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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리스도인 삶의 영적인 차원 (창 30:3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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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 삶의 영적인 차원 (창 30:37~43)


야곱은 성경적으로 아주 중요한 인물이었지만 성직자는 아니었습니다. 그가 예배를 인도했다거나 설교를 했다거나 성도들을 거느렸다는 언급이 성경에는 없습니다. 오늘날로 치면 야곱은 사업가와 같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 당시 사람의 재산은 양이나 염소 이것을 얼마나 소유하느냐에 좌우되었기 때문에 오늘날의 현금 ․ 주식 ․ 부동산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로 치면 야곱은 돈이 많은 사업가와 같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야곱의 삶에는 매우 영적인 차원이 존재했습니다. 야곱을 야곱 되게 만든 것이 바로 이러한 영적인 차원이었습니다. 그의 인생의 중요한 순간마다 영적인 경험을 했습니다. 벧엘에서 꿈을 꿀 때도 그랬고 얍복 강가에서 천사와 씨름할 때도 그랬습니다. 야곱이라는 개인을 보면 좀 이기적이고 허물이 많은 인간이지만 그럼에도 그가 중요한 신앙적인 인물이 될 수 있었던 비결은 그에게 이러한 영적인 차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을 설교 본문으로 채택한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이 본문은 설교시간에 흔히 듣는 구절은 아니에요. 야곱이 자기 삼촌 라반의 집에 가서 이십년 동안 머슴살이를 합니다. 이제 그는 자기의 미래를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남의 집에 영원히 머슴으로 살 수도 없고 이제 자기도 자신의 가문을 일으키고 뭔가 자기 소유가 있어야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삼촌과 계약을 맺습니다. ‘내가 삼촌의 양무리를 치는데 그 양 중에 아롱지고 점이 있고 검은 양은 저에게 주시고 그렇지 않고 흰털 양은 삼촌이 것이 되게 하소서’ 삼촌이 그 말을 듣고 양떼를 보니까 대부분이 다 흰털을 가진 양이라서 그렇게 하자 약속을 합니다. 

그런데 야곱이 나뭇가지를 가져다가 껍질을 벗겨서 흰 무늬를 내고 그 나뭇가지를 양떼가 물 먹는 곳 앞에다 두어서 양떼가 서로 짝짓기를 할 때 그 나뭇가지를 보게 만들었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희한하게도 그 무늬가 있는 나뭇가지를 보고 짝짓기를 한 양들이 전부 다 아롱지고 얼룩얼룩 하고 점이 있는 새끼를 낳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곱이 많은 양무리를 소유하게 되고 큰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것이 오늘 본문의 줄거리입니다. 

야곱을 축복한 사람은 그 아버지 이삭이지만 야곱이 부자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아버지의 유산을 받아서가 아니고 바로 이 사건을 통해서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오늘 본문의 이야기가 신화적이다, 그럴 리 없다, 미신적이다, 이상하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그렇다면 뭣 하러 여기에 기록을 했겠습니까. 그렇다면 벧엘에서 하나님이 야곱에게 나타나신 것도 신화라는 얘기입니까. 또 야곱이 얍복 강가에서 천사와 밤새도록 씨름한 것도 신화라는 얘기입니까. 

