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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하고 아름다운 가정 (시 133, 막 3:33~35)


송편 맛있게 많이 드셨는지요? 명절 고향과 고향교회 찾아가 예배드리는 일 귀한 데, 가족들과의 정겨운 만남 좋으셨는지요? 이웃과의 정도 나누셨는지요? 

저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진학하면서부터, 아버지 어머니 품과 집을 떠나 지금껏 살아왔습니다. 그러니까 ‘마흔 아홉’ 인생을 살아오는 동안 가만 계산해 보니, 아버지 어머니, 제가 6남매(맏이)인데 형제들과 한 지붕 밑에서 살아온 세월은 겨울 19년 밖에 되지 않습니다. 막내 동생과는 10년 차이가 나는데, 그렇게 따져보니 막내 동생하고는 제 평생, 겨우 9년 밖에 같이 살지 못했습니다. 큰 兄이라지만, 동생에게 뭘 별로 해 준 것도 없이 40년이란 세월을, 서먹서먹하다시피(저를 무척 어려워했다) 훌쩍 지나버리고 말았습니다. 인생이 참 기막히다 싶은 생각이 듭니다. 가족이라는 意味가 血統을 나눈 것 만이라고 생각한다면 말입니다.

며칠 전, 성북경찰서에 소속된 전의경들과 ‘추석감사예배’ 드리면서 말씀을 전하는 기회가 있었는데, 전의경들에게 “여러분도 이젠 좋은 시절 다 지나갔습니다. 사랑하는 부모님과 사랑하는 형제들과 한 지붕 밑에서 살아갈 수 있는 날, 앞으로 길어야 5, 10년 넘지 못할 것입니다”(그러자, 세상 물정 모르는 紅顔의 전의경들의 눈동자가 생각지 못했다는 듯이, 똥그래지더라고요). 

♣ 우리는, 인생을 좀 더 넓은 시야를 가지고 살 필요가 있습니다. 특히, 새로운 가정(족)의 개념을 가져야만 합니다. 우리나라사람 만큼 󰡔가족󰡕이라는 말을 많이 쓰는 나라도 흔치 않습니다. 한 때, 기업들까지도 󰡔가족󰡕이라는 말을 썼습니다. 삼성가족, 대우가족, 쌍용가족 했습니다(사회학적으로, 類似家族主義). 

분명한 것은, 우리가 쓰고 있는 다양한 가족개념들이 바뀔 필요가 있다는 겁니다. 利己的인 面이 좀 강합니다. 가족주의라는 말도 있잖습니까? 인생을 살아가는 󰡔삶의 範疇󰡕가 너무 좁고, 작다는 뜻이지요. 血統主義, 血緣主義, 人種差別은, 정도의 차이뿐이지, 어디 간들 없다하겠습니까? 否認할 수 없는 現實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그 자리에 그냥 머물러 있을 수야 없지 않습니까?

♣ 시편 133편은 다윗의 시입니다. 󰡔곧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라는 표제어가 붙어 있는 시입니다. 성전에 올라가면서 불렀던 노래라는 이야기지요. 이 시의 노래를 보십시오. 핵심은, 1절에 있습니다. 2, 3은 1절 말씀을 뒷받침해주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1절 말씀 보십시오.

“보라, 兄弟가 聯合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善하고 아름다운고.” “보라(BEHOLD)”는 감탄, 명령형으로 시작합니다.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여기 중요한 단어는, 󰡔형제󰡕라는 말입니다. 형제는 누구를 가리키는 말일까요?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말이 있는데, 피를 나눈 가족을 말하는 것일까요?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여기 ‘兄弟’는, 동일한 정신으로 하나 된, 동일한 목적을 추구하는 ‘운명공동체’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시편 133편이, 聖殿에 올라가면서 부르는 노래라 하지 않았습니까? 성전에 올라가는 자들을, 형제라고 불렀다는 말입니다. 그들은 무슨 목적을 가지고 성전에 올라가는 자들이었을까요? 살아계신 이스라엘의 하나님,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께, 예배하러 올라가는 자들입니다. 예배공동체 곧 신앙공동체를 두고, 다윗은 ‘형제’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예배공동체로 모이는 그들, 모여서 연합하여 함께 동거하는 그 모습이 지극히 善하고 아름답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아름답다고 합니까? 마치,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 옷깃까지 내림 같다/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소외됨이 없습니다. 충족합니다. 충만 그 자체입니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하셨는데, 그 복이 永生입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이스라엘 공동체를, 선하고 아름다운 형제로, 信仰家族으로 명명한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그들 모인 가족공동체에게, 福을 命하셨다 합니다. 그 명하신 복이, 永生입니다. 福의 지속성은 말할 것도 없고, 그 福은, 이 세상에서 취할 수 있는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 나라의 복이라 했습니다. 

