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그릇된 자아 깨기 (행 9:19~22)

  • 잡초 잡초
  • 661
  • 0

첨부 1


그릇된 자아 깨기 (행 9:19~22)


성경 인물 중에 가장 극적인 인물은 사도바울일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를 부르신 이유는 이방 전도 때문입니다. 12제자로서는 역부족이었습니다. 그들은 유대의식이 너무 강했고 이방전도에 대한 개념이 전무했습니다. 예수께서 태어났을 때 늙은 선지자 시므온이 결례받기 위해 성전에 온 예수를 품에 안고 예언하기를 “이는 이방을 비추는 빛”(눅 2:32)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예루살렘과 유대인만을 속량하시는 것이 아니고 전 세상 사람을 모두 사랑하시고 구원하시고 속량하시는 것이 목적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유대인만의 의식이 강하고 이방세계에 대한 의식이 전무했습니다. 

그래서 마음과 생각과 의식이 열린 바울을 부르신 것입니다. 당시 바울은 로마시민권자 였습니다. 그리고 헬라철학에 능통한 사람이었습니다. 복음의 세계화를 이루는데 적임자였습니다. 마침내 바울이 부름 받아 사도가 되어 오늘 모든 신앙인의 사표가 되었습니다. 그는 복음이 확실했고 오직 예수만 부르짖는 사도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모든 목회자들의 사표가 되었습니다. 그는 소명이 분명하였고 열정이 있었습니다. 

부름받기 전 병든 자아에 매임 

그러나 그는 부름받기 전에는 자기 자아에 너무 강하게 취해 독선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때 바울은 유대교와 율법에 심취해 열광했습니다. 그래서 자기 생각, 자기 종교, 자기주장과 다른 사람을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유대교와 율법을 강요했습니다. 이것을 독선이라고 하고 도그마라고 말합니다. 이런 사람이 권세를 잡으면 독재자가 됩니다. 

그리고 이런 사람이 종교인일 경우 대부분 교주가 될 확률이 높습니다. 이런 사람이 시어머니 일 경우 시집살이를 엄청 시킬 확실한 시어머니가 됩니다. 사람이 이런 태도로 살면 도전을 받습니다. 독재자는 국민들로부터, 교주는 이탈한 교인들로부터, 시어머니는 장차 며느리로부터 도전을 받습니다. 어느 인질범이 시어머니를 납치하고 “시어머니를 납치했으니 돈을 내라”고 며느리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그러자 며느리는 “나는 모르니 알아서 하라”고 했습니다. 

납치범이 “그러면 시어머니를 돌려보내겠다”고 하니까 며느리가 “그러면 빨리 계좌번호를 대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강하면 이런 도전에 직면하게 됩니다. 바울은 너무 자기주장이 강했고 독선적이었습니다. 그래서 자기의 뜻을 강요하기도 했습니다. 자아가 병들거나 건강치 못하면 자기주장이 강하고 자기 뜻을 강요합니다. 이단은 자기 교리를 강요합니다. 독재자는 개혁한다고 내 뜻을 따르라고 강요합니다. 

이런 그릇된 자아에는 불필요한 힘도 있고 열정도 있습니다. 바울을 보십시오. 어느 날 다메섹으로 달려갑니다. 예루살렘에서 다메섹은 230km 나 되는 거리입니다. 그 먼 거리를 단숨에 달려갔습니다. 그곳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잡아오기 위해서입니다. 자기가 믿는 유대교와 율법을 무시하고 예수와 십자가와 부활을 전파한다고 잡아오려고 달려갔습니다. 

얼마나 독기가 서려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자아가 건강치 못한 사람은 불필요한 일에 힘을 쏟습니다. 귀신 들린 사람은 속에서 무서운 힘이 솟아나옵니다. 병든 자아 때문입니다. 술 취한 사람도 속에서 술의 힘이 솟아나옵니다. 고집 자들을 보면 돌아다니며 편을 만드는데 열정적입니다. 모두 병든 자아가 주는 힘 때문입니다. 바울이 부름받기 전에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이웃에 피해를 주고 그리스도인들에게 피해를 주었겠습니까. 사람이 이렇게 살면 주위 사람들이 모두 피곤합니다. 자아가 이렇게 건강치 못하면 가는 곳 마다 불화를 일으키고 갈등과 불편을 야기합니다. 자아가 병들어서 건강치 못해서 그렇습니다.   

