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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살아계신 하나님 경험하기⑨ : 장애물 (수 6: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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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계신 하나님 경험하기⑨ : 장애물 (수 6:1~16)


I. 본문의 배경

한 교회 담임목사님이 교회학교 초등부 어린이 철이를 만나 성경공부를 얼마나 했나 시험하기 위해 물었습니다. "얘야, 여리고성을 누가 무너뜨렸지?" 이 아이 얼굴이 벌개지면서 "제가 안 무너뜨렸어요." 목사님은 조금 어이가 없어서 교회학교 그 반 담임교사에게 "여리고성을 누가 무너뜨렸느냐고 물었더니 철이란 녀석 자기가 안 무너뜨렸다고 대답합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때 선생님 왈 "목사님, 철이는 착한 아이입니다. 그 얘가 안 무너뜨렸다고 했으면 틀림없이 그 애가 한 짓은 아닙니다." 너무 황당해서 당회 시간 교회학교 부장 장로님께 자초지종을 말했더니 장로님 왈 "어디가 무너졌는지 조사해서 저희 부서에서 잘 세워 놓겠습니다."라고 했다는 죠크가 있습니다. 

오늘은 살아계신 하나님 경험하기 아홉 번째 시간 - 무너진 여리고성 사건을 통해 「장애물」이란 제목으로 은혜를 나눕니다. 

저는 운동을 잘하지는 못하지만 운동을 퍽 좋아합니다. 모든 운동에는 인생의 그림이 담겨있기 때문입니다. 어릴 때 씨름 선수를 해본 적이 있는데 저는 뒤집기의 명수였습니다. 가장 통쾌한 기술 중의 하나지요. 뒤집기는 대개 작은 사람이 큰 사람을 넘기는 기술로 사용됩니다. 인생의 재미 가운데 하나는 뒤집기가 있기 때문입니다. 

근대 올림픽의 창시자 쿠베르탱은 장애물 경기에 남다른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는 늘 장애물 경기에서 인생을 보았다고 합니다. 누구나의 앞에는 장애물이 있지요. 걸려 넘어지면 실패합니다. 건강한 인생은 장애물이 없는 인생이 아니라 장애물을 노련하게 넘을 줄 아는 것입니다. 심지어 하나님이 주신 비전을 따라 하나님의 뜻대로 걸어가는 인생길에도 장애물은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약속의 땅을 정복하는 과정에서 만난 장애물 앞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어떻게 인도하셨는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출애굽의 지도자 모세가 느보산에서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출애굽의 역사는 막을 내립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도자 모세의 죽음 앞에서 30일이나 함께 슬퍼하며 웁니다. 그러나 저들은 지도자의 죽음앞에서 울고 있을 수만은 없었습니다. 모세의 죽음도 장애물이 될 수는 없었습니다. 지도자는 사라져도 하나님의 계획과 비전은 계속되어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후계자 여호수아를 세워 출애굽의 역사를 갈무리하고 입(入) 가나안의 문을 열도록 했습니다. 

1장에서 여호수아가 가나안 입성의 지휘봉을 잡고 두려워하고 있을 때 "강하라 담대하라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 약속의 말씀으로 그를 붙들어 줍니다. 

2장에서 싯딤땅에 진을 치고 여호수아가 가나안 변방 여리고성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도록 정탐꾼을 보냅니다. 

3장과 4장에서 범람하는 강물 요단을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으로 건너는 요단강 도하작전을 성공적으로 마칩니다. 이 일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사기는 하늘을 찔렀고 가나안 백성들은 간담이 녹았습니다. 

이 여세를 몰아 여리고성을 진격해 들어가고 싶었지만 5장에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할례를 행하라, 유월절을 지키라" 말씀했습니다. 

II. 인생의 장애물 "여리고"

1. 이해 할 수 없는 전술
이제 오늘의 본문 여호수아 6장은 여리고성 점령사건입니다. 본문은 여리고 점령 사건을 통해 우리가 인생의 과제, 인생의 장애물 앞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요단강을 건너 여호수아 군대가 첫 번째로 만난 여리고 성은 너무 강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사람이 당황하면 바른 판단을 할 수 없게 되고 서둘게 됩니다. 

어떤 가정에서 가스가 폭발하며 불이 났습니다. 집에서 뛰쳐나온 아버지가 핸드폰을 손에 들고 부들부들 떨며 "119가 몇 번이지?" 그러더랍니다. 아들 녀석 한다는 소리가 "아버지, 빨리 114로 물어보세요." 하더랍니다. 

