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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다급하신 당부 : 가서 전하라 (욘 4:5~11) - 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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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다급하신 당부 : 가서 전하라 (욘 4:5~11)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BC 8세기경에 요나, 이사야, 미가, 호세아, 아모스 선지자들이 활동하였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민족의 타락을 경고하고 하나님의 심판이 임박함을 경고하였습니다. 그런데 요나는 다른 예언자들과 차이가 있습니다. 다른 예언자들은 자국민을 상대로 경고하고 예언하고 회개를 촉구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요나에게 니느웨 백성에 가서 경고하고 회개를 촉구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때 요나는 “내가 왜 내 백성도 아닌 이방인에게 가서 경고를 해야 합니까”하고 항거하고 도망하였습니다. 니느웨는 당시 강대국 앗수르의 수도입니다. 성의 둘레만도 100km 나 되고 그 도시에 12만 명이 살고 있는 거대도시였습니다. 이 성이 악독이 마침내 하늘에 까지 사무쳤습니다(1:2). 그래서 하나님은 요나에게 그 백성에게 가서 경고하고 회개를 촉구하라고 명하셨습니다. 

그런데 요나가 그 명령을 거역하고 다시스로 도망을 간 것입니다(1:3). 당시 다시스는 지중해 연안에 있는 지역입니다. 하나님은 동쪽에 있는 니느웨로 가라고 했는데 요나는 서쪽의 다시스로 도망을 갔습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려고 도망간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 대상이 동족이 아니니까 피한 것일 것입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왜곡된 선민의식이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 왜곡된 의식을 고쳐주려고 고발하고 있습니다. 당시 앗수르는 강대국이었고 이스라엘 백성의 입장에서 보면 망했으면 좋을 나라입니다. 그들을 자꾸만 괴롭히고 압제하고 위협했습니다. 그래서 내심으로는 망했으면 하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나라에 가서 구원을 외치라고 하십니다. 그 나라가 구원받으면 계속 강대국으로 자신들을 괴롭힐 것입니다. 그래서 요나는 그 나라에 가서 외치라는 말씀을 거부하고 니느웨와는 정반대의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탔습니다. 하나님은 요나가 괘씸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대풍을 불게 해서 그가 탄 배가 뒤집히게 하셨습니다. 사공들이 모두 두려워 각기 자기들의 신을 불렀습니다. 그 말은 모두 혼비백산 했다는 말입니다. 그때 요나는 배 밑창에서 깊이 잠이 들었습니다. 잠은 하늘이 주는 선물입니다. 

어떤 사람은 밤이 행복한 사람이 있습니다. 꿈이 있는 사람입니다. 아브라함은 꿈이 있었습니다. 장차 젖과 꿀이 흐르는 땅과 모래같이 많은 자손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의 꿈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밤마다 그 꿈을 생각하면 행복했을 것입니다. 요셉도 꿈이 있는 사람입니다. 꿈도 우주가 동원되는 꿈으로 해와 달이 절하는 꿈을 가졌습니다. 밤마다 그는 얼마나 행복하였겠습니까. 깊은 잠을 이루는 사람도 밤이 행복할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밤이 무서운 사람이 있습니다. 매일 밤 악몽에 시달리는 사람들, 불면증환자, 근심이 많은 사람은 밤이 두렵습니다. 

여기 요나의 깊은 잠은 영혼이 무디어진 결과입니다. 밖에서는 난리가 나고 두려워 떨고 있는데 요나는 깊은 잠을 이루고 있습니다. 무책임한 잠입니다. 영혼이 녹슨 잠입니다. 예배시간에 깊은 잠을 자는 것도 영혼이 녹슨 결과입니다. 그때 선원들은 요나를 깨우고 너도 네 신께 기도하라고 재촉합니다. 그 말에 요나는 “내가 여호와 낮을 피하여 이 재앙을 만났으니 나를 바다에 던지라(1:10~12)”고 합니다. 그래서 선원들이 그를 바다에 던졌더니 바다가 순식간에 잔잔하여 졌고 그때 하나님은 큰 물고기를 준비하여 바다에 던져진 요나를 집어 삼키게 하십니다. 

