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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낮은 곳에 임하는 은혜 (약 4: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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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은 곳에 임하는 은혜 (약 4:5~10)

 
사람들은 강한 것을 좋아합니다.

지난달 8월 17일에 있었던 프로골프 메이저 대회 PGA 챔피언십에서 양용은 선수가 골프 황제로 알려진 타이거우즈를 마지막에 3타차로 따돌리며 우승했습니다. 국내 신문 중에 하나는 제목을 이렇게 잡았습니다. “양이 호랑이를 잡다.” 타이거 우즈의 ‘타이거’와 양용은의 ‘양’을 본 따서 만든 재미있는 제목입니다. 뉴욕 타임즈에서도 “세계랭킹 110위가 1위를 했다”, “양용은이 타이거우즈를 기절시키고 골프세계를 전율하게 만들었다”라고 보도하였습니다. 양용은이라는 한 선수의 승리에 대해서 국내 골프팬뿐만 아니라 국민전체가 환호했습니다.

사람들은 강한 것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누구나 강한 자의 편에 서기를 원합니다. 강한 자를 보면 멋이 있고 힘이 있습니다. 그에게 사람들이 모여들고 뒤따라가는 것이 너무 부럽습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또 다른 마음이 있습니다. 그것은 역전승에 대한 환호입니다. 약자가 강한 자를 이길 때 사람들은 뛸 듯이 기뻐합니다. 

우리는 왜 다윗이라는 인물에 환호할까요? 다윗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사람이 골리앗입니다. 베들레헴의 작은 목동이었던 다윗이 거대한 장수 골리앗을 물맷돌 하나로 때려눕힌 사건을 떠올리면 우리도 모르게 입가에 웃음이 번지는 것을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불가능하다고 여겨졌던 일이 현실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100번 싸워서 100번 질 수밖에 없는 상황인데 그 상황을 역전시켰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강자들이 오랫동안 정상에 머무르는 것에 대해서 존경하고 귀하게 여기면서도 때로는 ‘저 강자를 물리칠 사람은 어디 없는가?’하고 마음속에 바라기도 합니다. 강자들은 너무 자신만만해 보입니다. 때로는 오만하게 보입니다. 그래서 강자가 뜻밖의 굴욕을 당하면 우리는 쾌재를 부릅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나 자신도 지금은 연약한 자이지만 언젠가는 내 인생에도 저런 역전의 날이 올 것이라는 기대를 하며 박수를 칩니다. 

우리는 중력의 법칙을 뛰어넘는 은혜의 법칙으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두 가지의 인생의 법칙을 경험합니다. 첫째는 중력의 법칙이고 둘째는 은혜의 법칙입니다. 중력의 법칙은 깊은 내면 속으로 모든 것을 끌어당기는 힘입니다. 그래서 계속 자기의 몸집을 불리며 모든 것을 소유하려고 합니다. 어쩌면 인간 내면 속에 있는 중력의 법칙이 인간을 이렇게 존재하게 만드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이 마음속에는 아담과 하와가 지니고 있던 이기적 속성이 들어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처럼 되려 했습니다. 피조물이 감히 창조주이신 하나님마저도 자기 소유물로 만들려고 시도했습니다. 이처럼 중력의 힘이란 이기적인 욕심의 힘입니다. 사람들은 이것을 통해서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확장해 나갑니다. 

또 하나의 힘이 있습니다. 그것은 은혜의 힘으로 중력의 힘과는 전혀 반대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은혜의 힘은 오히려 강한 자가 약한 자를 돌보려는 힘입니다. 순결한 자가 죄인을 용서하고 용납하는 힘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이것을 제일 가까이에서 경험하게 되는 것이 바로 어머니들의 사랑의 힘입니다. 어머니는 내가 연약할 때 나를 사랑했고, 내가 아무것도 가진 없을 때 모든 것을 쏟아 부으며 키우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부모님의 은혜라는 말을 합니다. 이처럼 강한 어머니가 연약한 나를 위해 사랑을 쏟아 붓는 것을 은혜라고 합니다. 

그러나 사실 우리 속에는 은혜의 힘이 없습니다. 때로는 은혜의 힘을 가지려고 하면서도 이것을 싫어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약한 것을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낮고 천한 것이 가까이 오면 물리치려고 합니다. 낮고 천한 것과는 멀리 떨어져있고 싶은 것이 마음의 속성입니다. 

