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우리가 복음을 전해야 하는 이유 (고전 9:16~17)

  • 잡초 잡초
  • 1284
  • 0

첨부 1


우리가 복음을 전해야 하는 이유 (고전 9:16~17)


과거 월남 전 때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어느 날, 경상도 출신의 소대장이 전투에 참여했습니다.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는 가운데 갑자기 상대편으로부터 폭탄이 날아오자 소대장은 급히 말했습니다.  "마카 수구리!"(모두 숙여라!)  그런데 대원들 가운데 아무도 그 말을 알아듣지 못해서 절반이 죽었습니다.  얼마 후에 또 폭탄이 날아왔습니다.  소대장이 또 다급하게 말했습니다.  "아까맹키로!"(아까처럼 해라!)  그런데 두 번째도 알아듣지 못하고 나머지 대원들이 다 죽었다고 합니다.

남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을 해야 합니다.  자기만 아는 자기의 말을 해서는 곤란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 가운데는 남의 말에는 귀를 닫고 끊임없이 자기 말만 되풀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기는 상대방의 말을 듣지 않으면서 상대방이 자기 말을 듣지 않는다고 원망하고 불평합니다.  정말로 웃기는 일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가만히 보면 참으로 웃기는 일들이 많습니다.  이런 것입니다.  매번 자기는 같은 반응을 하고, 같은 말버릇입니다.  매일 같은 태도에 같은 심보로 삽니다.  그러면서 상대만 달라지기를 기다리는 심보가 있습니다.  정말로 웃기는 겁니다.  자기는 같은 말버릇, 같은 태도, 자기 할 것은 다 하면서 남만 달라지기를 기다리는 웃기는 사람들의 사전적인 의미를 찾아보니까 이렇게 정의를 내리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똑같은 행위를 반복하면서 다른 결과를 기다리는 사람을 가리켜서 이렇게 정의를 내리고 있습니다.  "정신 나간 사람"  우리들 주위에는 정신 나간 사람들이 참으로 많이 있습니다.  이들 정신 나간 사람들 때문에 오늘 우리 사회는 점점 더 삭막해지고 있습니다.  그 심령들이 더 완악해지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시간 성령의 능력으로 믿음의 눈을 뜨시기 바랍니다.  성령의 감화 감동으로 새로운 세계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다른 사람들에 대한 분노, 다른 사람들에 대한 실망, 그것 이전에 진실하게 자신의 내면을 한 번 들여다보십시오.  들여다보면 자기 내면에 숨겨져 있는 무엇인가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자기 속에 숨겨져 있는 삶의 좌절감, 삶의 무의미, 욕구불만, 내 안에 잃어버린 무언가 그것 때문에 남을 비판하고 싶은 것입니다. 괜히 자신 속에 나타난 공허감 때문에 남을 무너뜨리고 싶고, 남을 판단하고 싶은 것입니다.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이런 것에서부터 자유하셔야 합니다.  자기 내면에 숨겨져 있는 내 심령의 공허감, 내 심령의 기갈, 이런 것 때문에 지금 내 마음이 이렇게 강퍅해졌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하면 모든 것이 급격히 달라질 것입니다.  천지가 새 것이 됩니다.  이 갈급한 심령들을 위해 오늘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있기를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살아가면서 경험하는 것 가운데 제일 고약한 것은 다름 아닌 말버릇입니다.  입에서 들어가는 것은 나오면 끝납니다.  그러나 입에서 나오는 것은 끝없는 악입니다.  끝없는 죄입니다.  끝없는 아픔입니다.  특별히 아무 생각 없이 불쑥 내뱉는 그 말버릇, 그 입버릇 때문에 자신과 상대를 끝없는 곤경에 빠뜨립니다.  생각 없이 툭 내뱉는 말이 상대방에게 깊은 상처를 주고 자존심을 상실케 하고 한없는 분노를 안겨줍니다.  그 말버릇이 절망의 나락에서 헤매이게 합니다.  삶을 송두리째 흔들어버립니다.  살맛이 없게 만들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버릇을 고쳐야 합니다.  사랑과 온유와 화평을 좇아 서로 간에 덕을 이루는 말을 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말의 표현과 사람을 구별해서 볼 수 있는 지혜를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사실 그 사람이 그런 말을 했다고 해서 그 말이 곧 그 사람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종교인이 되지 말고 믿음의 지도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우리 나라는 기독교 역사상 가장 놀라울 정도로 교회의 성장을 이루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이 땅에 교인은 많습니다.  그러나 지금 이 땅의 교회에 정말로 필요한 것은 거룩한 믿음의 지도자입니다.  보십시오.  교회에 등록을 했다고 해서 그들 모두가 사역을 감당하고 있습니까?  사실 교회에 적을 둔 모든 사람들을 다 쓸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의 역사를 나타낼 수 있는 것은 교인이 아니라 지도자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성경은 지도자를 위한 책이지 교인을 위한 책이 아닙니다.  성경은 결코 종교꾼들을 위한 책이 아닙니다.  