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어떤 기도를 드릴 것인가 (막 11:15~25)

  • 잡초 잡초
  • 308
  • 0

첨부 1


어떤 기도를 드릴 것인가 (막 11:15~25)
 

예수님은 사랑의 주님이십니다. 한없이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런주님이 가끔 우리를 당황하게 하실 때가 있습니다. 그 대표적 경우가 본문에 나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전에서 돈 바꾸는 사람들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을 둘러엎으셨습니다. 

15절에 보면 <그들이 예루살렘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며>라고 했습니다. 이 때 예수님 모습은 인자한 모습이 아닙니다. 그 성정이 불같습니다. 성전이 어떤 곳입니까?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거룩한 곳으로 여겨져 온 곳이 성전입니다. 주님은 그런 성전을 뒤집어엎으셨습니다. 

그런데 주목할 것은 이 사건에 한 그루의 <무화과나무>가 등장한다는 것입니다. 12절 이하를 보면 베다니 마을에서 주무신 예수님은 시장기를 느끼셨고, 길가에 있는 무화과나무로 다가가셔서 열매를 찾으셨습니다. 그러나 열매는 없고, 잎사귀뿐이었습니다.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저주였습니다. 14절을 보세요. 

<예수께서 나무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먹지 못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이를 듣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먹지 못한다>는 것은 무화과나무가 죽을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을 하실 때의 예수님은 평소의 예수님답지 않았고, 그 말씀은 너무 심해 보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날 이 세상의 열매맺지 못하는 모든 것들을 폐지해버리기로 작심하신 분 같았습니다.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예수님은 바로 이어서 성전의 비둘기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을 쫓아내시면서 <성전도 폐지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그 이유는 성전도 <또 하나의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였기 때문입니다. 길가의 무화과나무가 열매가 없어 저주를 받은 것처럼, 성전도 열매가 없으므로 더 이상 존재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전이 맺어야 할 열매가 무엇입니까? 성전은 사람이 하나님 앞에 와서 은혜를 입고, 죄의 용서와 구원을 받도록 하는 장소입니다. 그것이 성전의 존재 목적입니다. 최초로 성전을 지은 솔로몬이 성전이 완공된 후에 드린 봉헌 기도를 보면 그 사실이 분명히 드러납니다. 열왕기상 8장 30절을 보면 이렇습니다. 

<주의 종과 주의 백성 이스라엘이 이 곳을 향하여 기도할 때에 주는 그 간구함을 들으시되 주께서 계신 곳 하늘에서 들으시고 들으시사 사하여 주옵소서> <하나님, 앞으로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범죄할 때가 많을 줄 압니다. 그럴 때 우리들이 이 성전을 찾아와 기도하면 그 기도를 들으시고 우리 죄를 용서해 주옵소서!> 성전의 존재 목적은 죄를 지은 사람들이 찾아와서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여 그 응답을 받는 데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 당시의 성전이 과연 그 기능을 다하고 있었습니까? 예수님 보시기에 당시 성전은 제구실을 하기는커녕 강도의 소굴이었습니다. 

당시 성전에서 드려지는 제사는 마음을 다한 정성어린 제사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정성어린 제사 대신 <편리한 제사>를 했습니다. 그 증거 중 하나가 제물입니다. 본래 제물은 일년 된 수양, 암양 등 깨끗하고 흠 없는 동물이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흠 없는 짐승은 내다 팔아야 돈이 된다고 생각하고 하나님께 드리기는 아깝다고 여겼습니다. 

또 그 먼 거리에서 굳이 성전까지 짐승을 가져올 필요가 없었습니다. 제사장들은 힘들일 필요가 없도록 편리를 제공했습니다. 돈만 가져오면 성전에서 얼마든지 제물을 살 수 있게 했습니다. 현지조달인 셈이지요. 제사장들은 제물을 정상가격에다 이익을 조금 붙여서 팔았습니다. 또 그 짐승들은 흠 없는 짐승이 아니어서 제물이 되기에 적합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런 것들을 다 무시했습니다. 