중력의 힘, 즉 자기 자신에게로 끌어당기는 소유욕의 힘이 점점 확대되면 인간은 교만해지기 시작합니다. 승승장구하면 할수록 오만해집니다. 만약 인간관계속에서 중력의 법칙만 발동한다면 다다익선의 세상이 될 것입니다. 많으면 많을수록 좋기에 많은 것이 선이 될 것입니다. 작고 연약하고 부족한 것은 이 땅에서 설 자리가 없어지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부익부 빈익빈의 세상이 될 것입니다. 많이 가진 자와 적게 가진 자는 끊임없이 미워하고 싸우면서 살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세상은 끊임없는 차별을 만들어 낼 것이고, 연약한 자는 이것을 이겨낼 어떤 기회와 생명력도 얻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성경은 강한 사람들에게 말합니다. “강하면 강할수록 위험이 커진다. 강하면 강할수록 넘어질 자리가 많아진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겸손해질 것을 요청합니다. 성경은 인간이 가진 강한 것에는 뒷면이 있다는 것을 끊임없이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중력의 세계를 뛰어넘는 은혜를 통해서 인간이 서로 사랑하고 위해주며 나누는 삶을 살 것을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십니다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야고보서 4:6) 

하나님은 강하면서 뽐내는 사람들, 스스로 모든 것을 갖추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싫어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겸손한자, 연약한 자들을 받아주시고 그들에게 은혜의 세계를 열어주십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멀리하시고 겸손한 자를 사랑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서 중력의 법칙에 의해서만 살려고 하는 사람들의 모든 사고패턴을 깨뜨려버리고 있습니다. 자기만 높아지려고 하는 자들의 모든 사상과 가치관을 무너뜨리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개인의 실존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구조까지도 변화시키시려고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 위에 보내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의 사건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강한 자를 향해서 말씀합니다. “강한 자들아! 연약한 자들이 얼마나 억눌려 살고 있으며 얼마나 아파하고 있는지를 깨달아라. 높은 자리를 차지한 자들아! 낮고 비천한 자들의 고통과 신음소리를 들어보아라. 많이 가진 자들아! 없는 자들의 설움과 비참함을 눈여겨보고 도와주어라. 너도 본래 약한 자가 아니었더냐? 너도 본래 미천한 자가 아니었더냐? 너도 본래 아무것도 없었던 빈털터리가 아니었더냐? 그런데 하나님께서 너를 사랑하시고 너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시며 영원한 생명을 주시고 너에게 인생의 꿈과 비전을 주지 않았더냐?”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넉넉하게 부어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은혜의 법칙과 힘으로 중력의 힘만을 믿고 그것을 축적하려는 인간의 욕망을 향하여 브레이크를 거시며 때로는 뒤집기를 시도하십니다. 

애통하는 마음이 있을 때 사랑과 생명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슬퍼하며 애통하며 울지어다 너희 웃음을 애통으로, 너희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꿀지어다” (야고보서 4:9)

하나님의 역전은 때로는 아주 강렬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애통하고 슬퍼하며 눈물을 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신 것과 일맥상통합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마태복음 5:4) 

애통하는 것이 하나님이 주시는 새로운 은혜를 받는 자리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가학증(sadism)이나 자기학대증(masochism)을 조장하시는 분이실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진정으로 우리를 풍요롭게 하시기 위해서, 우리를 더욱 평화롭게 살게 하시기 위해서, 이 땅에 하나님의 은혜가 넘쳐나게 하시기 위해서 이 말씀을 우리에게 가르쳐주십니다. 

이웃의 아픔과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 이웃의 슬픔에 동참하지 못하는 사회는 죽은 사회입니다. 애통하는 사람이 있어야 생명의 싹이 다시 돋아날 수 있으며 가슴 아파하는 사람이 있어야 외롭고 그늘진 곳에서 탄식하며 신음하는 사람에게도 또 한 번의 기회가 주어집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애통하셨기에 우리가 살아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보시면서 긍휼히 여기시고 마음 아파하셨기에 우리가 새 생명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가난하고 병든 자를 보면서 긍휼히 여기는 사람들, 일터에서 쫓겨나 방황하며 탄식하는 자들을 불쌍히 여기는 사람들, 홀로 사는 노인과 부모, 잃은 어린 고아들과 소년소녀 가장을 보면서 마음 아파하는 사람들이 있어야 이 사회가 풍성해지고 생명과 사랑의 역사가 나타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이 모든 것을 가르쳐주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은 기쁨으로 가득 찬 분이셨지만 이 땅에 오셨을 때 우리의 죄악 때문에 슬퍼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기쁨과 용서를 허락해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즐거움으로 하나님과 동행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모습을 보면서 근심하고 염려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근심과 걱정을 주님께 맡길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주신 구원의 즐거움을 누리게 하셨습니다. 또한 주님께서는 우리 대신 상처를 받으시고 우리의 상처를 싸매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네게 상처가 있느냐? 그렇다면 내가 네 상처를 치유해주겠다. 너도 남의 상처를 보듬어주고 치유해주며 그들을 껴안아주어라. 내가 너를 위해서 눈물을 흘렸다. 그러니 너도 다른 사람을 위해 눈물 흘리면서 그들이 신음하고 통곡할 때 눈물을 닦아주어라.” 