이 성경은 하나님의 진리를 붙들고 세상을 구원하겠다고 하는 이 우매한 백성 속에 길과 진리를 보여주는 지도자를 위한 책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믿음의 지도자란 어떤 사람입니까?  믿음의 지도자란 미래에 이루어질 어떤 목표를 끝없이 추구하고 바라보며 나가는 사람들입니다.  뒤엣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서 부르는 부름의 상을 향하여 끝없는 푯대를 붙들고 나가는 사람들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제발 종교꾼이 되지 말고 믿음의 지도자가 되는 꿈을 꾸십시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환멸과 절망의 상황 가운데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보시기 바랍니다.  현재의 암흑과 낭패 가운데에서도 하나님의 약속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세상이 아무리 환멸스럽고, 지금의 환경이 아무리 낭패스럽고 답답해도 그 속에서 다시 저 무지개를 바라보며 하나님의 약속을 믿으십시오.  하나님은 끝없이 지도자를 길러냅니다.  미래의 주인 되시는 하나님은 그 미래를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맡기기를 원하십니다.  미래는 철저하게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미래를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맡기기를 원하십니다.  미래는 하나님의 자녀들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도 사람을 감탄시킬 수 있는 그런 간증을 만드십시오.  예수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으며 할 이야기가 많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의 자녀를 붙들고 할 이야기를 만드십시오.  내 사랑하는 남편을 붙들고 할 이야기를 만드십시오.  내 사랑하는 아내를 붙들고 할 이야기를 만드십시오.  내 기업을 붙들고 할 이야기를 만드십시오.  그 할 이야기, 그 간증이 끝없는 변화를 일으킵니다.  그 간증이 하늘의 능력을 움직입니다.  그 간증이 새로운 길을 열어줍니다.  여러분 속에 간증이 있기를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 믿고 교인이 되지 말고 예수 믿고 하나님의 능력에 잡혀서 증인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증인의 믿음을 가지십시오.  하나님은 증인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더 큰 증인을 원하십니다.  더 큰 증인을 세우기를 원하십니다.  더 큰 증인을 일으키기를 원하십니다.  더 큰 증인을 쓰기를 원하십니다.  그들이 바로 오늘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우리는 인생을 이 세상에 출생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영어로 출생을 Birth라고 합니다.  그리고 인생은 죽음으로써 이 땅에서의 삶을 마무리합니다.  죽음을 영어로는 Death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출생과 죽음 사이에는 무엇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까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얻기 위해서 질문을 이렇게 바꾸어 보겠습니다.  대답하기가 아주 쉬울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출생이라는 영어 단어가 B자로 시작을 해서 죽음이라는 단어가 D자로 끝났습니다.  그렇다면 B와 D 사이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대답에 곤란을 느끼십니까?  C입니다.  영어로 출생을 Birth라고 하고 죽음을 Death라고 한다면, 가운데 들어가 있는 C는 Choice, 선택을 의미합니다.  출생과 죽음 사이에는 선택이라는 과정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인생은 선택으로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날마다의 선택, 시간마다 때마다 끊임없는 선택을 통해서 우리의 삶의 모습이 만들어져갑니다.  그런 의미에서 배우자의 선택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그런가 하면 직업의 선택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결혼보다도, 직업보다도 더 중요한 선택의 명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신앙의 선택입니다.  신앙의 선택은 이 땅에서 우리의 삶의 모습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칠 뿐만 아니라 우리의 영원한 운명을 결정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인생의 도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내 인생의 구주와 주님으로 만나는 순간 우리는 그분을 우리의 구주와 주님으로 선택했습니다.  물론 그분이 우리를 먼저 선택한 결과로 우리가 보인 반응이기도 합니다.  어쨌든 우리는 그분을 우리의 구주와 주님으로 받아들임으로 신앙생활 속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으로 신앙의 선택이 다 끝난 것은 결코 아닙니다.  인생의 수많은 작은 것들이 모여 인생을 형성하는 것처럼 신앙생활은 다시 작은 신앙생활들의 선택들을 통해서 우리 신앙생활의 질을 결정하게 됩니다.

