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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별과 같이 빛날 사람들 (단 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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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과 같이 빛날 사람들 (단 12:1~4)
  

사람은 혼자 살 수 없습니다. 그래서 모두가 어울려 함께 살아갑니다. 그러다 보니 서로의 인생에 영향을 주고받습니다. 그 중에는 선한 영향도 있고, 악한 영향도 있습니다.

한문학자인 <심경호> 고려대 교수가 최근에 <내면기행>이란 책을 냈습니다. 이 책은 1200년대 <김훤>에서 시작해서 1900년대에 살았던 <이건승>까지 약 700년 동안 살았던 인물들의 묘비명과 그의 자취를 살핀 책입니다. 우리 조상들은 죽기 전에 유언장을 미리 써 두는 전통이 있었고, 그 유언장을 무덤 안에 함께 묻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런 인물들 중에는 실학자로 유명한 <정약용 선생>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정약용 선생은 죽기 14년 전에 지은 묘지명에서 <서영보>라는 인물에 대한 원망을 표현하였습니다. 서용보는 정약용과 과거시험을 함께 본 인물인데, 정약용은 차석, 서용보는 수석이었습니다. 서영보라는 인물은 정약용 선생의 인생에 가장 큰 악연이었습니다. 이 서영보 때문에 정약용은 계속 죽음의 위기에 처하거나, 나중에 귀양이 풀려 조정에서 등용을 하려고 해도 서영보가 막아서곤 했습니다. 

이게 바로 사람들의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우리도 많은 사람들로부터 영향을 받으면서 삽니다. 그러나 영향을 받기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영향을 줄 때도 많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영향을 받는 데는 민감합니다. 때로는 격한 반응을 보이기도 합니다. <왜 내가 그 사람 그늘에서 살아야 하는데?>라고 반문하면서 뛰쳐나가기도 합니다. <나 이번에 그 사람으로부터 평생 잊을 수 없는 상처를 받았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영향을 받는데는 이처럼 민감한 반면에 자신이 남에게 영향을 주는데 대해서는 의외로 둔감한 것 같습니다. 그러다 보니 생각 없이 한 마디씩 합니다. <넌 틀렸어. 그래서는 아무 것도 못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 말이 상대방에게는 얼마나 깊은 상처가 되는지 모릅니다. 특별히 어린아이에게 한 마디 던지는 것은 평생 좌절을 가져올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 어차피 험난한 세상에서 한 번 살아가는데, 무엇 때문에 다른 사람의 인생에 상처를 주면서 살겠습니까? 정약용의 경우를 보면서 얼마나 그 한이 깊었으면, 묘비명을 쓰면서도 상대방의 이름을 거론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서용보라는 사람은 정약용이란 사람의 생애에 지워지지 않는 독을 남긴 것입니다. 

여러분, 기왕이면 다른 사람들의 평생에 지워지지 않는 아름다운 자국을 남기십시오. 어떻게 하면 그렇게 할 수 있을까요? 

우선 남을 비판하지 마십시오. 비판은 교만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두 수도자가 어떤 개울을 건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개울가에는 혼자 건너지 못하고 있는 한 젊은 여인이 있었습니다. 한 수도자는 여인을 못 본 체하고 개울을 건너가 버렸습니다. 그러나 다른 수도자는 여인에게 등을 들이밀며 말했습니다. <업히시지요. 제가 건네 드리겠습니다.> 그는 여인을 업고 개울을 건네 주었습니다. 

두 수도자는 다시 길을 재촉했는데 좀 전에 여인을 업지 않았던 수도자가 화난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여보게 수도하는 몸으로 여인의 몸에 손을 대다니 자네는 부끄럽지도 않은가?> 여인은 업었던 수도자는 묵묵부답이었습니다. 그러자 다른 수도자는 더욱 화가 나서 동료 수도사를 나무랐습니다. <자네는 단순히 그 여인이 개울을 건널 수 있게 도왔을 뿐이라고 말하고 싶겠지, 하지만 여인을 가까이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우리의 신성한 계율임을 잊었는가?> 그 수도자는 계속해서 질책을 퍼부었습니다. 

