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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람이 무엇이기에 (시 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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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무엇이기에 (시 8:1~9)
 

어제는 추석, 한가위, 중추절을 보냈습니다.   우리 민족의 2대 명절로 설날과 추석을 지내고 있습니다. 어젯밤에 나가서 보름달을 쳐다보셨습니까?  여러분, 시간을 내어 하늘을 쳐다보십시오.   하늘을 쳐다보아야 여러분의 순수해질 수 있고, 영성은 회복될 수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저도 하늘을 쳐다본 적이 별로 없었습니다.  도시의 휘황찬란한 불빛을 보는 동안 하늘을 쳐다볼 정신이 없었습니다.  도심 한복판에 살다보니 빌딩에 가려서 하늘을 쳐다보지 못하였습니다.   먹고살기도 바쁜데, 하늘이 무엇이라고, 하늘에서 무엇이라도 떨어진다고 쳐다보느냐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가끔 하늘을 쳐다보아야 하나님의 창조의 위대하심을 노래하게 됩니다.  헬라어로 인간은 위를 바라보는 동물이라는 뜻입니다.  

오늘은 “사람이 무엇이기에”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오늘 시편8편은 “다윗의 시,  인도자를 따라 깃딧에 맞춘 노래”라는 제목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시편은 하나님의 창조의 위대함을 드러내는 시로 유명합니다.  그러나 ‘깃딧에 맞춘 노래’라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잘 모릅니다.  ‘깃딧’이란 어떤 동리에서 만든 ‘특별한 악기’를 말하는 것인지, 포도를 수확하면서 추수 때에 부르는 노래일 것이라고 추측할 뿐입니다. 

1.  우리는 창조주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찬양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에는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이 하늘을 덮었나이다.”(1)라고 하셨습니다.   

3절에서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께서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늘을 우러러 주의 영광을 바라보아야 하고,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찬양해야 합니다.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께서 베풀어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본다”고 했습니다.   우리도 이 시인처럼 우리가 직접 천지만물을 보면서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노래해야 합니다.  

오늘의 말씀은 창조의 위대함을 노래하는 시편입니다.  창조의 위대함을 노래하지만, 사실은 하나님, 위대하신 하나님을 높여 찬양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어려서부터 목동으로 양떼를 치면서 산과 들로 다닌 사람입니다.  그가 전쟁을 지휘하면서 산과 들에서 야영한 적도 많았습니다.  사울왕에게 쫓겨 다니면서 산과 들에 나가 숨어 지낸 적도 많았습니다.   그는 자연을 바라보며 창조주 하나님을 찬양하였고,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노래했습니다. 1절 말씀에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이 하늘을 덮었나이다.”라고 하셨습니다.  

2절 말씀은 새번역으로 읽어드립니다.   “어린이와 젖먹이들까지도 그 입술로 주님의 위엄을 찬양합니다.”라고 합니다.  우리 개역개정판 성경은 그 본문의 뜻이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    어린이와 젖먹이도 그의 입술로 하나님의 위엄을 찬양해야 합니다.  하물며 우리는 더욱 소리 높여 하나님을 찬양해야겠습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우주를 바라보면 그 신비함을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온 하늘에 펼쳐있는 헤아릴 수 없는 그 수많은 별들이 쏟아져 내리는 것을 바라보면서 저 많은 별들이 도대체 몇 개나 될 것인가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우리 태양계가 속한 은하계에는  약2000억 개의 별들이 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이 우주는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데, 지금도 계속해서 팽창하고, 확장되고 있습니다.  약 2000억 개의 별을 가진 은하계와 같은 별의 군단이 다시 1000억 개 이상이라고 하니 우리의 좁은 머리로는 상상이 되지 않습니다.  

