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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아름다운 선택(7) : 평화 (빌 4: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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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운 선택(7) : 평화 (빌 4:6~7)


중세기 이탈리아 산중 높은 곳에 위치한 어느 봉쇄 수도원에 이른 아침부터 누군가가 문을 두드립니다. 사제가 나가보니 무척 피곤에 지쳐 보이는 중년의 사내가 아마 밤새 산을 오른 것 같아 문을 열어주며 묻습니다. “누구를 찾아 오셨나요?” “예, 저는 평화를 찾습니다.” 이 사람이 바로 유명한 신곡의 저자인 단테 알리기에리(Dante Allighieri)입니다. 

그가 쓴 책 신곡은 이런 말로 시작됩니다. “내 인생의 한 중간 눈을 떠서 보니 나는 바른 길을 벗어나 어두운 숲속에 있었다.”이 수도원의 문을 두드리며 마음의 평화를 구하고 있었던 때가 정확하게 그의 나이 40에 접어드는 때였고 그의 인생은 중년기의 방황을 경험하던 때였습니다. 마치 어두운 숲속에 던져진 외로운 참새 같은 영혼이 된 것입니다. 20대에 사랑의 실패를 경험하고, 30대에 자기 고향 피렌체에서 정치에 입문했다가 정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고향에서 쫓겨난 그는 이제 40대 갈데없는 영혼의 방랑자가 된 것입니다.

오늘 단테처럼 마음의 평화를 구하고 계신 분들이 있습니까? 오늘 바울 사도가 바로 그 비밀을 우리에게 가르칩니다. 그는 지금 로마의 감옥에 있었습니다. 사형언도를 받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의 깊은 곳에는 기쁨이 있었고, 평화가 있었습니다. 감옥이 빼앗아 가지 못한 평화, 그를 매고 있는 쇠사슬도 앗아갈 수 없었던, 죽음의 위협도 흔들 수 없었던 평화였습니다. 그리고 그런 평화의 비밀을 지금 빌립보 교회의 식구들에게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가르치는 이 평화는 궁극적으로 예수님이 그를 따르는 제자들에게 약속하신 평화였습니다. 

요14:27의 말씀입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이 평안이 있었기에 예수님은 갈릴리 바다의 풍랑 속에서도 단잠을 주무실 수 있었습니다. 우리 마음에 이런 평안을 누리며 사는 비밀은 무엇일까요?

1.염려를 중단해야 합니다.

본문 6절은 무슨 말씀으로 시작합니까?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그렇습니다. 마음의 평화를 얻으려면 마음의 염려에서 먼저 해방되셔야 합니다. 여기 ‘염려’라는 단어는 본래 희랍어로 ‘merimnao''라는 말인데 ’merizo''(나누다, 찢다)라는 단어와 ‘nous''(마음)이라는 단어의 합성어입니다. 우리는 하루 하루 일상을 살아가며 얼마나 많은 일들로 마음을 찢기며 살고 있습니까? 

영성학자들은 이런 마음을 <분심>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이 분심이 바로 여러 가지 염려로 ‘찢겨진 마음’인 것입니다. 눅10:41에 보면 예수님을 집에 맞이한 마르다가 예수님을 섬기기 위해 식사 준비를 하다가 이 분심에 빠졌습니다. 이 대목을 읽어 보실까요? “주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여기 사용된 염려라는 단어가 본문과 동일한 ‘merimnao''입니다. 그런데 이런 염려에서 해방되려면 우선 염려를 그쳐야 한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많은 경우 염려한다고 해서 해결되는 문제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마태6:27의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보실까요?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키를 한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 그렇다면 차라리 염려를 그치는 것이 신상에 좋지 않겠습니까? 최근 미국 캔사스 시티의 한 200명 모이는 교회에서 시작하여 미국과 전 세계를 강타하고 있는 <불평없이 살아보기>운동에 대하여 들어 보셨습니까? 

이 운동의 시작 동기는 단순합니다. 윌 보웬(Will Bowen)이란 목사가 목사이면서도 늘 불평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자신이 너무 측은해 졌습니다. 그래서 기도 중에 불평한다고 나아질 상황이 아닌데도 불평하는 자신을 한번 바꾸어 보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불평할 때마다 보라색 고무밴드를 손목에 차고 있다가 오른 팔목에서 왼 팔목으로 왼 팔목에서 다시 오른 팔목으로 옮기는 일을 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점차 불평과 염려에서 벗어나며 자신의 삶의 마당이 변화되는 놀라운 기적을 경험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비생산적인 염려의 노예가 되어 인생을 살고 있는지요? 그래서 이런 풍자적인 유머가 생겨났습니다. 어떤 어머니가 아들을 군대에 보내놓고 주야로 염려하는 모습을 보고 누군가가 찾아가 위로 한답시고 이런 익살스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댁의 아들은 앞으로 둘 중에 하나가 될 것입니다. 후방에 배치되거나 아니면 전방에 배치될 것입니다. 후방에 배치되면 별로 염려하실 필요가 없으실 것이고 전방에 배치되면 조금은 염려가 되시겠지요. 그러나 전방에 배치되어도 둘 중의 하나가 될 것입니다. 전방에서도 위험한 곳이나 덜 위험한 곳에 배치될 것입니다. 덜 위험한 곳에 배치되면 염려 하실 필요가 없으실 것이고, 위험한 곳에 배치되면 조금은 염려가 되시겠지요. 