그런 수많은 신앙생활의 선택 가운데 중요한 하나가 전도입니다.  우리가 대부분 그리스도인이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이 땅에서 살고 있지만 그렇다고 우리 모두가 전도하는 사람들은 아닙니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열심히 전도를 합니다.  그러나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자기가 그리스도인이라는 최소한도의 의식과 정체성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의 평생을 통해서 단 한 사람도 전도하지 못합니다.  아니 전도하기 위해서 어떠한 노력조차도 하지 않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이 있다는 것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한국 교회 미래를 준비하는 모임'이라는 한미준에서 지난 2005년에 '한국교회 미래 리포트'라는 프로젝트로 한국갤럽과 공동으로 한국 교회 교인들의 신앙생활의 실태를 조사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 조사에 의하면 "나는 지난 1년간 누군가를 전도하여 교회에 출석하게 한 적이 있습니까?"라는 설문에 "그렇다"고 대답한 교인이 26.4%였습니다.  반면에 "그런 일이 없다"고 대답한 교인들이 무려 73.6%였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해주고 있습니까?  그러니까 교회에 출석하고 있는 사람들 가운데 전도에 노력하면서 어느 정도 전도에 열매를 거두고 있는 사람은 네 사람 가운데 한 사람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이 말을 다시 바꾸어 말하면 네 사람 중에 세 사람은 전혀 전도에 관심을 가지지 않은 채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는 결론이 됩니다.

지금 우리가 11월 29일 귀빈초청 축제를 준비하고 있지만 이 보고서가 한국 교회의 평균을 잘 반영하고 있다면, 안타깝게도 우리 가운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전도에 대해서 전혀 반응을 보이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해 볼 수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저는 여러분들에게 묻고 싶은 중요한 질문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평생 신앙생활을 하면서 전도하지 않는 교인의 삶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아니면, 내가 그리스도인으로서 나를 구원하신 그리스도의 은혜에 대한 최소한의 어떤 감격이 있다면 이제 주님의 기대를 이루기 위해서 전도의 열매를 맺는 삶을 선택하시겠습니까?

그렇다면 여기에서 우리가 물어보아야 할 중요하고도 근본적인 질문이 있습니다.  그것은 전도는 왜 하는 것입니까?  복음을 전하는 것이 왜 중요한 것입니까?  아니, 전도는 도대체 무엇입니까?  이러한 질문에 대한 대답을 오늘 본문에서 찾아보고자 합니다.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당시에 자신이 전도를 해서 교회를 세웠던 고린도 교인들에게 자신의 전도관에 대해서 이런 비장한 고백을 남기고 있습니다.
"내가 만약 이 복음을 전하지 않는다면 나 자신에게 화가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 나타난 사도 바울의 고백을 통해서 우리가 복음을 전해야 하는 중요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첫째로, 우리가 복음을 전해야 하는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우리의 의무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해야 하는 것은 거절할 수 없는 우리의 의무입니다.  본문 16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다."