그 때 여인을 업었던 수도자는 계속하여 질책을 하고 있는 다른 수도자를 향하여 비로소 입을 열었습니다. <이 사람아, 나는 벌써 두어 시간 전에 그 여인을 개울가에 내려놓고 왔는데 자네는 아직도 업고있군 그래.> 그 말을 들을 동료 수도자는 자신의 생각이 얕았음을 알고 부끄러워 고개를 숙였다고 합니다. 

비판하고 헐뜯는 게 우리네 본성이지만, 여러분, 기왕이면 격려하고 칭찬하십시오. 미소로 건네는 한 마디의 격려가 사람의 생애를 바꿉니다. 

<데이비드 리빙스턴> 목사는 영국이 낳은 세계적인 탐험가요, 선교사입니다. 리빙스턴 목사님이 일생을 아프리카에 헌신하게 된 것은 한 목사님의 격려 때문이었습니다. 그가 소년이었을 때 어느 주일 런던선교회 회원들의 찬양을 듣게 되었습니다. 런던선교회는 당시 세계에서 가장 활발한 선교활동을 하던 단체입니다. 리빙스턴은 동경하는 눈빛으로 선교회원들을 보았고, 그때 선교회 지도 목사님이 그에게 미소를 보내며 말했습니다. <너도 훌륭한 선교단원이 될 수 있을 거야!> 후에 리빙스턴은 그 한 마디의 격려와 미소가 선교사가 될 비전과 용기를 주었다고 고백했습니다. 그 목사님은 한 소년의 인생에 지워지지 않는 아름다운 자국을 남긴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그리스도인은 성령님의 사람들입니다. 우리 안에는 성령님이 계십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성령님께서 하시는 일을 따라 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성령님께서 하시는 일이 무엇입니까? 

성경을 어떤 언어로 번역할 때 가장 어려운 단어 중의 하나는 <보혜사(保惠師)>라는 단어라고 합니다. 헬라어 <파라클레토스>를 한국어로 번역한 것이 보혜사인데 이는 그 뜻은 매우 다양합니다. <안위한다, 권고한다. 상담한다. 도와준다. 훈계한다> 는 등의 뜻이 있습니다. 이 모든 말을 한 단어로 표현하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그래서 여러 언어에서 참 재미있게 번역되기도 했는데, 예를 들어 필리핀 남부의 <쫄로아노 모로족>은 <계속하여 옆에 서서 같이 가시는 분>이라고 번역했고, 중앙 멕시코의 <오토미 인디언>들은 <우리 영혼에 따스함을 주시는 분>이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그런가 하면 아이보리코스트에 사는 <빠울리족>들은 <꽉 동여매시는 이>라고 하는데, 성령께서 근심에 쌓인 우리 마음의 생각들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꽉 묶어 성령님의 통제 아래 두신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런 번역들은 일견 매끈해 보이지 않지만, 성령님의 사역을 잘 표현하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성령님은 결코 사람을 망치거나 죽이거나 무너뜨리는 사역을 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사단이 하는 일입니다. 성령님은 쓰러진 사람을 일으키시고, 좌절한 사람에게 용기를 주시고, 상처받은 영혼을 치유하시고, 앞이 막힌 사람의 나갈 길을 열어주십니다. 

그 모든 성령님의 역사 중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마음의 문을 열어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영접하도록 감동하시는 일입니다. 종교개혁자인 <칼빈> 선생님은 그의 유명한 <기독교강요>에서 <유효한 적용>이란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유효한 적용이란 무엇일까요? 예를 들면 주부들이 빨래할 때 빨래를 하얗게 만들기 위해 옥시크린을 사용합니다. 언론 매체에서 광고를 합니다. <옥시크린을 쓰면 빨래가 깨끗하고 희어집니다!> 그런데 어떤 주부는 당장에 사다가 사용하지만, 어떤 주부는 알면서도 사용하지는 않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을 영접하고 믿으면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도록 하나님께서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그러나 정작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구원을 받으려면 그 예수님을 자신의 주님으로 영접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자신의 인생에 적용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예수님의 사랑과 은혜가 그에게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런데 성령님께서는 닫힌 마음을 여시고, 굳어진 마음을 부드럽게 바꾸셔서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고 영접하도록 도우신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주신 구원의 은총이 사람에게 적용될 수 있도록 그 마음을 감동하시고 움직이시는 성령님의 역사를 <효과적인 적용>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 마음에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고, 예수님을 자신을 구원하신 주님으로 믿는 마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성령님의 사람이 된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2장 3절이 이에 대해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아멘! 여러분, 자신이 과연 성령님의 사람이 되었는지 의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으십니까? 지금 명절 연휴 기간임에도 불구하고 이 자리에 와서 예배를 드리시는 이유는 여러분이 이미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인 줄 믿습니다. 그것은 이미 우리가 성령님의 사람이라는 증거입니다. 의심하지 마십시오. 흔들리지 마십시오. 이미 성령님의 사람이 되셨습니다. 단지 그 성령님을 섭섭하게 하지만 마십시오. 