당황하는 이스라엘, 당황하는 여호수아에게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6장 2절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여리고와 그 왕과 용사들을 네 손에 넘겨 주었으니"라고 합니다. 2절의 동사를 <예언적 완전시제>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루어질 것이라고 약속 하셨기 때문에 성취된 것이나 마찬가지인 미래사건입니다. 싸우지도 않고 이미 승리의 나팔을 부십니다. 부전승이란 것이 있지 않습니까? 이 부전승이라는 복을 예수님도 우리에게도 약속하셨습니다. "세상에서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16:33)

하나님께서 여리고성을 돌도록 명령하신 내용이 본문에 좀 복잡하게 되어 있습니다만 정리해 보면 이렇습니다. 

① 엿새동안 매일 한 번씩 돌고 이레되는 날엔 일곱 번을 돌아라. 
② 남녀노소 빈부귀천 모든 백성이 함께 돌아야 한다.
③ 법궤를 가운데 두고 법궤앞엔 무장한 군인이 서고 일곱명의 제사장이 나팔을 불며 백성을 인도한다. 나머지 군인들과 백성들은 법궤뒤에 따르면 된다.
④ 모든 사람은 나팔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입을 다물어 침묵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작전은 군사전문가가 아니라 어린아이가 생각해도 좀 우습지 않습니까? 많은 백성들이 소풍 나온 것도 아닌데 하루에 한 바퀴씩 성을 돌라는 것입니다. 마치 여리고성 견학 나온 사람들 같습니다. 그것도 하루 이틀이 아니라 칠일을 계속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백성들의 이런 우스꽝스러운 행동들이 성의 함락과 도대체 무슨 상관이 있단 말입니까? 하루에 한 번씩 도는 것이나 법궤를 메고 도는 것이나 마지막에 소리를 지르는 것이나 그 어느 것도 성을 함락시키는 것과는 상관이 없어 보입니다. 성을 정복하려면 한 사람이라도 먼저 성벽에 기어올라 성문을 열고 쳐들어가야 하는 것 아닙니까?

이처럼 무방비 상태로 성을 돌다 적군이 성문을 열고 공격이라도 하면 어떻게 합니까? 만약 공격을 받는다면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사실 여리고성을 도는 이 전법은 구태여 전법이 있다면 황당전법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후 다른 성을 공격할 때에는 이 방법을 다시는 쓰지 않았습니다. 만일 이 황당전법이 정말 좋은 공격방법이라면 그 다음 성이나 또 다른 성을 공격할 때도 성돌기 황당전법으로 공격했을 겁니다. 그러나 성을 도는 전법은 여리고성 공격이후 역사상 단 한번도 사용된 적이 없습니다. 다만 중보기도 팀들의 선교적인 전략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한 도시 한 마을을 복음으로 점령하고자 할 때 예수 이름으로 보혈의 능력을 뿌리며 침묵기도로 성을 도는 방법을 쓰곤 합니다. 

- 여리고 설명 - 
고고학자들의 설명에 의하면 여리고성은 국방력이 강하고 쌍벽을 쌓을만큼 경제력이 풍부한 성이었다고 합니다. 여리고성을 발굴한 1930년대 존 가스탕 일행과 1950년대 케드린 케니언 일행의 설명에 의하면-

당시 여리고성은 지형적으로 가파른 바위 산(약 35도 경사) 위에 축성된 고대 도시였습니다. 그 성벽은 2중 벽으로 되어 아주 견고했다고 합니다. 외벽 두께가 1.8 m, 내벽이 4~5 m 가량 되었고, 성벽 높이도 9 m 정도 되었다고 합니다. 더욱이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너고 요단강까지 마른땅처럼 건넜다는 소문이 퍼져서 여리고 백성들이 철통같은 수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1절. "... 여리고는 굳게 닫혔고 ... "
한 마디로 난공불락, 금성철벽의 요새입니다. 이런 성을 이스라엘의 군사력을 갖고 정복한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했습니다. 

