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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다 나와 같이 되기를 원하노라 (행 26: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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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나와 같이 되기를 원하노라  (행 26:12~18)


우리는 보통 겉 다르고 속 다른 것을 위선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좀 더 고상하게 말하면 일관성의 결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앙인이 욕을 먹는 가장 큰 원인도 이런 일관성의 결여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바울 사도의 일생이 던지는 감동의 하나는 이런 일관성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가 회당에 들어가든 법정에 서든 그의 삶의 모습은 언제나 한결 같다는 것입니다. 그는 지금 예루살렘에서 체포된 후 다시 가이사랴 법정으로 호송되어 2년여에 걸쳐 재판을 받는 죄수의 몸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재판을 받으면서도 그리스도의 증인답게 그가 서 있는 법정조차도 전도의 장으로 삼아 복음을 증거합니다. 새로 부임한 베스도 총독(25:1-취임 3일 만에 재판)과 이번에는 헤롯 아그립바 왕까지 재판 자리에 임한 삼엄한 자리에서 조금도 위축됨이 없이 일개 죄수가 당당하게 오히려 이 권력자들에게 복음을 증거 하는 그 일관성 있는 모습을 보십시오. 

여기 보면 바울의 말을 듣고 있던 베스도 총독이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라고 했습니다. 베스도 총독이 본 바울은 아깝고 답답하고 미친 사람과 같았습니다. 로마 시민권을 가진 자입니다. 공부도 할 만큼 했습니다. 경제적으로도 걱정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자기 앞에 서 있는 초라한 그를 보자, 완전히 미치지 않고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 판단하지 않았겠습니까? 성공 출세를 마다하고, 부귀영화를 마다하고, 고생길을 걷고 있는 바울을 바라본 베스도 총독은 “네가 미쳤다”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결코 미치광이가 아니었습니다. 신약성경 27권 중에 반절이 바울이 쓴 책입니다. 미친 사람이 책을 쓸 수 있습니까? 그가 쓴 편지를 읽어보면 신론, 기독론, 구원론, 교회론, 성령론 등 기독교 신학이 기초부터 결론까지 일목요연하게 기술되어 있습니다. 그는 미친 것도 아니고 정신이 이상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여기 29절에 보면 자신을 미쳤다는 자를 향하여 “바울이 가로되 말이 적으나 많으나 당신뿐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노이다 하니라” 여기 “이렇게 결박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노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묻습니다. 무엇이 그로 하여금 세상이 그를 미쳤다고하고 초라한 그의 모습을 동정하는데도 이렇게 당당할 수가 있는 것입니까? 그는 지금 쇠사슬에 묶여 세상 법정에 서 있지만, 결코 한 순간도 흐트러짐이 없이 하나님의 말씀 앞에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지금 자기 앞에 있는 재판관은 일개 하급판사가 아니라 한 나라의 왕입니다. 바울은 그 재판하는 사람들을 향하여 "당신들도 나처럼 되라"고 외칩니다.(29) 그 사람들처럼 살지 못한 자신의 신세를 한스러워 하거나 불행해 하기는커녕 "당신들도 모두 나와 같이 되라”고 말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저와 여러분이 읽은 본문은 너무도 유명한 사도 바울의 회심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토록 기독교를 핍박하던 사도 바울이 복음을 증거하는 사도가 된 다메섹 사건입니다. 이것이 그의 삶에 너무나도 중요했기 때문에 아마도 사도 바울은 가는 곳마다, 예배 시간마다 자신의 간증을 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 사도행전에만 해도 똑같은 사도 바울의 회심 사건이 세 번이나 나타나 있는데, 오늘 본문과 9장과 26장에 누가가 이 다메섹의 회심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지난 세기를 살펴보면 바울이라는 한 사람의 역할 때문에 세계 역사가 바뀐 것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기독교뿐만 아니라 문화적으로도 그는 엄청난 영향력을 이 인류 역사에 끼쳤던 것입니다. 그는 원래 이 역사를 바꿀만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이 사도 바울의 놀라운 변화를 한 신학자는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사울을 바울로 바꾸셨다! 그리고 바울은 세계 역사를 바꾸었다!' 여기에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습니까? 

