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사도행전적 교회 (3) (행 7:55~60)

  • 잡초 잡초
  • 270
  • 0

첨부 1


제목 : 사도행전적 교회 (3)
         (The Characteristics of the Apostolic Church)
성경 : 행 7:55-60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 그들이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제히 그
에게 달려들어 성 밖으로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이십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몸으로서, 지금 이 땅에서 주님이 원하시는 일을 수행하는 기관입니다. 주님은 교회를 세우셨을 뿐 아니라 교회에 생명력을 불어넣어 주시며, 지금까지 지켜오고 계십니다. 주님의 참 교회는 세상을 움직이는 열쇠요 방향이요 정신입니다. 

  예수님이 원하시는 참교회의 모델은 사도행전에서 발견됩니다. 사도행전에서 보여주신 그 교회!  그 교회는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훈련받은 사도들이 성령님의 도움을 받아 이룩한 교회입니다. 비록 실수와 허점이 없지는 않았지만, 무엇보다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신 교회였고, 성령님께서 역사하시는 모습이 뚜렷한 교회였습니다. 

  지난 시간에 두 번에 걸쳐 살펴본 바와 같이, 사도행전 처음 6장까지에서 보여준 교회의 특징은 1)성령으로 충만한 공동체(2장),  2)예수의 삶을 사는 공동체(2장),  3)날마다 기적이 일어나는 공동체(3장),  4)고난속에서도 복음을 전하는 공동체(4장),  5)거룩과 정직을 추구하는 공동체(5장),  6)주의 종의 동역자를 세우는 공동체(6장) 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시간에는 사도행전 7장 이후를 계속 읽어 내려가며 사도행전적 교회의 모습을 살펴보겠습니다. 


7. 순교하는 공동체(7장)
  59-60절= “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사도행전적 교회의 일곱 번째 특징은 순교하는 공동체입니다. 사도행전의 심장은 전도와 순교인데, 특별히 순교는 사도행전의 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의 상징적인 인물은 베드로와 바울 뿐 아니라 초대교회의 일곱집사입니다. 그 중에서도 집사 빌립과 집사 스데반은 특이한 위치를 차지하는데, 한 사람은 전도자의 상징이요 또 한 사람은 순교자의 상징입니다. 

  스데반은 예수님을 위해 스스로 순교의 길을 택했습니다. 그는 기독교회의 최초의 순교자로서, 그의 삶은 이후 수많은 전도자와 순교자에게 영감을 불어넣었습니다. 

  예수님의 교회는 순교하는 공동체입니다. 복음을 위해 순교할 각오로 박해자들을 의연히 맞서고 있는 집사 스데반의 모습을 보십시오.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55절).
  원수들 앞에 서서 담대히 복음을 위치던 스데반은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의 영광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 계신 것을 보았습니다. 성경에서 승천하신 예수님은 앉아 계신다고 기록되어 있는데(마 26:64, 엡 1:20, 골 3:1, 히 1:3), 서 계신다고 기록된 곳은 이곳 뿐입니다. 

  예수님이 ‘서 계신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그것은 그리스도의 의(義)를 드러내고 믿음으로 순교의 자리에 서 있는 스데반을 격려하고 환영한다는 의미입니다. 영안이 열린 스데반이 ‘하나님 보좌 우편에 서 계신’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 얼마나 힘을 받았겠습니까!

  또한 ‘서 계신다’는 것은 스데반이 믿음의 순교자라는 사실을 하나님 앞에서 증언해 주는 증인의 의미를 전달합니다. 순교자는 결코 혼자 억울하게 죽는 것이 아닙니다. 스데반은 결코 홀로 쓸쓸히 죽어간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동일한 영광을 누리시는 예수님께서 스데반의 믿음을 인정하고 증인으로 보고 계시는 가운데 순교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얼마나 영예로운 죽음입니까? 그의 승리의 외침을 들어보십시오.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56절).

  성도 여러분!  스데반은 성도가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영예를 누린 삶의 승리자였습니다. 초대교회는 스데반의 순교의 열정을 그대로 이어받아 수많은 순교자를 배출해내었습니다. 그들은 사나 죽으나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을 위하여 삶을 헌신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순교적 신앙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7,8). 한 평생을 순교적인 믿음으로 살았던 바울 사도는 결국 AD 67년경 로마에서 목 잘려 순교의 제물이 되었습니다.

