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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에바다 (막 7:3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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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바다 (막 7:31~37)


미국 동부의 한 대학에서 사회학을 가르치며 설교 사역도 하는 토니 캄폴로라는 교수님이 계십니다. 이분이 한번은 하와이로 휴가 여행을 떠난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하와이에 도착했을 때는 한 밤중이었는데 시간차로 잠도 오지 않고 배가 고파 밤 2시경에 해변 가를 배회하다가 유일하게 그 시각에 문이 열려 있는 한 엉성한 식당에 들어갔다고 합니다. 

예상했던 대로 지저분하고 분위기도 없는 그렇고 그런 식당이었습니다. 간단한 음식과 커피를 주문하고 식사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식당 문이 열리더니 한 눈에 보아도 거리의 여인들처럼 보이는 7-8명이 들어와 자리를 잡더니 떠들썩하게 이야기를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그중에 한 여인이 갑자기 ‘야, 내일이 내 생일이다. 

벌써 서른아홉 살이나 먹었다’고 하자, 당장 다른 여인들이 구박을 하기 시작합니다. ‘우리가 네 생일 축하라도 해주고 생일 노래라도 부르고 케이크라도 사달란 말이냐. 네 신세에 무슨 생일 타령이냐’ 그러자 이 여인은 갑자기 안색이 변하더니 ‘내가 언제 너희들 보고 생일 파티 해달라고 그랬냐. 내일이 내 생일이란 소리도 못한단 말이냐. 너희들 왜 나를 무시하는거냐’고 울부짖기 시작하자 이들 사이엔 욕설이 오가고 싸움판이 벌어졌다고 합니다.

이 광경을 한 동안 지켜보던 캄폴로 교수는 한 여인의 단순한 독백이었던 ‘내일이 내 생일인데···’라는 말에 그냥 ‘축하 한다’고 한마디 받아 넘기면 될 상황이 무엇 때문에 싸움판으로 번져 갔는가를 잠시 생각해 보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결론은 명백해 졌습니다. 이 여인들의 내면에 존재하는 상처들이 이들로 하여금 단순한 ‘생일 축하’ 한마디도 불가능하게 그들의 마음을 닫고 있었던 것입니다. 닫힌 마음은 그렇게 비극적인 것입니다. 

식당 주인의 만류로 한 바탕 거리의 여인들의 소란이 끝나고 이들이 자리를 뜬 후, 캄폴로 교수는 식당 주인에게 이 여인들이 자주 식당에 오느냐고 물었다고 합니다. ‘매일 이 시각에 옵니다. 단골이긴 하지만 골치 아픈 손님들입니다.’ 그러자 캄폴로 교수는 식당주인에게 ‘제가 실은 아이디어 하나가 생각났는데 내일 밤 생일을 맞은 그 여인의 생일잔치를 여기서 준비하면 안 될까요?’라고 제안을 하자 식당 주인 부인이 아까 그 여자 이름은 아그네스이고 마음은 아주 착한데 불쌍한 여자라고 말을 하며 너무 좋은 아이디어라고 동의를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다음 새벽 3시 반에 이 엉성한 식당에서 아그네스의 생일잔치가 열렸습니다. 식당 주인은 미리 거리의 여인 몇에게 소식을 알렸고 그래서 문자 그대로 인근 모든 거리 여인들이 식당을 빼곡하게 채운 가운데 아그네스가 입장하자 ‘Happy Birthday!’라고 노래를 부르며 환영하자 이 아그네스라는 여인은 식당 입구에서 입을 다물지 못하고 서 버렸다고 합니다. 캄폴로 교수는 지금까지 한 사람이 그런 표정으로 놀란 모습을 처음 보았다고 합니다. ‘생일 축하합니다. 사랑하는 아그네스, 생일 축하합니다.’ 이 노래를 부르는 동안 그 식당 안에 있던 모든 사람들의 눈은 흥건하게 젖어들고 있었고 아그네스는 엉엉 울고 있었다고 합니다.

이제 케이크를 자르라고 재촉하자 아그네스는 ‘부탁이 있는데 이 케이크를 내가 집에 가지고 가서 얼마동안 간직하면 안 될까요?’라고 말을 하더랍니다. 사람들이 동의하자 그녀는 케이크를 집에 갖다 놓고 곧 돌아오겠다고 하더니 무슨 거룩한 성물인양 케이크를 가지고 식당을 나섰다고 합니다. 그녀가 식당을 나서는 모습을 사람들은 넋을 잃고 바라보다가 식당은 갑자기 깊은 침묵 속에 빠져 들어 갔습니다. 

사람들이 이제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고 있었던 순간 캄폴로 교수는 다시 일어서서 ‘제가 아그네스의 행복과 여러분의 행복을 위해 기도하는 시간을 갖고 싶습니다’고 제안을 했다고 합니다. 그날 밤 가장 교회 같지 않은 곳에서 가장 경건한 감동의 기도가 나누어 졌고 사람들의 눈은 퉁퉁 부어 올랐다고 합니다. 캄폴로 교수는 그날 거기서 상하고 닫힌 마음들이 활짝 열리는 치유의 기적을 보았고 이 엉성한 식당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을 보았다고 고백합니다. 이 경험을 바탕으로 나중에 캄폴로 교수는 한권의 책을 쓰게 됩니다. 책의 제목은 이렇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파티입니다.’

