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자기 승리의 비결 (갈 5:16~18)

  • 잡초 잡초
  • 344
  • 0

첨부 1


자기 승리의 비결 (갈 5:16~18)
     

성도 여러분, 한 주간도 안녕하셨습니까? 날씨가 많이 쌀쌀해 졌습니다. 환절기에 감기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요즈음 신종플루 때문에 불안합니다. 인플루엔자는 기온이 떨어지면 활동력이 올라가는데 실제로 이미 겨울이 온 몽골 지역에는 지금 신종플루가 무섭게 번지고 있다고 합니다. 불과 2-3주전 한명에서 시작한 감염자가 순식간에 1,000명으로 늘었다는 것입니다. 어떤 교회는 목사님이 교인들과 악수를 하지 않기로 결정했다는데 어떻게 될지 참 걱정스럽습니다. 우리에게 접근해 오는 신종플루와 싸워서 이기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이렇게 우리는 침투해 오는 것들과 끊임없이 싸울 수 밖에 없습니다.

인간에게는 세 가지 종류의 싸움이 있다고 합니다. 먼저는 자연과의 싸움입니다. 많은 재난과 싸워야 합니다. 홍수라든가 지진 같은 것과도 싸워야 하고 또 추위나 더위에서 오는 많은 질병... 이런 것들과 우리는 싸우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런 싸움에서 이기면 건강하고, 이런 싸움에서 지면 죽는 것입니다. 결국 인간은 자연과의 계속적인 싸움 가운데 살아가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인간과 인간의 싸움입니다. 이웃을 협조자로, 반가운 사람으로, 사랑하는 사람으로 대하지 못하고 서로가 경쟁이라고 하는 긴장관계 속에 살아가야 한다는 것 자체가 비참한 것입니다. 상점에 가서 조그마한 물건 하나를 사면서도 우리는 신경을 씁니다. ‘어떻게 하면 속지 않고 좋은 물건을 싸게 살 수 있을까’ 하고, 파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어떻게 하면 좀 더 많이 받을 수 있을까’ 합니다. 팽팽하게 긴장관계가 이루어집니다. 

왜 이렇게 해야 되는 것입니까. 왜 이렇게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까. 심지어는 부부간에도 먹느냐 먹히느냐, 지배 하느냐 지배당하느냐, 주인이 되느냐, 종이 되느냐, 하고 팽팽하게 싸우기도합니다. 한평생 싸우며 살아가는 이 비참한 모습- 왜 이러해야 되는 것입니까. 또한 우리는 부득불 자기와의 싸움을 해야 합니다. 

가장 무서운 적은 자기 자신입니다. 자신의 욕망과 자신의 나약함과 자신의 게으름과 더불어 싸웁니다. 그러면서 자기진실을 지켜가는 것입니다. 이래서 빅토르 위고는 자연과의 싸움을 설명하면서 「바다의 노동자」라는 책을 썼고, 인간관계를 역사적으로 연구하면서「93년」이란 소설을 썼습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과의 싸움을 극적으로 그려서「레 미제라블」이라고 하는 여러분도 잘 아시는 훌륭한 소설을 썼습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얼마나 생각해보았습니까? 자기 자신에 대한 제어능력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내가 나를 다스릴 수 있느냐, 아니면 내 마음이 원하는 대로 살아가는 존재냐’ 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자, 우리는 자연에 대해서 고민을 많이 합니다. 자연의 재해로부터 벗어나기 위하여 고민합니다. 또는 경제문제에 대하여, 정치문제에 대하여 많이 생각을 합니다. 심지어는 인간관계에 대해서, 나 외의 다른 사람, 또 그와 나의 관계에 대해서 많이 생각합니다. 

