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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정말 사랑합니까? (요 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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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3장 16절 
제   목 : 정말 사랑합니까? 
 
 
1. 이것이 사랑입니까?

신학대학원 2학년 말, 정말 사랑하는 한 자매를 만났습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배필이라는 확신이 분명하게 들었습니다. 그래서 정신없이 만났지요. 그러는 가운데 대학원 3년을 마치고 졸업을 앞두었을 때, 졸업하면 곧바로 군대를 가야하는데, 너무 사랑해서 두고 갈 수가 없었습니다. 어머니께서 “네가 알다시피 우리 집은 너 장가보낼 여유는 하나도 없다. 절대로 안 되니 제대하고 가라”고 하시는데 부득부득 결혼하겠다고 고집을 부렸습니다. 그랬더니 “너 알아서 해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정말 아무 것도 없이 아무 것도 모르고 결혼했습니다. 그때 저는 사랑하는 것 외에는 신부에게 해준 것이 거의 없었습니다. 사랑만 하면 되지 뭐가 필요하겠습니까? 그래도 제가 받을 것은 다 받았습니다. 그렇게 결혼하고서 아기를 가져 산달이 차오는 아내를 妻家에 두고 의기양양하게 入隊했습니다. 아내와 아기를 두고 떠나는 것이 걱정은 되었지만, 뭐 어떻습니까? 내가 자기를 사랑하고 그가 나를 사랑하는데 …. 그 후 훈련을 받으면서 ‘훈련소로 면회 오라’고 했습니다. 

아내와 아이가 보고 싶어서 견딜 수 없었으니까요! 아내는 그 불편한 시외버스를 제대로 앉지도 못한 채 난지 한 달 밖에 안 된 갓난쟁이를 데리고 면회를 왔습니다. 그래도 저는 그 일이 별로 힘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그쯤은 아무 문제도 아닐 것이라고 생각했지요. 훈련을 마치고 임관한 후, 전방으로 함께 가자고 우겼습니다. 

사랑하니까, 전방에서의 고생쯤은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少尉 월급으로 전방 생활은 불가능했고, 대신에 부대 교회 설교가 없는 주일은 어김없이 부대를 빠져나와 부산 집으로 갔고, 그러다가 둘째가 생겼습니다. 저는 둘째가 생긴 것이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사랑의 두 번째 결실이니까요! 

그러나 아내가 두 살 터울의 큰 아이와 날 때부터 병치레를 하는 작은 아이 때문에 얼마나 힘든지를 몰랐습니다. 그러다가 제대를 했습니다. 곧바로 중견 교회 수석 교역자가 되어, 교육과 심방과 행정 등 모든 것을 총괄하면서 대학부를 맡았습니다. 군대에서 교회 사역에 목말랐던 저는 아내와 아이들을 돌아 볼 여유도 없이 사역에만 몰두했습니다. 그러면서 아이들은 사랑하는 아내가 알아서 잘 키울 것이라고 생각했지요. 

그러던 중에 매주 월요일마다 서울로 공부를 하러 다녔습니다. 학비는 교회에서 주었지만, 차비와 책값 등이 만만치 않았습니다. 그래도 걱정하지 않았습니다. 사랑하는 아내가 다 알아서 해 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인지 사역의 열매는 컸습니다. 선교사로 가시게 된 담임목사의 후임으로 거론되었는데, 그것이 아내에게 주는 보답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또 공부도 잘 되었고, 교수님들은 박사 과정도 이어서 계속 하라고 권했습니다. 

그러다가 담임목사가 되지 못하고 서울로 사역지를 옮겼습니다. 친구들과 헤어지지 않으려던 초등학교 1학년짜리 큰 아이를 비롯해서 가족들은 서울에 적응을 잘 했습니다. 그러다가 작은 아이가 서울 사람들도 구분 못할 정도로 서울말을 하게 되자 울산으로 사역지를 옮기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울산으로 갔다가 다시 5개월 만에 담임목사 청빙을 받아 부산으로 갔습니다. 

그때가 결혼한 지 만 11년째 되던 해였습니다. 이렇게 사역을 하고 또 옮겨 다니면서 아내와 아이들의 입장에서 생각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거저 ‘내가 그들을 사랑하고, 그들이 나를 사랑하니까 다 이해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여러분, 제 생각이 맞았습니까? 저는 정말 제대로 사랑한 것입니까?

2. 동물들에게서 사랑을 배웁니다!

