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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의 영원한 주님 (눅 4:1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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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영원한 주님 (눅 4:16~4:30)
  

목사가 되어 오늘까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설교를 했습니다. 제가 장년 설교를 처음 한 것은 신학대학원 1학년말이었습니다. 그 때 12월 첫 주일부터 교육전도사가 되어 떠나게 되었는데, 제가 성장한 교회의 담임목사님께서 가기 전에 설교를 하라고 하셨습니다. 저를 키워주신 분들 앞에서 하는 설교였기 때문에 한편으로는 떨리고, 한편으로는 감격스러웠습니다. 문고리 하나 하나에 정이 들고 나무 한 그루, 계단 하나 하나에 추억이 서려 있는 정든 모 교회를 떠난 지 어언 26년이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도 저와 비슷한 체험을 하신 것을 보게 됩니다. 어느 안식일에 예수님은 나사렛 회당에 가셨습니다. 나사렛은 예수님께서 자라나신 곳입니다. 예수님께서 탄생하신 후 헤롯왕을 피해 애굽에 가셨지만, 돌아오신 후에는 계속 나사렛에서 사셨습니다. 

그랬던 예수님은 삼십 세 되시던 어느 날 홀연히 그 곳을 떠나셨습니다. 그리곤 소문이 들려왔는데, 예수님이 사람들을 데리고 다니면서 말씀을 가르치는데, 아주 능력이 있고 따르는 사람도 많다고 했습니다. 그 예수님이 나사렛에 다시 왔을 때 사람들은 안식일에 말씀할 것을 청했고, 예수님은 고향 사람들 앞에 서셨습니다. 

그 날 사람들은 어떤 말씀을 기대했을까요? 아마 이런 설교를 기대했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모두 제 가족과 같은 분들입니다. 이 중에는 제가 어렸을 때 저를 사랑해 준 분들도 있고, 저와 같이 성장한 친구들도 있습니다. 저쪽의 시몬도 내 친구고, 그 뒤에 앉은 유다는 우리 뒷집에 살았고, 일찍 결혼한 유다가 아기를 낳았을 때, 내가 튼튼한 나무로 요람을 내가 만들어 준 적도 있지요. 그리고 야곱, 자네 부친은 잘 계신가? 오늘 못 나오셨군.....> 아마 이런 식으로 친근감을 표시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 후에는 <나는 나사렛을 잊을 수 없습니다. 나는 어디 가서나 나사렛 사람인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제가 랍비로서 잘 할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그러면서 여러 가지 말씀을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예컨대 착하게 살라, 여호와를 경외하라, 겸손하라, 서로 사랑하면서 살기 좋은 아름다운 마을을 만들라는 등의 말씀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이 끝나면 사람들이 몰려와서 손을 잡고 말할 것입니다. <예수, 자네가 이렇게 훌륭한 랍비가 되다니, 정말 놀랍네. 늘 목수간에서 일이나 할 때는 몰라 봤어, 돌아가신 자네 아버지 요셉이 흐뭇하겠어. 어머니 마리아도 얼마나 기쁘겠는가?> 이런 식으로 칭찬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날 나사렛에서는 이런 보기 좋은 광경은 없었습니다. 오히려 정반대였습니다. 분위기는 살벌했고, 사람들은 흥분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가장 민감한 주제를 선택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날 예수님은 이사야서 61장 1절 이하의 말씀을 읽으셨습니다. 그 내용이 오늘 본문 18절부터 19절까지 나옵니다. 다같이 읽어 보실까요?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이 말씀은 유대인들의 가슴이 깊이 새겨진 말씀이었습니다. 그들은 이 말씀이 이루어지길 학수고대하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들이야말로 이 말씀 속의 고통받는 자라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가난한 자>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로마의 식민지 백성으로서 온갖 좋은 것은 수탈당하고 있었습니다. 

또 그들은 자신들을 <포로된 자>요, <눌린 자>라고 생각했습니다. 오래 전에 그들의 조상은 바벨론에 포로가 된 적이 있었습니다. 그 후 다시 돌아와 예루살렘에 살게 되었는데, 지금은 로마의 식민지 백성으로서 포로나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늘 번쩍이는 창검을 든 로마군대를 수시로 보아야 했습니다. 

게다가 자신들이야말로 <눈 먼 자>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의 눈에 눈 도무지 미래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희망이 없어 보였습니다. 

