌아와 자기들이 한 일을 자백하고 참회했습니다. 그러다가 그예 사단이 벌어졌습니다. 아르테미스 여신을 섬기던 이들의 선동으로 인해 바울은 위기에 처했고, 제자들의 강권에 의해 에베소를 떠나게 됩니다. 바울은 교회의 장로들을 밀레도 바닷가로 불러내 그들과 작별인사를 나누었습니다. 바울은 비장합니다. 

예루살렘에서 그를 기다리는 것이 투옥과 환난임을 직감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장로들에게 스스로를 잘 살피고 양 떼를 잘 보살피라고 당부합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사나운 이리들이 들어와서 사람들의 마음을 뒤흔들어놓으리라는 것을 예측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울과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은 바닷가에 무릎을 꿇고 함께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다시는 서로를 볼 수 없다는 사실을 알기에 실컷 울고서 목을 끌어안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성경에서 가장 가슴 뭉클한 장면 가운데 하나입니다.

바울이 떠난 후 에베소 교회는 매우 취약한 상태에 있었습니다. 그들이 특히 유의해야 했던 것은 에베소를 찾아오는 순회설교가들 가운데서 거짓 사도들을 식별해내고 그들의 가르침을 차단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런 면에서 에베소 교회는 주님의 칭찬을 받습니다. 제3세대 교부였던 이냐시오스 성인도 같은 내용을 전하고 있습니다. 

“나는 일찍부터 여러분이 새로운 교리를 가지고 찾아온 자들에 대해 그들이 여러분 사이에 자리잡도록 허락하지 않고 그들의 씨앗이 여러분 사이에 떨어지지 않도록 여러분의 귀를 막은 사실에 대해 잘 알고 있습니다.”(디다케11.8.10/헤르마스의 목자11.11-15)

성령은 이 교회가 니골라 당이 하는 일을 미워했다고 말합니다. ‘니골라’라는 단어는 ‘정복하다’는 뜻의 니카오νικάω와 ‘백성’을 뜻하는 라오스λαός가 결합된 말입니다. 뜻을 새겨보면 그들은 사람들의 마음을 빼앗아 나쁜 영향력을 행사한 이들이라 할 수 있을 겁니다. 유추해보자면 니골라 당은 성도들로 하여금 그 시대가 추구하는 가치와 정신에 적당히 편승해 살아가도록 사람들을 오도한 것으로 보입니다. 지금 이 시대에도 니골라 당의 길을 걸어가는 이들이 꽤 많습니다. 힘과 폭력이 정상이 되고, 사랑과 섬김과 나눔이 비정상이 되는 시대일수록 교회는 니골라 당의 유혹에 직면하게 됩니다. 하지만 에베소 교회는 결연한 의지로 그들과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에베소 교회 신자들이 한 일과 수고와 인내를 잘 알고 있다고 하십니다. ‘한 일, 수고, 인내’는 정확히 ‘믿음, 사랑, 소망’과 연결됩니다. 데살로니가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바울은 그들의 믿음의 행위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를 칭찬한 바 있습니다(살전1:3). 게다가 에베소 교회는 주님의 이름을 위하여 고난을 받기를 마다하지 않았고, 어떠한 어려움 속에서도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신앙은 함께 겪어내는 시련을 통해 순수해지고 단단해지기도 합니다. 이렇게 보면 에베소 교회는 참 든든히 선 교회, 혹은 모범적인 교회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 영적 냉담함 

하지만 이 교회에는 가장 중요한 것이 빠져 있었습니다. 주님과 만났던 순간에 그들의 가슴을 가득 채웠던 첫사랑의 마음이 어느 결에 사라지고 말았던 것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나무랄 데 없는 교회요 신자처럼 보였지만 그들은 살아 있는 중심을 잃어버렸던 것입니다. 기쁨과 감격을 가지고 주님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치고 싶어했던 그 마음이 사라져버린 것입니다. 에베소 교회는 잘 정돈된 교회입니다. 하지만 불꽃이 없고, 주님을 향한 열정이 사라진 공동체에 매력이 있을 리가 없습니다. 저는 지금 두렵습니다. 이게 나의 모습인 것 같고, 우리 교회의 모습인 것 같아서 말입니다. 

주님은 에베소 교회를 향해 사랑에 찬 권고를 하십니다. “네가 어디에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해 내서 회개하고, 처음에 하던 일을 하여라.” 이것은 잃어버린 첫 사랑을 회복하라는 주님의 간곡한 초대입니다. 회복의 과정은 세 가지로 제시되고 있습니다. 생각하고, 회개하고,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병통은 무엇입니까? 지갑을 잃어버리면 즉각 알아차리지만, 하나님께서 주신 본디 마음을 다 잃어버리고는 잃은 줄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나를 잃어버리고 살았다는 자각은 아픕니다. 하지만 그것은 새로운 희망의 시작입니다. 회개란 삶의 초점을 바로잡는 일입니다. 우리 마음을 하나님을 향하여 돌려놓는 일입니다. 

라는 만화에서 본 한 장면이 떠오릅니다. 주인공인 찰리 브라운이 뒤꼍에서 활쏘는 연습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는 무작정 벽을 향해 활을 쏘고는 천천히 그곳으로 걸어가 화살을 중심으로 과녁을 그려넣곤 했습니다. 그 광경을 보고 있던 루시가 다가와 “대체 뭘 하는 거니?” 하고 묻자 찰리 브라운은 자기는 절대로 실패하지 않는 길을 택했다고 말합니다. 