여기에서 사도 바울은 전도를 부득불 할 일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부득불 할 일"이라는 말이 우리에게는 소극적인 의미로 들려오지만, 그러나 영어 성경번역에서는 우리말의 늬앙스와는 다르게 들립니다.

NIV 영어성경에서는 이 부분을 이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I am compelled" 또 다른 번역에서는 "I am obligated"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어떤 감동이 와서 나는 그것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혹은 "나는 이것에 의무를 느끼고 있다"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 표현은 나는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는 거룩한 부담을 느낀다는 고백이 될 것입니다.

맞습니다.  바울은 여기에서 전도를 피해갈 수 없는 어떤 거룩한 부담, 혹은 거룩한 의무로 인식하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이 바울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기대였기 때문입니다.  나라는 사람이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았다는 이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를 느끼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성경은 내가 받은 이 구원은 결코 나 한 사람에게서 머물러야 할 사건이 아니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내가 구원받은 것은 나만 구원받아서 혼자 하나님의 나라에 가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구원을 통해서 또 다른 이웃들이 복음의 소식을 듣고 그 이웃들에게 복음이 흘러 들어가기 위한 통로로 주님이 먼저 내게 오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이 먼저 내게 복음을 들려주시고, 먼저 나를 구원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이웃을 향한 복음의 통로입니다.  이것이 바로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고백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주님이 저와 여러분을 구원하신 것은 저와 여러분을 통해서 또 다른 우리의 이웃들을 구원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기대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복음 전도라는 것은 해도 좋고, 안 해도 좋은 옵션이 아닙니다.  그것은 명령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의 선배들은 이 전도의 명령을 가리켜서 지상명령이라고 불렀습니다.  혹은 위대한 명령이라고 불렀습니다.

우리가 4복음서를 읽어보면, 그 복음서의 마지막 결론이 거의 비슷합니다.  마태복음의 결론을 기억하십니까?  부활하신 주님께서 사랑하는 열 한 명의 제자들을 모아놓고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한 마디로 말해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알지 못하는 이웃과 열방을 향해 나가서 복음을 전하라는 것입니다.  마가복음의 결론은 만민에게 복음을 선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누가복음의 결론은 죄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모든 족속에게 전파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의 결론은 이것입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이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이제 너희를 세상으로 보낸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 나라의 역사를 전개하는 사도행전의 책이 열리면서 주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신 거룩한 명령을 기억하십니까?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을 주님께서 우리들에게 명령하셨습니다.  다른 어느 누구도 아니고, 여기 선 오 목사가 아니고 우리의 주님이 명령하셨습니다.  군대로 말한다면 사령관의 명령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이 명령을 이행하지 않고 적당히 넘어갈 일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군대의 용어를 빌린다면 명령불복종이 아니겠습니까?  그것이 결코 가벼운 죄이겠습니까?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이 의무를 수행하지 않는다면 나에게 화가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내가 만나는 가까운 가족들과 이웃들에게 복음을 전해 보시지 않으시겠습니까?  왜냐하면 전도는 의무이기 때문입니다.  한 번 따라서 하십시다.  "전도는 의무입니다."  옆에 있는 분에게 이렇게 말하시기 바랍니다.
"의무를 수행하십시다."

우리가 전도해야 하는 중요한 이유 두 번째는, 전도는 우리의 특권이기 때문입니다.
전도는 단순한 의무가 아니라 특권이라고 말합니다.  전도를 부득불 할 수 밖에 없는 일, 이런 의무의 차원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바울의 전도에 대한 이해는 거기에서 머물지 않습니다.  우리가 어떤 의무감만으로 어떤 일을 수행하면 쉽게 지치고 맙니다.  결코 오래 갈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고통스러운 작업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전도를 단순히 의무로 이해한 것이 아니라 특권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냥 특권이 아니라 즐거운 특권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바울의 고백을 계속해서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본문 17절의 말씀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내가 내 자의로 이것을 행하면 상을 얻으려니와 내가 자의로 아니한다 할지라도 나는 사명을 받았노라."

