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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께서 입히시는 옷 (사 61: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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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입히시는 옷 (사 61:10~11)


(사61:10-11) 내가 여호와로 인하여 크게 기뻐하며 내 영혼이 나의 하나님으로 인하여 즐거워하리니 이는 그가 구원의 옷으로 내게 입히시며 의의 겉옷으로 내게 더하심이 신랑이 사모를 쓰며 신부가 자기 보물로 단장함 같게 하셨음이라. 땅이 싹을 내며 동산이 거기 뿌린 것을 움돋게 함 같이 주 여호와께서 의와 찬송을 열방 앞에 발생하게 하시리라.

1. 다윗과 요나단의 우정은 역사상 가장 아름답고 숭고한 것이었습니다. 사무엘 상 18:1-4에 보면, 요나단의 마음이 다윗의 마음과 연락되어 이들이 서로 자기 생명같이 사랑하여 언약을 맺고 그 증표로 요나단이 자기의 입었던 겉옷을 다윗에게 주었고 그 군복과 칼과 활과 띠도 주었다고 했습니다. 

(삼상18:1-4) 다윗이 사울에게 말하기를 마치매 요나단의 마음이 다윗의 마음과 연락되어 요나단이 그를 자기 생명 같이 사랑하니라 그 날에 사울은 다윗을 머무르게 하고 그 아비의 집으로 다시 돌아가기를 허락지 아니하였고 요나단은 다윗을 자기 생명 같이 사랑하여 더불어 언약을 맺었으며 요나단이 자기의 입었던 겉옷을 벗어 다윗에게 주었고 그 군복과 칼과 활과 띠도 그리하였더라

“요나단의 마음이 다윗의 마음과 연락되어 서로 자기 생명 같이 사랑했다.”는 것은 이들의 믿음과 삶의 목적이 서로 같아서 하나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먼저 요나단의 믿음을 보겠습니다. 요나단은 중무장한 대군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소수의 소년병에 쇠붙이 하나 없는 나무 막대기로 만든 무기가 고작이었습니다. 그러나 요나단은 그들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이렇게 외치며 병사들을 독려합니다. 

(삼상14:6) 우리가 이 할례없는 자들의 부대에게로 건너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일하실까 하노라. 여호와의 구원은 사람의 많고 적음에 달리지 아니하였느니라. 

과연 “여호와의 구원은 사람의 많고 적음에 달리지 아니하니라.”는 믿음을 가진 요나단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다윗도 마찬가지로 블레셋 장수 거인 골리앗과 맞붙게 되었습니다. 사울 왕 당시 양치는 소년에 지나지 않은 다윗과 거인 골리앗과의 싸움은 전력상 전혀 승산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양을 칠 때 사용하는 도구인 물매와 돌맹이 5개가 고작인 다윗과 거인에다 각종 무기로 중무장한 골리앗과의 싸움은 누가봐도 게임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거인 골리앗을 향해 이렇게 외치며 전투에 임합니다. 

(삼상17:45-47)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 오늘 여호와께서 너를 내 손에 붙이시리니 내가 너를 쳐서 네 머리를 베고 블레셋 군대의 시체로 오늘날 공중의 새와 땅의 들짐승에게 주어 온 땅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줄 알게 하겠고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로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붙이시리라.

소년 다윗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나가 싸웠습니다. 전쟁은 여호와 하나님께 속한 것을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양치기 소년 다윗이 거인 골리앗을 돌맹이 하나로 무너트렸습니다. 다윗의 믿음이 승리한 것입니다. 이렇게 요나단과 다윗은 전쟁은 하나님께 속했다는 동일한 믿음을 가지고 나가 싸워 승리했습니다. 

또 한 가지 그 전쟁의 목적이 똑같이 오직 하나님의 이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싸운다는 삶의 목표가 통하는 소년들이었습니다. 이렇게 “요나단의 마음이 다윗의 마음과 연락되어 요나단이 그를 자기 생명 같이 사랑하는”(삼상18:1)다윗과 서로 언약을 맺고 그 증표로 “자기의 입었던 겉옷을 벗어 다윗에게 주었고 그 군복과 칼과 활과 띠도 벗어 주었던 것입니다.”(삼상18:4) 

당시 남에게 자기 옷을 입혀주고, 군복과 칼과 활과 띠까지도 벗어준다는 것은 자신의 생명을 상대방에게 내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들의 우정은 단순한 우정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혈연관계 이상의 우정임을 보여준 것입니다. 요나단이 자신의 겉옷을 언약의 증표로 다윗에게 벗어 준, 그 우정의 진수(眞髓)는 하나님의 뜻에 따르는 결단과 삶에서 더욱 아름답고 거룩하게 나타납니다. 