여러분은 과녁을 제대로 겨누고 삽니까? 우리 마음이 가닿아야 할 곳은 바로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그 마음을 얻기 위해서는 자꾸만 우리 마음을 주님께 바쳐야 합니다. 기도하고, 성경 말씀 묵상하고, 예배에 참석하고, 공동체를 세우기 위해 헌신해야 합니다. 지금 우리의 마음은 잘 조율되어 있습니까? 우리 마음이 예수님의 마음과 일치되고 있습니까? 이번 주에 이용도 목사님이 1927년에 쓴 글을 사무치는 마음으로 읽고 또 읽었습니다.

피를 주소서. 우리는 눈물도 말랐거니와 피는 더욱 말랐습니다. 그래서 무기력한 빈혈 병자가 되었습니다. 피가 없을 때는 기운이 없고, 맥없고, 힘없고, 담력 없고, 의분 없고, 화기 없고, 생기가 없습니다. 그 대신 노랗고, 겁 많고, 쓸쓸하고, 소망이 없습니다.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피를 주사해 주소서. 그래서 우리는 새 기운을 얻고 화기와 생기 있고 기쁨이 있게 하옵소서. 

우리는 죄에게 잡히어 죽어 가되, 그 죄와 더불어 싸울만한 피가 없습니다. 악마가 우리 인간을 유린하되, 그것을 분히 여기는 피가 없습니다. 주여, 우리에게 당신의 피를 주사해 주옵소서. 그래서 죄악과 더불어 싸우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의 영혼이 원수 마귀를 격파하게 하여 주옵소서. 피가 있게 하소서. 피가 없으면 죽은 사람-우리에게는 피가 없어요. 주여, 우리는 기이 죽게 되었나이다. 당신의 십자가에 흘리신 피로써 우리에게 주사해 주옵소서.

우리는 예수의 피가 우리를 구원한다고 고백합니다. 옳습니다. 예수의 피가 우리 속에 있을 때, 그래서 예수의 정신이 우리 속에서 살아날 때 우리는 구원받은 사람이 됩니다. 예수의 피가 우리 속에서 뜨겁게 흐르면 우리는 새 사람이 됩니다. 죄에 맞서 싸우게 되고, 불의한 세상과 맞서 싸우게 됩니다. 그렇지만 지금 우리는 빈혈 환자가 아닙니까? 

삶의 안전만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며 살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예수의 피가 없으면 우리는 영적으로 죽은 사람입니다. 레위기의 성결법전에 보면 성소의 휘장 앞에는 늘 등불을 켜두어야 한다고 규정되고 있습니다. 백성들은 올리브를 찧어서 짜낸 깨끗한 기름을 공급해야 하고 아론은 그 불이 저녁부터 아침까지 꺼지지 않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레24:1-4) 오늘 우리는 주님 앞에 어떤 기름을 가져오고 있습니까? 교회가 세상의 빛이 되지 못한지 이미 오래입니다. 예수 정신의 불꽃이 스러지고 있습니다. 

• 侍天主, 養天主

우리는 주님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엄중한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회개하지 않으면, 내가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겠다.” 두려운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불리우는 교회라 해도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을 때는 이미 죽은 교회라는 선언입니다. 맛 잃은 소금과 같은 교회는 더 이상 교회가 아닙니다. 잊지 마십시오. 종교에도 흥망성쇠가 있습니다. 종교학자인 정진홍 선생님은 3000년을 지속하던 이집트 종교는 다 사라지고 신전만 남아있다면서 ‘신도가 없어지면 신도 사라진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말 앞에 ‘바르게 믿는’이라는 말을 추가해야 할 것 같습니다. 우리가 제대로 믿지 않으면 하나님은 우리 곁을 떠나실 것입니다.

동학은 ‘侍天主’ 곧 하나님을 모심을 강조합니다. 그게 종교의 핵심입니다. 자기 속에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이는 경거망동할 수 없습니다. 남을 함부로 대할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세상을 우리 맘대로 착취하고 변형시킬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시천주 보다 더 중요한 개념은 ‘養天主’ 즉 하나님을 봉양하는 것입니다. 마치 부모님을 봉양하듯이 하나님의 뜻을 받들고 성심껏 섬김으로써 우리 속에서 하나님의 주권이 확립되도록 한다는 뜻일 겁니다. 

오늘 우리는 이런 정성스러움을 많이 잃었습니다. 주일 예배에 참석하는 것으로 신앙생활을 다했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삶이 변화되지 않는다면 그게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타성에 젖은 신앙생활은 오히려 우리를 영적인 냉담자로 만들기 일쑤입니다. 이제 돌이켜야 할 때입니다. 신앙생활은 그래서 ‘싸움’입니다.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삿된 욕망과 싸우고, 거짓과 싸우고, 안일과 싸우고, 악한 영과 싸우는 것입니다. 

주님은 환난과 학대와 고통을 참아내면서 진리를 증언하고 또 악을 이기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정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게 하겠다고 하십니다. 그 열매란 그리스도를 통해 부여된 새로운 생명 즉 영생입니다. 입동이 지났습니다. 바깥 기온은 차가워지지만 우리의 내면은 주님에 대한 사랑과 열정으로 다시 한 번 뜨겁게 타오르는 나날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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