은하계에는 대략 2000억 개의 별들이 있는데, 그런 은하계와 같은 별의 집단이 다시 1000억 개는 넘는다고 하니, 이 우주의 신비라는 것을 다만 놀랄 뿐입니다.  우주를 설명할 때에 상상초월, 경이와 감탄이란 말로 설명할 수밖에 없습니다.   도대체 우주가 얼마나 크고 넓으냐는 것은 과학자들의 말을 빌리면, 지구상의 모든 바닷가의 모래와 사막의 모래를 모아서 우주에 날려버린 수의 10배는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우주가 얼마나 넓다고 생각하십니까?   빛은 진공 속에서 초당 약 30만Km를 달리고 있습니다.  빛이 일초 동안 달리는 거리를 일광초라고 하는데, 지구를 7바퀴 돌고 또 반 바퀴를 더 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주에서는 그런 빛의 속도로 빛이 일 년동안에 갈 수 있는 거리 그것을 일 광년이라고 합니다.  요즈음 천문학에서 사용하는 기본단위를 1파섹이라고 하는데, 1파섹이라고 하면 빛이 3.26년 동안 갈 수 있는 거리입니다. 파섹이라는 단위가 생소하기에 쉽게 광년으로 고쳐 말하는데, 우주가 얼마나 넓으냐 하면 빛이 1년 동안에 가는 속도로 가는데, 무려 320억 광년이 넘는다고 합니다.  

이 우주는 얼마나 넓은 것입니까?  입이 벌어져서 닫쳐지지 않습니다.  320억 광년이라고 하면 천문학적인 숫자, 무한대의 세계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면 별들은 대체 얼마나 많은 것입니까? 호주 국립천문대가 연구 발표한 수치가 있었는데, 7×10의 22승이라고 하는데, 전 세계 모든 해변과 모든 사막에 있는 모래알 개수의 10배 정도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훨씬 더 많을 것이라고 합니다.  

천체물리학자들이 말하는 우주의 나이는 137억 년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좀 과학이 발전하면 어떤 이론이 나올지 모르지만, 우주에 대한 모든 것은 신비할 뿐이요,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고 우리의 생각하고 주장하는 것보다 더 크고 놀라울 뿐입니다. 

하나님의 창조하신 세계를 돌아보면 현대과학으로 풀 수 없는 많은 숨은 비밀을 간직한 채, 그 모든 만물이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이 우주는 전능하신 하나님에 의하여 설계된 것으로 엄청난 하나님의 위엄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유명한 ‘아인슈타인’ 박사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종교가 없는 과학은 절름발이요, 과학이 없는 종교는 맹인이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위대하신 창조의 세계를 바라보시면서 하나님의 능력을 찬양해야겠습니다.  

우리는 우주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 그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찬양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어린이와 젖먹이의 심정으로 순수한 마음, 경이로움을 가지고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려야겠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위대하신 분을 예배하고, 찬양하고 그를 높여드리면 우리 자신도 따라서 위대해지고, 존귀하게 되고 순수한 마음으로 살게 됩니다.  이것이 예배드리는 사람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시시한 사람 앞에 서면 우리도 따라서 시시해지지만, 온 우주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 앞에 서고, 그 하나님을 예배하면 우리도 존귀한 존재가 되고 높아지는 것입니다. 


2.  우리는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무신론자인 쇼펜하우어라고 하는 유명한 철학자가 있습니다.  어느 날 복잡한 길을 가면서 어떤 생각에 골몰하고 있었습니다.   깊이 생각하면서 걸어가고 있으니, 앞에서 누가 오는지 가는지 생각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깊이 생각하며 길을 가다가 앞에서 오는 사람과 정면으로 부딪혔습니다.   앞에서 오던 사람이 화를 벌컥 내면서 “당신 누구요?”하고 소리를 쳤습니다.  쇼펜하우어는 미안한 듯이 뒤로 물러서면서 “바로 그것이 문제입니다. 내가 지금 누구인가 하고 생각하는 중입니다.”라고 했다고 합니다. 

여러분, 나는 누구입니까? 한 여자가 남편이라고 하니 남편이요, 딸들이 아버지라고 하니, 아버지이고, 우리 성도들이 목사님이라고 하니 목사입니다.  그러나 깊이 생각해보면 나 자신은 나일뿐입니다.  나는 누구입니까? 하나님 앞에서 나는 누구냐고 물어보아야 합니다.  나는 누구입니까?  