돈 바꾸는 일도 그렇습니다. 본래 성전세는 세겔로 드리게 되어 있는데, 이들은 평소에 로마 돈을 상용했습니다. 그러므로 로마 돈인 데나리온으로 드리지 않기 위해 성전에서는 데나리온을 세겔로 바꾸어 주었습니다. 나중에는 돈을 바꾸는 데도 수수료를 붙였습니다. 

이런 방법으로 제사장들도 부당한 이익을 챙겼고, 백성들 입장에서는 돈을 조금 더 주기만 하면 아주 편리했습니다.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이었습니다. 편리해서 좋고, 돈벌이가 되니 좋았습니다.

이렇다 보니 더 이상 성전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높이기 위해 찾아오는 곳이 아니었습니다. 제사는 형식화되어 때우기식 제사가 되었고, 거기엔 죄를 고백하는 기도도 없었습니다. 진심으로 죄를 고백하는 사람이라면 그렇게 무성의하게 제물을 준비할 리가 없지요. 앞에서 살펴본 솔로몬의 기도에서처럼 사람들은 성전에 와서 죄의 용서를 구하는 기도를 드려야만 했지만, 성전에서 그런 기도는 중단된 지 오래였습니다. 

그러므로 더 이상 성전은 존재 이유가 없었고,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주님은 이제 성전을 저주하여 폐기처분 하신 것입니다. 16절을 보세요. <아무나 물건을 가지고 성전 안으로 지나다님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은 매우 심각한 말씀입니다. 성전의 제사를 위해서는 여러 그릇들과 부삽들, 그리고 칼과 도구들이 필요했습니다. 

그런데 물건을 가지고 다닐 수 없다는 것은 더 이상 제사를 드리지 말라는 뜻이었습니다. 제사를 드릴 수 없다면 이미 그것은 성전으로서의 기능이 마비된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성전을 정화시켜 다시 성전으로서의 역할을 잘 감당하게 하시려는 게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제 그런 성전은 필요 없으니 문을 닫으라>는 선언을 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다시 무화과나무 이야기로 돌아옵시다. 예수님이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20절을 보면 그 다음 날 아침에 보니 무화과나무가 뿌리째 마른 것을 보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무화과나무만이 아닙니다. 성전도 말라버린 무화과나무처럼 되었습니다. 로마군대는 주후 66년부터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공격을 시작해서 주후 70년에 예루살렘을 초토화시켰고, 그 때 성전도 완전히 파괴했습니다. 그 때 이후로 지금까지 유대인들은 성전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수님 말씀처럼 성전은 폐지된 것입니다.

이제 여기서 매우 중요한 문제가 등장합니다. 성전이 없다면 사람들은 어떻게 죄를 용서받고 하나님의 은혜를 얻어야 합니까? 그 방법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다름 아닌 기도입니다. 앞에서 이미 예수님은 성전의 본래 기능이 기도임을 말씀한 바 있습니다. 17절을 보세요. <이에 가르쳐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 하시매>라고 했습니다. 

성전은 <기도하는 집>입니다. 사람들이 찾아와 엎드려 죄의 용서를 구하는 기도를 드리고 은총을 받는 장소였는데, 이제 존재 이유를 잃었습니다. 성전이 없으면 어떻게 합니까? 그러나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전이 없어도 기도는 얼마든지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디서나 하나님 앞에 용서를 구하는 기도를 드리면 구원을 받습니다. 