부름 받음 

바울이 그렇게 미친 듯이 돌아다니다가 어느 날 환상 속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는 그 환상 속에서 자신이 그토록 증오하며 무시하던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게 됩니다. 만나서 알고 보니까 자신이 그토록 증오하던 부활하신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었습니다. 알고 보니까 그토록 무시하던 기독교의 진리가, 십자가가, 부활이, 예수가 모두 사실이었습니다. 자신이 그토록 믿던 율법과 비교를 해 보니까 비교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지금까지 자신이 저지른 행동들이 모두 폭군이었고 깡패였고 폭력배였습니다. 얼마나 충격이 컸겠습니까. 그래서 그는 그 길로 아라비아 사막으로 들어가 3년 동안 칩거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는 고민을 했을 것입니다. 황당함 때문에 부끄러웠을 것이고 지난날 있을 수 없는 행동 때문에 망연자실 했을 것입니다. 그때 바울은 자신의 강했던 병든 자아를 완전히 부수어 버립니다. 무지한 자신을 송두리째 깨버렸습니다. 

그리고 그는 새로운 존재로 거듭났습니다. 3년간의 칩거를 끝내고 사막에서 나오면서 그는 고백했습니다. “나는 죄인 중 괴수로다”, “나는 이제부터 예수만 알기로 작정하노라.” 그는 삶을 완전 전향했습니다. 그리고 그 날로부터 전도자로 나섰습니다. 그는 그날부터 자신이 그렇게 부정하던 십자가를 전하고 부활을 전하고 그토록 증오하던 예수를 전하는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이런 극적인 인생도 없을 것입니다. 전도도 그냥 전도가 아니고 온 몸을 바치고 목숨을 내 놓은 전도를 하였습니다. 

그 모습을 본문에서 기록자 누가가 이렇게 표현합니다.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니 듣는 사람들이 다 놀라 이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을 멸하려 하던 자가 아니냐, 여기에 온 것도 우리를 결박하여 끌어가고자 함이 아니냐.”(20) 어느 날 갑자기 삶의 태도를 이렇게 바꾸었으니 자신도 놀랐을 것입니다. 핍박받던 그리스도인들은 더 놀랐을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또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사람이 이렇게까지 변할 수가 있습니다. 이것이 자아를 깨고 변화를 받는 삶입니다.  

지난 몇 주 동안 사랑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우리들이 진정한 사랑을 발휘하기는 불가능합니다. 다만 한 가지 조건이 있다면 이 강한 자아가 깨질 때 가능합니다. 악화된 관계회복도 우리 마음으로는 회복하기가 불가능하지만 조건이 있다면 내 강한 자아가 깨질 때 가능합니다. 바울은 그날 다메섹에서 아주 강하던 자아를 완전히 깨고 부숴버렸습니다. 그리고 딴 사람이 되었습니다. 딴 인생을 살게 되었고 딴 목적을 위해 살게 되었고 완전히 자신을 초월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사람이 행복한 사람입니다. 가던 길을 바꾸고 삶의 여정을 아주 분명하게 하고 확실한 길을 찾은 사람이 행복한 사람입니다. 기독교를 가리켜서 자기부정의 종교라고 말합니다. 우리들이 좀 더 성숙한 신앙인이 되려면 이 자아를 깨트려야 합니다.  

자아를 깨트리는 삶 

이 자아가 깨지지 않으면 바울처럼 자기기만 속에 살게 됩니다. 그래서 내가 독선적인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본문 1절에서 “사울이 주의 제자들에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기 등등하여 ... 남녀를 막론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 했다“고 했습니다. 오늘도 이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흔히 부부들이 싸우는 원인을 보면 서로가 상대방을 뜯어 고치겠다는 생각 때문에 발생합니다. 

그런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동안 부부생활은 원만해질 수 없습니다. 누가 누구를 뜯어 고치겠다는 말입니까. 그 생각 자체가 아직 자아가 깨지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자신이 너무 강하기 때문에 상대를 내 기준에 맞도록 내가 개혁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갈등이 오고 다툼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그 눈으로 세상을 보면 모두가 못 마땅하게 보일 것입니다. 

그 눈으로 자녀들을 보면 매사가 눈에 거슬리는 것만 보일 것입니다. 아직 기준에 미성숙하고 서툰 것이 많은 아이들이 오죽하겠습니까. 아이들의 변화에는 시간이 필요하고 기다려 줄줄 알아야 합니다. 뱀이 허물을 벗지 않으면 뱀이 될 수 없습니다. 달걀이 병아리가 되는 것은 날이 채워져야 가능합니다. 급하다고 깨면 망쳐버립니다.   