여러분, 우리는 어느 자리에 있습니까? 높은 곳에 있습니까? 많은 것을 누리고 있습니까? 세상에서 강력한 명예와 권력을 지니고 있습니까? 높은 자리에 있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도 높은 자리로 인도하라는 하나님이 주신 사명입니다. 많은 것을 소유한 것은 다른 사람들도 많은 소유에 함께 참여할 수 있도록 세우라는 주님의 축복입니다. 강한 권력을 가진 것은 연약한 사람의 아픔에 동참하고 그들을 일으키게 하기 위한 귀한 은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연약하고 소외된 자들을 향해 나아가셨습니다

노자는 지도자의 덕목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바다가 모든 강의 으뜸이 될 수 있는 까닭은 자기 자신을 낮추기 때문이다. 그래서 백성 위에 있고자하면 스스로 낮춰야하고 백성 앞에 서고자 하면 스스로 몸을 뒤에 두어야 한다.” 그러면서 노자는 바다와 같은 것이 겸손이고, 지도자의 마음이라고 말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낮은 물이 바다입니다. 그래서 모든 물은 바다를 향해서 내려갑니다. 바다는 그 말대로 모든 것을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바다입니다. 오수와 폐수도 받고 세상의 찌꺼기 같은 모든 것들을 받아들입니다. 인간의 지혜로도 이것이 인생을 살리고 사람을 살리는 길임을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것을 친히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바리새파, 율법주의자들과 대면을 피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잘난 척하고 남을 비난하며 거룩한 외향을 뽐내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지 가르쳐주실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마음속에는 교만이 가득 차 있었기 때문입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사람을 물리친다고 말씀하실까요? 교만한 사람은 끊임없이 사람을 분리시키고 구분합니다. 잘난 자와 못난 자를 구분합니다. 있는 자와 없는 자를 구분합니다. 힘이 있는 자와 무력한 자를 구분합니다.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를 구분하면서 가진 자에게는 아첨하고 없는 자에게는 조롱과 멸시를 퍼붓습니다. 이것이 교만의 속성입니다. 

교만의 속성은 끊임없이 홀로 서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만은 사람들에게 벽을 만듭니다. 바리새인이라는 말은 구분된 사람, 분리된 자라는 뜻입니다. 그들은 벽의 담을 높이 쌓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종교지도자들을 향해 말씀하십니다. “위선자들아! 회칠한 무덤과 같은 자들아!” 

예수님께서는 그들로부터 발길을 돌려 겸손한 자, 애통하는 자, 마음이 가난한 자, 인생의 슬픔과 아픔으로 탄식하는 자들을 바라보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같은 분이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하지 않으시고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 연약한 자들의 자리에 아낌없이 참여하셨습니다. 그리고 영혼이 목마른 자들을 향해 다가가셨습니다. 돈만 세는 취미를 가진 세리 마태를 향하여 나아가셔서 그를 자신의 제자로 삼으셨습니다. 다섯 남자한테 버림받고 자기 실존의 고독을 느끼며 살고 있던 사마리아 여인을 보시며 생수의 말씀을 전해주면서 그로 하여금 하나님의 자녀가 된 복을 누리게 허락하셨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다보면 놀라게 됩니다. 예수님은 당시에 인간 취급도 받지 못했던 사람들을 만나시고 그들에게 소망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도 아브라함의 자녀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을 통해서 역사가 변화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을 통해서 생명의 역사, 구원의 역사가 이뤄질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기독교의 역사는 이렇게 버려진 사람들, 세상 사람들에게 멸시받는 사람들에 의해 쓰여 졌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가운데 모여서 가슴에 사랑을 품게 되고 연약한 자들을 향해서 애통하는 마음을 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비전과 약속을 바라보면서 가정과 역사와 민족을 변화시킨 이야기가 바로 기독교의 이야기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를 낮추며 사랑의 역사를 이루어 가십시오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 (야고보서 4:10)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모든 것을 잃어버렸을 때 겸손해지는 것은 어쩌면 쉬운 일일지 모릅니다. 하지만 가진 것이 풍부할 때, 세상에서 무언가를 누리고 있을 때, 세상이 나를 참으로 강한 자라고 여길 때 스스로 겸손할 수 있다면 그것은 복이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사람들을 통해서 미움과 적대감이 가득한 시대에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와 생명의 역사를 새롭게 이루려고 하십니다.

우리가 가진 것이 없습니까? 무언가 부족한 것이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생에 새로운 기회를 주실 것입니다. 낙심하지 마십시오. 이것이 인생의 끝이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우리에게 소유가 있습니까? 무언가를 누리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통해 더 큰 생명의 역사를 이웃들과 함께 나누길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함께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이 놀라운 축복의 역사를 다시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를 낮추며 내게 주어진 것을 주님을 위해서, 생명을 살리기 위해서, 이 세상에 사랑의 역사를 이루기 위해서 사용하십시오. 바로 그 곳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복된 자리가 될 것입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부족하고 완악한 죄인인 우리를 불러주시고 하나님 자녀로 삼아주셔서 사랑과 은혜를 알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우리로 하여금 교만해지지 않게 하시고 겸손한 마음으로 주님께서 주신 생명과 은혜의 역사를 이루는 믿음의 사람들이 다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김지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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