  초대교회의 기둥이었던 예수님의 제자들은 모두 이처럼 순교적인 신앙으로 살다가 주를 위해 생명을 바쳤습니다.
  베드로는 로마에서 십자가에 거꾸로 못 박혀 죽었고, 그의 동생 안드레는 헬라에서 전도하다가 X자형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습니다.
  야고보는 예루살렘에서 아그립바 왕에게 목베임을 당했고, 그의 동생 요한은 에베소에서 끓는 가마에 던져졌다가 튀어 나오게 되자 저들이 놀라서 밧모 섬으로 정배시켰습니다. 요한은 그곳에서 계시록의 환상을 체험하고 기록했습니다.
  빌립은 부리기아에서 전도하다가 기둥에 매달려 순교했고, 바돌로매는 아르메니아에서 거꾸로  십자가에 달려 죽었고, 도마는 멀리 인도 남부에서 전도하다가 창에 맞아 죽었습니다.
  마태는 에디오피아에서 전도하다가 목 베임을 당했고,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는 성전 꼭대기에서 떨어뜨려져 순교했고, 유다는 파사에서 활촉에 맞아 죽었습니다.
  시몬은 애굽에서 전도하다가 유대에 와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고, 맛디아는 에디오피아에서 돌에 맞아 장렬히 순교의 제물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고난의 절정은 순교입니다. 교회사를 보면 어느 나라이든지 복음이 처음 전파될 때 많은 순교의 피를 흘려왔습니다. 
  한국교회의 경우에 영국에서 온 20대의 젊은 선교사 토마스가 대동강에서 무참하게 한국 관료의 칼에 맞아 순교했습니다. 그가 죽으면서 우리나라에 전한 한권의 성경책과 그가 흘린 순교의 피는 한국 땅을 축복의 땅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뿐 아닙니다. 주기철 목사님은 신사참배를 거절했다는 이유로 감옥에서 비참하게 죽임을 당했습니다. 제암리 교회 성도들은 예배드리다가 일본 경찰들이 출입문을 잠그고 불을 지른 관계로 불 속의 제물이 되었고, 살아남은 성도들은 총으로 사살당했습니다. 오늘의 한국교회는 순교자들의 거룩한 피 위에 세워진 공동체입니다. 

  성도 여러분!  초대교회는 순교하는 교회였습니다. 고난 없이 복음은 전해지지 않고, 순교 없이 교회는 세워지지 않습니다. 사도행전의 사람들은 목숨을 걸고 사는 사람들이었고, 우리 또한 그러해야 할 것입니다. 


8. 이방인을 품는 공동체(10장)
  행 10:44-46= “베드로가 이 말을 할 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 받은 신자들이 이방인들에게도 성령 부어 주심으로 말미암아 놀라니 이는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 높임을 들음이러라.”
  사도행전적 교회의 여덟 번째 특징은 그들이 이방인을 품었다는 데 있습니다. 10장과 11장에 길게 기록된 베드로와 고넬료의 이야기는 그 길이만 하더라도 이 사건이 얼마나 중요한 사건인가를 한 눈에 보여줍니다. 

  로마의 군대 백부장 고넬료는 이방인이었지만 하나님을 사모하는 사람이요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는 경건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베드로 사도를 시켜 고넬료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유대주의 와 이스라엘 선민사상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세 번씩이나 환상을 통하여 답답한 베드로를 깨우쳐야만 했습니다. 

  고넬료의 집에 도착한 베드로는 모인 식구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진리를 전했고, “베드로가 이 말을 할 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44절), 비로소 그들에게 세례를 주게 되었습니다. 이때부터 초대교회의 굳게 닫혔던 편견의 문이 열려지게 되어, 마침내 교회에 이방인을 받아들이는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초대교회의 대표적인 교회인 수리아의 안디옥교회는 최초의 이방인 교회로서, 유대인은 물론 세계 각지에서 몰려든 이방인들이 섞여 있었습니다. 다양한 인물로 구성되었지만 반목이나 대립의 그림자는 없었습니다. 그들은 오직 예수님에 대한 믿음으로 출신 배경과 계층, 인종을 초월하여 하나가 될 수 있었습니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갈 3:28).

