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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이 주시는 마음 (딤후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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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주시는 마음 (딤후 1:7)   
  

<실체가 없는 두려움, 인간의 조건>

동물학교에서 소풍을 갔습니다. 엄마 토끼가 자기 아들이 도시락을 가져가지 않은 것을 알고서는 부리나케 학교로 달려갔습니다. 학교 근처까지 왔을 때 엄마 다람쥐가 헐레벌떡 뛰어오더니만 엄마 토끼에게 부탁을 했습니다. "우리 아들이 도시락을 놓고 갔는데 이 도시락 좀 전해주세요." 엄마 토끼는 자기 아들에게 도시락을 갖다 주는 김에 기꺼이 그렇게 하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엄마 토끼의 고민이 하나 생겼습니다. 그 집 다람쥐 아들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으므로 어떻게 생겼는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내가 얼굴을 모르는데 댁의 아들을 어떻게 찾지요?" "하나도 어렵지 않아요. 학교에서 제일 잘 생긴 아이를 찾으면 되니까요." 토끼는 자가 아들을 찾아 도시락을 전해준 뒤, 다람쥐를 찾으려고 했지만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집에 돌아오는 길에 다람쥐에게 도시락을 되돌려주면서 말했습니다. "죄송해요. 어쩔 수 없었어요. 아무리 눈을 씻고 찾아봐도 댁의 아이가 누구인지 알 수가 없었어요. 왜냐하면 우리 집 아이보다 더 잘 생긴 아이는 없었거든요." 그리스의 민화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고슴도치도 제 자식은 귀엽다고 했습니다. 세상에 자기 자식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 부모는 하나도 없습니다. 살인마 강호순도 자기 자식 이야기만 나오면 고개를 떨어뜨린다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도 하나님께서 세상에 둘도 없이 귀하게 여기십니다. 하지만 우리가 예수님을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할 때가 가끔 있습니다. 하나님은 다른 사람들은 다 사랑하시지만 나는 별로 사랑하실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을 합니다. 이런 생각은 잘못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십니다. 나의 형편이 어떠하든지 간에 하나님은 한결같이 나를 사랑하십니다. 이것을 믿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우리를 사랑하고 계심에도 불구하고 우리 마음에는 문득문득 두려움이 생깁니다. 그런데 두려움에는 실체가 없습니다. 어떨 때에는 아무 근거도 없이 막연한 두려움이 우리를 괴롭힙니다. 모든 것이 너무너무 잘 되고 있을 때 혹 누군가 나의 행복을 시기해서 나의 행복을 빼앗을 것만 같을 때가 있습니다. 이와 같이 나의 존재에 항상 따라붙는 불안을 '존재론적 불안'(ontological anxiety)라고 했습니다. 이 세상에 두려움 없는 사람은 딱 두 부류밖에는 없습니다. 죽은 사람들과 정신 이상자들이지요. 그러므로 살아있고 제 정신인 사람들은 반드시 두려움을 느끼게 되어 있습니다. 

<두려움에 대한 바울의 처방전>

오늘 이 자리에 나오신 여러분들도 갖가지 두려움과 불안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마음은 하나님이 주시는 마음이 아닙니다. 우리의 마음은 두 가지 중에 하나일 터인데 하나님이 주시는 마음이든지 아니면 마귀가 주는 마음이든지 하나일 것입니다. 바울이 말하는 '두려워하는 마음'이란 '소심함'(timidity), '비겁함'(cowardice) 등의 의미를 갖고 있는데 단지 그런 마음의 상태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어떤 도전 앞에서도 두려워 떠는 연약한 자세나 행동으로 이어진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지면 작은 문제 앞에서도 벌벌 떨면서 소심하고 비겁한 태도를 보이게 되는데 이런 마음은 결코 하나님이 주시는 마음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두려움의 실체를 조금 더 설명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봉독한 디모데 후서 말씀은 로마 감옥에 두 번째로 투옥된 바울이 젊은 후배 동역자 디모데에게 준 권면의 말씀입니다. 감옥에 갇혀서 순교의 각오를 다지던 바울은 두려움에 떨고 있는 디모데를 격려하기 위해서 이 편지를 썼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디모데가 당면하고 있었던 두려움의 실체는 무엇이었겠습니까? 

아무래도 믿음의 아버지요 영혼의 대스승이었던 바울의 투옥이 젊은 목회자 디모데를 크게 위축시켰을 것입니다. 아무리 믿음이 좋다고 해도 디모데 역시 연약한 인간이었기에 바울이 당한 불행으로 크게 슬럼프에 빠져 있었을 것입니다. 디모데는 바울처럼 감옥에 갈 수도 있습니다. 극단적인 경우에는 죽을 수도 있습니다. 이와 같이 고난과 순교에 대한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었던 디모데에게 용기를 주고자 바울은 이 편지를 썼던 것이지요. 