고민도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얼마나 고민해보았습니까? 이것이 문제입니다. 다른 사람 원망하지 말고, 내가 피해자라고 생각하지 말고, 내가 가해자라고 하는 입장에서 한번 나를 돌이켜보았습니까? ‘나 때문에 불행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내가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걱정거리가 되고 있는가?’ 그렇게 생각해보았습니까? 나라고 하는 존재, 인간자체에 대한 실존적 고민을 해보았느냐, 그 말입니다. 자기진실, 자기존재를 찾으려고 얼마나 몸부림쳐보았습니까? 지금 잠시라도 이런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염세철학자 쇼펜하우어가 한번은 깊은 생각을 하면서 길을 가다가 너무 골똘하게 생각하던 나머지 앞에서 오는 사람과 부딪쳤습니다. 멀건 대낮에 사람끼리 충돌을 하고만 것입니다. 순간 상대방은 “이 사람이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기에 앞도 안살피고 생사람을 들이받는 거야? 도대체 당신 누구야?” 하고 야단쳤습니다. 그랬더니 쇼펜하우어 왈 “바로 그것이 문제요. 내가 누군지를 나도 몰라서 지금 고민하고 있는 거요” 하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자기 자신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이솝 우화」중에 「파리와 좀나방」이라고 하는 재미있는 얘기가 있습니다. 파리가 꿀 항아리에서 꿀을 핥아먹습니다. 변두리에서 조금씩 빨아먹으면 될 것인데 조금 더 조금 더 하고 더 많이 먹으려고 깊이 들어갔다가 그만 꿀 항아리에 빠져버렸습니다. 그래 날개가 꿀에 젖어서 이제는 날 수 없게 되고, 그냥 거기서 꿀 좀 더 먹다가 죽게 되었습니다. 

이 신세가 됐을 때 좀 나방 한 마리가 팔팔 날면서 파리를 비웃었습니다. “야 이놈아, 아니, 째그만 놈이 변두리서 좀 빨아먹어도 충분할 것 뭐 그 안에까지 들어갔다가 그 모양이 되냐, 이 미련한 놈아.” 이윽고 해가 졌습니다. 주인이 등불을 켰더니 좀 나방들이 모여듭니다. 불 가까이로 막 모여드는데, 좀 더 밝은 곳으로, 좀 더 밝은 곳으로, 하고 모여들다가 그만 그 등불에 타 죽었습니다. 

꿀 항아리의 파리가 한마디 합니다. “너는 나보다 더 바보다.” 했다는 것입니다. 자기욕심, 자기정욕을 이기지 못해서, 여기에 끌려가다가 비참하게 희생되는 이런 모습 - 우리는 이런 군상들 속에서 살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 나는 누구입니까? 내 마음, 내 몸, 내 뜻, 내 습관, 내 성향... 이대로 좋은 것입니까? 이대로 괜찮겠습니까? 한번 자신을 돌아보며 말씀안에서 자신을 극복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몸 말

우리는 사도바울을 잘 압니다. 참으로 훌륭한 분입니다. 그가 존경 받는 많은 이유 중 하나는 바로 로마서 7장입니다. 자기의 얼굴을 보지도 못한 사람들, 그리고 바울을 세계적인 위대한 이방인의 사도로 존경하고 있는 그 로마사람들을 향해서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그 편지에서 온몸을 홀랑 벗은 것과 같은, 적나라한 자기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저는 그 본문을 읽을 때마다 ‘이렇게 진실할 수가 있을까. 어찌 이럴 수가 있을까. 참으로 위대하다’ 고 느낄 때가 많습니다. 보십시오,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롬 7:19).”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3, 24)”하고 절박하게 부르짖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자기 진실을 이렇게까지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내가 구원받았다고 하는 구속의 은혜를 고백합니다. 자기진실을, 아주 진실한 자기모습을 그는 알고 있었고, 또 그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9장에서 그는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27절)” 한다고 말씀합니다. ‘나라고 하는 존재는 내버려두면 안된다. 매우 쳐서, 노예를 길들이듯이 쳐서 복종케 해야만 되는 그런 존재다’ 하는 것입니다. 