♣ 신약의 말씀 마가복음 3, 33에서 예수님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십니다.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동생들이냐?” 이 질문은, 누가 예수님의 가족이냐는 문제에 부딪히신 예수님께서, 답을 하시면서 던진 질문형식의 답입니다. 답이면서, 동시에 또 다른 질문을 하신 것이지요. 우리도 이와 같은 동일한 질문을 받은 적이 있으실 것입니다. 그때, 우리의 답은 무엇이었습니까? 만일, 답을 찾지 못하셨다면, 오늘 말씀에서 그 답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동생들이냐?” 질문하신 예수님은, 말씀을 듣기 위해 둘러앉은 주위 사람들을 보시면서 이르십니다. “내 어머니와 내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兄弟요/ 姉妹요/ 어머니이니라”(막 3, 34-35). 가족의 의미를 완전히 바꾸고 계시는 예수님을 봅니다. 이 말씀은, 다음과 같은 배경 속에서 하신 말씀입니다.

아시는 대로, 예수님께서 자라나신 고향은 ‘갈릴리 나사렛’이라는 마을입니다(갈릴리지방 남부, 자그마한 시골 마을). 30세에 예수님은, 나사렛의 집을 떠나셔서 거기서, 북동쪽으로 약 40km 떨어져 있는 갈릴리 바다 연안에 위치한 큰 성읍, ‘가버나움’으로 이주하십니다. 가버나움에, 공생애 본부를 두시고 ‘하나님 나라 운동’을 하십니다. 가버나움은, 지중해 水面보다 약 200m 정도 낮은 곳입니다. 갈릴리바다가 해발 —200m정도 되었다는 이야깁니다. 

예수님께서 자라나신 고향, 나사렛보다 훨씬 지대가 낮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가버나움으로 내려오셨다(눅 4, 31)는 표현을 쓰고 있는 보지 않습니까? 세관이 있어 국제적인 교류가 많은 도시 무역의 중심지였습니다. 로마군대가 주둔하고 있었습니다. 로마 군대 백부장의 종을 고쳐주신 곳 아닙니까? 베드로의 장모 열병을 고쳐주신 곳이고, 중풍병자를 네 사람이 메고 와서 지붕을 뜯고 고침 받게 했던 곳입니다. 오병이어 표적도 행하셨던 곳입니다.

가버나움에서 공생애 사역이 막 시작되었을 무렵, 대 소동이 벌어졌습니다. 무슨 소동입니까? 바알세불 소동입니다. 유대종교 지도자들이었던 서기관들(율법학자, 랍비)과 바리새인들이, 이적기사 행하시는 예수님의 공생애 활동을 두고 ‘바알세불이 지폈다’ 비난했습니다. ‘바알세불’이란 ‘귀신의 왕’이란 뜻입니다. 서기관들․바리새인들의 눈에는 예수님이 귀신 왕 바알세불을 힘입지 않고서는, 그런 놀라운 일을 행할 수 없다고 보았던 것이지요.

‘바알세불이 지폈다’(가지고 있다, 사로잡혔다)면서, 예수님을 불신했습니다. 결국, 예수님을 미친 자라고, 귀신들린 자라고 했다는 말입니다. 더 놀라운 것은, 그 예수님께서 선포하시고 가르치시는 하나님 나라 복음말씀을 가만 보니, 지금껏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가르치고 주장하던 것과는 그 해석이 너무나도 달랐습니다. 그 가르침의 차원이 완전히 달랐다는 겁니다. 이런 말씀 보시지 않으셨습니까?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예수께서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시매, 뭇 사람이 그의 교훈에 놀라니, 이는 그가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막 1, 21-22; 마 7, 28-29). 