우리는 서로 다름을 인정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다름이 곧 은사일 수 있습니다. 이 세상사람 모두가 똑같아지면 어떤 모습이 되겠습니까. 옷 가게에 가보면 아주 유치한 색깔의 옷들을 걸어 놓고 있는 집이 있습니다. 그 모습을 보면 저 옷은 누가 사 입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데 그런데 그런 색깔을 좋아서 사 입고 다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이 조화가 이루는 것입니다. 

부부도 정돈을 잘 하는 남편이 있고 못하는 부인이 있습니다. 이런 경우 함께 살면 매일 다투게 됩니다. 내가 저 못된 습관을 반드시 고쳐주겠다고 부르짖으면 조화가 깨집니다. 아무리 부르짖어도 안 고쳐집니다. 그때 두 가지 지혜를 발휘해야 합니다. 하나는 빨리 포기하는 방법입니다. 그러면 가정이 평안해집니다. 또 하나는 정돈을 잘 하는 내 은사를 발휘함으로서 상대방을 돕는 방법입니다. 그러다 보면 아내도 정돈에 익숙해지는 사람으로 변해 갈 것입니다. 

그것이 사랑하는 일이고 세상을 원만하게 살아가는 비결입니다. 우리는 서로 다름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 서로 다르다는 것이 은사일 수 있습니다. 그 다름 들이 모여 모여 이 세상의 균형과 조화를 이룰 수 있습니다. 오늘도 집안에서, 교회에서, 사회에서, 직장에서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가 있는 곳이면 불화와 갈등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아직 자아를 깨트리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이 자아를 깨트리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피조물들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도록 지음 받았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올바른 신앙관을 가지려면 이 서툰 자아가 깨져야 합니다. 깨트리지 않으면 내 주인인 하나님을 몰아내고 내가 주인인 것처럼 행사하게 됩니다. 그래서 멋대로 생활하고 죄에 물들고 타락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싫어하는 것이고 안 믿으려고 하는 것(롬1:28)입니다. 그래서 내 자아를 깨트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내가 예수 안에서 다시 새로운 자아로 거듭나게 됩니다(골 3:9-10). 내 자아가 깨진다는 것은 내 능력을 말살하는 것이 아니고 포기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서툴고 쓸데없이 고집스러운 왜곡된 내 자아를 교정시키는 것입니다. 

옛 자아는 하나님을 거역하고 멀리하고 무시하려는 자아입니다. 그래서 불신자들을 보면 막말을 하며 하나님을 부정하고 욕하고 비난합니다. 그것은 그의 자아가 병들고 깨지지 않고 미성숙해서 그렇습니다. 그래서 그 자아를 깨야 합니다. 그러면 내안에 의롭고 건강한 자아가 회복되게 됩니다. 그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난 새 자아를 덧입게 되는 것(엡 4:24)입니다. 

야곱을 보십시오. 야곱은 그 인생이 성실치 못한 자기이익에 집착해서 형도 아버지도 속이는 사람으로 살았습니다. 가정에 분란을 일으켰고 불화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다 피신생활을 했고 외가에 가서도 그 버릇 버리지 못하고 외삼촌을 속였습니다. 그리고 형과는 관계를 풀지 못하고 불안하게 살아갑니다. 왜냐하면 이 병든 자아를 고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야곱은 이 병든 자아를 빨리 부수지 않고는 제대로 된 인생을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그 병든 자아를 깨지 않는 한 그의 인생은 피곤하고 형제간의 문제는 풀리지 않습니다. 고향에 갈 수도 없습니다. 야곱은 완전히 욕망과 탐욕과 시기와 질투와 거짓으로 가득차 있던 사람입니다. 그런 야곱이 고향에 돌아가던 길에 얍복강에서 깨졌습니다. 얍복강에서 천사와 씨름하므로 자신을 완전히 부숩니다. 그리고 야곱이 비로소 이스라엘로 거듭납니다. 이 자아를 깨는 일이 이렇게 중요한 일입니다. 베드로를 보십시오. 베드로는 언제나 큰소리를 쳤고 덤벙댔습니다. 

그러면서도 언제나 예수 깊숙이 들어가지 못하고 언저리에 맴돌았습니다. 그러니까 멀찍이 서 있다가 스승을 배반하게 되고 부인하고 저주도 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베드로가 악해서가 아니고 아직 자아가 미성숙했고 깨지지도 않아서 그렇습니다. 그러다가 그가 언제 깨지게 되었는가 하면 닭 울음소리를 듣는 순간 깨지게 되었습니다. 닭 울음소리를 듣고 베드로가 얼마나 통한의 눈물을 흘립니까. 그 통곡하는 시간이 베드로가 자신의 자아를 산산이 깨부수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베드로가 진정한 제자가 됩니다.   