이것이 여리고성입니다.
우리 자신의 힘만으로는 해결할 수도 정복할 수도 없는 문제가 있다면 그것이 여리고성입니다. 커다란 꿈을 안고 달려가다가 해결할 엄두를 낼 수 없는 장애물에 부딪혔다면 그것이 여리고성입니다. 분명히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습니다. 꿈을 안고 하나님께 기도도 했습니다. 작은 성취도 보았습니다. 그런데 문득 예기치 못했던 벽에 부딪혀 이 난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한 걸음도 전진할 수가 없습니까? 당신은 지금 여리고성 앞에 서 있습니다.

오늘 여리고성이 무너진 이 사건은 신앙생활의 장애물을 무너뜨리고 승리의 행진을 계속하는 성도의 삶의 모형입니다. 하나님의 공동체가 만난 선교의 장애물 장벽을 무너뜨리고 도시를 정복한 승리의 모형입니다. 

어떻게 여리고의 장애물을 무너뜨릴 수가 있을가요?

2. 장애물을 두려워하지 마라

배고픈 호랑이 한 마리가 먹이감을 찾아 사냥을 나섰습니다. 때마침 토끼 한 마리가 깡충깡충 뛰어 가길래 앞발을 번쩍 들어서 낚아채려는데 토끼가 날카로운 눈으로 호랑이를 째려보면서 앞발을 탁 쳤습니다. "이거 놔 짜식아!" 깜짝 놀라서 토끼가 뭐길래 이렇게 배짱이 좋은가? 놀란 호랑이가 도망을 갔습니다. 그 다음날 배가 고파서 먹이를 찾아 나섰는데 토끼가 깡충깡충 그 앞을 지나갑니다. 다시 앞발을 들어 탁 치려는데 날카로운 눈으로 째려보면서 "짜식아 내가 어제 그 토끼야!" 이 토끼는 도무지 안되겠다. 다른 토끼를 찾아서 나섰습니다. 토끼들이 있는 곳에서 한번에 낚아채기 위해서 앞발을 번쩍 들었더니 토끼들이 씩 웃으면서 "짜식아 소문 다 났어!"

토끼 한 마리도 잡지 못하는 호랑이처럼 세상을 살아가지는 않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정복하도록 많은 권세와 능력을 주셨는데 문제에 갇혀서 신음하며 오늘도 살아가지는 않습니까? 인생의 장애물 앞에서 패배주의에 빠져 세상을 비관하며 살지는 않습니까? 

오늘 본문 사건을 시작하는 여호수아 5장 1절에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전적인 도움으로 요단을 건넜다는 한 가지 사실 때문에 아모리 왕이, 가나안 모든 왕들의 마음이 녹았고 정신을 잃었다고 말합니다. 

왜 두려워하십니까?
왜 주저하십니까?
왜 사탄의 공격을 보고만 있습니까?


당신이 구원받았다는 사실 하나로, 당신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한 가지 사실 때문에, 성령이 당신과 함께 한다는 사실 때문에, 이미 적들은 간장이 녹았습니다. 사탄은 정신을 잃었습니다. 지금 당장 공격하십시오. 오늘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을 정복하는데는 태산같은 믿음이 필요한 장 공아닙니다. 예수를 구주로 믿는 겨자씨만한 믿음이금 족합니다. 당신에게 이미 권세가 있습니다. 능력이 있습니다. 많은 무기들이 주어졌습니다. 
"저들은 우리의 밥이다" 돈 다발 크다고 염려할 필요가 있습니까? 장애물을 보는 눈이 달라져야 합니다.

III. 어떻게 여리고(장애물)를 정복할 수 있을까?

1. 할례 "거룩하라!"
어떻게 이 땅에 교회들이 여리고를 정복할 수 있을까요? 요단강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기적처럼 건너온 여호수아는 한편 급한 마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적의 공격에 대비하여 교두보를 확보하자. 아니다. 요단강을 건넌 여세를 몰아 가나안 족속중 한 두 족속이라고 먹어치우자. 낭비할 시간이 없다. 일제 전투태세. 나무를 꺾어 활을 만들어라. 녹슨 칼을 갈아라. 바위에 돌창을 문질러라. 일부 장정들은 여자와 아이들을 지키라. 지금이야말로 가나안을 공격할 최고의 기회다. 돌격!" 이러고 싶지요.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전혀 다른 계획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것은 교두보를 구축하는 일도, 선제공격을 하는 일도 아니었습니다. 
장정들을 사막에 눕혀놓고 할례를 행하는 일이었습니다. 「할례를 행하라」는 명령이었습니다. 