그리고 이제 우리가 할 일이 분명해졌습니다. 그것은 성령님의 동역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람들은 예수님께로 인도하는 일입니다.

지난 여름 청년들이 필리핀에서 의료봉사를 했습니다. 그 때 모든 일이 철저한 협력 속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오신 분들을 안내하는 사람, 이름을 적고 열을 재고 혈압을 재는 사람, 그리고 차례대로 의사를 만나게 하는 사람, 진료하는 의사, 처방대로 약을 나누어주는 이들, 그리고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예수님 이야기를 하는 사람 등 모든 것을 협력하여 했습니다.

사람을 구원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을 예수님께서 인도하는 것은 우리의 책임입니다. 우리가 할 일입니다. 그 후 그 분들에게 예수님을 소개하는 것은 목사의 책임입니다. 그 후 그 분들의 마음 문을 열고, 예수님을 믿도록 하는 것은 성령님의 역사입니다. 

<사람을 예수님께로 인도하는 일, 사람들이 예수님의 소식을 듣게 해 주는 일>, 이 일은 사소한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들 중에서 가장 귀한 일입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 중에서 하나님을 가장 기쁘게 하는 일도 이 일입니다. 한 사람의 인생에 가장 큰 사랑의 자국을 남기는 일입니다. 이 보다 더 귀한 일은 없습니다. 우리가 듣는 칭찬의 말 중에서 <저 분 때문에 내가 예수님을 알게 되었습니다!>라는 말 보다 더 귀한 말은 없습니다. 우리로 인해 다른 사람이 천국의 사람이 된다면, 이 보다 더 아름다운 일은 없습니다.

더구나 이 일은 시간을 다투는 시급한 일이기도 합니다. 오늘 읽은 말씀은 다니엘이 본 환상 중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그 분위기는 매우 심각합니다. 그 심각성은 <환난>이라는 단어 때문입니다. 1절은 <그 때에>라는 말로 시작하는데, 그 때란 마지막 때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 때는 오늘 우리의 때입니다.

이 때의 특징은 환난입니다. 이 환난은 단지 질병이나 가난 등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영적 환난입니다. 즉 영적으로 사람들이 공격을 당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을 공격하는 적은 사단입니다. 사단은 독재적이고 폭력적인 정부들을 통해 사람들을 공격합니다. 사악한 이데올로기를 통해 공격합니다. 그런가 하면 달콤한 문화와 예술로 사람들을 공격하기도 합니다. 

이런 여러 공격의 목적은 하나입니다. 사람들을 멸망으로 끌고 들어가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공격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무너지고 있습니다. 몇 일전 부산에서는 여학생 두 명이 서로 끌어안은 채로 25층 아파트에서 뛰어내려 자살했습니다. 사단이 두 여학생을 공격하여 이긴 것입니다. 엊그제는 술 취한 사람이 제 차에 와서 부딪혔습니다. 저는 다른 차에 받힌 줄 알았습니다. 내려보니 차가 찌그러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보상을 요구할 형편도 못되었습니다. 술에 취해 서 있기도 힘든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영혼도 지금 무차별 공격을 받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글깨나 읽었다고 하면서 이런 저런 논리들을 동원하여 하나님이 없다고 말합니다. 

