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무엇이든지 기도로 판단하라! (행 18:1~11)

  • 잡초 잡초
  • 333
  • 0

첨부 1


무엇이든지 기도로 판단하라! (행 18:1~11)


무엇이든지 기도로 판단하라!
사도행전 18장 1-11절
“그 후에 바울이 아덴을 떠나 고린도에 이르러 
아굴라라 하는 본도에서 난 유대인 한 사람을 만나니 글라우디오가 모든 유대인을 명하여 로마에서 떠나라 한 고로 그가 그 아내 브리스길라와 함께 이달리야로부터 새로 온지라 바울이 그들에게 가매 
생업이 같으므로 함께 살며 일을 하니 그 생업은 천막을 만드는 것이더라 
안식일마다 바울이 회당에서 강론하고 유대인과 헬라인을 권면하니라 
실라와 디모데가 마게도냐로부터 내려오매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그리스도라 밝히 증언하니 
   
그들이 대적하여 비방하거늘 바울이 옷을 털면서 이르되 너희 피가 너희 머리로 돌아갈 것이요 나는 깨끗하니라 이 후에는 이방인에게로 가리라 하고 
거기서 옮겨 하나님을 경외하는 디도 유스도라 하는 사람의 집에 들어가니 그 집은 회당 옆이라 
또 회당장 그리스보가 온 집안과 더불어 주를 믿으며 수많은 고린도 사람도 듣고 믿어 세례를 받더라 
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말씀하시되 두려워하지 말며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어떤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하시더라 
   
일 년 육 개월을 머물며 그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니라 ”

다른 사람은 저를 어떻게 평가할지 모르지만, 저는 제 자신의 지금 모습에 대하여 아쉬움이 많습니다. 때때로는 괴로울 정도로 자책할 때가 있습니다. 이유는 어려서부터 제 마음대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제가 하고 싶은 대로 제가 보기에 좋은대로 제 육신이 끄는 대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솔직히 저는 인생을 사는 다른 방법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누구나 자기가 원하는 대로 사는 것이라 생각하였습니다. 

제가 저와 함께 하시는 예수님을 알고 예수님의 인도를 받는 것을 배우기 시작한 것은 제 인생 중반을 훨씬 넘기고서의 일이었습니다. 
“그래도 목사님은 성공한 편이예요!” 라고 말하는 분도 계십니다. 제가 이 만큼 살게 된 것은 예수님을 알고 난 다음 나의 생각, 소원, 판단을 꺾고 주님의 인도를 따랐던 몇 번의 순종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주님을 알기까지는 하나님의 말씀이 그렇게 어려웠습니다.
“항상 기뻐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두려워 말라. 염려를 주께 맡겨 버리라,외모를 보지 말라.”
어떻게 그렇게 살 수 있는 것입니까? 마음이 슬픈데 어떻게 기뻐하며, 낙심되는데 어떻게 감사합니까? 두려운데 염려가 되는데 어떻게 염려를 주님께 맡길 수 있습니까? 사람을 보면 판단이 되는데 어떻게 사람의 중심을 볼 수가 있느냐 말입니다. 제가 예수님을 알기 전에는 이런 말씀들이 다 지키기가 어렵고가 이해도 안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알면서 제 판단만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판단이 있음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와 함께 계시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주님의 판단이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내 눈에 보기에는 이렇게 판단이 되지만, 예수님은 어떻게 보실까? 예수님은 어떻게 판단하실까?’ 이것이 의식이 되면서부터 ‘내 생각대로만 살 것이 아니구나!’ 하는 것을 그때서야 알았습니다. 
사 55:8-9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저는 요즘 판단을 내리기가 두렵습니다. 

저는 꽤 신중한 성격이지만 ‘나는 왜 이렇게 판단력이 부족할까?’ 늘 고민입니다. 나름대로 신중하게 지혜롭게 판단한다고 하지만, 지나고 보면 항상 제 판단과 다른 결과가 나오는 것을 봅니다. 좋아 보이던 일로 인하여 어려움을 겪고, 고통 중에 눈물 흘리던 일이 지나고 보면 너무나 귀한 감사 제목이 되는 것입니다. 기대한 사람에게서는 실망하고, 전혀 기대하지 않던 사람에게서 하나님의 역사를 봅니다. 
그러니 제 위치 때문에 중요한 결정을 해야 할 일이 많은데, 여간 고민이 아닙니다. 