요나단은 사울 왕의 아들로 황태자입니다. 차기 왕권 계승자입니다. 그런데 사울 왕은 백성들의 다윗에 대한 인기도가 상승하자 이를 시기해서 다윗을 살해하고자 합니다. 자신의 왕권 보존은 물론 왕위를 황태자에게 제대로 물려주기 위해서라도 권력 주변에 급부상한 다윗을 반드시 제거해야 할 필요성을 느낀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알고 요나단은 아버지 사울 왕을 찾아가 나라 민족을 위해 세운 다윗의 공로를 들어 다윗을 죽이지 말 것을 탄원합니다. 그리고 다윗이 위험에 처할 때마다 아버지를 배신하면서까지 다윗의 생명을 구원합니다. 그 이유를 요나단이 다윗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삼상23:17)  곧 요나단이 그에게 이르기를 두려워 말라 내 부친 사울의 손이 네게 미치지 못할 것이요 너는 이스라엘 왕이 되고 나는 네 다음이 될 것을 내 부친 사울도 안다

아무리 자기 아버지 사울 왕이 다윗을 죽이고자 할지라도 결코 성공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더욱 더 중요한 것은 “너는 이스라엘 왕이 되고 나는 네 다음이 될 것을 내 부친 사울도 안다.”는 말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이미 다윗을 왕으로 선택하셨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자신이 비록 황태자이지만 왕의 자리를 포기하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 하나님의 뜻을 아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신앙에서 탈선하여 다윗을 죽이려는 아버지를 배신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삶에 있어서 혈연관계보다 하나님의 뜻이 더 비중이 컸던 것입니다. 요나단은 하나님의 마음이 어디에 있는가를 잘 알았던 것입니다. 

이렇게 요나단은 권력이나 혈연보다 더욱 중요한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 마음이 함께 하는 우정의 진수를 보여준 것입니다. 요나단이 다윗과 영원히 변치 않는 우정의 언약을 맺고 그 증표로 자신의 겉옷, 즉 황태자의 옷을 벗어 주었다는 것은 상징적으로 친구 다윗이 사울 왕의 계승자가 된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자기 생명을 십자가에 희생하시므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그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요15:13)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만왕의 왕이신 예수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 자기 생명을 버리시고, 하늘 영광의 보좌를 버리시고 황태자의 옷을 입혀 주시고 영원한 언약을 맺어주셨습니다. 이러하신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우리의 진정한 친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요 15:14) 너희가 나의 명하는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누구든지 예수 믿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면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친구입니다. 


2. 이를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구원의 옷으로 내게 입히시며 의의 겉옷으로 내게 더하심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를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갈3:27)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회개하여 죄 사함을 받은 사람은 “그리스도로 옷 입었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원래 옷을 입지 않았습니다. 최초의 인간, 아담과 하와는 에덴 동산에서 벌거벗었으나 전혀 부끄러워 하지 않았습니다.

(창2:25) 아담과 그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 아니하니라

그러나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고 하신 금단의 열매를 먹자 갑자기 그들의 눈이 밝아져서 자기들이 벌거벗은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남편과 아내, 부부지간임에도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만들어 몸을 가렸습니다.

(창3:6-7)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 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더라

이들은 그래도 부끄러워서 동산 나무사이에 숨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숨어있는 아담을 부르시자 “(창3:9-10)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고 대답합니다. 죄를 짓자 자신의 벌거벗은 몸이 부끄러워진 것이고 부끄러워지자 그 수치를 가리기 위해 치마를 만들어 가렸던 것입니다. 아주 어린 아이들은 죄를 모르기에 벗어도 부끄러워하지도 않습니다. 죄가 들어오자 부끄러워합니다. 아이들이 커가면서 부끄러운 것을 깨닫고 옷을 찾아 입히고, 입게 되는 것은 인간은 죄 가운데 태어난다고 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죄를 범한 아담과 하와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창3:16-17) 내가 네게 잉태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말라 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그리고 이들에게 자비와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께서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습니다.”

(창3:21)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하나님께서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다.”는 것은 그 옷을 짓기 위해 동물을 희생시키셨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 말씀은 장차 온 인류의 죄 사함을 위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요1:29)으로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죄사함을 받아 깨끗함을 얻게 되면, “하나님께서 구원의 옷으로 내게 입히시며 의의 겉옷으로 내게 더하심”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인간은 스스로 죄를 가리울 수 없습니다. 무화과 나뭇잎으로 치마를 지어 입은 것처럼 죄를 가리울 수 없습니다. 인간은 자신의 어떠한 의로운 행위로도 죄를 가리울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59:6) 그 짠 것으로는 옷을 이룰 수 없을 것이요 그 행위로는 자기를 가리울 수 없을 것이며 그 행위는 죄악의 행위라 그 손에는 강포한 행습이 있으며  ....