여러분, 변화를 원하십니까? 우리 모두는 아마도 마음속 저 깊은 곳에 무언가 변화를 위한 갈망이 있을 것입니다. '내 인생을 이대로 끝내고 싶지 않다. 지금보다는 좀더 나아져야 되는데...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서 나를 사용하시는 정말 위대한 인생을 살 것인가?' 어떻게 하면 우리 인생이 변화될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오늘 사도 바울처럼, 사울이 바울이 됨으로 이 세계사를 바꾼 것처럼 우리도 변화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사도 바울처럼, ‘감옥에 갇힌 것 외에는 자기처럼 되기를 기도한다’ 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까? 

Ⅰ.우리의 삶이 변화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를 향한 집요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아야 한다고 본문은 얘기합니다.(9-12) 지금 바울은 자신이 예수를 믿기 전에 어떤 사람인가를 이야기합니다. 9-12절에 보면 “나도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대적하여 범사를 행하여야 될 줄 스스로 생각하고 10 예루살렘에서 이런 일을 행하여 대제사장들에게서 권세를 얻어 가지고 많은 성도를 옥에 가두며 또 죽일 때에 내가 가편 투표를 하였고 11 또 모든 회당에서 여러 번 형벌하여 강제로 모독하는 말을 하게 하고 저희를 대하여 심히 격분하여 외국 성까지도 가서 핍박하였고 그 일로 대제사장들의 권세와 위임을 받고 다메섹으로 갔나이다 ” 

여기 사울은 예수 믿는 자, 교회를 핍박하기 위해 칙령을 받아들었습니다. 그는 너무나도 이 일에 열심이었습니다. 약 230km, 그 당시 상당히 먼 거리인 예루살렘부터 다메섹까지 그는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다가 옥에 가두기 위해 다메섹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오늘의 본문과 같은 9장 1절에 보면 ‘그가 칙령을 받으러 들어갈 때 그리스도인들을 향해서 위협과 살기의 마음이 등등했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는 마음에 살기가 있었습니다. 미움이 있었고 분노가 있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 죽여야 되겠다라는 미움이 그의 마음속에 가득 차 있었어요.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살기등등한 마음을 가지고 다메섹으로 향할 그 때에 예수님이 그에게 나타나셨다고 얘기합니다. "사울아, 사울아!" 이름을 부릅니다. 

무슨 얘기입니까? 죄 지은 아담을 부르셨던 하나님, 살인한 가인을 부르셨던 하나님, 교회를 핍박하기 위해 살기등등해서 찾아가는 사울을 부르셨던 하나님이 오늘 여러분을 부르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를 목놓아 부르는 하나님의 음성을 녹취한 책입니다. 우리를 포기할 수 없어서, 우리를 끝까지 그의 품에 안으시려는 하나님의 추적에 대한 기록입니다. 

이 사실을 깨닫게 하기 위해 하나님은 구약시대에 한 선지자를 택하십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목사입니다. 그리고 그에게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얘야, 너 오늘 가서 저 창녀와 결혼하라!" "아니, 하나님, 제가 목사인데 창녀와 어떻게 결혼합니까?" "결혼하라!" 명령하셨습니다. 할 수없이 그가 순종했습니다. 그런데 그 창녀가 옛 버릇을 못 버리고 도망을 갔어요. 그렇게 사랑해 주었는데, 목사가 창녀를 데려왔는데... 하나님이 또 명령을 하십니다. "가서 돈을 주고 찾아 오라!" 포주에게 속했던 그를 다시 돈을 주고 찾아와 아내를 삼습니다.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그런데 평생을 감사하며 그를 남편으로 모시고 살아야 할 터인데, 그 창녀는 그렇게 하지 못하고 또 도망을 갑니다. 이번에는 이름도 모르는 한 남자와 동침을 해서 아들까지 낳아버렸습니다. 하나님이 그 목회자에게 찾아와서 다시 그 여자를 데려다가 아내를 삼으라고 하십니다. 너무나 괴로웠지만 하나님의 명령이라 할 수 없이 순종했습니다. "여보, 이제는 도망가지 마라! 내가 하나님의 명령으로 당신을 이렇게 사랑했잖아! 내가 가진 재산을 다 버리고 당신도 누군지 모르는 아들을 내가 키우지 않소! 여보, 이제 나를 사랑하고 나를 믿음으로 내 평생 내 가슴에 상처를 입히지 말고 살아주오!" 애원했지만 얼마 세월이 지나지 않아 이 여자는 또 도망을 가버립니다. 