지나고 나면 뒤집어지는 일이 많기 때문입니다. 저는 교회 담임 목사이기도 하고 어떤 때는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될 일이 많습니다. 결과를 책임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 두려운 것입니다. 어떤 일을 결정할 때 제 나름대로 생각과 판단이 있지만, ‘이것이 정말 옳은 판단일까?’ 그래서 기도하게 됩니다. 정말 간절히 무섭게 기도하게 됩니다. ‘주님, 주님은 어떻게 판단하십니까? 주님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결과를 책임져야할 일일수록 더욱 그렇습니다. 저와 함께 주님이 계시다는 것을 느끼니까 더 간절히 주님께 기도하게 됩니다.  
제 눈에 보기에 어떤 판단이 서지만, 반드시 먼저 기도해야 함을 절실히 느낍니다. 

오늘 본문은 사도 바울이 고린도에 가서 전도했을 때의 기록입니다. 
고린도는 당시 로마 시대에 로마 다음으로 큰 도시였고 황제 숭배의 본산이었고 비너스 신을 섬기는 우상숭배 도시였습니다. 게다가 아주 음란한 도시였습니다. 비너스 신전에 있는 1,000여 명에 이르는 여자 사제들은 실제 창기들이었습니다. 당시 ‘고린도 사람처럼 행하다.’라는 동사가󰡐음란한 짓을 하다.󰡑라는 뜻일 정도로 타락한 도시였습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에서 전도를 시작하였을 때, 그는 너무나 낙심한 상태에 있었습니다.
고전 2:3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 
그럴만도 합니다. 사도 바울이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건너가서 전도를 하게 되는데 가는 곳마다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빌립보에서는 감옥에 들어가고 매도 맞았습니다. 데살로니가에서는 깡패들이 나타나 때리기도 하고 베뢰아까지 따라왔습니다. 혼자서 아테네로 가서 복음을 증거했는데 논쟁만 하였지 별로 열매가 없었습니다. 너무 쓸쓸한 마음으로 좌절감에 잡혀서 고린도로 온 것입니다. 
사도 바울에게는 얼마나 절망적으로 여겨졌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 고린도에서 사도 바울에게 뜻밖의 위로를 주셨습니다. 고린도에 와서 평생에 힘이 될 동역자를 만난 것입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였습니다. 
그들을 만난 동기는 서글펐습니다. 고린도에 왔지만 바울에게 집을 제공해 주는 데도 없고 먹을 것을 주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천상 바울이 스스로 일을 해서 거기서 전도를 해야 되는데, 사도 바울이 할 수 있는 일은 천막 만드는 일이었습니다. 시장에 나왔다가 천막집이 있어서 갔다가 거기서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를 만난 것입니다. 그래서 그 집에서 밥을 먹고 자고 하면서 동업자도 되고 동역자도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부부가 사도 바울에게 얼마나 충성스런 동역자가 되었는지 모릅니다. 
롬 16:3-4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들인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 저희는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의 목이라도 내어 놓았나니 나 뿐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저희에게 감사하느니라”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에게도 고린도에서 바울 만난 것은 뜻밖의 큰 복이었습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는 로마에서 잘 살던 사람이었는데, 글라오디오 황제의 칙령에 의해서 로마에 있는 모든 유대인이 재산도 몰수하고 추방을 당할 때 고린도로 쫓겨 왔던 처지였습니다. 그러니 그들에게 고린도가 무엇이 좋았겠습니까? 그들에게는 상처의 도시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을 만난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 부부의 삶이 송두리채 변화된 것입니다. 바울을 만나 복음을 듣고 1년 6개월 동안 사도 바울과 고린도에서 지내면서 가장 가까이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양육받을 수 있었고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알았고 복음을 위하여 헌신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로마에서 쫓겨났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습니다. 고린도에 오기를 잘 한 것입니다..고린도는 그들에게는 좇겨와서 정착한 도시입니다. 좋을 리가 전혀 없는 도시입니다. 사람의 생각, 감정, 눈에 보이는 것으로 판단하면 고린도는 불행한 도시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계획으로 보니까 고린도는 사도 바울에게나 브리스길라 아굴라 부부에게는 정말 은혜의 도시가 아니었습니까? 