(사64:5-6) 주께서 기쁘게 의를 행하는 자와 주의 길에서 주를 기억하는 자를 선대하시거늘 우리가 범죄하므로 주께서 진노하셨사오며 이 현상이 이미 오랬사오니 우리가 어찌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 대저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우리는 다 쇠패함이 잎사귀 같으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같이 우리를 몰아 가나이다.
 
인간의 의로는 부끄러운 수치를 가릴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값주고 사신 의의 옷, 거룩한 옷을 입혀주시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예수 믿고 죄 사함을 받으면 입게 되는 옷을 ‘의(義)의 옷’, ‘흰 옷’이라고 합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가지를 들고 하나님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과 어린양을 경배 찬양합니다.” 

이에 장로 중 하나가 “이 흰 옷 입은 사람들이 누구며 어디서 왔느뇨?” 라고 묻자 “이들은 어린양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지키기 위해 큰 고난을 겪었고, 숱한 환난을 당하면서 자신을 더럽히지 아니하고 어린 양의 피로 옷을 희게 씻은 사람들이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보좌 가운데 계시는 어린 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셔서 생명수 샘으로 그들을 인도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의 눈에서 눈물을 씻어 주실 것이니라.”고 말씀하십니다.(계7:9-17) 

그러므로 예수 믿고 그 어떠한 유혹이나 시험, 그리고 어떠한 고난과 환난 중에서 끝까지 믿음을 지켜 자신을 더럽히지 아니한 성도들에게 입혀주시는 옷이 바로 “의의 옷”, “흰 옷”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오직 흰 옷입은 사람들만이 들어갈 수 있는 곳입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아버지 집을 나와 재산을 탕진하고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지만 그마저 주는 자가 없어 굶어 죽게 된 탕자가 있습니다. 그가 아버지께 돌아가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나이다. 이제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할 자격도 없습니다. 다만 저를 일꾼의 하나로 써주십시오.”라고 부탁할 생각을 단단히 품고 아버지 집으로 돌아갑니다. 아버지가 돌아오는 아들을 멀리서 알아보고 달려가서 아들을 얼싸안고 입을 맞춥니다. 그러자 아들은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어 이젠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할 자격도 없습니다. 다만 저를 일꾼의 하나로 써 주십시오.’ 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눅15:22-24)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을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저희가 즐거워하더라 

여기 아버지가 돌아온 탕자에게 입힌 “제일 좋은 옷”을 입혔다고 하는 것은 아들의 죄를 깨끗이 용서해주셨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손에 가락지를 끼웠다.”는 것은 자신의 권위를 나타내는 인장 반지와 같은 것으로서 이를 아들에게 주었다고 하는 것은 곧 자신의 권한을 아들에게 위임한 것임을 말합니다. 집을 떠나 아버지 재산을 탕진하므로 가산에 대한 모든 권한을 잃어버렸지만 이제 돌아옴으로써 가산에 대한 아들의 모든 권한이 회복되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리고 “신을 신기었다.”는 것은 세상에서는 맨발로 다니는 종들처럼 살았지만 아버지께 돌아옴으로 다시 자유인으로 살게 되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세상에서 죄의 종노릇하며 살다가 예수 믿고 회개하여 하나님 아버지 앞에 돌아와 진정한 자유인이 되었음을 뜻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죄 사함을 받아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자가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아버지께 돌아온 탕자에게 “제일 좋은 옷을 입히고, 가락지를 끼우고, 신을 신기우고 큰 잔치를 베푸신 것” 등은 모두 아버지가 돌아온 탕자에게 거저 베푸시는 ‘은혜’입니다. 이를 로마서 3:22-26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롬3:22-26)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