그 회개의 기도가 구원을 가져오는 것이지, 성전 건물이 구원을 가져오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성전이 없어도 얼마든지 기도할 수 있고, 눈물로 회개하며 기도하면 어디서 기도하든 하나님께서는 들으시고 응답하실 것입니다. 성전 건물 보다 중요한 것은 엎드려 기도하는 마음입니다. <하나님, 저의 죄를 용서해 주옵소서. 저를 구원해 주옵소서!> 

여기서 주님의 말씀의 주제는 <기도>가 됩니다. 주님은 성전과 상관없이 기도하면 무엇이든 이루어진다고 말씀합니다. 다시 무화과나무 이야기로 와 봅시다. 무화과나무가 말라죽은 것을 보고 놀란 베드로가 말합니다. 21절을 보세요. <랍비여 보소서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말랐나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는 정말 무화과나무가 주님의 말씀대로 죽은 것을 보고 놀랐습니다. <아니, 나무가 몇 달에 걸쳐 서서히 죽을 줄 알았는데, 이렇게 하루만에 뿌리째 말라죽다니, 이런 일이 있구나. 주님의 능력은 도대체 어디까지인가?> 

이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이 무엇입니까? 22-23절을 보세요.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을 믿으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무슨 말씀일까요? <내 말에 나무가 당장 말라죽은 것을 보고 놀랐느냐? 놀랄 것 없다. 믿음으로 구하면 된다. 기도하면 은혜를 입는다. 굳이 성전 건물 따위는 없어도 좋다. 진실되게 엎드려라>, 24절을 다같이 읽읍시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여러분, 하나님을 믿고 간구하면 이루어집니다. 이런 믿음의 기도를 드리시길 바랍니다. 

이제 우리는 중간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앞에서 드린 말씀을 다시 정리해 봅시다. 성전이란 기도하는 집입니다. 사람들은 성전에 가서 엎드려 죄의 용서를 구하는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제사도 그런 심정으로 드려야 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제사도 형식적일 뿐이었습니다. 이미 성전은 기능이 마비되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성전이라면 문을 닫을 것을 선언하셨습니다. 그러나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성전이 없어도 얼마든지 하나님의 은혜를 얻을 수 있습니다. 참 믿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면 은혜를 입습니다. 구원을 받습니다. 놀라운 능력을 체험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에 힘써야 합니다.

자, 그러면 이것이 주님이 남겨 주시려는 교훈의 전부입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은 여기서 말씀을 그치지 않으셨습니다. 결정적으로 중요한 한 마디를 더 덧붙이셨습니다. 25절을 다같이 읽어봅시다.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 하시니라> 아멘! 

여기서 예수님의 말씀의 초점이 변하고 있음에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방금 전까지 믿고 기도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갑자기 <용서>라는 주제를 끄집어내셨습니다. <기도할 때에 용서하라>고 하십니다. 그래야 하늘의 아버지께서도 용서해 주실 것이라고 합니다. 

여러분, 기도와 용서가 무슨 관계가 있기에 예수님은 기도하라고 하시면서 용서를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성전에 와서 기도하는 사람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못하고 있다면, 하나님께서 뭐라고 하시겠습니까? 대답은 뻔한 것입니다. <너는 남을 용서하지 않으면서, 내게 와서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느냐? 너부터 용서해라. 그러면 내가 네 죄를 용서하겠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주기도문을 떠올리게 됩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하나님, 제가 제게 죄를 범한 친구를 용서했습니다. 그러니 제 죄도 용서해 주세요>라고 가르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대목에서 주님의 말씀은 분명합니다. <용서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의 은총을 구할 생각일랑 버리라>는 것입니다. 매우 강력한 명령인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받아야 할 은혜는 여러 가지입니다. 물질의 복, 건강의 복, 자녀의 복 등을 다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죄의 용서를 받는 것입니다.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를 위해서는 <용서하는 마음>을 가지고 나오라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유명한 <씨 에스 루이스, C.S Lewis>는 <순전한 기독교>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기독교의 한 복판에는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는 말씀이 분명히 있다. 이 말씀은 다른 방법으로 용서받을 수 있다고 생각할 여지를 조금도 주지 않는다. 용서하지 않으면 용서받지 못한다는 것은 아주 명백한 사실이다. 다른 길은 없다. 그러니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원수를 사랑하라는 것은 그에게 호감을 가지라거나 그가 근사한 사람이 아닌데도 근사한 사람이라고 말하라는 것이 아니라, 그가 잘 되기를 진심으로 바라라는 것이다.>