여러분이 이 교회에 오실 때 혹시 사도 바울 같았을 수도 있고, 브리스길라 아굴라 부부 같았을 수도 있습니다. 좌절하고 상처 받고 정말 좇기듯이 오신 분이 있으실 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하나님의 계획이 이 교회에 여러분의 삶속에 오늘 사도 바울과 브리스길라 아굴라 부부처럼 있기를 축복합니다. 변하여 간증이 되게 해주시는 하나님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속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을 발견하고 나면 힘을 주십니다. 사도 바울이 브리스길라 아굴라 부부를 만나고 전도할 힘을 얻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무엇이 잘된 일이고 무엇이 힘든 일입니까? 어떤 일도 속단할 수 없습니다. 기도 중에 판단해야 합니다.

그 때 마침 실라와 디모데도 고린도에 도착하여, 사도 바울은 다시 전도할 힘을 얻었습니다. 
5절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유대인의 회당을 찾아가 담대히 예수를 전하였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사도 바울을 심하게 배척하였습니다. 그리고 회당 출입을 못하게 했습니다. 바울은 다시 좌절합니다. 
“너희 피가 너희 머리로 돌아갈 것이요 나는 깨끗하니라” 
저주에 가까운 발언을 합니다. “이 후에는 이방인에게로 가리라” 라고 선언했습니다. 

다시 사도 바울은 좌절합니다. ‘안되는구나! 여기서는 복음을 전하기 어렵구나!’ 빌립보에서도 데살로니가에서도 베뢰아에서도 또 아덴에서도 오래 사역을 하지 못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아마 이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제는 고린도에서도 떠나야하는구나. 또 어디로 가지? 내가 지금 하나님의 정확한 인도를 받고는 있는 것인가?’ 사도 바울의 눈에는 어려운 것만 많이 보였습니다. 하나님이 도와주시고 계셨지만 그것은 아주 작게 여겨지고 다 어렵게만 보였던 것입니다.

그런 사도 바울에게 하나님께서 뜻밖의 위로를 주셨습니다. 회당에서 좇겨났는데 회당장 그리스보가 예수를 믿게 된 것입니다. 참 놀라운 일입니다. 사도 바울이 ‘야, 여기에 역사가 있구나.’ 이렇게 생각할만도 한데, 그리스보가 세례 받은 일 이후에도 바울 마음은 풀리지가 않았던 모양입니다.  
 사도 바울의 마음이 완전히 회복되지 못하였습니다. ‘고린도에서 더 전도해야 하나? 이젠 전도하기도 두렵구나. 이제 또 어디로 가야 하나? 내가 지금 바로 가고 있나?’

사도 바울이 이렇게 갈등하던 중, 기도하다가 주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9-10절 “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말씀하시되 두려워하지 말며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어떤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하시더라” 
이 말씀에 사도 바울은 너무나 감격하였습니다. 마음이 완전히 회복되었습니다. 고린도에서 전도해야 할 이유를 분명히 깨달은 것입니다. 힘을 얻었습니다. 

‘고린도에 구원받을 사람이 많다.’ 는 말씀에도 큰 힘을 얻었겠지만,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하시는 주님 말씀에 더욱 힘을 얻었을 것입니다. 사방이 어렵지만 ‘주님이 함께 하시는구나! 내가 지금 잘 가고 있는 것이구나!’ 그러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고린도에서는 1년 6개월 동안 사역을 한 것입니다. ‘주님이 나와 함께 계시니 반드시 역사가 일어난다! 내가 지금 잘 가고 있구나!’ 여러분, 지금 현재 여러분의 처지가 어렵고 힘들어도 답은 어디서 얻어야 되느냐하면 주님이 나와 같이 계시다! 여기에서 답을 얻어야 됩니다. 주님이 나와 함께 계시다! 이것만 분명하면 지금 잘 가고 있는 것입니다. 눈 앞에 어려워 보이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반드시 모든 상황이 다 뒤집어지는 때가 오기 때문입니다.  