전도를 단순히 의무로만 인식한 것이 아니라 자의로, 내가 좋아서, 기뻐서 행한다면 거기에 상이 따라올 것을 그는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즐겁게 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전도는 단순히 거룩한 부담, 거룩한 의무뿐만 아니라 그것은 즐거운 특권인 것입니다.  거기에는 가장 고귀한 상급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전도의 상급이라고 하면 우리는 일반적으로 이 세상에서의 삶이 끝나고 천국에 갔을 때 거기에서 우리 주님이 씌워주시는 면류관을 생각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말하고 있는 상급은 그런 상급이 아닙니다.  물론 사도 바울은 그런 상급도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에서의 상급은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본문이 이어지는 18절에서 사도 바울은 자신의 입술로 이 상급의 정체를 말하고 있습니다.  18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그런즉 내 상이 무엇이냐 내가 복음을 전할 때에 값없이 전하고 복음으로 말미암아 내게 있는 권리를 다 쓰지 아니하는 이것이로다."

바울이 묻습니다.  내 상이 무엇이냐?  내가 전할 때 값없이 대가를 바라지 않고 전도하는 것, 이 자체가 내게는 상급이라고 말합니다.  내가 사도로서 쓸 수 있는 권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복음 전도에 방해가 되지 않기 위해서 내 권리를 포기하고 사는 것, 이것이 나의 상급이다.  아주 역설적인 이야기입니다.  이 말씀을 잘 생각하고 들으셔야 합니다.

이런 이야기가 이해에 도움이 될는지 모르겠습니다.  몇 년 전에 어느 장로님이 운영하시는 어떤 개인 병원에 10년이 넘게 꾸준하게 환자를 돌보는 자원봉사자 권사님이 계셨습니다.  원장님과 같은 교회에 나가시는데, 이 원장님이 너무 고맙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해서 어느 해 추석절에 봉투에 2백만원을 넣어서 감사표시를 했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그 권사님이 원장실로 달려왔습니다.  그리고 봉투를 내놓고 정색을 하면서 원장님께 이렇게 항의를 했다고 합니다.
"원장님, 장로님, 어째서 제 상급을 빼앗아 가려고 하십니까?  제게 이런 것을 주시면 제가 겨우 이런 물질의 보상을 바라고 여기에서 봉사한 꼴이 되고 말지 않겠습니까?  제가 이것을 받으면 저는 더 이상 이곳에서 기쁨으로 일할 수 없습니다.  제가 상급을 받을 수 있도록 다시 이것을 돌려 받아 주십시오."
이런 권사님 앞에서 장로님은 너무 부끄러웠다고 합니다.  어쩌면 그렇게 순수한 믿음을 가지고 있느냐?  그렇게 살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이 오히려 권사님 앞에서 부끄러웠다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본문에서 바울의 고백이 그런 차원의 고백이었을 것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미래의 전도의 상급도 있겠지만 바울은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내가 전도하는 것, 그 자체가 상이라고 말입니다.  내가 전도하는 그 자체가 즐거움이라고 말입니다.  아니, 전도하다가 아픔을 당해도 내가 무엇인데 복음을 전할 수 있나?  그 사실 때문에 나는 기쁘다.  그 사실 자체가 내게는 크다란 상급이다.

굳이 표현하자면 십자가를 지는 감격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전도가 십자가를 지는 거룩한 감동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바울은 그것을 상급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즐거웠습니다.  전혀 힘이 들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거룩하고도 즐거운 특권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런 간증, 이런 고백을 경험해 보셨습니까?  전도를 해 봤어야 알지요.

