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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눔과 통합의 성사 (고전 10: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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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과 통합의 성사 (고전 10:16~17)


[우리가 축복하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여함이 아닙니까? 우리가 떼는 빵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함이 아닙니까? 빵이 하나이므로, 우리가 여럿일지라도 한 몸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모두 그 한 덩이 빵을 함께 나누어 먹기 때문입니다.] 

• 주님의 식탁으로

세계성찬주일을 기념하는 예배에 동참하신 모든 분들에게 주님의 위로와 평강이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한가위 명절을 잘 보내셨는지요? 가족들과 함께 지내면서도 저는 마음이 편치 못했습니다. 우리는 사모아 섬과 인도네시아 수마트라를 강타한 해일과 지진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을 당했다는 보도에 접했습니다. 

무정한 자연 재해 앞에서 망연자실 울고 있는 우리의 이웃들을 생각할 때 가슴이 아픕니다. 지난 1월 20일에 벌어진 용산참사 유족들은 8개월이 지나 추석을 맞이할 때까지 장례조차 치르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난 목요일 저녁 참사 현장에서 드린 예배를 마친 후 우리는 유족들이 빚은 눈물의 송편을 나누어 먹었습니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어 “떡을 참 맛있게 빚으셨네요” 하고 객쩍은 인사를 건넸지만, 우리는 서로의 마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유월절이 다가왔을 때 주님은 당신의 죽음이 임박했음을 절감하셨습니다. 그러면서도 제자들과 더불어 유월절 식사를 함께 나누셨습니다. 늘 그렇듯이 만찬에는 맛짜라는 누룩이 들지 않은 빵이 있었고, 포도주가 있었습니다. 주님은 유월절 의식에서 가장의 역할을 맡으셨습니다. 주님은 감사의 기도를 올리신 다음 맛짜를 둘로 쪼개시면서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다.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억하여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식사를 마치신 후에는 포도주 잔을 드시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다. 너희가 마실 때마다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억하여라”(고전11:24-25). ‘기억하다’는 뜻의 영어 단어 ‘remember’는 ‘다시’를 뜻하는 ‘re’와 ‘구성원’을 뜻하는 ‘member’가 결합된 말입니다. 기억한다는 것은 그를 다시금 우리 삶에 맞아들인다는 뜻입니다. 성찬식은 다시금 주님을 우리 삶의 주인으로 모시는 의례인 셈입니다. 성찬에 사용되는 빵과 포도주는 눈에 보이지 않는 주님을 상기시켜주는 기억의 매개입니다. 

예배공동체에 속한 성도들은 성찬식을 통해 자신의 인격과 성품이 그리스도를 닮아가기를 소망합니다. 헨리 나우웬 신부가 남긴 마지막 일기인 <<안식의 여정>>을 보면서 제가 좀 놀란 것이 있습니다. 하버드 대학과 예일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던 세계적인 학자인 그는 인생의 절정기에 대학을 사임하고 중증장애인들이 모여 사는 ‘새벽의 집’에 들어가 스스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아담’이라는 사람을 돌보며 살았습니다. 

밥을 먹여주고, 씻겨주고, 잠자리를 보아 주고, 휠체어를 밀어 산책시켜주는 것도 그의 일이었습니다. 여러 해를 그렇게 살다가 그는 안식년을 얻게 되어, 1년 동안 ‘새벽의 집’을 떠나 세계 이곳저곳에 흩어져 살고 있는 벗들을 만납니다. 그런데 주목할 만한 것은 그가 벗들과 만나면 늘 성찬식을 거행했다는 것입니다. 그곳이 어디이든 그들은 성찬을 나눔으로 자기들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형제자매인 동시에 그리스도의 손과 발이 되어 살아가야 할 존재임을 재확인하곤 했습니다. 그들의 사귐의 중심에는 성찬식이 있었던 것입니다.

주후 4세기 이후에 사막의 은둔소에 머물며 기도생활에 전념하던 이들을 가리켜 헤지카스트라고 부릅니다. 그들도 주일이 되면 은둔소에서 나와 인근 도시에 있는 교회를 찾았습니다. 그것은 예배와 성찬에 동참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존 웨슬리 목사는 은혜를 사모하는 이들이 해야 할 일 가운데 성찬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감리교도들에게 길을 가다가도 어딘가에서 성찬식이 있음을 알면 꼭 성찬에 참여한 후에 길을 떠나라고 권고했습니다. 