우리 문제의 핵심도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확신입니다. 그것이면 충분합니다. 상황이 여건이 어떠하냐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야곱이 아버지 집을 떠나서 삼촌 라반의 집으로 도망을 갈 때 벧엘 들판에서 노숙을 했습니다. 얼마나 두렵고 얼마나 고독하고 얼마나 막막했겠습니까? 그런데 돌베개을 베고 자다가 하나님을 만나 두려움이 사라졌습니다. 하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창 28:16 “야곱이 잠이 깨어 가로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야곱의 삶에 변화가 일어난 것입니다. 오늘도 ‘주님이 나와 같이 계시는구나!’ 하는 확신이 오면 여러분의 삶 모든 것이 달라 보이기 시작합니다.  
임마누엘 하시는 하나님은 만나면 그곳이 어디이든지, 어떤 처지이든지 두려움이 사라집니다. 능력이 생깁니다. 

주님이 함께 하신다는 응답을 받고 사도 바울은 1년 6개월 동안 고린도에 머물 수 있었습니다. 엄청난 복음의 열매가 맺어졌습니다. 초기의 어려움 때문에 낙심하였다면 고린도 전도도 실패로 끝났을 것입니다. 
고린도는 아덴보다 전도하기 어려운 곳이었습니다. 아덴에서는 핍박이 없었지만 고린도 지역에서는 핍박이 있었습니다. 또 아덴이 철학의 도시라면 고린도는 상업과 무역의 도시였고. 도덕적으로는 심히 부패한 도시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덴에서는 장기 사역을 하지 못했지만 고린도에서는 장기 사역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사도 바울이 기도 중에 주님의 지시를 받고 순종했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에서는 좌절하지 않고 눈에 보이는 것에 굴복하지 않고 끝까지 거기서 말씀을 전하니 고린도에 큰 교회가 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이 여러분과 함께 계시느냐 그것을 오늘 확인하셔야 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도 매 순간마다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여러분 중에 어떤 분은 ‘주님은 정말 나와 함께 하실까?’ 의심하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또 ‘어디를 가야 주님을 만날 수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이런 분이 있으십니까?

성 어거스틴은 젊었을 때 참 종교, 참 신, 진리를 찾고자 사방을 헤매고 다녔습니다. 이런 저런 철학을 공부하고 결국 ‘마니교’라는 이단 종교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예수님을 영접하고 구원받은 후 고백하였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찾아 이곳 저곳 돌아다녔지만 하나님은 늘 내 옆에 계셨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지금 우리 안에 계십니다. 내가 주님을 볼 수 없고 주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고 주님을 느끼지 못하여도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시고 도우시고 인도하신다는 사인을 주십니다. 우리가 오늘 주일 예배에 참석한 것 자체가 주님의 인도하심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사인은 작게 여기고, 눈 앞에 보이는 세상, 부정적인 일만 크게 보고 좌절하고 낙심에 빠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령 충만한 교회는 어떤 교회입니까? 찬송 소리가 크고 기도 소리가 크고 아멘 소리가 큰 교회입니까? 아닙니다. 성령의 인도를 잘 받는 교회가 성령 충만한 교회입니다. 교회는 성령님께 민감하여야 합니다. 사람의 생각으로 교회 일을 결정하지 않고 성령님께서 함께 하심을 믿고 성령님에게 순종하는 교회가 성령 충만한 교회입니다. 

어떤 사람이 성령 충만한 사람입니까? 늘 찬송하고 늘 기도하고 늘 전도하는 사람입니까? 아무 죄도 안 짓고 화도 안내고 유혹도 안 받고 슬픔도 느끼지 않고 늘 기쁘고 늘 감사하고 항상 기적을 일으키는 사람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도 지극히 정상적인 사람입니다. 슬프기도 하고 화도 나고 죄의 유혹도 받고 낙심도 하고 두려워도 합니다. 
그러나 단 하나, 언제나 주님을 바라보는 눈이 열려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사람이 성령 충만한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심을 분명히 알고 예수님에게 순종할 수 있는 사람이 성령 충만한 사람입니다. 그때부터 그 사람을 통해서 역사가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성령 충만한 교회가 되고 성령 충만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까? 
‘내 생각과 주님의 생각은 다르다!’ 이 사실 하나를 분명히 믿고 무슨 일이든 어떤 상황이든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판단하면 됩니다. 주님이 나와 함께 계시고 내 생각과 주님의 생각이 다르다는 점을 정말 분명히 믿으면 기도 안하고 견딜 수가 없습니다. 내 생각과 주님의 생각은 다른데 어떻게 해야 됩니까? ‘주님, 이것은 도대체 어떻게 판단을 해야 되나요? 주님, 이것에 대해서 도대체 무엇이라고 말씀하시겠습니까?’ 기도 안하고 어떻게 견딥니까? 주님의 생각이 궁금한데. 주님의 생각대로 되어야 비로서 역사가 있고 비로서 살 길을 가게 되는데.  