바울의 이런 고백은 전도를 해 본 사람만이 압니다.  내가 힘들게 어떤 사람을 전도하여 그의 눈이 열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영접하게 될 때, 한 사람의 인생이 뒤바뀌고 그분이 복음을 받아들인 감동의 눈물을 흘릴 때, 우리는 그 순간 모든 상을 이미 받은 것입니다.  바울은 지금 이런 상을 말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전도는 단순한 의무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기억하십시오.  전도는 내게 즐거운 특권입니다.  옆에 있는 분들에게 이렇게 말해 보시기 바랍니다.
"전도는 내게 의무일 뿐만 아니라 특권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해야 하는 세 번째 이유는, 전도는 우리의 사명이기 때문입니다.

본문 17절의 말씀을 다시 읽도록 하겠습니다.
"내가 내 자의로 이것을 행하면 상을 얻으려니와 내가 자의로 아니한다 할지라도 나는 사명을 받았노라."

사도 바울은 물론 자의로, 기뻐서, 자원해서 즐거운 마음으로 지금 전도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즐거운 마음이 동반되지 않는다고 해도 전도는 여전히 포기할 수 없는 나의 사명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사용된 사명이라는 단어는 희랍어의 'oikonomian'이라는 단어로 쓰여졌습니다.  이 말은 본래 집안의 일을 위해 맡겨진 청지기적 사명을 뜻하는 말입니다.  집 주인이 집안 일을 믿을 만한 청지기에게 신임해서 맡겼을 때에 쓰여지는 말입니다.

바울은 전도를 이렇게 이해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믿어 주셔서, 하나님이 나를 신임하셔서 하나님의 자녀요 가족이 된 나에게 전도할 수 있는 거룩한 직분을 맡겨 주셨다.  그래서 이 과업은 내 사명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전도의 사명은 하나님이 천사에게도 맡기지 않았던 사명이었습니다.  오직 그의 자녀들에게만 맡겨주신 사명입니다.  그래서 찬송가의 작시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주 내게 부탁하신 일 천사도 흠모하겠네"

이 찬송가의 작시자는 엘라이져 캐슬이라는 사람입니다.  그는 본래 의사였습니다.  그는 성공적인 의사였고, 평신도 지도자로서 자신의 직업의 장에서 아무 모범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그리고 미국의 네브라스카의 한 교회에서 모범적인 집사로 봉사하던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런 모범적인 삶을 살면서도 또 한편으로 전도는 자기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임을 한 순간도 잊지 않고 살았던 평신도 전도자였습니다.  그는 환자를 지성으로 돌본 다음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일을 한 순간도 잊지 않았습니다.   돈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분이 물었다고 합니다.
"당신은 돈을 버는 것보다 전도하는 것이 그렇게도 좋으십니까?"

이때 그는 빙그레 웃으면서 이런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그렇구 말구요.  우리는 다 나그네가 아닙니까?  나그네 인생에서 천하보다 더 귀한 영혼을 구원하는 것보다 더 가치 있고 고귀한 사명, 그것을 무엇과 바꿀 수가 있겠습니까?  전도는 천사도 흠모하는 일이거든요."

"전도는 천사도 흠모하는 일"이라는 그의 말에 옆에서 듣고 있던 부인이 감동을 받고 집에 돌아와서는 남편에게 그 말을 시로 쓰면 자신이 작곡을 하겠다고 말합니다.  그의 부인은 본래 음악 전공자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부부의 고백으로 탄생한 찬송이 바로 찬송가 508장입니다.

"우리가 지금은 나그네 되어도 화려한 천국에 머잖아 가리니
이 세상 있을 때 주 예수 위하여 끝까지 힘써 일하세
주 내게 부탁하신 일 천사도 흠모하겠네"

그런데 그의 나이 60을 넘기면서 그의 마음에 파트타임이 아닌 풀타임으로 자신의 전 시간을 드려서 복음을 전하고 싶었습니다.  복음 전도에 대한 불타는 마음을 견디지 못해서 의사를 그만두고 신학을 해서 마침내 목회에 헌신하게 됩니다.  더 이상 돈은 벌지 못합니다.  인간적인 의사로서의 대접도 받지 못합니다.  그렇지만 그는 풀타임으로 전도할 수 있다는 사실 때문에 너무 기쁘고 감사해서 그의 첫 부임지인 콜로라도 덴버의 한 작은 교회에 목사로 부임하면서 그는 취임예배에서 취임설교 대신에 이 찬송을 불렀다고 합니다.