바로 이런 영적 전쟁이 곧 환난입니다. 이 환난을 개국 이래 없던 환난이라고 1절에서 말씀했는데, 지금 우리는 그 어떤 시대보다 더 심각한 영적 전쟁을 겪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결론은 둘 중 하나입니다. 하나는 죽는 것이요, 하나는 사는 것입니다. 본문 2절을 보세요. <땅의 티끌 가운데에서 자는 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깨어나 영생을 받는 자도 있겠고 수치를 당하여서 영원히 부끄러움을 당할 자도 있을 것이며>라고 했습니다. 살아남아 영생을 누리는 자가 있는가 하면, 수치를 당하여 영원한 부끄러움에 떨어지는 사람도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런 상황에서 여러분의 사랑하는 가족들을 영원한 부끄러움, 다시 말해 지옥의 고통으로 떨어지도록 방치하시겠습니까? 그대로 두시겠습니까? 사단의 무차별 공격에 노출된 그들을 그대로 두시겠습니까? 아니면 구하러 가시겠습니까?

이 가을과 겨울에 여러분의 사랑하는 분들을 구하시길 바랍니다. 우리는 12월 첫 주일을 목표로 사랑하는 이들을 사단의 공격에서 구하길 원합니다. 우리 모두가 그 분들을 구하는 일에 뛰어들기를 원합니다. 주보 사이에 이를 설명하는 팜플렛을 넣어드렸습니다. 잘 읽어보십시오. 추진 일정과, 어떤 분들에게 어떻게 전할 것인가 하는 것과, 모시고 올 분을 작정하여 내는 부분까지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최선을 다해 이 해가 가기 전에 소중한 분들을 사단의 공격으로부터 건져내는 일에 성공하시길 축복합니다.

이를 위해 기울이는 수고는 정말 값진 것입니다. 어머니를 교회로 인도하기 위해 서울에서 일부러 내려온 따님도 있습니다. 따님이 우리 목사님들에게 부탁합니다. <저희 어머니 좀 잘 돌봐 주세요!> 따님이 할 수 있는 최대의 효도입니다.

그 무엇도 이것보다 소중할 수는 없습니다. 몇 달 전에는 우리 교회 한 여집사님이 우리 교회를 떠나 이웃 교회로 가셨습니다. 그 이유는 시어머니를 전도해야 하는데, 어머니의 친구들이 그 교회에 있어서 그곳으로 가길 원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처음 교회에 가는 분이기 때문에 집사님이 모시고 가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기꺼이 집사님께 그렇게 하시라고 했고, 그 교회 담임목사님께 전화를 해서 알려드렸습니다. 그리고 후에 그 목사님을 만나서 물었습니다, <우리 교회에서 가신 집사님 잘 하고 계시지요?> 어머니를 구원할 수만 있다면 백 번이라도 보내드릴 수 있습니다. 그 집사님이 어느 교회에 다니는가 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그 어머니를 구원할 수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한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흘리는 땀은 가장 고귀한 것입니다. 이런 수고는 반드시 보상이 따를 것입니다. 이런 분들은 장차 찬란한 빛을 발하게 될 것입니다. 3절을 보십시오.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리라>고 했습니다.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 모두가 그렇게 되시길 기원합니다. 모두 하나님의 나라에서 빛나는 분들이 되시길 기원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사단과 맞서는 일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조금도 걱정 마십시오. 우리와 함께 싸울 분이 있습니다. 1절을 보세요. <그 때에 네 민족을 호위하는 큰 군주 미가엘이 일어날 것이요>라고 했습니다. 미가엘은 하나님의 천사장 중 하나로서 전쟁의 천사장입니다. 미가엘은 사단과의 전쟁에서 성도들을 지키고 보호하는 천사장입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에게는 미가엘보다 더 강한 분이 있습니다. 다름 아닌 성령님이십니다. 성령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셔서 우리의 사랑하는 분들을 예수님께로 인도하도록 도우실 것입니다. 결코 혼자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당당하게 이야기하십시오. 이 세상에서도 복되고, 영원한 생명의 구원을 얻는 길을 알려주겠다고 하십시오. 

아무쪼록 우리 모두가 이 가을에 사랑하는 분들을 위해 기도하고, 가슴에 품고, 12월에 그 분들을 주님께로 인도하길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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