‘내일이 내 생일이다’라고 말하는 여인에게 어느 누구하나 관심을 기울여 주지 않을 때 캄폴로 교수가 그녀에게 보인 관심은 생일을 맞이한 여인만이 아니라 그곳에 모인 모든 사람들, 그리고 캄폴로 교수까지도 감동을 받게 됩니다. 그곳은 하나님 나라로 변했습니다. 

오늘 본문에 불행한 한 사람이 나옵니다. 그는 귀 먹고 말이 어눌한 사람으로 세상을 향해 마음을 굳게 닫고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만나 예수님의 따뜻한 관심과 사랑을 받으면서 그의 생애에 하나님 나라의 파티가 시작됩니다. 

예수님께서 귀 먹고 어눌한 사람을 치료하시면서 하나님 나라의 파티를 만들어 가는 과정을 보면 예수님은 상처를 가지고 있는 사람과 함께 아픔을 나누셨습니다. 34절의 말씀을 함께 읽어봅시다.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에바다 하시니 이는 열리라는 뜻이라’ 예수님께서 병자를 보시고는 ‘탄식’하셨습니다. 본문에 사용한 탄식이라는 단어를 보면 단순한 동정의 탄식 정도가 아닙니다. ‘깊은 탄식’입니다. 예수님께서 병자를 보시는 순간 그가 지고 있는 인생의 고통의 무게를 느끼셨습니다. 질병으로 인해 그가 겪고 있는 아픔과 슬픔을 느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병자를 보시고 탄식하심은 그 사람의 고통을 당신의 온 몸으로 함께 느끼심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연민, 긍휼’로 번역하는 영어 단어 ‘compassion’이라는 단어는 ‘com’ 와 ‘passion’의 두 단어가 합성된 것입니다. 즉 ‘함께 고통을 받는다’ 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귀 먹어 말하지 못하는 가운데 그가 한 평생을 살아오면서 겪었던 아픔과 고통을 예수님은 그 사람과 함께 느끼셨습니다. 그와 함께 아픔을 함께 공유하시는 과정을 통해 예수님의 치유는 시작되었습니다. 

심리학자 레오 버스카글리아의 글에는 이런 얘기가 나옵니다. 어느 할아버지가 암 진단을 받았습니다. 이 할아버지는 암 진단을 받은 날부터 갑자기 성격이 매우 난폭해졌습니다. 식구들이나 주변 사람들에게도 욕을 퍼붓고, 아무도 만나려 하지 않고, 입원해서도 아무도 만나지 않았습니다. 간호사와 의사들에게도 포악하게 대했습니다. 어떻게 도울 수 없을까 해서 옛날 친구들을 들여 보냈지만 도움이 되지 못했습니다. 소리를 지르며 쫓아 버리고 말았습니다. 

또 그와 절친하게 지냈던 은사들을 보내 봤지만 그것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목사님을 보냈더니 목사님도 욕만 먹고 쫓겨났습니다. 카운슬러도 들여 보냈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동네에서 이 할아버지가 가끔 만나던 어린 꼬마가 할아버지가 아프다는 소식을 듣고 병원으로 왔습니다. 식구들은 호기심 반 기대 반으로 ‘한번 들어가서 할아버지를 만나 보렴’ 하며 그 꼬마를 들여 보냈습니다. 

그런데 한 20-30분 동안 이 어린 소년이 할아버지를 만나고 나오더니, 이 할아버지가 변한 것입니다. 태도가 갑자기 누그러지고 부드러워지고 사람들도 만나고 얘기도 하는 것이었습니다. 너무나 이상해서 소년을 붙들고 사람들이 물어 보았습니다. ‘너 할아버지하고 무슨 얘기를 했니?’ 소년은 대답했습니다. ‘아무 얘기도 안했어요’ ‘그러면 도대체 할아버지랑 20-30분 동안이나 뭘 했니?’ 그랬더니 어린 소년이 대답했습니다. ‘저요? 할아버지하고 같이 울었어요’ 

이 할아버지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느끼면서 함께 우는 순간, 더불어 껴안고 울던 그 눈물 속에서 할아버지의 아픔과 질병이 치유된 것입니다. 우리가 아픔을 겪는 사람의 아픔을 공감할 때, 그 아픔을 함께 느낄 때 치유의 능력이 솟아납니다. 