이 얼마나 어처구니없고 터무니없는 말씀입니까? 
이 얼마나 황당한 명령입니까? 
이스라엘의 도움이었던 하나님이 지금은 그들이 나아갈 길의 장애물이 되는 것 같습니다.

제가 여호수아였다면 하나님께 따졌을 것입니다. 「주님, 그럴 수 없습니다. 전쟁터에서 할례가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모르십니까? 하나님, 창세기 34장에 세겜족속들이 할례를 행하고 꼼짝도 못하여 야곱의 아들들에게 몰살당했던 그 일을 잊으셨습니까? 하나님, 그것은 전투가 아닙니다. 자살행위입니다.」

하나님의 대답을 들어보십시오. 「 하나님의 군대의 능력은 인간적 자원이나 작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거룩성에 있느니라. 하나님의 백성들이 세상을 정복하는 무기는 거룩함에 있느니라. 거룩이 파워이니라.」

1) 가나안 전투를 앞두고 할례를 행하시므로 성도의 싸움은 거룩의 싸움임을 보여 주십니다. 

광야에서는 만나가 내리고 반석에서 샘이 터졌습니다. 거기는 술도, 퇴폐문화도 없는 수도원이었습니다. 그러나 가나안 땅은 유혹도 타협도 있었습니다. 음란한 문화가 있었는가 하면 생존경쟁도 있었습니다. 광야의 양식이었던 만나가 그쳤습니다. 가정과 직장, 학원과 사업터를 정복하는 능력이 거룩이라는 것입다. 그곳은 거룩한 백성만이 승리할 수 있는 곳입니다. 

여리고를 점령하는 것은 영토를 얻는 싸움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신령한 전쟁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거룩해 질 수 있느냐의 싸움입니다. 얻는 싸움이 아니라 세상의 것을 잘라내는 싸움입니다. 모든 야망들을 짤라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역을 방해하는 잘못된 우선순위와 이기적 야망을 짤라내야 합니다. 

영적 싸움의 신비가 여기 있습니다. 얻는 싸움이전에 짜르는 싸움에서 이기는 것입니다. 성공하는 싸움이전에 포기하는 싸움에서 이기는 것입니다. 사는 싸움이전에 죽는 싸움에서 이기는 것입니다. 

2. 유월절을 지키라
할례를 행한 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유월절을 행하라 명령하셨습니다. 전쟁을 앞두고 잔치를 벌였습니다. 싸우기도 전에 승리의 축제를 벌였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싸움은 싸우기 위해서 간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벌써 싸워 이긴 싸움에 그들은 그냥 동참하러 간 것입니다. 그러니까 잔치이지 전쟁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승리와 축복을 확인하러 가는 것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를 확인하는 것이 여리고를 점령하는 그리스도인의 싸움이었습니다. "이겨놓고 싸운다." 싸워서 쟁취하는 싸움이 아니었습니다. 여러분 부전승이라는 것을 아십니까? 싸우기도 전에 승리의 축제를 벌이고 있는 것입니다.

구원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승리를 나의 승리로 확인하는 것입니다.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주께서 이긴 승리, 주께서 이루신 구원, 이것을 함께 기뻐하는 축제가 유월절 축제였습니다. 

누가 세상을 구원해 낼 수 있는 것입니까? 구원의 감격이 살아있는 사람, 예수님이란 말만 들어도 가슴이 벅차오르는 사람, 십자가를 바라만 보아도 눈물이 글썽해 질 수 있는 사람, 내가 구원받았다는 한 가지 사실 때문에 세상의 악을 정복하고 사탄을 정복해 갈 수 있는 사람,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한 가지 사실 때문에 감격하며 사는 사람이 세상을 정복할 수 있습니다. 기억하십시다. 구원의 감격없이 정복의 능력도 없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이 성을 너희에게 주셨느니라"(6:16) 파주 땅을, 고양 땅을 너희에게 주셨느니라. 삼천리 금수강산 한반도를 너희에게 주셨느니라. 너희들이 복음으로 정복하게 될 것이니라. 세계 열방을 너희에게 주노라!