뱀 중에 ‘殺母蛇’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 이름만 들어도 섬뜩해지지요? 이 뱀은 이름 그대로 어미를 죽이고 태어난다고 합니다. 여러분이 알다시피 다른 뱀들은 알을 낳아 부화를 합니다. 그런데 유독 살모사만은 새끼를 낳습니다. 뙤약볕이 내리 쬐는 여름날, 살모사의 어미는 새끼를 낳다가 지쳐 죽습니다. 그때 새끼들은 죽은 어미의 배를 빠져 나오면서 어미의 살을 뜯어 먹고 힘을 얻습니다. ‘펠리컨’이 라는 새가 있습니다. 바닷새 중에 늘어진 큰 목주머니를 달고 다니는 특이한 새이지요. 이 새는 먹을 것이 없어서 새끼가 굶어 죽을 지경이 되면, 스스로 자신의 가슴을 쪼아서 흘러나오는 피로 새끼를 살려냅니다.

몇 년 전 전국을 눈물바다로 몰아갔던 <가시고기>라는 소설을 기억하십니까? “아빠는 멍텅구리입니다”로 시작하는 이 소설의 작가 조창인 씨는 <안산동산교회>의 집사님입니다. 그의 소설의 재료가 되었던 가시고기 이야기를 여러분은 아실 것입니다. 동해 바다에서 올라온 가시고기들은 수심 2m 지점에서 알을 키웁니다. 그런데 물고기 가운데 유일하게 둥지를 짓는 가시고기는 주둥이로 강바닥 모래를 퍼내 구덩이를 만들고, 수초 가닥으로 집을 짓고, 그것이 떠내려가지 않도록 단단하게 고정합니다. 

집이 완성되면, 암컷은 3, 4초간의 짧은 산란을 마치고 집을 떠나 버립니다. 그때부터 수컷 혼자서 부화하기까지 알을 보호하고 새끼를 지킵니다. 이때 수컷 가시고기가 하는 일은 네 가지 정도인데요. 첫째는 암컷이 알을 낳고, 새끼가 그 알에서 부화할 때까지의 보금자리가 될 집을 짓는 일입니다. 두 번째는 암컷이 알만 달랑 낳고 떠난 후 새끼가 부화할 때까지 그 둥지를 지키는 일입니다. 고작 7㎝에 불과한 가시고기이지만 알을 노리는 붕어, 거북이 등과 맞서 싸우면서 새끼를 끝까지 지키고 보호합니다. 

세 번째는 신선한 산소를 제공하기 위해 1000개나 되는 알들을 둥지에서 차례로 꺼냈다가 다시 넣어 주는 일을 반복합니다. 이 일은 새끼가 부화할 때까지 약 15일 동안 계속 됩니다. 네 번째는 자기의 살을 새끼들에게 주는 일입니다. 산란 후 8일째가 되면 알이 부화하기 시작하는데, 그때 수컷은 알들을 주둥이로 찔러 부화를 돕습니다. 

그렇게 새끼가 모두 부화하기까지 약 15일 동안, 수컷은 잠도 자지 않고, 아무것도 먹지도 않은 채, 새끼들의 생명을 보호하다가, 알들이 다 부화한 후 5일이 지나면 서서히 죽어 갑니다. 그런데 수컷 가시고기는 자신이 죽어가면서 마지막 힘을 다해 새끼들이 있는 둥지 쪽으로 접근한 후 숨을 거둡니다. 그 이유는 자기 몸을 새끼들에게 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면 1㎝도 안 되는 새끼들은 이런 아빠 고기의 희생을 아는 듯 모르는 듯 무심하게 ‘아빠의 살’을 뜯어먹으면서 자랍니다. 

우리가 미물이라고 여기는 뱀이나 작은 물고기 등도 이렇게 감동적인 사랑을 합니다. 제 몸을 새끼들에게 주는 사랑은 감동적이다 못해 전율이 돌 정도입니다. 그런데요! 이러한 사랑보다 더 지극한 사랑으로 여러분을 사랑하는 분이 있습니다. 그 분은 이 세상에서 여러분을 가장 사랑하는 분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 세상에서 여러분을 가장 사랑하시는 분은 누구일까요? 오늘 본문이 그 답을 주고 있습니다.

3. 하나님의 사랑은 특별합니다.

1)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오늘 본문은 먼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사랑하시는데, 그 이유는 이 세상을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은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습니다(창1:4,10,12,18,21,25,31). 여기서 “보셨다”는 말은 그 대상에 대하여 ‘관심이 있다’, ‘사랑하신다’는 뜻이며, “좋았다”는 말은 ‘아름답다’는 뜻입니다. 