그것보다는 야곱의 삶에 존재했던 영적인 차원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우리의 삶에도 영적인 차원이 있기를 바라고 예수를 믿는 사람이라면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 모르지만 그의 삶에 과학적으로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신비한 영적인 면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하고 기도하고 믿음의 능력을 의지하는 게 아닙니까. 그러기 때문에 모름지기 믿는 사람이라면 그의 삶의 영적인 차원을 부인할 수 없는 것이고 그것을 불신한다면 그렇다면 그의 신앙은 거의 무의미한 도덕적인 차원이 돼 버리고 말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에 도덕도 있고 지식도 있고 예절도 있고 이런 모든 것을 갖췄지만 거기에 플러스 다른 방법으로 설명할 수 없는 신비한 하나님의 역사로밖에 설명할 수 없는 그러한 것이 있다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너무 당연한 것입니다마는 그러나 살다보면 그것을 무시하고 간과할 때가 많이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영적인 능력을 의지하여 병을 고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예언을 하기도 하지만 야곱의 경우에는 영적인 능력을 의지하여 부자가 되었습니다. 이것을 오늘 여러분과 생각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몇 년 전에 EQ라는 말이 유행하기 시작한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오랫동안 사람들은 IQ만을 알고 IQ만을 중요하게 여겼지만 EQ, 사람의 지능뿐만이 아니고 사람의 감성, 감성이 얼마나 발달했느냐 감성지수도 중요하다고 인간의 감성적인 발달을 평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지능이 있고 감성이 잇고 영성이 있는데 spirituality, 이 영성을 개발할 필요에 대해서는 우리가 별로 말하지 않습니다. 어느 부모도 자기 자식의 영성을 개발시키기 위하여 학원에 보낸다든가 과외를 시킨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자식의 영성을 개발시켜야 된다고 말하면 아마 대다수의 부모들은 반발한 것입니다. 목사를 시키란 말이냐. 그저 IQ만 발달하고 EQ만 있으면 적당히 세상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러나 적어도 신앙의 삶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영성이라는 것이 불가피합니다. 사람이 책을 읽고 공부를 함으로 그의 지성이 발달하고 또 음악을 듣고 사람들과 어울리고 사랑을 주고받으면서 감성이 풍성해지는 것처럼 예배를 드리고 기도를 함으로 그의 영성이 자라나게 됩니다. 

사람의 영성이 발달하기 시작하기 시작하는 것은 그가 성령으로 거듭난 이후의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 말씀에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고는 하나님 나라를 볼 수도 없고 들어갈 수도 없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진리 ․ 하나님의 말씀 ․ 하나님의 구원 ․ 섭리 이런 모든 것은 영적인 진리이기 때문에 사람이 거듭나기 전에는, 성령의 도움을 받기 이전에는 이런 것들을 이해하지도 못하고 고마워하지도 않고 귀중하게 여기지도 않습니다. 

여러분이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영접할 수 있는 것은 성령의 도우심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알든 모르든 여러분에게는 영성이라는 것이 있고 믿음이 성장한다는 것은 결국은 그 사람의 영성이 더 풍부해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영성이 풍부해지면서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많아지고 또 우리의 영적인 지혜가 발달하고 또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고 하나님의 섭리를 이해할 수 있고 나아가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성령의 능력에 붙들릴 수가 있는 것이고 여기에 성령의 은사가 가능하고 또한 성령의 열매도 마찬가지가 되는 것입니다. 영성이라는 것은 이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영성은 영적인 차원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고 물리적인 부분에도 영향을 줄 수가 있습니다. 기독교가 공산주의 유물론과 다른 결정적인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유물론은 영적인 세계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물질세계만이 전부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물질세계는 영적인 방법으로 만들어졌다고 가르칩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에서 비롯됐다고 가르치는 것이 바로 성경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배를 타고 갈릴리 호수를 건너가시다가 풍랑이 일어났을 때 예수님이 바람과 바다를 꾸짖었다고 했습니다. 어떻게 바람과 바다를 꾸짖습니까. 꾸짖으면 알아듣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이 바람과 바다 앞에서 꾸짖었더니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어요. 그래서 바람과 바다가 잔잔해졌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영적인 파워가 물리적인 세상을 지배하는 원리를 말해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믿음을 제자들에게 심어주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 있으면 이 산을 들어 바다에 옮기라 하여도 그리 될 것이고 너희가 믿음으로 구하는 것을 이루리라’ 

우리가 예수님을 모르는 부분이 많이 있는데 예수님을 그저 훌륭한 스승, 또 훌륭한 도덕을 가르친 그런 위대한 인물로만 이해하는 사람은 예수님의 가르침 ․ 예수님의 교훈 ․ 예수님의 정신만을 알고 그것만을 부각시키려고 하지만 예수님에게는 영적이고 신비한 면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일은 이 같은 면을 고려하지 않고는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그런 면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게 바로 병자를 고치고 귀신을 내쫓고 물 위를 걷고 바람을 잠잠케 하고 문둥병자를 깨끗케 하고 심지어 죽은 자를 일으킨 일이에요. 이건 신화가 아니고 이것은 사람들이 상상한 것이 아니고 그것을 부인하면 예수님을 부인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인정하려면 예수님의 말씀뿐만이 아니고 예수님의 행적도 이해해야 됩니다. 