3. 여호와의 군대장관이 나타나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할례를 행하고 유월절을 기념했습니다. 그리고 여리고 성 가까이 왔을 때에 여호수아는 여호와의 군대 장관을 만나게 됩니다. 칼을 높이 빼어든 하나님의 군대 장관을 보게 된 것입니다. 깜짝 놀란 여호수아 "당신은 우리 편이요, 아니면 적들의 편이요. 당신 도대체 누구요?" 그때 그가 대답합니다. "너의 질문이 틀렸다. 내가 너의 편이냐 적들의 편이냐가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다. 너의 싸움이 진정 하나님의 싸움이더냐. 너의 인생발걸음이 진정 하나님과 함께 하는 발걸음이더냐. 네가 정말 하나님 편에 서 있더냐. 너의 모든 인생의 목표가 하나님 그분에게 맞춰져 있느냐. 이것이 너의 질문이 되어야 하는 것이야!"

지금 상황을 보십시오. 여호수아 앞에 여호와의 군대장관이 섰습니다. 그런데 여호수아의 신분이 무엇입니까? 이스라엘의 군대 장관입니다. 군대 장관이 두 명인데 이스라엘의 군대 장관이 여호수아가 여호와의 군대장관 앞에서 무릎을 꿇습니다. 무슨 상황입니까? 이스라엘 군대의 통수권이 여호와의 군대장관 앞으로 넘어가는 장면입니다.

남북전쟁 당시에 아브라함 링컨에게 한 장군이 찾아왔습니다. 북군은 커다란 위기에 직면하여 있었습니다. "폐하, 이때에 하나님이 우리 편이라고 하면 얼마나 좋을까요?" 아브라함 링컨이 이 장수에게 대답합니다. "그것은 문제가 아닐세. 참된 문제는 우리가 정말 하나님 편인가? 우리 북군이 하나님 마음에 합한 군대인가? 우리가 정말 하나님 편에 서 있는가? 이것이 문제일세.”내가 하나님 편에 서기만 하면 언제나 하나님은 우리 편이라네. 할렐루야! 내가 하나님 편에 서 있기만 하면 언제나 하나님은 나와 함께 하신다네. 

하나님이 우리 편인가를 묻는 것이 아니라 네가 지금 하나님 편인가를 물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질문을 바꿔야 합니다. 그때 여호와의 군대 장관은 얘기했습니다. "내가 이제 왔느니라." 왜 이 사람이 요단을 건넌지 며칠이 지나도록 나타나지 아니하고 이제 왔는지 성경은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침묵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 한 가지가 있습니다. 여호와의 군대 장관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찾아오기 전에 전쟁을 감행했더라면 저들은 틀림없이 실패했을 것입니다. 영적인 전쟁은 하나님의 싸움입니다. 추수는 하나님의 사역입니다. 세상정복 그것은 우리가 그분의 사역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III. 언약궤

하나님의 백성들이 장애물을 정복하는 다음 전략이 이어집니다. 소위 여리고성 돌기 작전입니다. 

"일곱 제사장은 일곱 양각 나팔을 잡고 여호와의 궤 앞에서 계속 진행하며 나팔을 불고 무장한 자들은 그 앞에 행진하며 후군은 여호와의 궤 뒤를 따르고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며 행진하니라"(13절)

여기서 중요한 것은 언약궤입니다.

언약궤를 중심으로 앞뒤에 제사장들과 군인들이 늘어선 대형으로 행군을 하는 것입니다. 언약궤를 중심에 놓고 이스라엘 백성 전체가 앞뒤로 대열을 이루어서 행군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언약궤가 상징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들 가운데 임재해 계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법궤를 중심에 놓고 행군 하는 것은 하나님을 우리 삶의 중심에 놓고 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앞이 막혀서 아무런 길이 보이지 않을 때 제일 먼저 할 일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돌아보는 것입니다. 그런 이유 때문에 여호수아 5장에서 할례를 행하고 유월절을 지키도록 명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여호와의 군대장관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이제 여리고성을 돌 때도 그 행군의 중심에는 법궤를 놓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중심에 놓고 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들에게는 세상적인 무기는 없었지만 세상에서 볼 수 없는 무기가 있습니다. 하나님이십니다. 비록 그들이 칼이나 창이나 마병이나 대포는 없었지만, 전능하신 하나님과 함께 동행했습니다.

언약궤가 앞서 갈 때는 '앞서 가시는 하나님'을 생각했습니다. 언약궤가 등뒤에 따라올 때 하나님께서 내 등 뒤에 계시는 구나. 언약궤가 그들 한 가운데에 있을 때는 '우리 가운데 계시는 하나님'을 생각했습니다. 그들에게는 어떠한 전쟁 무기도 없었지만 철저하게 여호와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항상 하나님을 바라보며 그 하나님과 동행하며 전진했습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승리할 수 있는 비결입니다. 우리의 승리는 무엇을 소유했느냐(to have)에 있는 것이 아니라 누구와 함께 있느냐(to be)에 있습니다. 소유의 문제가 아닌 존재의 문제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이 승리의 비결입니다.