그들은 이런 자신들에게 자유를 주고, 다시 보게 하고, 은혜의 해를 전파할 사람을 기다렸습니다. 자신들에게 정말 기쁜 소식, 복음을 전해 줄 사람이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그 분은 다름 아닌 메시아라고 믿었습니다. 그들은 무려 수백 년 동안 메시아를 기다려왔습니다. 그런데 그 날 예수님께서 읽으신 말씀이 그 말씀이었을 때 그들은 놀랐을 것입니다. <메시아에 관한 말씀을 읽다니, 아마 우리 모두가 힘들어도 낙심치 말고 끝까지 메시아를 기다리자고 말하려는 가 보다>, 이런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입에서 나온 첫 마디는 정말 놀라운 말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귀를 의심했습니다. 도대체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셨기에 이처럼 놀랐을까요? 21절을 보세요. 예수님께서는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고 하셨습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여기 <응한다>는 단어는 성취된다는 뜻입니다. 이 말씀이 그들 앞에서 이루어졌다는 의미입니다.이사야서의 메시아 예언이 지금 성취되었다는 것입니다. 즉 그들 앞에 서 계신 예수님 자신이 바로 그 메시아라는 선언이었습니다. 

이 때 나사렛 사람들의 반응은 어떠하였습니까? 그들은 처음에 예수님의 말씀에 놀라움을 느꼈습니다. 대단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22절을 보면 <그들이 다 그를 증언하고 그 입으로 나오는 바 은혜로운 말을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그 감정이 분노로 바뀌었습니다. 29절을 보면 이들은 예수님을 낭떠러지로 끌고 가서 밀쳐 떨어뜨려 죽이려고 했습니다. 이들이 극도의 분노를 드러낸 것을 보게 됩니다.

여러분, 이들이 왜 이렇게 분노했을까요? 아마 그들은 이런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제법이야. 말을 잘 해. 나는 그와 함께 자란 친구로서 그가 여기서 목수 노릇 할 때보다는 엄청나게 발전했다는 것을 나도 인정해. 그렇지만 어떻게 자신을 메시아라고 말할 수 있단 말인가? 그가 해 준 것은 겨우 우리 아이 요람을 만들어 주고, 우리 밭의 망대를 고쳐 주었지. 그는 목수였어. 지금은 선생이라고 해 두지. 그러나 메시아는 아니야. 저건 신성모독이야. 비록 친구지만 용서할 수 없어!> 

여러분, 여기서 생각해 볼 게 있습니다. 그것은 <왜 예수님은 가장 민감한 주제를 선택하셨는가?> 하는 점입니다. 이것말고도 말씀할 게 많았을 것입니다. 착하게 살아라. 사랑하라, 이런 이야기 얼마나 좋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가장 민감한 주제, 어쩌면 돌을 맞을 수도 있고, 죽을 수도 있는 주제를 선택하셨습니다. 그 결과 예상대로 사람들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은 위험을 감수하면서 이 주제를 말씀했을까요? 

바로 이 부분이 오늘 말씀의 핵심입니다. 여러분,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의 가장 큰 사명이 무엇입니까? 사람들을 계몽해서 착하게 살게 하는 것입니까? 살기 좋은 마을을 만드는 것입니까? 아이들을 잘 키우도록 지도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그 무엇도 아닙니다. 예수님의 가장 큰 사명은 <사람들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그들을 죄악에서 구원하는 것, 죽음에서 구원하는 것, 사단의 손아귀에서 구원하는 것, 그래서하나님의 자녀로 만드는 것, 그것이 메시아로서 예수님의 오신 목적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사람들이 구원을 얻도록 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님 자신을 메시아로, 하나님의 아들로, 구주로 믿게 하는 것입니다. 믿어야 구원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를 메시아로 믿으라. 그래야 구원을 받는다>, 이것을 알려주려고 하셨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어떤 분이기에 구원자가 되십니까? 우리는 예수님께서 읽으신 말씀을 다시 한 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메시아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는 분>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복음을 전하는 자로 그친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복음 자체를 만드신 바로 그 분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리고 못 씻을 죄악이 없는, 이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세척력을 가진 보혈을 쏟으셨습니다. 그리고 죽음과 사단의 권세를 깨뜨리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생명의 길을 활짝 여셨습니다. 그 예수님을 믿으면 누구나 구원을 받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예수님은 복음 그 자체입니다.

또 예수님은 포로된 자, 억눌린 자들을 자유케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귀신에 사로잡힌 영적 포로들, 그리고 질병에 눌린 사람들을 풀어주셨습니다. 가난하고 병든 많은 사람들이 자유를 얻었습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온갖 편견에 사로잡혀 있던 세리와 창기들에게 자유를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어떤 죄인도, 비록 세리나 창기라 하더라도 회개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을 선포하셨습니다. 죄인으로 낙인찍혔던 많은 세리들과 창기들이 예수님으로 인해 해방의 기쁨을 맛보았습니다.