여러분, 이게 주님 말씀의 결론입니다. 주님은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성전 보다 중요한 것이 기도라고 하십니다. 믿음으로 기도하면 응답을 받습니다. 그런데 거기 조건이 있습니다. 그것은 용서하는 마음으로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기도하기 전에 용서하십시오.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기 전에 먼저 은혜를 베푸십시오. 이건 정말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혹시 자신을 홀대하고 제대로 키워주지 않았다고 어려서부터 부모님을 원망했습니까? 부모님을 용서하십시오. 이혼하고 떠나 자신을 고생스럽게 만든 어머니, 집을 나가 가족을 힘들게 한 아버지를 용서해야 합니다. 

자신의 인생을 망쳐 버린 것처럼 여겨져 늘 원망해 온 배우자를 용서하십시오. 차라리 없는 편이 더 좋았다고 생각할 정도로 미웠던 자녀들을 용서하십시오. 여러분의 자존심에 상처를 준 사람들을 용서하십시오. 손해를 크게 끼친 친구들을 용서하십시오. 손해를 끼치고도 조금도 미안해하지 않는 뻔뻔해 보이는 사람들을 용서하십시오. 용서의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오십시오. 그렇게 할 때 하나님은 은혜를 베푸시고 용서하십니다. 

용서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몇 일 전 새벽기도 시간에 묵상했던 말씀이 생각납니다. 잠언 24장 16절을 보면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말미암아 엎드러지느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을 싫어하는 교인들은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아, 나는 일곱 번 넘어져도 여덟 번 일어날 것이다. 하나님은 나를 버리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말씀으로 설교하면 모든 교우들이 <아멘!>으로 화답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 말씀에 위로를 받으면서 성경을 덮으면 안 됩니다. 성경을 덮기 전에 반드시 물어야 할 질문이 있습니다. 그것은 <여기서 말하는 의인은 누구인가>, <그리고 나는 하나님 앞에서 과연 의인인가>를 물어야 합니다. 많은 사람이 당연히 자신은 의인이고, 자신에게 손해를 끼친 사람은 악인이라고 단정합니다. 그러나 이런 단정이 과연 옳은 것일까요? 그래서 우리 자신은 일곱 번 넘어져도 여덟 번 일어나고, 상대방은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야 망하는 게 마땅할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분명히 로마서 3장 10절은 이 세상에 의인은 단 한 사람도 없다고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칠전팔기하는 의인은 누구입니까? 칠전팔기의 의인이란 <자신은 의롭고 다른 사람은 악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결코 아닙니다. 여기서 말하는 의인은 <하나님, 전 죄인입니다. 저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라고 엎드려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나도 죄인인데 어떻게 저 사람을 용서하지 않겠습니까?>라고 생각하면서 형제를 용서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용서의 은총을 받은 사람, 바로 이런 사람이 의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진정으로 성전에 나가 기도하는 사람일까요? 자신이 죄인인 줄 아는 사람이 하나님의 성전에 나갑니다. 그러면서 다른 이들의 죄를 용서하는 사람이 성전에 나갈 수 있습니다. 그 때 하나님의 사죄의 은총이 임합니다. 이 때 성전은 용서의 현장이 됩니다. 사랑의 현장이 됩니다. 화해의 현장이 됩니다.

용서하지 않으면서 은혜를 구하는 것은 <용서받지 않아도 좋습니다>란 말과 같습니다. 그 순간, 그 자신이 열매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가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맺어야 할 열매는 용서인 것입니다.

<서로 참아 주면서, 서로 감싸주면서, 서로 사랑하면서 주께로 가는 길 오 주 사랑의 종소리가 사랑의 종소리가 이 시간 우리 모두를 감싸게 하여 주소서> 이 가을, 우리 모두 용서의 사람이 되길 원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