예수님은 당신 앞에 서 있는 귀 먹고 말을 못하는 사람을 보시면서 그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를 물어 보거나 확인하지 않으셨습니다. 그가 처해 있는 아픔을 보시고 탄식하심으로 그와 함께 아픔을 나누었습니다. 귀 먹고 말을 못하는 사람은 자신의 아픔을 진정으로 함께 나누는 예수님을 만나면서 자신의 닫힌 마음을 열게 되었습니다. 이 주일 아침에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상처와 아픔을 그대로 품으시고 위로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온 몸과 마음으로 느끼며 하나님을 향해 마음의 문을 활짝 여는 복된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귀먹고 말 못하는 사람을 무리에서 데리고 나와 한적한 곳으로 가셨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손가락을 그 사람의 양 귀에 넣었습니다. 그리고 침을 뱉어 그의 혀에 손을 대시며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시며 ‘에바다’라고 외치셨습니다. ‘에바다’라는 말은 ‘열리라’는 뜻입니다. ‘에바다’는 ‘귀가 열린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마음에 맺혀 있는 것이 풀린다는 의미도 가지고 있습니다. ‘데스모스’라는 헬라어는 사람의 심령을 짓누르고 있는 한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사단이 주는 불안과 고통 속에 짓눌려 마음이 이웃과 세상을 향해, 또한 하나님을 향한 영적인 영역까지도 굳게 닫혀 있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영어 단어들 가운데 감정이라는 단어를 보면 여러 개가 나옵니다. feelings, passion 등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emotion이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emotion이라는 단어는 ‘e’라는 접두어와 ‘motion’의 합성어입니다. ‘e’ 는 라틴어에서 온 접두어인데 ‘out’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motion’은 ‘move’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즉 감정이라는 것은 내면에 있는 것을 밖으로 내보내는 것을 말합니다. 내면의 세계를 밖으로 표현하는 것을 감정이라고 말합니다. 

성경에 보면 최초의 사람인 아담과 하와는 죄를 범하기 전까지는 자신의 감정을 숨김없이 왜곡시킴이 자연스럽게 표현했습니다. 아담이 하와를 보고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고백합니다. 최초의 이성간의 사랑의 고백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여기에서 동행했다는 말은 하나님과의 의사소통하는데 아무 어려움이 없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선악과를 따 먹은 후에는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는데 문제가 생깁니다. 자신의 감정을 왜곡시키고, 자신의 감정을 통제하지 못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은 후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찾아 오셨을 때 아담은 자신의 감정을 속입니다. 사실은 하나님이 두려워서 무화과나무 밑에 숨었는데 그는 자신이 벌거벗은 것이 부끄러워 숨었다고 자신의 감정을 속입니다. 

아담은 자신의 죄를 합리화시키기 위해 자신이 최고의 사랑을 고백했던 하와를 향해 ‘저가 따먹으라고 해서 먹었다’고 말합니다. 사랑이 순식간에 미움과 원망으로 변한 것입니다. 최초의 살인을 저지른 가인을 보면 자신의 분노의 감정을 절제하지 못해 동생 아벨을 잔인하게 죽입니다. 이와 같은 잘못된 감정의 표현은 바로 죄의 결과입니다. 죄로 인해 사단의 종이 되어 사단의 감정을 가지고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감정이 억압되고, 감정이 절제되지 않고, 감정이 왜곡되는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귀 먹고, 어눌하며 영적으로 눌려 있어 자신의 내면의 세계를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고 억눌려 있는 사람을 향해 ‘에바다’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에바다’의 의미는 그의 막힌 귀와 눌린 혀를 향해 외치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더 넓게는 그의 마음을 짓누르고 있는 영적인 억압을 향해 외치시는 말씀입니다. 35절에 보면 ‘그의 귀가 열리고 혀가 맺힌 것이 곧 풀려 말이 분명하여졌더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육의 눈을 가지고 세상의 것에 욕심을 품으면 우리의 감정은 하나님의 나라와 의로 인해 기뻐하지 못합니다. 두 귀를 가지고 세상의 잡다한 이야기에만 귀를 기울이며 울고 웃으면 우리를 향해 들려주시는 하나님이 세미한 음성을 듣지 못합니다. 입을 가지고 세상의 것을 자랑하고 주장하면 하나님 나라를 증거하고 찬양하는 일에는 어눌합니다. 

세상을 향해 우리의 마음이 옥토가 되어져 세상의 가치와 욕망에 민감하게 반응을 보이면 하나님 나라를 향해서는 길가와 돌밭, 가시밭이 되어 성령의 열매를 맺을 수가 없습니다. 손과 발이 세상의 즐거움과 이익만을 위해 부지런히 움직이면 하나님을 나라를 위한 헌신과 섬김의 영역에 있어서는 뻣뻣하게 굳어지거나, 오그라 듭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해 귀먹고 어눌한 병자를 향해 ‘에바다’라고 외치신 예수님께서 우리들을 향해서도 ‘에바다’라고 외치십니다. 귀먹고 어눌했던 사람이 예수님의 ‘에바다’라는 외침을 통해 깨끗이 치유되었듯이 이 시간 우리를 향한 ‘에바다’의 외침 안에서 우리의 굳어져 있는 영적인 영역들이 풀어지고 회복되는 은혜가 있기를 소원합니다. 

우리 몸의 자유함을 억압하고 있는 모든 질병으로부터 자유함을 얻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사단으로부터 눌림을 당하고 있는 우리 영혼과 마음이 자유함을 누리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나라는 진정한 영혼의 축제가 있는 곳입니다. 이 주일 아침에 우리들을 향해 ‘에바다’라고 외치시며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우리의 육과 영이 자유함을 누리는 하나님 나라의 파티가 열리는 삶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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