요나는 하나님이 준비하신 큰 물고기 뱃속에서 3일간을 지냈습니다. 그 물고기를 고래라고도 하고 상어라고도 말합니다. 그 물고기가 뭐든 좋습니다. 다만 큰 물고기였을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면 그 물고기 뱃속에서 요나가 어떻게 3일간을 지낼 수 있었겠습니까. 그것도 알바 아닙니다. 다만 이 사건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임을 암시하고 하고 있습니다. 나사로가 죽은 지 나흘 만에 살아납니다. 예수께서 죽은 지 3일 만에 부활하십니다.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서 3일을 지냅니다. 모두 연관 있는 상징적 시간입니다. 

물고기 뱃속에서 요나는 피눈물 나는 기도를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물고기 뱃속에서 부르짖었다(2:2)”고 했습니다. “물이 나를 둘렀고 ..영혼까지 둘렀으며.. 내 영혼이 피곤하니이다(2:5)” 하고 참회를 합니다. 그렇게 3일간 심각한 영혼의 곤비함 속에서 부르짖었을 것입니다. 사람이 살다가 길을 잘못 들게 되면 이렇게 부르짖을 때가 오게 됩니다. 그 부르짖을 때는 그냥 눈물만 흘리는 것이 아니고 처절한 눈물을 흘리게 됩니다. 

요나가 그렇게 처절하게 부르짖었을 것입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이 물고기에게 명하시니 .. 물고기가 그를 육지에 토해냈다(2:10)”고 했습니다. 모래사장에 내 던져진 요나를 생각해 보십시오. 온몸에 물고기 내장의 분비물로 온통 찌들어 있었을 것입니다. 얼굴과 몸과 옷 전체에 냄새가 진동했을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이 요나에게 재차 명령하셨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두 번째 요나에게 임하시니라 이르시되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들에게 선포하라(3:1-2)” 그래서 요나는 꼼짝 못하고 3일 길을 걸어서 니느웨에 도착하였습니다. 니느웨 성은 성 둘레만도 100km이었다고 합니다. 

요나는 기진맥진한 몸으로 가서 외쳤을 것입니다. “요나가 그 성읍에 들어가서 하루 동안 다니며 외쳐 이르되 앞으로 사십일이 지나면 이 니느웨 성이 무너지리라 하였더니(3:4)” “니느웨 백성들이 하나님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고 굵은 베옷 입은지라, 그 일이 왕에게 들리매 왕이 보좌에서 내려앉아 왕복을 벗고 재위에 앉으니라(3:5-6)” “왕이 조서를 내려 사람이나 짐승이나 소떼나 양떼나 아무 것도 입에 대지말지니 곧 먹지도 말고 물도 마시지 말고 여호와께 부르짖으라(3:7-8).” 

니느웨 성은 신속하게 대처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시고 그 진노를 그치사 하나님이 우리를 멸망하지 않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이 일은 단 며칠 만에 이루어진 순식간의 일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때로 너무 느릴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지쳐서 시험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때로는 이렇게 순식간에 이루시기도 합니다. 소돔성에 유황불을 내려 심판하실 때를 보십시오. 추상같습니다.  

요나가 가서 외쳤더니 모두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제는 모든 상황이 종료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요나에게 깊은 하나님의 영혼 사랑을 느끼게 해 주셨습니다. 이 대목이 하나님의 심정을 잘 대변해 주시는 구절입니다. 그 후 “요나가 해 아래에 앉아 나는 죽고 싶습니다, 죽여주소서(4:3)”하고 탄식하고 불평을 하였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박넝쿨을 돋아나게 해서 요나의 머리위에 햇빛을 가리게 하셨습니다. 그랬더니 박넝쿨로 인하여 요나가 좋아했습니다. 다시 “하나님이 곧 박넝쿨을 벌레 먹게 하시니(4:7)” 다시 햇볕이 내리쪼였습니다. 그러자 “요나가 사는 것이 죽는 것 보다 나으니이다, 죽여 주소서(4:8)”하고 화를 냅니다. 

그 모습을 보고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박넝쿨로 인하여 네가 왜 성을 내느냐, 너는 박넝쿨이 자라는데 물 한번 주었느냐, 수고를 하였느냐, 이 박넝쿨을 네가 재배하였느냐, 너는 하루 만에 사라지는 이 박넝쿨도 소중히 여기거든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 앞뒤를 가리지 못하는 사람이 12만 명이 있고 그 밖에 짐승이 부지기수로 많은데 내가 이 백성들을 아끼지 않겠느냐”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여기서 요나서가 끝납니다. 