정신 분석학자이며, 심리학자인 프리츠 펄스(Fritz Pearls)라는 사람은 “통째로 버려라”는 책을 썼습니다.    그는 건강한 사람에 대한 특징을 네 가지로 말했습니다. 다 말씀드릴 수 없고, 첫째로 정신적으로 건강한 사람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아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남들이 무어라고 하든 말든 자신의 정체성을 아는 사람입니다.   예를 들어서 남들이 유식하다고 해도 내가 무식한 것은 내가 잘 압니다. 남들이 성공했다고 해도 성공하지 못한 것을 나만이 압니다. 남들이 보고는 건강하다고 해도 내가 병든 것은 내가 압니다.   아무리 세상이 달라져도 나는 나입니다.  나의 정체성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다른 사람의 평판에 우쭐거릴 필요가 없습니다.  나의 실상을 알아야 합니다.   영적인 수준도 알아야 합니다.  나를 발견해야 합니다. 

이 광활한 우주에 비하여 인간의 모습이란 보잘것없는 존재에 불과한 듯합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하나님은 인간을 지으실 때에 사람이 살아갈 모든 환경을 만들어놓으시고 사람을 지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지으실 때에 많이 생각하시고 지으셨습니다.  

유명한 종교개혁자 요한칼빈은 말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없이는 내게 대한 지식도 없다.”고 했습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하나님을 알아야 나를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이 인간입니다. 

인간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창조하셨는데, 오늘의 본문 4-5절 말씀에는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그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4-5)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인간으로 지음 받은 것을 감사해야 하고, 하나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인간이 무엇이기에”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항상 부끄럽고 부족함을 느끼고, 죄인에 불과하고, 심판받아야 마땅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 앞에 설 때면, “인간이 무엇이기에”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무엇이기에”라는 의문대명사 “마”라는 말인데, 배후에 숨어있는 특징과 속성을 물어보는 것입니다.   인간이 무엇이냐?  인간의 특징과 속성을 잘 이해하자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무엇이냐고 하면 하나님의 이름이나 묻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어떤 속성을 가진 분이냐를 묻는 것입니다. 

도대체 인간이 무엇입니까?   우주 만물을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께서 이 보잘것없는 인간에게 관심을 두시는 것입니까?   부족한 인간에게 존귀와 영광으로 관을 씌우셨습니다. 인간을 존귀하게 만들었습니다.  왜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생각하셨고, 돌아보시고 있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심혈을 기울여 만든 것이 인간인데,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는 존재로 지으셨습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알아볼 수 있는 자로 지으셨습니다.  인간만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입니다.  

 창세기 1:26-27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인간의 창조는 다른 피조물과 전혀 달랐습니다. 다른 피조물은 하나님의 형상이 아니고,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셨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하니, 외모양이 비슷할 것으로 생각하면 어리석은 발상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은 외형적이고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것이 아닙니다. 인간에게는 풍부한 언어 능력과 지능, 의지, 감정이 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인간만이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는 영성이 있는데 오로지 인간에게만 주어진 것입니다.  형상은 하나님과 교류할 수 있는 어떤 관계성을 가지고 지으셨다는 말입니다.  

유명한 바르트라는 신학자는 하나님의 형상이란 말은 한 마디로 말하면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어떤 일이 일어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존재로 지음 받았다”는 사실을 설명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지으실 때에 하나님 자신과 교통할 수 있고, 당신이 인간에게 말씀하실 수 있고, 인간이 당신에게 말씀드릴 수 있는 존재로 지으셨습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기에 하나님의 말을 들을 수 있는 ‘너’가 될 수 있으며, 하나님 앞에서 응답할 수 있는 ‘나’가 될 수 있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리고, 하나님을 대적하면서 살아가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만물의 으뜸으로, 만물의 영장으로, 지어주신 인간인데, 하나님을 영화롭게 아니하고 자기가 신이라도 된 것처럼 교만하고 자만에 빠져 살고 있습니다.  이기적인 존재입니다.  욕심으로 뭉쳐졌습니다. 