‘남에게 복음을 전하고 나는 오히려 버림이 될까 두렵다’라고도 그는 고백합니다. 자신을 잘 알고 있음입니다. 그런가하면 고린도후서 12장에 가서는 더 절박한 말씀을 합니다. 내 몸에 ‘육체의 가시’가, 사단의 사자가 있다고, 이것이 아니면 나는 겸손할 수 없다고, 이것이 아니면 나는 교만하다고, 이것이 아니면 은혜에 살 수 없는 존재라고, 나는 못된 사람이라고, 육체에 가시가 있어서 나를 계속 찔러야만 믿음 안에 바로 설 수 있는 이 정도밖에 안되는 존재라고 그는 자백합니다. 그는 진실한 사람입니다. 그는 자기를 알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자신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습니까? 사회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사람이 무슨 일을 하든 그 일을 하다가 실패를 했다면 거기에는 네 가지 이유가 있다고 합니다. 첫째는 욕심이 많았습니다. 욕심이 지나쳤습니다. 누구를 막론하고 실패한 데는 지나친 욕심이 있었습니다. 두 번째는, 목적이 잘못되었습니다. 자기 일생을 걸만한 확실한, 확고부동의 목적이 없었습니다. 보통 가지고 있는 목적으로써는 성공할 수가 없습니다. 목적이 문제였습니다. 

세 번째는, 내가 세운 목적에 합당한 값을 지불하지 않았습니다. 큰 것을 원했으면 그만큼 수고했어야지요. 학자가 되려 했으면 열심히 공부했어야지요. 그리고 내가 지불해야 될 진실과 충성과 열정을 다하지 못했습니다. 열정을 다하지 못한 데 원인이 있는 것입니다. 네 번째는, 자기 자신을 믿었습니다. 세상에 자기처럼 믿을 수 없는 존재가 없습니다. 여러분, 아직까지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내가 마음만 먹으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사실은 나라는 존재는 믿을 것이 못됩니다. 내 지식, 내 감정, 내 판단... 도대체 믿을 것이 못됩니다. 바로 여기에 문제가 있었던 것입니다. 내가 나를 너무 믿었습니다. 믿을 것이 못되는 것인 줄 알면서도 믿었습니다. 그것이 오늘의 실패를 낳은 원인이라는 것입니다. 모름지기 우리는 자기 자신을 자기가 어찌할 수 없다는 것, 자기 자신을 자기가 주장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됩니다. 마땅히 대 포기가 필요합니다. 깊이 생각해야 됩니다. 큰 포기가 먼저 있어야 합니다. 

예일대학의 총장님이 대학을 졸업하는 학생들 앞에서 졸업식사를 하는데, 아주 의미심장한, 연설을 해서 그것이 명연설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졸업생 여러분, 스스로 승리자가 될 것을 완전히 포기한다면 여러분은 틀림없이 승리자가 될 것입니다.” 승리자가 되고자 하는 욕망, 일등이 되고자 하는 욕심, top-crazy, 이것을 포기하기 전에는 승리자가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대단히 중요한 얘기입니다. 우리는 쓸데없이 경쟁해왔습니다. 아무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싸웠습니다. 허무한 일에 너무 많은 정력을 쏟았습니다. 이제 생각해야 합니다. 이것들이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이었습니다. 다 포기해야합니다. 욕망자체에 대한 완전한 중생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강하게 말씀합니다. 성령을 좇아 행하라, 네 욕망, 네 의지, 네 판단을 좇아 행할 것이 아니라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네 욕망을 이길 수 있을 것이다, 너 자신을 이길 수 있을 것이다, 라고 말씀합니다. 현대적인 표현을 빌린다면 패러다임 스위치(paradigm switch)를 말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살아온 규범이 있습니다. 또 전형이 있습니다. 이 패러다임, 이대로는 안 됩니다. 이것을 바꾸어야 됩니다. 