예수님을 예수님 되게 한 것이 바로 예수님의 행적입니다. 예수님 말씀에 ‘내 말을 믿지 못하겠거든 내가 하는 일을 말미암아 나를 믿으라 나의 하는 일이 나를 증거하느니라’고 말씀하셨어요. 예수님이 어떠한 분인지, 예수님의 구원이 어떠한 것인지를 알고 싶으면 예수님의 말씀뿐만이 아니고 예수님의 비유뿐만이 아니고 예수님의 행적을 봐야 되고 그리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알아야만 예수님의 구원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부분적으로 아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예수님을 부분적으로만 경험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예수님을 알려면 제대로 알아야 됩니다. 어느 선교단체의 모토처럼 우리 인생의 목적은 예수님을 알고 예수님을 남들에게 알리기 위한 것입니다. To know Christ and to make him known- 그리스도를 알고 그리스도를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한 것입니다. 둘 다 어려운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는 알지만 그리스도를 알리는 것에 대해서는 주저한다, 천만의 말씀. 

그리스도를 알리지 못하는 사람은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아는 만큼 남에게 알릴수가 있는 것이고 자기가 은혜를 받은 만큼 남들에게도 은혜를 끼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나의 믿음의 분량만큼 남들을 섬길 수가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믿음이 사랑으로 역사하는 것이기 때문에 믿음의 분량만큼 사랑도 실천할 수 있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는데 사랑을 실천한다는 것은 그건 이론입니다. 믿음의 분량만큼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핍박하고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까지도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는 큰 믿음, 온 세상을 구원할만한 믿음을 가지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 풍성함으로 우리가 살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래서 유물론적인 세계관을 가진 사람은 기도를 하지 않습니다. 기도를 하는 사람은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영적인 세계가 존재해서 그것이 우리의 물질 세상에 영향을 준다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믿음을 예수님이 강조하셨는데 한번은 예수님이 시장하셔서 먼데 무화과나무가 있는 것을 보시고 열매가 있는가 하여 가까이 가보셨더니 잎사귀만 무성하고 열매가 없었다고 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신기한 일을 하셨습니다. ‘다시는 사람들이 네게서 열매를 먹지 못하리라’고 그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셨습니다. 그랬더니 그 다음날 보니까 그 나무가 뿌리로부터 말랐다고 했습니다. 제자들이 그것을 보고 기이히 여겨 예수님께 말씀을 드렸더니 예수님 말씀이 ‘만일 너희가 믿음이 있고 의심치 아니하면 이 무화과나무에 된 일만 할뿐 아니라 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지우라 하여도 될 것이요 너희가 기도할 때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영적인 권세를 저주하는 데에는 단 한번 사용하셨습니다. 그리고 무화과나무를 왜 저주하셨느냐. 무화과나무가 상징하는 것이 이스라엘입니다. 그러므로 무화과나무가 열매 맺지 못한 것은 이스라엘이 열매 맺지 못한 것을 예수께서 심판하신 것이라고 보면 됩니다. 나머지는 예수님께서는 사람을 구원하고 고치고 살리고 축복하는 데에 이러한 권세를 사용하셨습니다. 

제가 대학을 다닐 때 출석하던 미국인 교회가 있었습니다. 이 교회는 캠퍼스 가까이 있는 교회가 아니었어요. 차를 타고 한 30분을 가야 있는, 멀리 있는 교회였는데도 불구하고 저희 대학에서 많은 학생들이 그 교회를 출석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된 연유가 있었습니다. 그 교회 목사님이 환상 중에 어느 거인이 버티고 서서 한 발로는 산을 딛고 한 발로는 바다를 딛고 그 대학교 캠퍼스에 입에서 더러운 것을 토해내는 환상을 봤어요. 그때부터 그 목사님과 교인들이 거인을 대적하는 기도, 그리고 그 캠퍼스를 위해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후로부터 그 학교에서 그 교회로 학생들이 출석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하나의 미니 영적 부흥이 일어난 것입니다. 