즉 하나님은 세상을 가장 아름답게 창조하셨고, 그것을 사랑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랑 가운데서 아주 특별한 사랑의 대상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신 사람이었습니다(창1:26-28). 그래서 하나님은 그 사람을 피조 세계 한 가운데 두시면서 온 세상을 다스리라 하셨습니다.

이렇게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아주 특별한 존재로, 그리고 하나님의 특별한 관심과 사랑을 받는 존재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사랑이 없이는, 특별히 하나님의 사랑이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남아프리카의 한 고아원에서 아이들이 병들어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사는 환경이나 먹을 것에서 아무런 이상이 없는데도, 아이들이 자꾸만 병으로 죽어갔던 것입니다. 의사들이 아무리 그 이유를 찾아보아도 원인을 밝혀낼 수가 없었습니다. 마침내 유엔에서 세계적으로 저명한 학자들을 보내어 그 이유를 연구하도록 했습니다. 그들은 모든 것을 조사하고 연구한 끝에 아이들에게 한 가지 처방을 내렸습니다. 

“아이들이 깨어 있을 때 반드시 하루에 10분씩 안아주고 입맞추어주고 귀여워해줄 것!” 이것이 그들이 내린 처방이었는데요. 그 처방대로 했더니, 아이들은 회복되었고 정상적으로 성장했다고 합니다. 그 아이들이 병들어 죽어가던 이유는 사랑을 받지 못해서였던 것이죠. 

사랑하는 여러분, 이 아이들처럼 이 땅에서 먹고 살 조건만 갖추어지면 잘 살 것 같지만, 우리 모두 사랑이 없으면 살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너무나 사랑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 이 말은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너무나 크고 놀랍다는 뜻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하나님의 아주 특별한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사랑을 모를 때도 하나님은 여러분을 사랑하셨고, 지금도 사랑하시고, 앞으로 영원히 사랑하실 것입니다. 

제가 하나님의 사랑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을 때, 제일 먼저 생각한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하나님은 어째서 나같이 못나고 부족한 사람을 사랑하실까? 세상에는 나보다 훨씬 똑똑하고 잘 나고 훌륭한 사람들이 많은데 …. 하나님은 왜 나 같은 죄인을 이렇게 사랑하실까? 착하고 의로운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 여러분은 그런 생각을 해 보신 적이 없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죄인을 사랑하시고, 병든 자를 사랑하시고, 가난한 사람과 못난 사람과 낮은 자를 더 사랑하셔서 그들을 들어 사용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인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이렇게 말씀드려도 여러분에게 별 감동이 없을 것입니다. ‘사랑’이라는 말이나,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주제가 여러분에게 너무나 익숙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오늘 본문에 “이처럼”이라는 말에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이 세상과 세상 모든 사람들과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특별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는 뜻이지요. 그렇다면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2) “독생자를 주셨으니”

하나님의 사랑이 특별한 이유를 오늘 본문은 “독생자”를 주셨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본문에 “···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라고 할 때, “이처럼”이라는 말은 “이 길로”, “이 방법을 따라”라는 의미입니다. 그 방법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독생자를 주신 일”입니다. “독생자”란 ‘외아들’, 즉 ‘단 하나밖에 없다’는 뜻을 넘어서 ‘그 속성과 성품에 있어서 오직 하나인 분’이라는 뜻이 함께 들어있는 말입니다. 즉 예수님은 하나님의 ‘유일무이하신 아들’이자 그 자신도 ‘하나님이신 분’이란 뜻입니다. 

어쩌면 하나님 자신이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지요. 그런데 하나님은 바로 그 외아들 독생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죽게 하셨습니다. 그가 죽은 이유는 죄로 인하여 죽어야 할 우리를 대신하신 것으로, 그 분의 죽음 때문에 우리를 심판과 죽음으로부터 구해주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입니다.

미국의 한 아파트에서 대형 화재가 발생했습니다. 그 화재로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는데요. 그 가운데 보는 이들의 마음을 유난히 안타깝게 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어느 집에 아버지와 아기가 함께 갇혔는데요. 한참 불길이 치솟고 소방대원들이 달려와 진화 작업을 하고 있을 때, 이웃 사람들이 그 집에 아기와 아버지가 함께 있다는 사실을 알려 주었지만, 불길이 너무 심해서 소방대원들도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불길을 다 잡고 난 후, 소방대원들이 그 집을 뒤져보니까, 아버지가 먼저 화장실에서 발견되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아기가 살아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아버지가 아기를 변기 속에 집어넣고, 자신이 아기의 방패막이가 되어 타죽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죽으신 것이 이와 같습니다. 아니 그 이상입니다. 왜요? 이 아버지가 아들을 위하여 죽은 것과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죽은 것은 너무나 다르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을 섬기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섬기지 않으니 그 생각이 허망하여 지며 미련한 마음이 그의 영혼과 삶을 어둡게 만들었습니다. 창세기 6장 5절은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의 마음과 생각의 모든 것이 항상 악할 뿐이었다고 말합니다. 그 뿐 아닙니다. 