농담 겸 진담으로 말합니다마는 어리석은 자가 소신껏 살려고 하는 것처럼 답답한 일이 없습니다. 어리석은 자는 이제 그만 어리석어야 합니다. 생각을 돌려야 합니다. 어리석고 미련한 사람이 거기다가 부지런을 떱니다. 그러니 점점 더 멀리 갑니다. 미련한 사람이 또 고집을 부립니다. 저 망하고 남 망하게 합니다. 생각 좀 달리합시다. 얼마 전까지도 흔히들 얘기했습니다. 탱크처럼 밀어붙이면 무엇인가 되는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심지어 이런 말을 좋아했습니다. ‘안되면 되게하라’ 요새는 안 됩니다. 고집 좀 그만 부립시다. 쓸데없는 고집을 버립시다. 근본적으로 패러다임 스위치가 필요합니다. 

언젠가 신문에서 이런 글을 보았습니다. 프로골퍼가 골프를 곧잘 쳐 가다가 슬럼프에 빠질 때가 있다고 합니다. 몇달 동안 안 되고 보면 불안해져서 점점 더 안 된다고 합니다. 아주 형편없이 떨어진다고 합니다. 아무리 몸부림을 쳐도 성적이 안 오른다고 합니다. 이럴 때 그 슬럼프를 극복할 수 있는 비결이 있는데, 그것은 다 잊어버리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교과서적으로, 골프채 잡는 법부터 다시 시작을 합니다. 

그동안에 상받은 것 다 잊어버리고, 그 동안에 우승했던 것 다 잊어버리고 온전히 초보자로 다시 시작을 합니다. 기초부터. 그래서 올라가야 다시 이전보다 더 올라갈 수 있다고 합니다. 옳은 얘기입니다. 원점으로 돌아갑시다. 아주 백지로 돌아가서 다시 시작해야 됩니다. 신앙생활도 그렇습니다. 뭐, 한 가지 고치고 두 가지 고치고, 결심하고 맹세하고, 그것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서 내가 예수 처음 믿던, 십자가의 예수를 발견하고 내 죄 사해주신 은혜에 감사하던 감격 - 바로 거기서부터 다시 시작할 것입니다. 

그동안 뭘 알았다느니, 직분을 맡았다느니, 무슨 일을 했다느니 쓸데없는 것 다 잊어버립시다. 처음 믿을 때로, 돌아가고 첫사랑으로 돌아가야 됩니다. 다시 생각합시다. 거기서 출발해야 합니다. ‘그리하면 육체의 욕망을 채우려하지 않을 것입니다’ 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율법적 관계에서는 구원의 길이 없습니다. 소극적 방법으로는 해결이 없습니다. 부정적 방법으로는 죽음뿐입니다. 더는 비판할 것도 없습니다. 믿어볼 것도 없습니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서 창조적인 역사로 시작되어야 됩니다. 이제 내 생각 다 버리고 그저 어리석을 정도로 주님의 말씀에 따르는 것입니다. 성령이 감동해 주는 대로, 성령이 지시해 주는 대로, 성령이 깨우쳐 주는 대로, 성령이 인도하는대로 그대로 순종할 것입니다. 여기서 새로운 역사는 시작될 것입니다. 

원수를 이기려고 몸부림칠 것 없습니다. 아주 사랑해 버리면 됩니다. 핍박하는 자를 피해보려 하지 마십시오. 미워하는 자를 같이 미워할 것 없습니다. 대결하지 맙시다. 싸우지 맙시다. 더는 비방하지 맙시다. 이제는 비방하는 자를 위하여 복을 빌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의 역사입니다. 성령은 복을 빌라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에베소서에 보면 도둑질하던 자가 있느냐, 이제는 구제할 것이 있기 위하여 일하라, 하였습니다. 