그리고 다른 남자의 아기를 또 갖습니다. 그 순간 하나님이 그 목회자에게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가서 그 창녀를 데려오라고 명령하십니다. 이것이 상상이나 가는 일입니까? 오늘날 한번만 외도를 해도 이혼의 사유가 되어 이혼을 하겠거든, 몇 번씩이나 외간 남자의 아이를 가진 그 여자를 데리고 와 같이 살라니요? 아내로 같이 데리고 살라니요? 하나님이 도대체 어떻게 이런 명령을 내릴 수 있단 말입니까? 소설입니까? 아닙니다. 이것은 역사, 성경에 기록된 호세아 선지자의 얘기입니다. 호세아서를 읽어보십시오. 하나님은 왜 이 잔혹한 일을 선지자 호세아에게 시켰습니까? 

여기에는 두 가지 목적이 있었습니다. 먼저, 하나님의 사랑을 백성들에게 전달하기 전에 하나님의 심정을 호세아 선지자 스스로가 한번 겪어보라는 겁니다. 네가 내 사랑을 안다고 설교하느냐? 정말 네가 내 가슴을 알기를 원하느냐? 그렇다면 이러한 여자와 한번 살아보아라! 수없이 하나님을 떠나 도망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내가 너를 사랑한다고 되풀이하시며 쫓아다니시는 하나님의 심정을 헤아려 보라는 겁니다. 호세아가 이 메시지를 받고는 그의 삶이 달라졌습니다. 

두 번째 이유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호세아를 위한 메시지가 아니라 오늘 바로 당신을 향한 메시지가 여기에 들어있는 겁니다. "얘야, 내가 너를 향한 사랑이 어느 정도인 줄 아니? 네가 계속해서 내 곁을 도망가는구나! 데려다 놓으면 또 죄를 짓고, 세상에 빠지고, 쾌락에 빠지고, 물질에 빠지고... 그러나 나는 너를 한번도 포기한 적이 없단다!" 우리를 사랑한다 말씀하시는 하나님, 호세아 선지자를 통해 당신의 사랑을 친히 보여 주셨던 하나님은 그것으로도 되지 않아서 마침내 그 사랑을 확증하시기 위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찾아오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도 여러분을 찾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여러분은 과연 듣고 계십니까? 오늘 왜 사람들이 변화되지 않습니까? 왜 그토록 신앙생활을 오래하고도 우리 마음에 변화가 없습니까? 그 이유는 성경을 수없이 읽으면서도 이 애타는 하나님의 사랑의 음성을 우리가 듣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 음성을 듣는 자는 복이 있을 줄 믿습니다. 오늘 이 음성을 들으십시오. 사울을 찾으셨던 하나님이 오늘 당신을 찾으십니다. 여러분의 있는 자리가 어디입니까? 

오늘 이 말씀을 듣는 가운데 내 머리 속의 하나님이 아닌, 성경 속에 기록된 제3의 하나님이 아닌, 나의 하나님의 음성을 우리 모두가 듣게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2. 자신을 올바로 바라보아야합니다.예수 믿는데 가장 방해되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왜 사람들이 예수를 못 믿는가? 또 예수를 믿고 나서도 왜 신앙생활을 잘하지 않는가? 신앙생활에 가장 걸림돌이 되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다름 아닌 "자신"입니다. 이 세상 살면서 신앙생활 하는데 가장 원수가 자신입니다. 

본문의 사울이 그러했습니다. 모든 판단의 주인이 자신이었어요. 자신의 견해로 볼 때 예수님은 가짜였습니다. 그러기에 예수 믿는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없어져야 할 사람이라고 판단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스데반을 과감하게 죽였어요. 양심의 가책도 없이... 그리고 이것도 모자라서 예수 믿는 사람, 저 230km 밖에 있는 사람까지 전부 잡아다가 감옥에 넣으려고 했던 것입니다.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요? 불교신자라도 이렇게 못하잖아요? 그런데 사도 바울은 안 믿는 사람이 아니라 유대교 신자였습니다. 