  교회가 건강하다는 것은 바로 이런 것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누구라도 쉽게 와서 어울릴 수 있어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는 조건이나 배경 때문에 소외되거나 무시되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성도라면 누구와라도 화합하고 존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강한 자는 약한 자를, 신앙의 연륜이 오래된 자는 초신자를 섬기고 바르게 인도하여 그들로 높아지고 강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교회는 어떤 풍파에도 흔들리지 않는 건강하고 견고한 교회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 바울은 여러 번의 전도여행을 하면서 이방인을 찾아다니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바울 사도의 주된 메시지가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만 아니라 모든 이방인들도 동일하게 구원하신다는 사실입니다. 복음 안에는 동양인과 서양인, 남자와 여자, 어른과 아이들이 모두 하나입니다. 바울은 1, 2, 3차 전도여행을 하면서 이방인을 찾아다니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것 때문에 그는 유대인들에게 심하게 핍박받았고, 쫓겨나고 매를 맞았습니다. 

  성도 여러분, 사도행전 교회는 이방인을 품는 교회였습니다. 한국교회가 진정으로 복 받는 비결은 나와 다른 사람들, 다른 체질의 사람들, 언어와 피부색과 습관이 다른 문화권에 사는 사람들을 이해하고 품고 사랑하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먼저 교단과 교파간의 벽을 허무는 일에 힘써야 하고, 영호남이 하나 되는 일에 교회가 앞장서야 할 것입니다. 

  특별히 우리 땅에 찾아온 이주 노동자들과 조선족, 그리고 탈북자들을 편견 없이 받아들일 때 한국교회는 진정한 축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멀리 해외로 나가 선교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주님이 우리에게 보내주신 이들을 사랑하지 않고서는 복 받을 방법이 없습니다. 
  우리는 이 땅에 찾아온 이들을 포용하고, 힘 없고 약한 자를 찾고, 소외된 자를 품어야 합니다.  우리 안에 “이방인을 품는” 넓은 마음이 가득해지기를 예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9. 땅 끝까지 선교하는 공동체(13-28장)
  사도행전 교회의 아홉 번째 특징은 땅 끝까지 선교하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은 세계선교를 위하여 안디옥 교회로 하여금 바울과 바나바를 파송하도록 하셨습니다. 
  행 13:2-3=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이르시되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

  사도행전을 보십시오. 모두 28장인데 13장부터 본격적인 선교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의 50%가 선교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의 결론은 선교입니다. 선교는 교회를 향한 성령님의 절대적 지상명령입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 승천하시기 직전에 제자들에게 주신 성령 약속은  바로 세계선교를 위한 것입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 1:8). 
  예루살렘 교회가 크게 부흥하여 많은 사람이 모이게 되었을 때에 주님은 그들 위에 무서운 핍박을 허용하셨고, 그 결과 성도들은 사방으로 흩어져서 복음을 전파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초대교회는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확산되어 나갔습니다. 

  여러분, 주님의 관심은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해 힘을 다하는 교회 위에 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비록 성령 충만한 교회였지만, 교회가 본격적으로 이방인 선교를 추진하기에는 많은 제약과 한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내에는 여전히 할례나 율법 준수 등을 고집하는 유대주의적 성향이 아직 강하게 남아 있어 상당기간 동안 지속되었습니다(15:1,5; 21:20-24). 예루살렘 교회는 이방인 선교에 본격적으로 나서는 데에 내부적 한계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예루살렘은 초대교회가 태동하여 출발한 본산지로서 아직도 일정부분 지도적 역할을 감당한 곳이기는 하지만, 주의 복음을 땅 끝까지 전파하는 세계선교 사명의 바통은 수리아의 안디옥으로 넘겨지게 된 것입니다. 교회사를 볼 때 세계 교회의 중심 축은 언제나 세계선교 사명을 수행하는 나라의 교회로 옮겨졌는데, 그 첫 번째 모델을 안디옥교회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안디옥교회를 설명할 때 지도자들의 이름이 나오는데, 아프리카 사람을 포함하여 여러 인종이 모여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안디옥 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으니 곧 바나바와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과 구레네 사람 루기오와 분봉 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과 및 사울이라”(행 13:1). 그리고 그들은 세계선교를 위하여 담임목사격인 바울과 바나바를 파송하게 됩니다. 