이렇게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께서 예수 믿는 성도 여러분에게 “신랑에게 제사장의 관을 씌우듯이, 신부를 패물로 단장시키듯이, 구원의 옷을 입혀 주시고 의의 겉옷을 둘러 주셨다.”고 했습니다. 세상에서 그 어떤 것들로 단장해도 “구원의 옷과 의의 겉옷”으로 단장하지 아니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이러한 비유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마22:1-14) 하나님 나라는 자기 아들을 위해 결혼 잔치를 베푸는 어떤 왕과 같으니라. 왕은 종들을 시켜 잔치에 초대한 손님들을 불렀으나 그들은 오지 않았느니라. 왕은 또 다른 종들을 초대한 사람들에게 보내 ‘살진 소를 잡아 모든 음식을 푸짐하게 준비해 놓았으니 어서 잔치에 오십시오.’ 하라고 하였느니라. 그러나 그들은 들은 척도 않고 어떤 사람은 자기 밭으로 가고 어떤 사람은 장사하러 가고 또 다른 사람들은 그 종들을 잡아 모욕하고 죽여 버렸느니라. 그러자 왕은 화가 나서 군대를 보내 살인자들을 죽이고 마을을 불태워 버렸느니라. 그리고 나서 왕은 종들에게 ‘잔치는 준비되었으나 초대받은 사람들은 자격이 없느니라. 그러니 너희는 길거리에 나가 만나는 사람마다 잔치에 초대하여라.’고 말하였느니라. 그래서 종들이 나가 좋은 사람이건 나쁜 사람이건 만나는 대로 데려오자 잔치 자리가 가득 찼느니라. 왕이 손님들을 보려고 들어갔다가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그대는 어째서 예복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는가?’ 하고 묻자 그는 아무 대답이 없었느니라. 그때 왕은 종들에게 ‘이 사람의 손발을 묶어 바깥 어두운 곳에 던져라. 거기서 통곡하며 이를 갈 것이니라.’ 고 하였느니라. 이와 같이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여기 왕이 입으라고 내어 준 “예복”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값없이 입게 되는 “구원의 옷과 의의 옷”을 말합니다. ‘예복’을 입지 않아서 어두운 곳으로 쫓겨나 거기서 통곡하며 이를 간다고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고 초청되었지만 정작 믿음을 가지고 구원의 옷, 의의 옷을 입지 않은 사람들의 당할 지옥의 고통과 형벌을 말합니다. 그래서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왕의 아들의 혼인잔치는 부활하신 예수께서 약속하신대로 다시 오시는 ‘재림’으로 이루어지는 성도들의 구원을 비유하는 것입니다. 예수 믿음으로 구원받게 되는 것을 어린양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와의 혼인잔치로 비유한 것입니다. 이를 요한 계시록에서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계19:7-9)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여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 아내가 예비하였으니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천사가 내게 말하기를 기록하라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입은 자들이 복이 있도다.....

외모가 아무리 예뻐도, 돈이 아무리 많아도, 지식과 권력이 아무리 높아도 깨끗하지 못하면, 하나님으로부터 깨끗하다고 인정받지 못하면 하나님의 기쁨이 되지 못하고 어두운데 던져지고 맙니다. 비록 가진 것 없어도, 그리고 배운 것 없고 낮고 천하여도 깨끗한 사람을 하나님은 기뻐하시고 “땅이 싹을 내고 정원이 거기에 뿌려진 씨앗을 움돋게 하듯이 여호와께서 온 세상에 그의 의를 나타내실 것이니 모든 민족이 그를 찬양하게 되는” 축복을 받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안팎으로 하는 일마다 풍성한 열매를 맺게 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축복을 말합니다. 

여자들의 화장에 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여자는 10대에는 단장만 하면 된다고 합니다. 이 때 ‘단’은 화장한다는 붉을 ‘단’(丹)이 아니라 홀로 ‘단(單)’을 사용한 단장(單粧)입니다. 건강미가 넘치고 피부도 탱탱하므로 입술 연지만 살짝 바르거나 예쁜 머리 핀만 하나 꽂아도 예쁘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20대에는 조금 부족해 보이는 부분만 가꾸는 ‘치장(治粧)’을, 
30대에는 본격적으로 찍어 바르는 ‘화장(化粧)’을, 
40대에는 연극 배우처럼 떡을 칠하는 ‘분장(扮裝)’을, 
50대에는 칼로 긁어도 안 벗겨지는 ‘무장(武裝)’을, 
60대에는 전혀 다른 사람의 얼굴로 바꾸는 ‘변장(變裝)’을 해야 한다는 조크가 있습니다. 

그래서 지혜서 잠언 31:30-31에서 “고운 것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나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여자는 칭찬을 받을 것이라. 그 손의 열매가 그에게로 돌아갈 것이요 그 행한 일을 인하여 성문에서 칭찬을 받으리라.”고 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어린양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옷을 희게 씻는 신앙생활로 삶을 가장 아름답고 거룩하게 단장하는 복된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예수 믿는 믿음으로 하나님께서 입혀주신 “구원의 옷, 의의 옷”을 더럽히지 아니하고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깨끗하게 지켜 하나님의 기쁨과 영광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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