도둑질하던 사람은 구제를 하고, 교만하던 사람은 어린아이의 마음으로 돌아가서 겸손해 질 것입니다. 내가 무엇을 했다거나 남을 도왔다고 생각하던 것 다 잊어버리고 오로지 나는 도움을 받으며 살아왔다고 생각하고 다시 시작합시다. 오직 온유와 겸손, 화평과 진실을 찾을 것입니다. 새로운 방법입니다. 새로운 세계에서 출발할 것입니다. 성령은 곧 그리스도의 영입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입니다. 빌립보서 2장 5절에서 말씀합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 예수의 마음으로 다시 바라보십시오. 세상은 아름답습니다. 새로운 세계를 보게 될 것입니다. 성령을 따라 행할 때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합니다. 자유하게 됩니다. 내가 그렇게도 이기기 어려웠던 나 자신을 이기게 됩니다.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기는 순간 세상은 새로운 세상으로 내 앞에 다가올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가면 육체의 욕망을 이기게 될 줄로 믿습니다.

마무리하는 말

노자가 어느날 제자들과 여행을 하다가 숲 속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숲에는 수백명의 벌목꾼들이 나무를 베고 있었습니다. 숲 속의 나무들이 거의 잘려 나갔는데, 한 큰 나무는 그대로 서 있었습니다. 그 나무가 얼마나 큰지, 그 그늘에서 수십명이 앉아 쉴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노자는 제자들을 시켜 왜 그 큰 나무는 베지 않았는지를 알아보게 했습니다. 그들이 가서 물었을 때 벌목꾼들이 말하기를, ‘이 나무는 가지들은 구부러졌고 옹이가 많아 어떤 것도 만들 수 없습니다. 

또 이 나무에서 나오는 연기는 눈에 해로워 장작으로도 쓸 수가 없습니다. 이렇듯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에 우리가 베지 않는 것입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제자들이 와서 스승에게 전하자 스승은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너희들은 이 나무처럼 되어라. 너희가 쓸모 있게되면 잘리어 다른 사람의 집에 가구가 될 것이다. 너희가 아름다우면 상품이 되어 시장에서 팔릴 것이다. 이 나무처럼 되어라, 아무 쓸모없는 나무처럼 되어라. 그렇게 되면 너희는 자라고 성장할 것이다. 그리고 수 많은 사람들이 네게서 그늘을 찾게 될 것이다.’ 하였습니다.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의미있는 이야기 같습니다.

성도 여러분, 육체의 욕심에 매여 있는 자신을 이겨야 합니다. 오늘 본문 24절에서 바울은 정과 욕심까지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말씀합니다. 여기에 자유함이 있습니다. 가만히 보면 사람들이 자기 노력으로 해보고자 애쓰다가 더 비참해지는 것을 많이 봅니다. 참으로 비참한 사람은 자기 욕심에 끌리는 사람이요, 더 비참한 사람은 자기 욕심을 이기지 못해서 몸부림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자기 옛 생활에 노예가 된 사람처럼 비참한 사람이 없습니다. 

이제 다 그만하고 ‘패러다임 스위치’ 해 버립시다. 그리고 어린아이의 마음으로 돌아가서 훌훌 털어버리고 일어나 보십시오. 새로운 세계를 보게 될 것입니다. 원(願)으로도 못하고 능(能)으로도 못합니다. 오직 성령으로만 가능합니다. 주의 영이 내게 임할 때에만 그게 가능합니다. 그런고로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소욕을 이길 수 있을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것은 곧 사랑입니다. 열심히 하나님을 사랑합시다. 

그리고 그 사랑으로 또 이웃을 사랑합시다. 성령은 곧 진리의 영이요, 사랑의 영입니다. 비로소 새로운 세계, 새로운 인간관계, 새로운 자신을 찾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는 성령이 나를 지배하시고, 나는 성령을 쫒아 행하는, 자기를 뛰어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