문제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만 예수님이 바알세불이 지폈다, 미쳤다 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가슴 터지는 일이 또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가족들, 어머니와 형제들도 조차도, 예수님이 미쳤다고 생각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집으로 잡아 가기 위해서, 나사렛에서 40km나 떨어진 가버나움까지 내려왔다는 사실입니다. 

그렇잖아도, 방금전까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과 바알세불 지폈다고 해서 뜨거운 논쟁을 벌이시지 않았습니까? 바로 그 즈음에 때마침, 예수님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예수님을 나사렛 집으로 잡아가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말씀을 가르치고 계시는 집에 당도했다는 것입니다. 그 집에 와 보니, ‘立錐의 여지’도 없었습니다. 인산인해였습니다. 하는 수 없이, 예수님의 가족들이 밖에서 사람을 보내어, 예수님을 부릅니다. 

“보소서, 당신의 어머니와 동생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찾나이다”(32하). 예수님은 가족들이 찾아온 이유를 이미 다 알고 계셨습니다. 그 때 하신 대답이, 다음의 질문입니다(質問答). “누가 내 어머니이며 동생들이냐?” 질문을 던지시고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말씀을 듣기 위해서, 삼매경에 빠진 둘러앉은 자들을 보시며 이르십니다. “내 어머니와 내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막 3, 34-35).

▶ 우리가 경험하지 않습니까? 인생을 살다보면 父母子息 間에도, 兄弟姉妹 間에도, 義 傷하는 일, 많습니다. 말도 하지 않고 지내는 일, 많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우신 가정(족)의 기준은, 혈연이 아닙니다. 혈통이 아닙니다. 인종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입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가르치시고 선포된 하나님 나라의 복음말씀에 순종하고 응답하며 사는 것이, 예수님과 한 가족이 되는 기준이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예수님의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라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主를 따랐나이다”하자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있지요(막 10, 28-30).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兄弟나 姉妹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子息이나 田土를 버린 자는, 백 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來世에 永生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예수님과 복음 때문에 생기는 가족이 더 많아진다는 말씀입니다. 재산도 더 많아진다는 겁니다. 그러나 핍박도 받습니다. 궁극적으로는 永生을 받지 못할 자가 없습니다. 

이것은, 우리시대가 추구하는 가족이기주의나, 집안중심주의, 물질적인 복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관계의 복을 말합니다. 삶의 질의 복을 말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사는 것을 말합니다. 곧 영생의 복입니다. 그러나 우리사회의 󰡔잘 산다󰡕는 의미는, 오직 물질주의적인 것으로만 축소되어 있습니다. 돈만 많으면, 󰡔잘 산다󰡕고 하지 않습니까? 집안중심, 물질중심에 예속된 사회입니다. 

우리사회가 50, 60년대에 절대적인 가난을 경험한 후 70, 80년대 들어와 산업화, 민주화과정을 거치면서 나타난 특이한 현상 중 하나는, 옛 것이 많이 잔존하면서 산업화, 민주화의 과정을 밟았다는 겁니다. 무엇이 잔존하고 있습니까? 民族主義, 家族主義價値입니다. 배타적인 면이 강합니다. 집안중심, 물질중심에 예속된 가치 수준을 넘어서질 못했습니다. 유사가족주의까지 등장한 것 아닙니까? 심지어 교회까지도 (예)‘정릉가족’(저는 잘 쓰지 않는 표현인데, 예수님 말씀과 같은 의미라는 좋은 표현입니다), 이해관계의 중심이, 가족 단위라는 것입니다. 가족중심주의적인 의식이 우리 사회에 고스란히 잔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나라에 기독교 복음이 전파되었을 때, 당시 우리사회에 미친 기독교의 복음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복음은 價値變革的이었습니다. 유교가치 위에 세워져 있던 우리사회에 기독교 복음이 뿌리내리면서, 祭祀文化를 파기하는 힘을 발휘하지 않았습니까? 신분의 벽이 허물어지는 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종과 백정이 예수 믿고, 교회공동체의 주역이 되었고, 건강한 리더십의 자리에 함께 세워지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조덕삼’이라는 양반 집 馬夫였던 ‘이자겸’이라는 종이, 主人보다 먼저 교회에서 장로가 되었습니다. 도리어 주인 조덕삼은 자기 집 馬夫 ‘이자겸’을 훌륭한 장로가 되도록, 키워주는 역할을 합니다. 복음의 능력이 그것을 가능케 했습니다. 복음이 우리나라 사회변혁의 動因이었던 거지요. 전통에 대한 도전의식이었습니다. 일본의 식민통치에 맞서는 힘이 되기도 했습니다. 