더구나 예수님은 그들의 눈을 여셨습니다. 미래를 보게 하셨습니다. 로마의 식민지로 희망을 잃은 그들에게 새로운 위대한 나라, <하나님의 나라>을 보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선포했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하나님의 나라는 억눌린 백성들에게 로마 제국을 대신할 새로운 미래였습니다.

이 분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그 분을 믿으면 구원을 받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사렛 사람들이 반발할 것을 뻔히 아시면서도 그 주제를 끄집어내셨습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위해서라면 어떤 위험도 감수할 각오가 되어 있었습니다. 

여러분, 즉시 수술하지 않으면 죽을 환자가 있다고 합시다. 그 사람은 예민합니다. 심각하다고 말하면 화를 낼 게 뻔합니다. 그렇다고 의사가 <감기약이나 드세요>라고 말하겠습니까? 아닙니다. 정말 의사라면 멱살을 잡히더라도 말해야 합니다. <당장 수술하지 않으면 죽습니다. 당신의 몸을 내게 맡기세요>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나사렛 사람들에게 <날 믿으라. 내가 메시아다. 너희들이 볼 때는 목수의 아들로 보이겠지만, 내가 바로 메시아다. 날 믿어라> 이게 그 날 말씀의 주제였습니다. 예수님은 고향 나사렛 사람들이 분노할 것을 아시면서도, 가장 중요한 진리, <예수님 당신이 바로 메시아>라는 사실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여기서 우리는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한 질문 앞에 서게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너는 나를 누구라고 믿느냐? 날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여러분, 이 질문에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지스문트 겟치>라는 화가의 <<버림받은 예수>>란 비유적인 그림이 있습니다. 성 바울 대성전의 계단에 예수님이 서 있습니다. 그 주변에 여러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스포츠 신문에 열중한 청년, 휴가여행을 위하여 택시를 잡으려는 남녀, 길을 가면서도 시험관을 들여다보고 있는 과학자, 그러나 아무도 예수가 거기에 서 있다는 사실에 관심을 둔 사람은 없습니다. 신부 서너 명이 둘러서서 팔을 휘두르며 열렬히 토론하고 있지만 예수에게는 신경을 안 씁니다. 오직 간호원 복장을 한 여성 한 사람만이 잠깐 멈추어 곁눈으로 예수님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오늘 이 시대는 예수님께 관심이 없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관심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 분이 어떤 분인지 잘 알지 못합니다. 나사렛 주민들은 요셉과 마리아의 아들, 목수, 이웃집 사람, 친구 정도로 여겼습니다. 그 이상이라고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오늘날도 그렇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성인으로 여깁니다. 훌륭한 스승이라고 여깁니다. 사랑의 모범을 보인 분으로 여깁니다. 도덕 선생님 정도로 여깁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시고 사흘만에 부활하신 우리의 구원자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순종하여 섬겨야 할 주님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왕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해 가실 인도자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사랑해야 할 분입니다.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너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대답하는 데서 시작합니다. 베드로는 대답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도마는 대답했습니다.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구원은 봉사 많이 하고, 착하게 사는 것으로 받는 게 아닙니다. 심지어 목사나 장로나 권사나 집사가 된다고 받는 게 아닙니다. 구원은 예수님을 구주로 믿어서 얻는 것입니다. 구원받는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심지어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해서, 이스라엘의 피가 흐른다고 해서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믿으면 그 믿음을 근거로 세례를 받게 됩니다. 오늘 우리는 세례식을 행합니다. 세례를 받는 분들은 마음으로 <하나님은 내 아버지요, 예수님은 내 구원자요, 주님입니다>라고 믿는 분들입니다. 그렇게 믿게 하는 분은 성령님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신앙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시간 가장 쉽고도 가장 어려운 이 질문에 명백히 답할 수 있길 원합니다.<예수님, 당신은 나의 영원한 주님입니다. 나의 구원자입니다>라고 고백하길 바랍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을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생각하기만 해도 행복하시길 바랍니다.

<어거스틴>이 어느 날 밤 주님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기도하다가 잠이 들었습니다. 그는 꿈속에서 주님을 만났습니다. 주님께서 어거스틴에게 물으셨습니다. <내 아들아, 나에게 무엇을 원하느냐?> 어거스틴은 이렇게 고백했다고 합니다. <아무것도 원하지 않습니다. 다만 주님 당신만을 원합니다!> 우리도 그렇게 되길 원합니다.

<나의 사랑, 나의 생명, 나의 예수님, 영원토록 정성 다해 사랑합니다. 나의 힘 되신 예수님 내가 사랑합니다. 영원토록 정성 다해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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