아마 여러분에게는 꿈같은 이야기로 들릴지 모르지만 영적인 차원에서 하는 일이 실제적인 차원에 영향을 미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그런 말씀을 하셨어요. ‘강한 자-strong man, 강한 자가 무장을 하고 집을 지킬 때는 그 소유가 안전하되 더 강한 자가 와서 저를 이길 때에는 저가 믿던 무장을 빼앗고 그 재물을 나누느니라’ 더 강한 자, 여기에서 strong man-강한 자는 마귀를 뜻하는 것입니다. 마귀가 무장을 하고 세상 사람들의 영혼을 자기 것으로 주장을 하고 있었어요. 

여기에 모든 사람들이 붙들려있고 다 종처럼 그 밑에서 꼼짝하지 못했는데 더 강한 분이 오셨어요. 그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더 강한 분이 오셔서 이 strong man을 이겼어요. 그리고 그의 무장을 빼앗고 붙들려 있던 영혼들을 예수님이 당신의 것으로 취하신 것입니다. 사람이 구원을 받고 가정이 구원을 받고 나라가 복음화 되고 영적인 부흥이 일어나고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돌아올 수 있는 비결은 바로 이것입니다. 

강한 자가 붙들고 있기 때문에 더 강한 자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저를 이겨야 됩니다. 그래야 그의 무장을 해제하고 재물을 나눌 수가 있습니다. 여기에서 재물이라 함은 사람의 영혼을 말할 수도 있고 또 영적인 부흥을 말할 수도 있고 물질적인 재물을 말할 수도 있습니다. 야곱은 이러한 원리를 이해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사용해서 부자가 되었습니다. 

이 원리, 야곱이 알고 있었던 이 원리가 무엇이냐. 이것을 설명하자면 첫째, 합심의 원리입니다. 야곱이 자기 삼촌과 합의를 했어요. 이 두 세 사람이 합심한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어떤 역사가 일어나기 위해서는 합의가 있어야 됩니다. 두세 사람이 뜻을 같이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바라봄의 원리입니다. 나뭇가지 껍질을 벗겨서 양들 앞에 두니까 양들이 물을 먹고 거기서 짝짓기를 할 때 그걸 바라보니까 바라본 대로 새끼를 낳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도 어느 정도는 알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태교의 원리입니다. 임산부는 좋은 것만 보고 좋은 것만 듣고 좋은 생각만 해야 좋은 아기를 낳는다, 이미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이지요. 

바라봄의 원칙.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장막 밖으로 이끌어서 하늘의 별을 보게 하셨죠. ‘하늘의 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너의 후손이 이와 같으리라’ 그래서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하나님이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그의 믿음대로 되게 하셔서 아브라함의 후손이 하늘의 별처럼 많아지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을 바라보느냐 이것이 정말로 중요합니다. 바라봄. 

그리고 세 번째는 뜻을 정하는 원리입니다. 이게 첫 번째라고 볼 수 있지만 야곱이 내가 나의 가문을 세워야 되겠다는 뜻을 정한 것이 하나님의 역사를 가능하게 만든 것입니다. 뜻을 정해야 됩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 젊은이들은 취업하기가 힘들다, 기회가 없다고 불평만 하지 말고 정말 자기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 뜻을 정해야 됩니다. 자기가 뭘 하고 싶은지 알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기회가 없다, 문이 열리지 않는다고 말할 수가 없는 것이지요. 자기가 뭘 하고 싶은지 먼저 뜻을 정해야 됩니다. 

그것이 분명할수록 이루어질 수 있는 가능성이 더 많아집니다. 분명할수록 그것이 이루어질 수 있는 가능성이 더 많아집니다. 이것이 비결이에요. 요즘 인터넷 상에 보면 시크릿이라고 옛날부터 부자들이 알고 있었던 비밀이라는 강의, 책 이런 것이 돌아다니던데 저는 관심도 없습니다. 만약에 그런 비밀이 정말로 존재한다면 성경에서 훔친 것일 것입니다. 야곱은 그 원리를 알고 있었습니다. 우리도 그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복을 받는 것은 별게 아니에요. 하나님을 가까이 하면 복을 받습니다. 하나님은 복을 주시는 분입니다. 복을 주시는 분을 가까이 하면 당연히 복을 받습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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