이것이 날씨가 추워지고 신종 플루의 소문이 훙흉해도 우리가 새벽에 말씀 앞에 모이는 이유입니다. 기도하고 말씀 들으며 살 때 살 길을 찾게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기도 안하고 세상을 어떻게 살아갑니까? 어려워서 어떻게 살아갑니까? 두려워서 어떻게 살아갑니까? 여러분의 판단을 도무지 믿을 수 있습니까? 여러분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판단하는 것이 정말 살 길이 맞습니까? 주님으로부터 들어야 됩니다. 그때부터 어디로 가야 될지, 무엇을 해야 될지가 결정 나는 것입니다. 
‘우리 눈에 보이는 것과 예수님의 계획은 다르다.’ 이것 하나만 분명히 알아도 믿음이 큰 사람입니다.

우리의 문제는 속단하는 것입니다. 눈으로 보는대로 판단하는 것입니다. 
많은 성도들이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문제로 두려워합니다. 너무 성급히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기도해 보면, 말씀을 붙잡으면 하나님이 보이고 하나님의 능력이 보이고 하나님의 약속이 보일텐데, 기도하기 전, 말씀듣기 전에 속단하는 것입니다. 
우리 눈에 보이는 것과 실제 상황은 다릅니다. 

풍랑이는 바다에서 제자들과 예수님의 판단이 달랐습니다.
벳세다 들판에서 5천 명이 먹을 것이 없을 때 그것을 바라보는 제자들과 예수님의 판단이 달랐습니다.
죽은 나사로 앞에서 마르다 마리아 자매와 예수님의 판단이 달랐습니다.

엘리사의 종은 아람 군대가 침공해 와서 도단성을 포위했음을 알았을 때, 너무나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엘리사에 좇아들어가서 “주인님, 우리가 다 죽게 되었습니다!” 소리 쳤습니다. 그러나 엘리사는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믿음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종의 눈을 열어 보게 해달라고 기도하자, 두려웠던 엘리사의 종도 눈이 뜨여 불말과 불병거가 둘러싸고 있음을 보고는 두려움이 사라졌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깨닫기 전에는 속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눈에 안 보이는 하나님의 역사가 있단 말입니다.
우리의 삶에도 똑같습니다. 내가 보는 것 내가 듣는 것 내가 판단하는 것이  주님이 보는 것과 다르다는 것입니다. 
무엇이 잘된 일이고 무엇이 안된 일입니까? 기도하기 전에 속단해서는 안됩니다. 
믿음은 속단하지 않는 것입니다. 기도해 본 후에 판단하는 자세입니다.

알고 보면 우리가 두려워 해야 할 문제는 환난이나 역경이 아닙니다. 
순탄할 때가 더 무섭습니다. 편안할 때가 더 위험합니다. 여러분이 부대자루에 담아서 세야 될 만큼 돈을 많이 번다 하더라도 그 때가 더 위험할 때인지 모릅니다. 사람이 마음이 느긋해지면 마음이 풀어집니다. 몸이 아프지도 않고 가족들도 문제가 없고 특별하게 급박한 일도 없을 때 마음이 느긋해져서 저녁에  TV 앞에서 연속극이나 보는 것입니다. 그 자리가 위험한 자리입니다. 

세상이 편안하니까 연속극도 보는 것입니다. 힘들고 어려운 일이 생겨보십시오. 연속극 볼 시간에 기도하고 말씀 보게 됩니다.   
우리가 정말 두려워해야 하고 위험한 순간은 우리가 영적으로 가장 약해지는 순간입니다.
저는 우리 교회가 힘들고 어려울 때가 위기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교인들이 많아지고 부흥될 때가 위험한 때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느 집사님은 예배나 성경 공부를 하러 갈 때는 몸이 천근이지만, 여행가고 쇼핑하고 먹고 노는 일에는 몸이 솜털보다 더 가벼워진답니다. 점심 때까지 드러누워 있다가도 누가 쇼핑하고 점심 먹자고 전화만 해주면 용수철처럼 벌떡 일어납니다. 이것이 두려운 것입니다. 그때가 영적으로 위기인 것입니다. 심각한 것입니다.  