사람이 스스로 지혜 있다고 하면서도 얼마나 어리석은지 사람의 형상, 짐승의 형상, 심지어 버러지 형상의 우상을 만들고서는 신이라고 섬겼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그들 속에 不義 醜惡 貪慾 惡意는 더욱 넘쳤습니다. 정욕과 음란의 종이 되어 끌려 다니고, 사회는 폭력과 불법이 난무하며, 철저한 弱肉强食의 세상이 되어 버렸습니다. 즉 하나님이 사랑하실만한 구석이 전혀 없는, 하나님의 원수와도 같은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이런 세상과 우리 모두를 사랑하셨습니다. 어떻게요? 당신께서 죄의 벌을 대신 받고 대신 죽으신 것입니다. 우리가 받을 형벌을 예수님이 대신하여 우리가 달려야 할 사형 틀인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이 일을 쉬운 일이라고 보십니까? 추악하고 더러운 죄인들, 그것도 자신을 배신하고 우상을 섬기던 자들을 위하여 가장 사랑하는 아들을 희생하는 이 사랑이 이해가 되십니까? 자식을 잃은 부모의 마음은 그 사람 밖에 모르듯이, 죄인들을 위하여 당신의 아드님을 희생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가 어떻게 다 알 수 있겠습니까? 다만, 나 같은 죄인위하여 당신의 아드님을 주신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이라고 밖에는 할 말이 없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말로만 하시지 않고, 실제로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어 희생 제물로 죽이시면서까지 그 사랑을 나타내셨습니다. 

3) “멸망치 않고 영생을”

그러면, 여러분!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16절 하반 절을 보십시오.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즉 사람들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누리게 하시려고 이렇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죄의 결과는 審判이고 詛呪이고 死亡입니다. 이 땅에서, 그리고 사람이나 사회를 향하여 지은 죄도 그 대가를 치르게 되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향해서 지은 죄, 내게 주어진 인생과 시간에 대하여 범한 죄의 대가 역시 반드시 치르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그 죄의 대가, 즉 심판을 우리가 제대로 감당할 수 있을까요? 이 땅에서 지은 죄의 형벌도 감당하기 어려운데, 장차 주님 앞에서 우리가 지은 죄의 형벌을 어떻게 감당하겠습니까? 

그런데 놀라운 것은 우리에게 이 엄청난 죄의 형벌을 하나도 감당하지 않고 피할 수 있는 길, 도리어 福을 받고 永生을 받는 길이 열렸다는 사실입니다. 바로 그것이 주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사도행전 16장 31절에서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고 했습니다. 주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베드로처럼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 이다(마16:16)”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님을 하나님의 독생자로, 자신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죽어주신 분으로 고백하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요1:12). 즉 영생을 얻는다는 말이지요. 자기 죄로 인하여 날마다, 아니 죄를 지을 때마다 죽어야 할 사람이 예수님을 믿음으로 영원히 죽지 않게 된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거저 믿기만 하면 구원을 주신다는 이 조건이 얼마나 쉽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우리를 구원해주시고, 믿기만 하면 죽을 자가 죽지 않게 되고, 죄악으로 더러워진 몸이 깨끗하게 되고, 어두운 삶을 살던 자가 밝은 삶을 살게 되고, 세상에 악영향을 미치던 자가 세상에 선을 끼치게 되고, 세상에 해악을 미치던 자가 세상을 살리는 사람으로 변하는 등, 인생의 전환과 더불어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되니, 이것이 얼마나 놀라운 사랑입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아시겠지요? 여러분을 사랑하기에 독생자를 이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달려 처참하게 죽게 하셨습니다. 자기 아들을 죽이시면서까지 저와 여러분을 사랑하신 것이죠. 어떻게 생각하면,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보다 저와 여러분을 더 사랑하신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누가 우리처럼 죄와 허물이 많고 연약한 자를 사랑하겠습니까? 누가 나를 대신하여 죽어 줄 수 있겠습니까? 설교 시작 부분에서 물었던 질문을 다시 할까요? 이 세상에서 여러분을 제일로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여러분의 부모입니까? 여러분의 아내입니까? 여러분의 남편입니까? 여러분의 자녀입니까? 아닙니다. 여러분의 남편이 아무리 여러분을 사랑한다 할지라도, 여러분의 아내가 아무리 여러분을 사랑한다 할지라도, 여러분의 부모가 아무리 여러분을 사랑한다할지라도, 그 사랑은 영원하지 못합니다. 