그는 구약성경,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가 이렇게 악하게 행동할 수 있단 말입니까? 이유는, 그가 겉으로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했지만 실제로 자신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 하면서 자신을 믿는 사람이 오늘날 교회에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저주하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판단하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미워하고, 심지어 하나님의 이름으로 사람에게 말의 상처를 입힙니다. 

여러분, 이 인류역사에서 가장 잔혹한 전쟁이 누구의 이름으로 일어났는 줄 아십니까? 하나님의 이름으로 발발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십자군 전쟁입니다. 임신한 부인의 배를 갈랐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요.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그들은 입으로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했지만, 실상은 자신을 믿고 있었던 겁니다. 사울 역시 자신의 의를 가지고 다메섹으로 가는 것입니다. 

때가 정오라고 얘기합니다.(13) 낮이 얼마나 밝습니까? 태양이 얼마나 밝은가요? 그러나 놀랍게도 그날 이 태양보다도 몇 십 배, 몇 백 배 더 환한 빛이 사울에게 쏟아졌습니다. 홀연히 쏟아졌습니다. 그 빛을 받은 사울이 도저히 견딜 수없어 그 자리에서 시력을 잃어버리고 땅에 고꾸라집니다. 그리고 사울이 가장 먼저 한 말이 무엇인가 하면 "주여! 뉘시오니까?" 옛날에 예수가 나타났으면 이렇게 물었을 겁니다. 

"너, 누구냐?" 그러나 오늘 사도 바울은 이렇게 부릅니다. "주여!" 사도 바울이 그를 구세주로는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다만 하나의 존경의 표시였겠지요. 무한한 힘을 바라보고 자기를 부르는 그 위대한 분을 향해 "주여! 뉘시오니까?"라고 대답합니다. 훗날 이 사건을 돌이켜보며 사도 바울은 디모데전서에서 자신을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라고 일컬었습니다. 나는 율법적으로 흠이 없고, 도덕적으로 예수 믿는 너희보다 낫다. 이만하면 내가 너희를 정죄할 자격이 있다라고 생각했던 사울, 그래서 살기가 등등했던 사울, 그러나 그는 오늘 이 다메섹에서 비로소 자신을 바라보았습니다. 

왜 사람들이 교만한 줄 아십니까? 자신을 보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왜 함부로 남을 정죄하는지 아십니까? 자신을 못 봐서 그렇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못 보는 이유는 하나인데,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난 경험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만나도 저 멀찌감치서 만났어요. 여기에 아무리 환한 빛이 있어도 100미터 정도 떨어져서 반짝거리는 불빛 아래 깜깜한 밤에 옷을 보십시오. 

아무런 티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가까이 밝은 빛에 오면 올수록 깨끗해 보이던 옷과 얼굴이 더러워져 보입니다. 이것이 바로 나를 보는 것입니다. 오늘 사울은 자신을 보았습니다. 내가 얼마나 형편없는 인간이었던가, 내가 얼마나 교만해서 내 지식에 미쳐서 살았던가, 그래서 함부로 판단하여 나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정죄하며 살았던가를 그는 보았던 것입니다. 

그 후, 날마다 날마다 간증하기를 "죄인 중에 내가 죄수니라." 남은 인생을 그는 이렇게 간증하며 살았습니다. 변화되기 원하십니까? 하나님 앞에서 당신을 바라보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성도 여러분! 나를 보십시다. 나를 보십시다. 정말 하나님 앞에서 나를 돌아보면 허물이 나에게만 있고 남에게 있지 않습니다. 남편에게 있지 않고, 아내에게 있지 않고, 자녀와 부모에게 있지 않습니다. 모든 허물이 나에게 있는 것입니다. 