  그들은 어디까지 갑니까? 중앙아시아를 전도하다가, 성령님의 인도로 바다를 건너 유럽으로 지경을 넓혀 나갑니다. 빌립보, 데살로니가, 고린도, 아테네까지 유럽의 대도시, 상업과 경제의 도시, 정치와 철학의 도시를 복음으로 휩쓸어 갑니다. 

  여러분, 아직 교통이 발달하지 못한 시대지만, 사도 바울의 마음에는 당시의 땅 끝인 로마와 스페인까지 복음으로 정복하고자 하는 불타는 열정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는 로마의 성도들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여러분이 나를 지원하면 내가 스페인으로 가겠다” 라고 선언했습니다.

  결국 바울 사도는 로마로 갔습니다. 어떻게 갔습니까?  역설적으로 죄수의 신분으로 갔습니다. 하나님은 바울로 하여금 배 삯 한 푼 들이지 않고, 그를 죽이려고 하는 유대인들로부터 안전하게 경호까지 받으면서 가도록 섭리하셨습니다. 
  그는 로마에 도착하여 셋집을 얻어 군사 몇 사람의 감시아래 죄수 생활을 시작하였고, 자기를 찾아오는 많은 사람들, 특히 로마 군인들과 귀족 계급의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사도행전의 마지막 부분을 보십시오. “바울이 온 이태를 자기 셋집에 머물면서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담대하게 거침없이 가르치더라”(28:30-31).

  여기에 또 한 가지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바울처럼 꼭 먼 곳에 가서 복음을 전하는 것만이 전부는 아닙니다. 사실은 우리가 사는 곳이 선교지입니다. 우리는 가정의 선교사이고, 직장의 선교사이고 사회의 선교사입니다. 

  해외 선교지뿐 아니라 우리 각자의 일터에서도 순교할 각오로 사는 것이 바로 선교입니다. 보통 사람이 직장에서 여덟 시간 일한다고 하면, 우리 그리스도인은 아홉 시간, 열 시간 일할 각오로 살아야 합니다. 주어진 시간보다 1, 2시간 정도 회사를 위해서 말없이 봉사하고 헌신하는 것입니다. 잔업수당을 받지 못해도 기쁜 마음으로, 때로는 밤 늦게까지라도 일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선교사의 마음이고 사도행전의 마음입니다.  


[나오는 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도행전의 마지막은 마침표가 아닙니다. 사도행전의 교회는 끝이 없습니다. 마침표(period)가 아니라 콤마(comma)일 뿐입니다. 사도행전의 교회는 주님 재림하실 때까지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28장은 끝났지만, 교회는 계속하여 29장을 쓰고 있는 중입니다. 그때 성경을 배운 사람들이 흩어져 교회를 세우고 성경을 가르쳤습니다. 그들에게 성경을 배운 사람들이 다시 나가서 교회를 세우고 가르쳤습니다. 그렇게 하여 교회가 교회를 낳는 일은 지난 2천여 년 동안 끊이지 않고 이어져 왔습니다. 이것이 사도행전 29장입니다.

  성도 여러분, 저는 우리 서현교회가 사도행전적인 교회의 모습을 갖추기를 원합니다. 사도행전적인 교회는, 1)성령으로 충만한 공동체, 2)예수의 삶을 사는 공동체, 3)날마다 기적이 일어나는 공동체, 4)고난속에서도 복음을 전하는 공동체, 5)거룩과 정직을 추구하는 공동체, 6)주의 종의 동역자를 세우는 공동체입니다. 그리고 나아가 7)순교하는 공동체, 8)이방인을 품는 공동체,  9)땅끝까지 선교하는 공동체입니다. 

  이런 공동체야말로 우리 서현교회가 지속적으로 지향해야 할 목표입니다. 저는 우리교회가 주님의 이 꿈과 비전, 개인 영혼을 살리는 것부터 시작하여 세계를 변화시키는 일에 앞장서기를 원합니다. 

  저는 한국교회가 한 교회도 빠지지 않고 하나님 나라의 거대한 비전에 동참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교회는 끊임없이 개척되어야 합니다. 교회는 교회를 낳고 또 낳아야 합니다. 그곳이 어디이든 주님의 교회를 세우는 정신은 바로 사도행전 29장을 쓰는 마음입니다. 


  박순오 목사, 대구서현교회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영원합니다. 지금도 주님의 교회는 영원합니다.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우리 교회는 대구를 변화시키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아방가르드(선구자)가 될 것입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