내 인생의 가장 큰 복은 하나님과 함께 가는 것입니다. 우리 앞에 어떠한 요단이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과 함께 하면 문제가 되지 아니하며 아무 장대한 여리고가 놓여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과 함께 가면 실패하지 않습니다. 어차피 우리 앞에 놓여있는 금성철벽 여리고와 같은 문제를 우리 힘으로 해결할 수 없다면 하나님만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항상 동행하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은 언제나 기적의 연속이어야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생각해보면, 지금까지 이스라엘 백성이 달려온 길은 모두가 기적의 연속이었습니다. 앞에는 홍해가 가로막혀 있고 뒤에는 애굽군대가 추격하는 절대 절명의 위기에서 홍해가 열려 구원을 받았습니다. 40년간의 광야생활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로 먹여 주시고 반석에서 물을 주셔서 지금까지 살 수 있었습니다. 얼마 전에는 요단강물이 멈추어서는 기적 가운데 요단강을 건넜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위기를 만나면 하나님이 함께 계심을 망각하는 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이었습니다. 


지금 여러분의 앞을 여리고가 가로막고 있습니까?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 일이 앞을 가로막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앞이 막혔을 때는 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내가 처한 상황 가운데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언제 한 번이라도 여러분 힘으로 살아오신 적이 있습니까? 어느 것 하나 내 힘으로 한 것이 없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의 역사하심으로 지금까지 살아올 수 있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왜 지금 당한 위기 속에서는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으십니까? 우주 만물을 지으신 살아 계신 하나님께서 내 삶의 중심에 계심을 왜 깨닫지 못하십니까? 그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완전한 승리와 완전한 구원이 있을 것임을 왜 확신하지 못하십니까? 오직 우리와 함께 하신 그 분을 바라보십시오. 

이것이 믿음입니다. 

여러분, 6일 중동 전쟁을 아십니까? 엿새 동안의 전쟁으로 시나이 반도, 요단강 서안, 골란고원을 몽땅 다 빼앗은 전쟁입니다. 당시 국방 장관이었던 모세 다얀 장군은 그가 가진 모든 정보와 과학적인 데이터를 컴퓨터에 입력해 보았습니다. 과연 300만으로 아랍족속 3억을 이길 수 있겠는가? 컴퓨터의 대답은 뻔했습니다. "승리 불가. 불가능"-. 

그 때 모세 다얀 장군은 컴퓨터를 내동댕이치고 "우리는 과학으로 싸우지 않는다 믿음으로 싸운다"라고 외쳤습니다. 그리고 안식일이 지난 다음날 싸움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는 다음 안식일이 돌아오기 전에 그 싸움을 마치고 안식일을 지킬 것이라고 선언했습니다. 과연 이스라엘은 엿새만에 그 엄청난 아랍 연합군을 무찌르고 대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믿음이 이깁니다. 하나님은 승리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주판알을 굴려 싸우지 않는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싸운다. 
믿음으로 싸운다.」 이것이 신앙인의 영적 싸움입니다. 할렐루야!




IV. 침묵하라

내 인생의 여리고성 앞에 설 때에...
첫째는 내 눈이 하나님만 바라보는 것이요. 둘째는 내 귀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10절 말씀을 보십시다.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너희는 외치지 말며 너희 음성을 들리게 하지 말며 너희 입에서 아무 말도 내지 말라 그리하다가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여 외치라 하는 날에 외칠지니라 하고"

여기 한 절 말씀속에 침묵에 관한 명령이 세 번씩이나 반복적으로 등장합니다. 