3. 그리고 그는 자신을 부르신 그 부름 앞에 일관되게 복음의 간증자로 살아갑니다. 바울은 행 13장에서 안디옥 교회의 파송을 받아 이방인 선교에 나선 후 순교할 때까지 약 20년 동안 선교여행에 헌신했습니다. 1차 전도 여행 때 약 2년 여 갈라디아 지역 2240키로나 되는 먼 거리를 다니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2차 전도 여행 때는 약 3년 여 기간 동안 약 5000키로의 먼 거리를 다니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3차 전도 여행 때는 약 6년여 기간 동안 5000키로나 되는 먼 거리를 여행하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다 로마로 가서 긴 투옥생활을 보내고 잠시 풀려났습니다. 

그 후 서바나와 기타 여러 지역을 다니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다 다시 로마에서 체포되어 순교하게 되었습니다.바울은 이 여행 도중 자기가 겪었던 그 고초를 고후 12:23절 이하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헐벗었노라” 그야말로 바울은 예수를 위해 철저하게 헌신했던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가장 큰 뜻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하나님의 뜻은 원칙적으로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세상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유일한 뜻이요, 궁극적인 목표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한 순간도 잊지 말아야 됩니다. 나는 이번 터치 153 새 생명 축제에 바울과 같은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세상이 미쳤다해도 결코 위축됨이 없이 복음을 증거하는 은혜의 사람이 넘쳐나기를 기도합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도 이 세상에 계실 때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미쳤다고 모함을 받을 만큼 '해산의 수고'를 하신 분입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하는 수많은 성도들도 지난 2000년 역사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미쳤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러나 돌이켜 생각해 보십시오. 도대체 누가 미친 것입니까? 영원한 생명을 발견하여 그 영생을 위해 한 번밖에 없는 인생을 투자한 사람이 미친 것입니까? 아니면, 잠깐 후면 사라져 버릴 명성을 위해 죽을지 살지도 모르면서 온갖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들, 채 10년도 가지 못하는 권력의 바람에 자신의 목숨을 다 걸어 놓고 사는 사람들, 자신의 목숨을 깍아 먹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술과 담배를 끊지 못하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미친 것입니까? 

사람은 어차피 무엇엔가 미쳐야 살 수 있다고 합니다. 어디엔가 빠져들게끔 되어 있습니다. 흔히들 10대는 사랑에 미치고, 20대는 야망에 미치고 30대는 소유에 미치고, 40대는 정욕에 미치고, 50대는 늙음과 고독에 미치고, 60대는 명예와 죽음에 미친다고 합니다. 여러분은 지금 무엇에 미쳐 살아가십니까? 우리 주님께서 필요로 하는 사람, 오늘 교회와 이 시대가 진정 필요로 하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 그분에게 똑바로 미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주님의 사랑에 미칠 줄 아는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저들의 뜨거운 정열, 불타는 사랑이 필요합니다. 눈물과 감격과 열정이 요청되고 있습니다. 울 줄도 모르고 웃을 줄도 모르고 감격도 열정도 없는 고드름 같은 믿음 가지고는 어떠한 역사도 변화도 기적도 가져올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미치도록 사랑하지 않았다면 우리를 위해 목숨을 드릴 수 있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미치도록 사랑하지 않았다면 독생자를 날 위해 보내 주실 수 있었겠습니까? 오늘 우리 시대는 무감각의 질병으로 역사가 시들어 가고 교회가 죽어가고 있습니다. 죄에 대해서도 무감각합니다. 성령의 역사에 대해서도 무감각합니다. 신앙의 열정도 감격도 잃어버리고 살았다는 이름은 가졌으나 실상은 죽은 자들 때문에 오늘 이 시대가 병들어 가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 역시 예수님께 미치고 싶습니다. 완전히 미치고 싶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처럼 온전한 사랑으로 모든 죽어 가는 사람들을 위해 해산의 수고를 해서라도 그들을 세우고 싶습니다. 사랑하고 싶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그야말로 예수님의 사랑에 미쳐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영이신 성령에 취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지 않고서야 어떻게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을 가진 사람들을 통해 세상을 복음으로 역사하는 성령의 계절을 가져오리라고 생각하십니까? 복음은 기쁨을 줍니다. 이제 우리 교회는 사람을 세우기 위해 총 진력을 할 것입니다. 바울과 같이 영혼 구원에 대한 열정과 비전을 가지고 우리 모두 또 하나의 열매를 맺기 위해 충성을 다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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