• 기억과 성찰 

성찬식은 어느 교회에서나 아주 엄숙하게 거행됩니다만, 사실 예수님이 제정하신 성찬은 일상의 식탁과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성찬식이 지나치게 신비화되는 것도 바람직한 일은 아닙니다. 그래서 어느 신학자는 교회의 상징은 성찬식에 사용되는 화려한 그릇들이 아니라, 주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닦아 주실 때 사용한 수건과 대야여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일리가 있습니다. 자칫하면 성찬은 교회와 성직자들의 배타적 권위를 상기시킬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복음서 가운데 가장 늦게 기록된 요한복음이 성찬식 제정에 대한 이야기 대신 제자들의 발을 닦아주신 예수님의 겸비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 아닌가 싶습니다. 하지만 복음서가 전해주는 성찬도 소박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맛짜와 포도주, 그들이 유월절이면 늘 먹는 그 음식을 통해 주님은 당신의 뜻이 제자들에게 계승될 수 있기를 바라셨습니다.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을 사람들에게 깊이 각인시킨 것은 무엇일까요? 하나는 여성들을 제자로 받아들였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식탁공동체입니다. 주님의 식탁에서 배제된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낯선 광경이었던지 사람들은 주님에게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는 별명을 붙였습니다. 여기에는 좀 수상쩍은 사람, 경건하지 못한 사람이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음식을 함께 나눈다는 것은 그와 식구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어린 시절 나는 어머니가 겨울이면 이불 속에 밥 한 그릇을 묻어두곤 하였던 것을 기억합니다. 그것은 불쑥 찾아오는 이들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소금장수든 방물장수든 우리 집을 찾아오는 이들은 모두 손님이었습니다. 어머니와 그 상인들은 물건만 사고파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는 이야기도 함께 나누곤 했습니다. 그런 이야기는 사람과 사람 사이를 이어주는 끈입니다. 

제자들은 성찬을 통해 주님과 함께 지냈던 때의 기억을 반추하고, 그분의 현존이 자기들 속에 일으켰던 변화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을 것입니다. 이런저런 삶의 고통에 시달리는 이들을 보면서 안타까워하시고, 어찌하든지 그 고통을 덜어주려고 애쓰시던 주님의 모습, 세상의 권세자들 앞에서 한없이 당당하시던 주님의 모습, 한적한 곳을 찾아가 하나님 앞에 엎드리셨던 주님의 모습, 그리고 십자가에서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도 ‘저들의 죄를 용서해달고’고 빌던 주님의 모습, 그리고 두려움에 떨던 자기들을 찾아와 평안을 빌어주며 새로운 사명을 주시던 주님의 모습…주님에 대한 기억은 또한 거울이 되어서 지금 자신들의 모습을 돌아보게 하였을 것입니다.

• 빵집 노인의 성사

오늘 성찬에 참여하는 이들은 마음속에 예수적인 존재로 변화되고픈 열망을 가져야 합니다. 디이트리히 본회퍼 목사는 성도의 삶을 ‘타자를 위한 존재’라는 한 마디로 요약했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에 대한 교리를 인정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의 정신을 우리 삶을 통해 되살려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병든 이들을 고쳐주고, 귀신들린 이들에게서 귀신을 쫓아내고, 소외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성도가 된다는 것은 자기 초월, 즉 자기 밖으로 나가 다른 이들에게 선물이 되는 삶을 지향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성찬에 참여하는 이들은 다른 이들과 더불어 기쁨도 나누고 슬픔도 함께 나누는 나눔의 사람이 됩니다. 이 시간 하인리히 메르텐이 들려주는 아름다운 이야기를 기억합니다.

파리의 야곱거리에 있는 빵집에는 손님들이 많았습니다. 빵 맛이 좋기도 했지만, 사실은 나이가 지긋한 빵집 주인의 아버지께 마음이 끌려서 오는 이들이 많았습니다. 사람들은 그 노인이 지혜롭고 인정미가 넘치는 사람이라고 말하곤 했습니다. 하루는 버스 운전기사인 게라드가 우연히 야곱거리를 지나다가 그 빵집에 들렀습니다. 수심에 차 들어오는 그에게 빵집 노인이 말을 건넸습니다.