▶ 요즘 기독교인들은 예수를 믿어도, 이해관계 문제에 부딪히면 비 신앙인들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집주변에 장애인 복지시설을 세우려고 할 때, 가장 먼저 앞장서서 반대하는 사람들이 교회 다니는 주민들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혈연을 무시하거나 부정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도리어 가족과 형제의 의미를 더 확장시키는 말씀입니다. 심화시키는 말씀입니다. 

어느 일간지 신문에, 우리의 가슴을 뭉클하게 해주는 기사가 실렸습니다. 추석을 3주 앞두고, 2년 반 넘게 胃癌을 투병하던 엄마를 잃은 12살 난 ‘슬기’(假名)라는 여자아이를 딸 삼은 이야기입니다. 슬기 엄마는 未婚母였습니다. 엄마가 위암으로 병원에 계시자 교회 목사님 집과 장로님 집 등을 한 달씩 돌아가며 지냈는데, 엄마가 돌아가시자 혼자 된 아이입니다. 그런 슬기를 딸 삼은 울산에 사는 朴氏 가족의 이야깁니다. 

또 한 가족이야기는, 12살 난 탈북소녀 ‘연아’(가명)를 양녀로 삼은 가정입니다. 생모와 함께 탈북했지만 탈북과정에서 생모는 중국 공안에 잡혀 북송된 이후 소식을 모른답니다. 연아는, 태국을 거쳐 1만km 대장정 끝에 우리나라에 와서 하나원에서 사회적응훈련을 받았습니다. 연아 같은 아이들을 무연고 청소년이라 하는데, 하나원 교육이 끝나면 막막해진답니다(연고가 없는 아이들은, 주로 지방의 청소년보호시설로 들어가고 있다고 합니다). 

연아의 소식을 들은 40대 중반의 어느 한 부부가, 연아를 입양하겠다고 나선 것입니다. 연아의 아버지가 된 조씨는, 10여 년 전부터 사회봉사활동을 하면서 입양을 생각해왔다면서, 지인을 통해서 연아 사정을 듣고는, 아내와 상의해서 결정했다고 합니다(군에 간 아들, 고3 딸을 둔 가정). 연아를 데려온 후, 조씨 부부가 “아줌마 아저씨라고 하지 말고 엄마, 아빠라고 해보자” 하니, 새침하게 연아가 북한 사투리로 “생각 좀 해 보겠습니다”고 했답니다. 잠시 후, 자기 방에 들어간 연아가 방문을 열고 고개만 쏙 내밀면서 “아빠, 엄마”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연아가 건강한 인격으로 잘 자라기까지는 얼마나 많은 쉽지 과정, 왜 없겠습니까? 그러나 딸 삼은 아빠, 엄마, 오빠, 언니의 사랑이 연아의 人生에 祝福의 통로가 되지 않겠습니까? 

야고보가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孤兒와 寡婦를 그 患亂 中에서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약 1, 27). 우리 모두가 主 안에서 선하고 아름다운 가족이 되십시다. 가족의 範疇를 점점 더 넓혀 가 보십시다. 우리 가정을 하나님의 뜻이 통하는 축복의 통로로 만들어 보십시다. 아멘.

하나님 아버지, 죄로 인하여 하나님과 怨讐 되었던 우리, 죽었던 우리와 화목하시고, 살리시고, 자녀 삼아주신 것 감사드립니다. 우리의 삶에도, 하나님의 뜻 이루어져 예수님의 가족 이루게 하옵소서. 주의 말씀 안에서 성도의 교제(코이노니아)가 이루어지게 하시고, 가족의 범위가 점점 더 넓어지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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