이제 바울의 투옥으로 크게 낙심했던 디모데를 생각하면서 본문 말씀을 다시 한 번 읽어봅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 다시 한 번 기억합시다. 우리에게 두려워하는 마음이 생길 때마다 이것은 결코 하나님이 주시는 마음이 아닙니다.

한국 천주교회 역사에 있어서 가장 먼저 순교당한 신부는 김대건 신부님입니다. 김대건 신부님이 순교당할 당시의 상황을 보면 참으로 절박했습니다. 아버지는 이미 순교를 당했고 어머니는 문전걸식을 하면서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녔습니다. 김대건 신부님이 정말 효자요 가정을 조금이라도 생각하는 분이었다면 순교할 형편이 아니었지요. 육신의 어머니를 돌봐야 마땅했습니다. 

게다가 교회적으로도 이미 200여명의 교우들과 세 분의 선교사님들이 순교를 당했기 때문에 김대건 신부님 한 분만이라도 살아서 교회의 명맥을 유지해야 할 판이었습니다. 그런데다가 정부 관리들이 신앙을 버리고 배교하면 큰 벼슬자리를 주겠다고 유혹했습니다. 또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하지만 김대건 신부님은 이런 모든 두려움과 유혹을 이겨내고 순교의 길을 걸어갔습니다. 인간적인 뜻보다 하나님의 뜻이 더 중요했기 때문이지요. 

두려워하는 마음이 하나님이 주시는 마음이 아니라고 한다면 하나님이 주시는 마음은 무엇일까요? 

첫째로, 하나님이 주시는 마음은 능력(dynamis)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의 능력은 다이너마이트가 산을 가르고 바위를 쪼개는 것과 같은 폭발적인 힘을 말합니다. 바울 사도가 능력이라는 말을 쓸 때 이것은 항상 예수님의 '부활'의 능력, '복음'의 능력, 그리고 '성령'의 능력과 관계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사망 권세를 이기는 능력입니다. 복음의 능력은 죄와 사망의 사슬에 묶여있는 인류를 자유와 해방으로 이끄는 능력입니다. 무엇보다도 성령의 능력은 무서워 떠는 겁쟁이 제자들을 두려움이 하나도 없는 사람들로 바꾸어놓았습니다. 

오늘 여러분의 마음속에 두려움이 생기는 분들은 부활의 능력을 믿으십시오! 복음의 능력을 믿으십시오! 무엇보다도 성령의 능력을 믿으시고 성령충만을 받으시길 바랍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할 때 두려움을 이길 수 있습니다. 마귀가 가져다주는 마음은 두려운 마음이지만 하나님의 영이 주시는 마음은 능력입니다. 담대함입니다. 

영국의 어떤 감독이 큰 집회에 설교 부탁을 받았습니다. 여러 주 동안 이 감독은 설교를 하겠다 않겠다 가부간에 아무 연락도 주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이 집회의 총무가 그 감독에게 급한 편지를 보냈습니다. "설교를 하실 것인지 안 하실 것인지 알려주셔야지만 저희가 집회를 준비할 수 있습니다. 빨리 가부(可否)를 알려주십시오!" 

편지를 받은 감독이 답장을 보냈습니다. 자기는 현재 그 곳에서 설교를 할지 안 할지 성령의 인도하심을 기다리고 있는 중인데 4주 후에 결정해서 알려주겠노라고 썼습니다. 이 답장을 받은 총무는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다음과 같은 편지를 그 감독에게 즉시 보냈습니다. "감독님, 이제 설교 건에 대해서는 잊어버리십시오. 감독님을 우리 집회에 초청하는 것을 취소합니다. 우리는 4주 동안이나 성령님으로부터 떨어져 사는 사람을 우리 집회에 초청해서 설교하도록 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성령은 바람이 임의로 불고 싶은 대로 자유롭게 불듯이 자유롭고 급하게 역사합니다. 시간을 정해 놓고 순서대로 불어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언제 어느 때나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함을 받을 때 우리는 두려움을 이길 수 있습니다. 지금 바로 이 시간에 성령충만을 받으십시오! 성령께서 여러분의 두려움을 쫓아주실 것입니다! 

둘째로, 하나님이 주시는 마음은 사랑(agape)이라고 했습니다. 우리 마음속에 사랑이 사라지면 이상하게 두려움이 찾아옵니다. 누군가를 미워하고 오해하면 내 마음이 불편해질 뿐 아니라 두려움이 생겨납니다. 그래서 요한일서 4: 18절을 말씀합니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쫒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십시오! 신기하게도 두려움이 사라지는 것을 발견할 것입니다. 