“무슨 걱정거리가 있으신 것 같군요?”
“예, 막내 딸아이 때문에 정말 걱정입니다. 그 아이가 어제 창문에서 떨어졌거든요. 그것도 2층에서 말입니다.”
“몇 살이나 됐는데요?”
“이제 네 살이에요.”
그러자 빵집 노인은 진열장에 있는 빵을 꺼내 둘로 쪼개어 한 쪽을 게라드에게 주며 말했습니다. “당신과 당신 딸을 생각하겠소.”
게라드는 한 번도 이런 일을 겪어 본 적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빵집 노인이 자기에게 빵을 떼어 줄 때 그것이 무슨 뜻인지 금방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두 사람은 빵을 먹었습니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입원해 있는 딸애를 생각했습니다.

빵집엔 게라드와 노인 둘만 있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한 부인이 근처 시장에서 산 우유 두 봉지를 들고 빵을 사기 위해 들어왔습니다. 빵집 노인은 부인이 들어오자마자 빵을 떼어 부인 손에 쥐어 주며 말했습니다. “어서 오세요. 우리 함께 빵을 나눠 먹읍시다. 이분의 막내 따님이 크게 다쳐 병원에 입원했다지 뭡니까. 창문에서 떨어졌다는군요. 이제 겨우 네 살인데 말입니다. 우리 그 아이의 아버지가 결코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어야 하겠습니다.” 부인은 그들과 함께 빵을 나누어 먹었습니다.(<<태양과 곡식과 금>>, 성서와 함께, 1991 중에 나오는 하인리히 메르텐의 <손에 있는 빵을 나누세요>) 

• 아름다운 세상의 꿈

빵을 사러 왔던 게라드는 뜻밖에도 자신과 고통을 함께 나누는 정신의 벗들을 얻게 되었습니다. 빵을 함께 나누면서 그들은 어쩌면 자기들 속에 현존하고 계신 주님을 경험했는지도 모릅니다. 빵집 노인은 성찬의 정신을 자기의 구체적인 일상 속에서 구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노인의 따뜻한 초대가 그들을 하나로 묶어주고 있습니다. 낯모르는 부인까지도 게라드의 딸을 생각하며 기도합니다. 성찬은 그렇기에 나눔을 통한 통합의 성사입니다. 주님의 마음이 들어가면 사람들은 일치의 기쁨을 맛봅니다. 너도 없고 나도 없습니다. 바울 사도는 이런 신비를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유대 사람도 그리스 사람도 없으며, 종도 자유인도 없으며, 남자와 여자가 없습니다. 여러분 모두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기 때문입니다.”(갈3:28)

우리는 지금 차별 없는 사랑의 세상을 열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까? 내년에 우리나라에서 G20 정상회의가 열리게 되었습니다. 세계적인 금융위기를 경험한 후 주요국들이 함께 모여 세계경제문제, 에너지, 자원, 기후변화, 기아, 빈곤 문제 등을 폭넓게 논의하는 자리라고 합니다. 정부는 우리가 세계의 중심이 될 기회라며 들뜬 표정을 감추려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정말 우리가 세계의 중심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나라의 국격이 올라가야 합니다. 약한 사람들을 배려하고, 돌보고, 그들이 안심하고 살 수 있는 사회 시스템을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하고, 국제적인 기아와 빈곤 문제를 풀기 위해서도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용산 참사로 상징되는 우리 사회의 눈물을 닦기 위해 정부는 몸을 낮추어야 합니다. 교회도 그 아픔의 현장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좋은 나라, 좋은 교회는 선언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실천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북녘의 동포들이 식량난에 허덕이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있습니다. 수단과 에티오피아를 비롯한 동부 아프리카의 여러 나라들이 기근으로 말미암아 위기에 처해 있다는 소식도 들려옵니다. 사모아와 인도네시아의 지진 피해는 극심합니다. 지금 세계 도처에서 ‘게라드’와 같은 처지에 있는 이들의 탄식이 들려옵니다. 그들과 진심으로 빵을 떼며 마음을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

세계성찬주일인 오늘 주님의 살과 피를 상징하는 빵과 포도주를 나누며 우리는 그동안 외면해왔던 인류의 절반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들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시작할 때 평화의 문이 우리 앞에 열릴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축복의 잔에 참여하고, 축복의 빵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우리가 평화의 일꾼이 된다는 것, 조각난 세상을 사랑의 끈으로 묶는 사람이 된다는 것, 그보다 더 큰 축복은 없습니다. “나는 ,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더 넘치게 얻게 하려고 왔다”(요10:10b) 하신 주님의 말씀은 바로 이 경우를 이르는 말입니다. 주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셔 더욱 넘치는 생명의 담지자들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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