우리가 아무리 이웃을 사랑하고 헌신하고 봉헌의 삶을 살아도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세상을 사랑하시는 그 사랑을 흉내라도 낼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전도하라고 하면 얼마나 힘들어 합니까. 그래서 전도하라 하면 온갖 핑계를 대고 교회 불리려 한다고 불평을 합니다. 그 모습을 보면 꼭 요나 같습니다. 요나가 그래서 불평을 한 것입니다. “왜 내가 이방인에게 가서 외쳐야 합니까” 그 말은 “오늘 우리들이 교회가 이만하면 되었는데 더 키우려고 합니까” 하고 불평하는 것과 같은 소리입니다. 

그 때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저 성읍에 좌우를 분별하지 못하는 백성이 12만 명이나 있느니라.”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이 심정을 헤아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요나에게 명하시는 명령이 오늘 나에게 하시는 명령으로 받아야 합니다. 전도는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우리는 요나처럼 외쳐야 합니다. 외치면 몇 가지 나타나는 현상이 있습니다.  


영접자 

이 세상에 누군가는 듣지 못해서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직도 이 세상에는 진지하게 복음을 전달받지 못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주 형식적인 전달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진지하게 전하는 전달이 없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전도는 진지하게 해야 되는 것입니다. 요나는 물고기 내장의 온갖 피비린내 나는 모습 그대로 가서 다급하게 전했을 것입니다. 그 말은 요나가 진지하게 전했다는 말입니다. 그랬더니 사람들이 듣자마자 선뜻 받고 곧 금식하며 회개하고 눈물을 흘리면서 돌아왔습니다. 일반 백성에서부터 왕까지 다 돌아왔습니다. 그래서 그 성이 멸망당할 처지에서 구원받게 되었습니다. 상상 밖의 영접이었고 순종이었고 결실입니다. 

이 세상에는 다 타락한 것이 아닙니다. 아직도 전하면 그대로 받는 사람이 있습니다. 순수한 사람, 구원받기로 작정된 사람들은 그대로 받고 응답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전도는 진지하게 전달해야 합니다. 그러면 성령의 역사가 이루어집니다.  


준비된 자 

이 세상에는 믿고 싶은 마음을 간직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용기가 없어서 선뜻 나오지를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때 누군가 안내자가 되어 주어야 합니다. 교육학에서 “줄탁동기(啐啄同機)”라는 말이 있습니다. 알에서 병아리가 부화할 때가 되면 병아리가 속에서 나오려고 몸부림을 칩니다. 그때 어미가 밖에서 껍질을 살짝 쪼아주면 가냘픈 병아리가 금방 껍질을 깨고 밖으로 나온다는 말입니다. 밖과 안에서 동시에 마음이 맞아야 합니다. 지금 누군가는 용기가 나지 않아서 교회에 못 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미 닭의 마음으로는 이미 준비된 사람들을 인도해 주어야 합니다. 누군가가 가서 쪼아만 주면 금방 따라 나올 수 있습니다.  


수 고 

전도는 그냥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수고가 필요합니다. 세심한 배려와 인내와 끈질긴 노력이 필요합니다. 벼농사는 그냥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사과 농사도 그냥 되지 않습니다. 사업도 그냥 발전하지 않습니다. 하물며 한 영혼의 구원이 그냥 이루어지겠습니까. 여러분들이 여기 이 자리에 나와 앉기까지 순순히 따라 나섰습니까. 얼마나 애를 먹인 후에 여기에 나오셨습니까. 

1793년에 윌리암 케리가 영국에서 인도로 선교를 떠납니다. 그는 가자마자 5세난 아이를 잃습니다. 부인이 충격으로 정신병자가 됩니다. 자신도 충격을 받고 실의에 빠집니다. 그 후 7년의 세월이 흐른 후에 한사람을 구원한 것이 오늘 인도 선교가 시작된 것입니다. 아도니람 저스든은 미국 1호 선교사입니다. 1814년에 미얀마로 선교를 떠납니다. 그는 먼저 6세 된 아들을 잃고 1년 옥고를 치루는 동안 아내는 열 받아 사망합니다. 그리고 5년 후 겨우 한사람의 영혼을 구원합니다. 