셋째로, 하나님이 주시는 마음은 절제하는 마음(sophronismos)이라고 했습니다. 자기통제(self-control)를 말하는 것이지요. 근신하고 신중해서 함부로 행동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사람의 마음속에 두려움이 가득 차면 절제력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두려움을 두려워한 나머지 과식, 과음에 빠지기도 하고 도박과 향락에 빠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성령이 우리 안에 들어오시면 우리는 절제하게 됩니다. 

누구에게나 두려움이 있습니다. 하지만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믿는 주님은 두려움보다 훨씬 더 크신 분입니다. 설령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두려움이 우리를 괴롭힌다고 할지라도 주님이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마귀는 우리에게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져다주지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을 주십니다. 

<두려움을 주께 맡겨라>

타조는 사자가 뒤쫓아 올 때 시속 70 킬로미터로 도망을 치다가 모래 속에 머리를 처박습니다. 자기 머리를 모래 속에 집어넣어서 사자가 눈앞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위험이 사라진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그런 방법으로서는 두려움을 이길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 6: 26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또한 마 6: 31절에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확실히 우리의 염려나 두려움보다 훨씬 더 크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염려와 두려움을 다 맡아주실 만큼 위대한 분이십니다! 그래서 사 41: 10절에서 확실히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이와 같이 성경에는 무려 58 차례나 하나님께서 "두려워 말라"고 말씀하신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두려움이 생길 때마다 그 두려움을 주님께 맡기십시오! 여러분의 두려움보다 훨씬 더 크고 위대하신 하나님께서 그 모든 두려움을 해결하여 주실 것입니다! 벧전 5: 7절의 말씀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 

그렇다면 하나님께 염려를 다 맡기라고 했는데도 여전히 염려를 우리 마음속에 담아두는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미 염려나 두려움보다 훨씬 더 크신 하나님께서 다 해결해주셨는데 그 염려나 두려움을 여전히 우리 마음속에 품고 있기 때문입니다. 

옛날 일본에 두 사람의 스님이 진흙탕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비가 온 다음에 땅이 질게 되어서 걷기가 무척 힘이 들었습니다. 꼬부라진 길에 이르렀을 때 두 사람은 비단 키모노를 입은 기가 막히게 예쁜 처녀를 하나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 처녀는 아주 고운 옷을 입고 있었기 때문에 진창길을 건너지 못하고 쩔쩔 매고 있었습니다. 탄잔이라는 스님이 이 처녀를 두 팔로 덥석 안고서는 흙탕물을 지나 맨 땅으로 옮겨다 주었습니다. 이 광경을 옆에서 지켜 본 에키도라는 스님은 그 날 밤 목적지인 절에 도착하기까지 한 마디도 말하지 않은 채 기분이 몹시 상해 보였습니다. 

마침내 에키도가 입을 열었습니다. "탄잔 스님, 우리 중들은 절대로 여자를 가까이 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잘 알지요? 그런데 당신은 오늘 젊고 아리따운 아가씨를 두 팔로 안았지요? 이것은 분명히 불계(佛戒)를 어긴 것이 됩니다!" 에키도의 꾸짖는 소리를 들은 탄잔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저는 그 처녀를 이미 그 곳에다 내려두고 왔기 때문에 다 잊어버렸습니다. 그런데 스님은 아직까지도 그 처녀를 마음속에 품고 있는가보죠?" 탄잔은 이미 그 처녀를 다 잊어버렸는데 에키도만 여전히 그 소녀를 마음속에 품고 있었던 것이지요! 

여러분, 누가 불도(佛道)가 더 높아서 음욕(淫慾)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입니까? 탄잔이라는 스님이 아니겠습니까?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염려를 다 맡아 주신다고 약속하셨는데도 여전히 염려 속에 빠져 있다면 우리가 꼭 에키도와 같은 사람일 것입니다. 

디모데는 아마 기독교 역사상 가장 위대한 목회자 중에 한 사람일 것입니다. 그는 유럽에 교회가 최초로 세워졌을 때 바울을 도왔습니다. 그리고 마게도니아와 그리스에 교회를 세웠으며, 데살로니가 교회와 에베소 교회, 고린도 교회에서 목회했습니다. 바울이 로마 감옥에 첫 번째로 투옥되었을 때 바울 옆에 있었으며 그 후에는 그 당시 가장 큰 교회였던 에베소 교회를 맡아 섬겼습니다. 그리고 바울이 세상을 떠났을 때 역시 끝까지 바울 곁을 지켰습니다. 전설에 의하면 디모데는 로마의 도미티아누스 황제 때 순교 당했다고 합니다. 젊고 소심하고 두려움을 잘 타던 디모데가 장렬한 순교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에게 있는 일체의 두려움을 주님께 맡기십시오. 주님께서 여러분을 강하고 담대하게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두려움은 하나님이 주시는 마음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마음은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입니다. 성령님께 여러분의 마음을 맡기십시오. 성령께서 여러분의 마음을 담대하게 만드실 뿐 아니라 능력과 사랑과 절제의 마음을 주실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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