본문의 장면을 상상해 보십시오. 모두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침묵하면서 성을 돌고 있습니다. 들려오는 소리는 울려 퍼지는 나팔소리뿐입니다. 성경에서 나팔소리는 하나님의 음성, 하나님의 위엄, 하나님의 행동을 의미했습니다.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 천군천사들의 나팔소리와 함께 오실 것입니다. 천사장의 나팔소리는 하나님이 역사 속에 개입하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모두가 침묵하는 가운데 크게 울려 퍼지고 있는 나팔소리를 상상해 보십시오. 그 소리를 들으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이 사건에 개입하실 것임을 확신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침묵하라고 했습니까? 그것은 나팔소리를 통해서 선포되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들이 자유롭게 떠들며 성을 돌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들 대부분이 나팔소리를 듣지 못했을 것입니다. 혹시 그 나팔소리를 들었다 할찌라도 그 나팔소리에 담긴 하나님의 음성을 깨닫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모두 13번에 걸쳐서 성을 돌았습니다. 돌면서 무슨 생각을 했겠습니까? 굳게 닫힌 성을 보면서 한편으로는 더 절망적인 생각이 들지 않았을까요? 도저히 열릴 것 같지 않은 그 높고 굳게 닫힌 성을 볼 때 절망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약 자유롭게 말하도록 두었다면 그들은 나팔소리를 듣는 것보다 그들 스스로 절망에 찬 말을 서로가 주고 받아서 오히려 서로가 서로에게 낙심시켰을 것입니다.

부정적인 말, 불평의 언어가 난무했을 것입니다. 
"야, 돌고 돌다가 돌겠다."
"돈다고 무너지냐? 돈 사람만 도는 거야. 너도 돌면서 돈 척 하는거야." 
"돌았니, 돌게. 돌고 있네..."

때문에 하나님은 침묵하게 하셨습니다. 오늘 우리 시대에도 꼭 필요한 것이 침묵입니다. 

테레사 수녀가 미국을 방문해 CBS 방송의 유명한 뉴스 진행자 댄 래더의 프로그램에 출연했습니다. 방송국 스튜디오를 찾은 마더 테레사에게 앵커는 물었습니다. "당신은 하나님께 기도할 때에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테레사 수녀는 다소곳이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대답했습니다. "나는 듣습니다." 예상 밖의 대답을 들은 앵커는 당황해 다시 질문을 던졌습니다. "당신이 듣고 있을 때에 하나님은 무슨 말씀을 하십니까?" 그때 마더 테레사 수녀는 잠시 생각하다 다시 대답했습니다. "그분도 듣지요."

하나님의 본래적인 존재 양식이 침묵입니다. 출애굽기 14장에 보면 하나님이 일하실 기회를 드리기 위해 너희는 침묵하라고 했습니다. 전도서 5:2과 하박국 2:20에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기 위해 침묵할 것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앞에서 잠잠한 양같이 침묵하셨습니다. 우리가 먼저 너무 많은 말을 하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게 됩니다. 어려운 일을 만났을 때일수록 떠들지 말고 조용히 침묵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만났을 때 모세를 통해서 들려준 하나님의 명령이 무엇이었습니까? 

"너희는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출 14:13) "너희는 가만히 서서"라는 말에 주목하십시오. 사람의 힘으로 감당할 수 없는 일을 만났을 때는 말하는 것이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조용히 침묵해야 나팔소리를 통해서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법입니다.

지금 막다른 골목에 있습니까? 도저히 내 힘으로 감당할 수 없는 절망에 처했습니까? 그렇다면 조용히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그분의 음성속에 여러분의 살길이 있습니다. 절망을 헤치고 일어설 수 있는 새 힘은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무 말이나 하지말고 조용히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독수리가 가장 좋아하는 먹이는 두루미라고 합니다. 독수리가 두루미를 먹이 감으로 가장 좋아하는 이유는 두루미를 사냥하기가 가장 쉽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두루미는 떠들기를 좋아하는 새입니다. 평소에 땅에 앉아 있을 때에도 재잘거리며 잘 떠드는 새입니다. 그런데 두루미는 공중을 날 때에는 아주 요란스러운 소리를 낸다고 합니다. 때문에 독수리는 아주 멀리에서도 두루미가 떠드는 소리를 쉽게 들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독수리는 떠드는 소리를 내는 두루미를 쉽게 찾아내게 되고 두루미는 독수리의 훌륭한 먹이 감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두루미가 떠드는 소리는 마치 [나 여기 있으니 나 잡아 잡수시오]하는 말과 같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조류학자들은 신기한 현상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나이가 많고 경험이 풍부한 두루미들은 모두가 먼 지역으로 이동하게 될 때에는 입안에 가득할 정도로 돌을 입에 물고 떠난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입니다. 침묵만이 자신들을 살릴 수 있다는 것을 두루미가 경험을 통해서 터득을 했기 때문입니다. 