시139:13 이하를 보면 “주께서 내 내장을 지으시며 나의 모태에서 나를 만드셨나이다.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기묘하심이라 주께서 하시는 일이 기이함을 내 영혼이 잘 아나이다.”라고 했습니다.  기묘하심이라고 했는데, 예전 개역성경에는 “신묘막측”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세상에 보내실 때에 동물로 보내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지은 인간으로 보내어주셨다는 것으로 감사해야 합니다.  인간의 값어치를 감당해야 합니다.  아무리 똑똑한 침판지나 오랑우탄이나 개라고 해도 그런 동물에게는 신의 개념이 없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미개한 식인종이라고 해도 종교성이 있고, 영성이 있습니다. 우리 사람만이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시시한 존재가 아닙니다.  결코  무가치한 존재가 아닙니다.  그냥 밥이나 축내다가 죽으면 그만이 아닙니다.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지으신 사람입니다.  사람값을 하고 죽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도 있고, 대단히 죄송하지만 순종하지 아니할 수 있는 존재로 지음 받은 것을 감사해야 합니다.  하나님에게 불순종하여 죄를 짓고, 죄인이 되었지만, 짐승은 죄인이 될 수도 없으며, 양심의 가책도 받을 것도 없는 하찮은 존재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지으심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는 자유의지를 지닌 소중한 존재인 것을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 자신이 먼저 하나님이 지으신 소중한 존재임을 알아야 가치 있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3.  우리는 피조물로서 책임적인 존재로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 인간은 책임적인 존재로 지음 받은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6-9절입니다.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의 발아래 두셨으니 곧 모든 소와 양과 들짐승이며 공중의 새와 바다의 물고기와 바닷길에 다니는 것이니이다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하나님이 한 주간에 온 우주 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창조의 마지막 날 창조의 절정은 인간의 창조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우주 만물을 지으시고, 마지막으로 남자와 여자를 만드셨는데, 이 인간창조가 하나님의 창조의 역사 중에 가장 절정을 이루신 것입니다.    인간은 이성적인 존재로, 도덕적인 존재로, 책임적인 존재로, 사회적인 존재로, 영적인 존재로 지으셨습니다.    인간을 지으실 때에 다른 피조물과는 다르게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셨습니다. 

우리는 자연환경에 대하여 잘 보존하고 관리할 책임도 있습니다. 문화를 발전시키고 사람 살만한 사회를 만들어가야 합니다.  어렵게 살아가는 이들에게 대하여 빚진 심정으로 어우르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전쟁이 없고, 평화롭게 살아가는 지구촌, 지구가족을 만들어야 합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시고, 천국 시민으로 인쳐주시고, 보증으로 성령님을 보내어주시고, 천국의 후사가 되게 하시고, 존귀한 사람으로 성별해주시는 것을 감사하면서 사람값을 하다가 하나님 앞에 서야겠습니다. 

한경직 목사님을 생전에 가까이에서 모시던 목사님들이 남한산성 영락신학원 사택에 계시는 한목사님을 마지막으로 뵈었습니다.   “한목사님 저희 후배들을 위해서 한 말씀해주세요.”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는데, 마지막 돌아가는 목사님들을 향하여 “예수 잘 믿으시오”라고 인사하더라고 합니다. 우리는 예수 잘 믿는 것이 우리의 할 일이요, 예수 잘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요, 우리가 최선을 다하여 경주해야 할 일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십자가를 보면서 나를 보는 것입니다. 나를 위해 죽으신 십자가를 보고 그리고 나를 보면 내가 얼마나 소중합니까?  십자가를 바라보세요.  우리 주님은 우리도 소중한 일에 쓰임을 받게 하십니다. 

유명한 교육학자요, 신학자요, 사상가인 라인홀드 니버는 말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십자가 안에서 내 삶의 의미를 발견하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잘 믿어야 우리의 삶의 의미를 발견하게 됩니다.  십자가를 바라보아야 나를 알 수 있습니다.  억만 죄악을 대속해주신 주님,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모실 때에 참된 자아를 알게 됩니다.  내가 할 일도 알게 됩니다.   주님의 나의 전부이십니다.  주님은 나의 사는 이유가 되십니다.  주님은 나를 존귀하게 여겨주셨습니다.  

우리는 창조주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찬양해야 합니다.    우리 인간을 지으신 하나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피조물로서 책임적인 존재로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삶의 의미를 발견하고, 나만의 정체성을 가지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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