아이들을 유괴하는 유괴범들이 처음에는 아이의 부모보다 더 친절합니다. 유괴범이 아이를 유혹할 때 사실은 매우 두려운 순간입니다. 그러나 그 아이는 그것을 깨닫지 못합니다. 우리에게 다가오는 마귀의 역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육신의 눈만 의지하는 성도는 매우 위험합니다. 기도하지 않을 때는 모르는 것입니다. 기도가 없을 때는 내가 지금 위험한지 어떤지 모르는 것입니다.  

아브람의 조카 롯이 소알 땅으로 갈 때, 그는 기도한 후에 판단하지 못하였습니다. 넓은 땅과 초지, 소돔성과 고모라 성만 보았습니다. 그는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너무 속단했습니다. 결과는 모든 재산을 다 잃어버리고 말았고 아내도 죽었습니다. 

대학 입시철이 시작이 되었습니다만, 친구 목사님 딸이 대학에 합격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딸 입시를 뒷바라지하면서 크게 회개한 것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내가 이 아이의 신앙 교육을 시키지 못하였구나!’ 깨닫고 너무나 회개가 되더랍니다. 딸이 입시를 치르면서 순간 순간 되어지는 일로 인하여 너무 좌절과 낙심이 크더랍니다. “담대하거라!” 입시가 인생의 전부가 아닌데, 하나님을 바라보는 믿음의 훈련, 어지간한 시련에는 꿈쩍도 하지 않는 믿음의 훈련을 시키지 못했음을 깨달았답니다. 많은 성도들이 아이들 공부시키는 것을 신앙보다 더 우선 순위에 두고 있습니다. 이것이 두려운 일입니다.

주님께 기도하십시오. 주님이 만나주실 것입니다. 말씀해 주실 것입니다. 주님을 만나고 주님의 판단을 듣고 나면  믿음이 달라지고 판단이 달라집니다. 

지난 금요 성령집회 때 기도를 받으러 나온 남자 분이 있었습니다. 무슨 기도 제목이 있습니까? 했더니 “저는 찬양 사역자입니다. 그러나 나는 위선자입니다! 찬양할 때도 기도할 때도 나는 아무 믿음이 없는 자입니다. 기도 받으러 나온 지금도 나는 위선자입니다.”하며 울었습니다. 그는 죄책감으로 주님을 만나지 못하는 영적 답답함으로 믿음이 무너져 있었습니다. 

“주님, 이 형제가 주님을 갈망합니다. 저의 마음이 준비되었습니다. 주님 임하시옵소서!” 기도했을 때, 그에게 성령님이 임하였습니다! 
그 형제는 기도 받으러 나오는 순간에도 그 마음 속에서는 갈등하였습니다. ‘너는 위선자야, 이것도 거짓이야!’ 그러나 그것은 마귀가 그를 조롱하고 정죄하는 것이었습니다. 성령님이 이끌지 않으면 눈물로 기도할 수 가 없습니다. 
기도하게 하시는 주님께 순종하였더니, 주님이 그에게 함께 하심을 보이시고 모든 낙심, 의심이 떠나가게 하셨습니다.

오늘 여러분을 성령께서 계속해서 이끄십니다. 그것을 여러분이 다 느끼고 있습니다. 그것을 붙잡아야 됩니다. 주님이 여러분을 이끄시고 계십니다. 주님께 순종하고 나가야 됩니다. 주님의 판단이 여러분에게 분명해야 합니다. 그래야 여러분이 삽니다. 

오늘 성찬이 주님을 만나는 시간입니다. 성찬이야말로 주님이 여러분과 함께 계시다는 것을 보여주는 가장 확실한 은혜입니다. 성찬을 통해서 주님을 바라보는 눈이 뜨이시기를 축복합니다. 

내일부터 시작되는 새벽 기도회에 오셔서 여러분 안에 주님의 생각 주님의판단을 회복하는 놀라운 은혜가 있기를 축복합니다. 
무슨 문제가 있든지 뜨겁게 기도한 후 결정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