세상의 사랑이나 사람의 사랑은 언젠가는 변합니다. 언젠가는 서로의 뇌리에서 잊혀질 날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을 향한 주님의 사랑은 변하지 않습니다. 설사 여러분의 부모가 여러분을 버릴지라도 하나님은 여러분을 버리지 않습니다(사49:15).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여러분을 가장 사랑하는 분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4. 여러분은 정말 하나님을 사랑합니까?

그런데 여러분! 이렇게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한 사랑을 받은 여러분들은 그 주님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요? 이것이 오늘의 主題이고, 저와 여러분을 향한 주님의 質問입니다.

2차 대전 당시, 독일 점령 하의 폴란드 어느 조그만 마을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독일군이 언제 들이닥칠지 몰라 하루하루를 불안하게 지내고 있던 유태인들 앞에 드디어 독일군이 나타났습니다. 독일군의 일부는 마을로 들어가고, 나머지는 학교로 와서 학생 중에 섞여 있던 유태인 어린이들을 끌어내려고 했습니다. 그러자 유태인 아이들은 무서워하면서 선생님에게 달려가 매달렸습니다. ‘코르자크’란 이름을 가진 선생님은 자기에게 달려온 유태인 어린이들을 두 팔로 꼭 안아 주었습니다. 

선생님은 ‘아무 죄도 없는 어린 아이들을 왜 잡아가느냐’고 호통이라도 치고 싶었지만, 짐승만도 못한 그들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때 아이들을 실어가기 위하여 트럭 한 대가 운동장으로 들어오자, 아이들은 더 간절하게 선생님의 팔에 매달렸습니다. 그때 코르자크 선생님은 “무서워할 것 없다. 하나님께 기도를 드린다면 마음이 좀 편해질 거야.”라고 했습니다. 

독일군들은 코르자크 선생님에게서 유태인 어린이들을 떼어놓으려고 했습니다. 그러자 코르자크 선생은 군인을 막아서며, “가만 두시오. 나도 함께 가겠소!” 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아이들에게 “자, 나랑 함께 가자. 선생님이 같이 가면 무섭지 않지?”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아이들은 “네, 선생님. 하나도 무섭지 않아요.”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리고 코르자크 선생은 아이들과 함께 트럭으로 올라갔습니다. 이것을 지켜보던 독일 군인들이 그를 끌어내리려고 하자, “어떻게 내가 가르치던 사랑하는 이 어린이들만 죽음으로 보낼 수 있단 말이오.” 라고 하면서 내리기를 거부했고, 그는 유태인 아이들과 함께 강제 수용소로 끌려가 ‘트레물렌카’의 가스실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거기서도 코르자크 선생은 아이들의 손을 꼭 잡고 앞장서서 가스실로 들어갔습니다. 자신은 유태인이 아닌데도 사랑하는 제자들의 두려움을 조금이라도 덜어 주기 위해서 함께 목숨을 버린 것입니다. 유태인들은 이 코르자크를 잊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히틀러에게 학살된 동포들을 기념하기 위해 예루살렘에 세워진 기념관 뜰에는 겁에 질려 떨고 있는 사랑하는 제자들을 두 팔로 꼭 껴안고 있는 코르자크의 동상이 세워져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혹시 여러분은 입으로만 사랑을 외치지는 않았습니까? 저처럼 자기중심적인 사랑을 진정한 사랑이라고 착각하지는 않았습니까? 행동과 삶으로 나타나는 사랑, 자신을 버리고 희생하는 사랑, 상대방이 어떠하든지 그를 중심으로,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내어주는 사랑, 이런 사랑이 진정한 사랑입니다. 바로 우리 하나님의 사랑이지요. 이제부터 저와 여러분의 사랑이 이와 같아야 하지 않을까요? 이제부터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모습이 달라져야 합니다. 

그 분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사랑해야 합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향한 우리의 사랑의 모습도 달라져야 합니다. 그 무엇보다도 우리가 흔히 “불신자”라고 말하는 사람들과 이 세상을 향한 사랑의 모습이 달라져야 합니다. 주님이 우리가 불신자일 때 사랑하셨던 것 같이, 우리도 불신자들을 그렇게 사랑해야합니다. 주님이 십자가에 죽기까지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복음을 전하며 죽기까지 저들을 살려내야 합니다. 

우리가 이런 모습으로 사랑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정말 사랑하지 않는 것이고, 또 사랑을 모르는 사람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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