그러나 위험한 곳에 배치되어도 둘 중에 하나가 될 것입니다. 부상당하거나 부상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부상당하지 않으면 염려하실 필요가 없고 부상당하면 조금은 염려가 되실 것입니다. 그러나 부상당해도 둘 중의 하나가 될 것입니다. 회복되거나 죽거나 할 것입니다. 회복되면 염려하실 필요가 없을 것이고 죽으면 더 이상 염려해 보아도 정말 소용없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제발 염려랑 마시고 사시지요”했다고 합니다. 물론 지어낸 유머이겠지만 일리는 있지 않습니까? 염려가 문제 해결에 도움이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일단 염려를 중단하십시오.


2.염려를 기도로 바꾸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6절 말씀을 다시 읽겠습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여기서 대조적인 두개의 단어는 “아무것과 모든 일”(영어로 nothing과 everything)입니다. Nothing-염려하지 말고, Everything-기도하고 간구하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염려할 모든 일을 기도할 모든 일로 바꾸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염려 할일이 기도할 일이라는 것입니다. 염려해도 아무 변화가 일어나지 않지만, 기도는 변화를 약속합니다. 무엇보다 기도하는 이들에게는 성경은 하나님의 평화를 약속하십니다. 

본문 7절입니다.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표준 새 번역은 이 부분을 이렇게 옮겼습니다. “그리하면 사람의 헤아림을 뛰어넘는(사람으로는 감히 생각할 수도 없는-공동번역)하나님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지켜 주실 것입니다.” 

한 영성학자는 이런 상태를 일체의 물결이 잔잔해진 고요한 호수에 비유했습니다. 잔잔하고 평화로운 호수 가에 서면 호수 깊은 곳 까지 다 투명하게 들여다보입니다. 하나님의 평화가 임한 마음이 그와 같다는 것입니다. 그의 마음은 더 이상 동요하지 않습니다. 염려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도 마음의 깊은 평화를 누립니다. 그리고 그는 잔잔한 호수를 들여다보듯 내 마음 깊은 곳을 헤아려 지혜롭게 마음을 다스립니다. 그리고 이런 이들은 인생의 위기를 기회로 바꾸어 살아갑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평화가 지키는 마음의 역동 상태입니다. 이런 평화가 그립지 않으신가요? 이런 평화가 갈망되지 않으시나요?


3.평화의 하나님을 나의 마음에 영접해야 합니다.

오늘의 본문은 만일 우리가 염려를 중단하고 염려 할 모든 것을 기도할 모든 것으로 바꾸어 살아간다면 7절에서는 하나님의 평화가 우리 마음을 지킬 것이라고 약속합니다. 그런데 약속은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평화>보다 더 좋은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평화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평화’는 하나님의 선물이지만 평화의 하나님은 평화를 주시는 하나님 자신이십니다. 

여러분, 제가 아버지로서 저의 아들에게 주는 선물이 더 중요할까요? 제가 제 아들의 아버지가 되어 준다는 것이 더 중요할까요? 그렇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염려를 기도로 바꾸어 하나님의 평화를 경험하는 자들에게 그 평화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함께 할 것이라고 약속합니다. 이것은 더 좋은 약속이 아닌가요? 빌4:9입니다.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그 평화의 하나님이 함께 하는 삶의 시작은 그분을 보여주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신 그분의 아들을 내 마음에 나의 하나님, 나의 구주로 영접하는 일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그분이 탄생하기 700년전에 그분의 탄생을 예언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사9:6) 그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탄생하던 밤, 하늘의 천사들은 그의 나심을 이렇게 노래하지 않았습니까?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눅2:14)고. 그가 십자가로 가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평화를 잃어버린 원인이 우리의 죄, 우리의 욕심인 것을 아셨기에 그 죄 ,그 허물을 짊어지시고 우리가 받을 저주를 대신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그가 우리의 죄의 자리에 오셔서 죽으심으로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담은 허물어지고 우리는 평화의 하나님을 마음에 모시고 하나님의 평화를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엡2:14을 보십시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그래서 예수가 우리의 평화가 되신 것입니다.

마리온 라인버거(Marion Lineberger)라는 이스라엘 선교사가 있었습니다. 그를 통해 예수를 믿은 유대인 대학생의 간증을 읽은 일이 있습니다. <나는 사실 기독교 선교를 파괴할 목적으로 선교사님에게 접근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신임을 얻어 그와 함께 일하고 그와 함께 여행하고 그와 함께 잠을 자면서 나는 그가 내게 없는 것을 가지고 있는 것을 알아차리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평화였습니다. 그리고 나는 그 평화의 근원이 메시아되신 예수아임을 알게 되었고 마침내 나는 그를 영접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가 지닌 동일한 평화를 갖게 되었습니다.> 

저는 오늘 단테의 이야기로 설교를 시작했습니다. 나이 40이 되어 수도원을 찾았던 그는 새롭게 성경을 읽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성경이 증거하는 예수님을 자신의 구주와 주님으로 받아드리게 됩니다. 그리고 그의 나이 43세가 되던 해 붓을 들어 무려 13년간에 걸쳐 써내려간 책의 이름을 신곡(Divine Comedy, La Divina Commedia)이라 명명하게 됩니다. 더 이상 인생은 비극이 아니라 위대한 희극, 기쁨과 평화의 서사시인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나는 숲속에서 길을 잃었다>로 시작한 그의 고백이 무엇으로 마무리 되는지 아십니까? <나는 행복하다.나는 자유하다.나는 참으로 완벽하게 고요한 평화를 맛보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영원한 평화의 시작이었다.> 유대인 대학생이 찾은 평화, 시성 단테가 찾은 이 평화를 오늘 선물로 받지 않으시겠습니까? 기도하십시다. (이동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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