마치 이스라엘의 모습은 두루미의 모습과 흡사했습니다. 이스라엘은 조그만 일에도 말이 많았습니다. 광야길에서 불평의 언어, 부정적 언어로 수많은 사람이 죽어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말로 인해서 큰 어려움을 당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로 하여금 침묵하도록 하셨던 것입니다. 교회안에서도 열심히 일하면서 도움이 되지 않는 일이 말을 많이 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교회를 아프게 합니다. 

보십시오. 5장에서 할례를 행하고 유월절을 지키고 하늘의 장군을 만났습니다. 거룩이 능력입니다. 싸우기도 전에 승리의 축제를 벌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싸우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늘의 사령관이 나타나 진두지휘하십니다. 

오늘 6장에서 문제의 여리고성을 보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이 내 앞서 가시는구나. 하나님이 내 뒤에 계시는구나. 하나님이 우리안에 계시는구나." 내 입을 닫고 하나님의 나팔소리에만 귀를 기울였습니다. 침묵이 능력입니다. 

V. 장애물은 무너진다

이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께서 이 성을 너희에게 주셨느니라"

본문 여호수아 6장 16절을 통하여 하나님의 음성과 그분의 약속을 들어보십시오. 
"여호와께서 이 성을 너희에게 주셨느니라" 할렐루야!

이 귀한 축복의 음성, 이 놀라운 감격의 음성이 여러분 귀에 잘 들립니까? 조만간 하나님의 그 때는 이르고 맙니다. 엿새 동안 이스라엘은 여리고성을 돌았으나 성은 끄덕도 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의 꿈이 희미해져 가고 희망이 아득하여 캄캄한 일이 있습니까? 조금만 더 참고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요. 침묵 중에 그분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십시요. 감히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목적과 그 진리를 막을 성벽은 없습니다. 여러분은 반드시 신앙에서 승리할 것입니다. 사업에서 승리할 것입니다. 인생에서 승리할 것입니다. 

여러분, 백성들의 함성에 여리고성이 무너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무너뜨릴 것에 대한 믿음으로 너무 기뻐서 감격의 환성을 지른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함성은 바로 하나님께서 여리고 성벽을 무너뜨리는데 대한 감격의 환성이었습니다. 여기 신앙의 나팔이나 백성들의 함성은 불신앙의 신음이나 낙심한 심령들의 한숨소리와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침묵! 다음 하나님의 확신이 오면 그때 외치는 것입니다. 

일산아 무너져라! 
고양아 무너져라! 너는 복음앞에서,
문제의 성아 무너져라!
인생의 장애물이여! 너는 복음의 능력 앞에 굴복할찌어다!
휴전선아! 너는 성령의 불길 아래서 녹아질찌어다! 북녘 땅은 무너져라!
오, 내가 당하고 있는 고난의 성아, 시련의 성아, 실패의 성아, 문제의 성아, 복음을 모르는 완고한 심령의 성들아! 무너져라, 할렐루야! 무너져라, 할렐루야!

굳게 닫힌 불신의 성은 무너지고, 운명처럼 따라다니던 가난의 성도 무너지고, 끈질긴 사탄의 질병도 무너지고, 나는 안된다고 하는 부정의 성도 무너질찌어다!여호와께서 이 성을 너희에게 주셨느니라! 

난공불락 여리고성 벽이 어떻게 무너졌을까요? 
고고학자들의 조사에 의하면 여리고 성은 '밖에서 안으로' 무너진 것이 아니라(밖으로부터의 공격이 아니었다는 증거) '안에서 밖으로' 무너진 것이었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6:20-무너져 내린지라) 그러니까 지진 같은 현상에 의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결론은 이것입니다. 
사람이 아닌 하나님이 무너뜨리신 것입니다. 더 놀라운 사실은 외벽의 한 부분만이 무너지지 않았는데 고고학자들은 아마도 이곳이 라합의 집이었을 것이라고 추정합니다. 할렐루야!

본문에서 이어지는 결과를 보십시다. 

20절 "이에 백성은 외치고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매 백성이 나팔 소리를 들을 때에 크게 소리 질러 외치니 성벽이 무너져 내린지라 백성이 각기 앞으로 나아가 그 성에 들어가서 그 성을 점령하고"

27절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와 함께하시니 여호수아의 명성이 그 온땅에 퍼지니라"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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