한국 기독교 역사에 김익두라는 사람이 독보적입니다. 그가 자아가 깨지기 전에는 엉망진창의 인생을 살았습니다. 폭군으로, 불량배로, 이웃을 괴롭히는 인생으로 살았습니다. 그가 그러다가 어느 날 술에 취해 길을 가다가 공중화장실의 넓은 똥통에 빠지는 순간 깨집니다. 그 속에 빠져 허우적거려도 누구 하나 바라만 볼뿐 건져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소식을 듣고 달려온 부인이 혼자서 간신히 건져 내 놓습니다. 술에서 깨어난 후 그 소리를 듣고 김익두가 비로서 정신을 차립니다. 

자신의 모습에서 그는 비참함과 초라함과 불쌍함을 느낍니다. “내가 어떻게 살았기에 이 정도로 외면 받는 인생이 되었는가” 그리고 자신을 주저 없이 깨부수었습니다. 그 순간 김익두가 변화되었고 병든 자기 자아에서 깨어났습니다. 그리고 그는 세례를 받는 날 사람들에게 김익두가 물에 빠져 죽었다고 부고장을 보냈고 사람들이 와서 어떻게 된 거냐고 묻자 보다시피 나는 물에 빠져 죽고 새롭게 태어났다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세례는 물에 빠져 죽고 다시 태어나게 하는 예식입니다. 그래서 김익두가 마침내 김익두가 된 것입니다. 

어거스틴도 한때 방탕생활을 했습니다. 그의 주변에 많은 방탕자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어거스틴이 방탕한 짓을 할 때마다 동료들은 멋있다고 손뼉을 쳐 주었다고 합니다. 어거스틴은 그 말에 힘입어 더 박수를 받기 위해서 더 강도 높게 방탕생활을 했다고 고백했습니다. 그것이 어찌 멋이겠습니까. 병든 자아를 가지고 있으니까 그것이 멋있게 보인 것입니다. 

그러다 어느 날 그는 그 방탕의 잠에서 깨어납니다. 그리고 그는 만신창이가 된 자신을 바라보았을 것입니다. 그때 어거스틴은 “나는 참으로 부끄러운 짓을 했다”고 눈물로 고백을 합니다. 자아가 깨지고 건강한 자아가 회복되니까 비로소 자신의 부끄러운 모습이 보인 것입니다. 오늘 목회자들도 이 건실치 못한 자아가 깨져야 목회가 가능합니다. 깨지지 않은 분들은 힘들게 목회를 하며 “나는 아닌가 봐”라는 말을 되풀이 합니다. 소명의식이 불분명한 것처럼 불행한 일도 없습니다. 

새벽기도가 힘들고 억지로 하니 한두날도 아니고 어떻게 평생을 그런 모습으로 목회를 하겠습니까. 그 뿐 아니고 자존심도 이기지 못하여 불필요한 고집을 부리고 권위의식에 사로잡히고 불화를 야기합니다. 깨지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교회 중직자들 중에도 많습니다. 그러니까 가는 곳 마다 가정에서도 교회에서도 공동체 안에서도 불화를 야기합니다. 내가 깨지지 않는 것은 나만의 불행이 아니고 모두의 불행이고 결국 하나님께도 불행한 일입니다.   

바울이 어느 날 다메섹에 살기가 등등하여 그리스도인들을 잡으려고 혈안이 되어 가고 있을 때 그 모습을 주님께서 예리하게 바라보고 계셨을 것입니다. 그때 주님은 아주 강한 빛 속에 그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사울로 하여금 자신이 신봉하던 율법이 얼마나 오류투성이 인가를 보여주셨을 것입니다. 그 순간 바울은 비로소 굳게 쌓여있던 자아를 깨버렸을 것입니다. 자신을 깨는 것이 은혜이고 축복입니다. 바울은 그때 진정 행복한 전도자로 변신을 하게 됩니다. 

그 후 옥에 갇히면 찬송을 불렀고 매를 맞으면 주님의 고난을 생각하였고 법정에 세우면 전도를 하였고 굶주리게 되면 금식하며 기도했습니다. 아주 행복한 마음으로 말입니다. 내 병든 자아가 깨지고 건강한 자아로 회복하니까 성령이 내안에 임하시고 내게 행복한 삶을 부여하십니다. 모두에게 덕을 기치고 평화를 이루는 삶을 주십니다. 무엇보다 내가 할 일이 무엇인지를 알게 하십니다. 그 삶이 신앙인의 삶입니다. (이정익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