자기희생이 없이는 열매를 거둘 수가 없습니다. 게을러빠진 사람이 어느 날 열매를 거두었습니다.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요한복음12장24절을 보면 “한 알의 밀알이 떨어져 죽지 않으면 불가능”하다고 결론짓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자기 몸을 죽이십니다. 하늘 보좌를 버리고 영광의 자리를 떠나 세상에 태어납니다. 그리고 30년 동안 고난의 삶을 살고 3년 사역한 후에 죄인으로 죽습니다. 그래서 세상에 구원과 영생과 천국과 부활이 주어진 것입니다. 

요나가 어느 날 소풍가듯이 니느웨에 가서 전했다면 그들이 믿었겠습니까. 그랬는데도 믿었다면 기적입니다. 그런 일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요나는 그날 물고기 뱃속에서 나온 그대로 가서 전했습니다. 사람들이 그 모습을 보고 눈이 뒤집혔을 것입니다. 온몸이 떨렸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모두 자리를 깔고 회개의 눈물을 흘렸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십자가에 매달려 처참하게 죽으신 것입니다. 사람들이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고로 전도에는 수고가 필요한 것입니다. 

오늘 한국과 일본의 기독교가 다른 점이 있습니다. 일본은 우리나라 보다 더 일찍 기독교가 들어왔습니다. 그럼에도 오늘 일본 기독교가 보잘 것이 없습니다. 어쩌면 그것은 내촌감삼의 영향력 때문일 것입니다. 내촌감삼은 일본의 기독교 지도자입니다. 그는 지성신앙과 개인성결을 주장하였습니다. 남에게 실례를 범하지 말라, 부담주지 말라, 조용히 믿으라는 것을 강조하였습니다. 그리고 교회에서 요란하게 모여 떠드는 것은 좋지 않다는 뜻을 전하여 교회를 부정하고 무교회주의를 강조하였습니다. 그 결과 오늘 일본 기독교가 이렇게 아주 미미한 것입니다. 

일본이 그런 노선을 걷는 동안 한국 기독교는 나만 구원이 아니고 나만 조용한 것이 아니고 나아가 전도하고 강권했습니다. 그래서 때로 실례되는 일도 있었지만 적극적 전도와 활동과 전파를 감행하였고 나가서 간증하고 새벽기도를 열심히 한 결과 오늘 한국의 기독교가 이렇게 부흥하게 된 것입니다. 전도는 그냥 되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들이 주님을 만나게 된 것도 누군가 우리 앞에서 이렇게 무거운 십자가를 졌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의 할 일은 우리도 증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톨스토이는 “전도자들이 참으며 고통 받는 사이에 교회는 존재한다, 그들이 편해지기 시작하자 그들의 전도도 끝났다“고 했습니다.  


영혼 사랑 

전도는 사랑의 발로이고 표현이고 실천입니다. 전도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이웃의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과 이웃의 영혼에 대해서 안타까운 마음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내 이웃과 친구와 가족에게 가장 먼저 영혼의 선물을 주어야 하겠다 하는 마음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탕자의 비유를 보십시오. 한 여인이 잃은 동전을 찾기 위해서 밤새워 동분서주 하는 모습을 보십시오. 그것이 한 영혼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의 표현입니다. 

하나님의 니느웨를 생각하는 마음을 보십시오. 현재 니느웨는 너무 타락하여 곧 심판받아야 합니다. 심판받으면 12만 명이 멸망당하게 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누구 하나도 멸망당하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요나를 사용하셨습니다. 그래서 “네가 가서 외치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요나가 순종치 않고 도망갑니다. 하나님이 그를 그냥 놔두시겠습니까. 요나가 도망가면 어디로 가겠습니까. 그것이 어리석은 행동입니다. 자기가 하나님의 낮을 피하여 도망하면 어디로 갈 수 있습니까. 

시편139편7절을 보면 “내가 주의 앞을 떠나 어디로 피하리이까, 하늘에 갈지라도 주님은 거기 계시며 저 깊음 속에 숨을지라도 하나님은 거기도 계시며 내가 새벽 일찍이 바다 끝으로 도망갈지라도 하나님의 손이 나를 붙잡으시니 내가 어디로 피하리이까”하고 고백합니다. 요나가 도망하여 배 밑창에 숨었습니다. 하나님은 정확하게 찾아가 족집게로 집어내시듯이 그를 찾아내시고 재차 명령하셨습니다. “그 성에는 좌우를 분간하지 못하는 사람이 12만 명이 있느니라. 가서 외치라.” 오늘 이 아침 우리는 이 하나님의 안타까운 부르심을 들어야 합니다. (이정익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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