"우리가 지금은 나그네 되어도 화려한 천국에 머잖아 가리니
이 세상 있을 때 주 예수 위하여 끝까지 힘써 일하세
주 내게 부탁하신 일 천사도 흠모하겠네
화목케 하라신 구주의 말씀을 온 세상 널리 전하세."

그런데 캐슬이 이 교회에 목사로 부임한지 한 달이 채 되지 않아서 부인이 교통사고를 당해서 세상을 떠나가게 됩니다.  누군가가 장례식에 와서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목사가 되신 것이 후회가 되지 않으십니까?
목사가 안 되시고 의사 하셨으면 이런 일이 없었을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때 캐슬의 대답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제가 취임사 할 때 불렀던 찬송가가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지금은 나그네 되어도' 이 찬송을 제가 썼지만 제 아내가 작곡을 하면서 제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잠깐 지나가는 나그네 길에 당신이 이렇게 행복하게 전도하는데 그 행복한 전도자의 동역자가 된 행복을 말로 다 할 수가 없다.  난 너무 행복하다.  내가 당신보다 앞서 이 세상을 떠나가는 일이 있다고 할지라도 나는 천국에서 당신의 전도사역을 열심히 응원할 것이라고.  나는 영원히 당신의 동역자라고.  지금도 내 아내는 그런 말을 하고 있을 겁니다."

그러면서 그분에게 내 아내가 사고 나던 그날 밤도 한 영혼이라도 전도하기 위해서 가다가 사고가 났다고 했습니다.  저는 그것이 사고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한 영혼을 전도하기 위해서 제 아내는 자신의 가장 소중한 생명을 하나님 앞에 드린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리고 캐슬 목사님은 자기 아내의 장례식에서 마지막에 온 교우들에게 이 찬송을 함께 불러줄 것을 부탁했다고 합니다.

한 영혼을 전도하기 위해서 가다가 사고를 만나 그 영혼을 드리는 이 아름다운 여인의 장례식에서 온 교인들이 이 이야기에 감동을 받으면서 함께 찬양을 불렀습니다.

"우리가 지금은 나그네 되어도 화려한 천국에 머잖아 가리니
이 세상 있을 때 주 예수 위하여 끝까지 힘써 일하세
주 내게 부탁하신 일 천사도 흠모하겠네
화목케 하라신 구주의 말씀을 온 세상 널리 전하세."

사랑하는 여러분,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당당한 사명자의 모습입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하나님 앞에서 사명자로 사시겠습니까, 아니면 방랑자로 사시겠습니까?
내 인생의 목적도 희미한 채로 오늘은 이곳, 내일은 저곳으로, 내가 무엇을 위해서 사는지 알지도 못한 채로 방황하다가 끝내버리는 인생, 방황자의 인생을 사시겠습니까?  아니면 나를 구원하신 주님의 고귀하신 은혜에 대한 응답으로 내 인생을 주 앞에 드리는 전도자의 생애, 사명자의 생애를 사시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모두 함께 꿈을 꾸십시다.  함께 환상을 보십시오.  함께 선언을 하십시오.  함께 예언을 하십시오.  묵시가 없는 집단은 백성을 무너뜨립니다.  꿈이 없으면 혼란과 무질서가 일어납니다.  꿈이 없으면 반역과 방종이 일어납니다.  꿈이 없으면 옳고 그름의 기준이 흔들린 채 얻는 것도 기대할 것도 아무 것도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이 남은 인생을 어떻게, 무엇을 위해, 누구를 위해 사시겠습니까?  하나님을 붙들고 다시 일어나십시오.  사명자로서 성령의 능력을 받으십시오.  그리고 또 다른 주님의 제자를 삼아서 주님의 나라를 세워 가는 전도자의 길을 걸어가시기를 축복합니다. (오주철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