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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오천 명을 먹이심 (요 6: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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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천 명을 먹이심 (요 6:5~14)
  

상수도 시설이 좋지 않던 시절에는 펌프로 지하수를 끌어올려 식수로 사용하였습니다.
그런데 지하에 있는 물을 끌어올리기 위해서는 한 바가지의 물이 필요했습니다.
한 바가지의 물을 펌프에 붓고 열심히 펌프질을 하면 그 압력에 의해 지하에 있는 물이 콸콸 쏟아져 나옵니다. 

이 때 물을 끌어올리기 위해 붓는 물을 ‘마중물’이라고 불렀습니다.
이름이 예쁘지요?
영어에서도 이 물을 ‘calling water' 즉 ’물을 부르는 물‘이라고 부릅니다.
마중물은 단지 한 바가지에 불과하지만 땅속 깊은 곳에 있는 엄청난 지하수를 끌어올리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의 말씀에는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천명을 먹이신 기적이 나옵니다. 
이 기적은 교회에 나오지 않는 사람도 잘 아는, 널리 알려진 말씀입니다.
한 가난한 어린이가 가지고 있었던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는 예수님의 엄청난 능력을 끌어올리는 마중물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벳세다 광야의 나지막한 산에 오르셨을 때 큰 무리가 예수님께로 나아왔습니다. 
이 큰 무리의 대부분은 유월절 절기 참석차 각 지방에서 올라오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아마 그들은 이런 얘기를 주고받으면서 발길을 예수님께로 돌렸을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하루 이틀 정도 늦게 도착하더라도 예수, 그 사람 한번 만나보고 갑세. 들리는 소문이 예사롭지 않아!”

이렇게 모여든 무리가 장년만 쳐도 오천 명이나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에게는 그 무리를 먹일만한 빵도, 돈도 없었습니다. 
그들 앞에는 한 어린이의 점심 도시락으로 어머니가 싸준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만 놓여있을 뿐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 기도드린 다음, 그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제자들에게 떼어주시면서 무리지어 앉은 사람들에게 나눠주라고 하셨습니다.

떼어 주어도, 떼어 주어도 계속 부풀어 오르는 떡을 만지면서 제자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이 놀라운 기적의 한복판에서 굶주린 배를 채워가는 무리의 입에서는 무슨 얘기들이 나왔을까요? 
제자들은 이미 요한복음 2장에 나오는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만드는 예수님의 질적 변화의 역사를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지금 그들은 벳세다 광야에서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천명 이상을 먹이시는 예수님의 양적변화의 역사를 체험하고 있습니다.

이런 모습을 목격한 그들은 얼마나 행복했겠습니까?
여러분도 삶을 살아가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일으키시는 질적인 변화를, 양적인 변화를 체험하기를 축원합니다.

본문을 읽으면서 사람들은 이런 문제들을 제기합니다.
① 우선, ‘이 사건은 진짜 역사적 사실일까?’하는 의구심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이 ‘기독교는 허구이다.’라는 사실을 주장하려고 할 때, 가장 많이 인용하는 말씀이 바로 이 이적이 아닙니까?

“성경? 성경 좋아하지 마라! 성경은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였다는 그런 당치도 않는 얘기로 가득 찬 책일 뿐이야!”
여러분, 그런 얘기 많이 들어보셨지요?
성경은 소설(fiction)이라는 것입니다.

② 두 번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음서가 이 허무맹랑한 듯한 사건을 기록한 이유가 무엇일까?’하는 문제입니다.
이 두 문제를 풀어가면서 오늘 말씀을 전하려고 합니다.

1. 어떤 이들은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 이상을 먹인 사건을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그들의 설명은 이렇습니다.

1) 그것은 ‘나눔의 식탁’이었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한 어린이가 적지만 다른 사람을 위해 자기의 먹을 것을 선뜻 내놓자 어른들이 감동을 받아서 자기들이 먹으려고 감추어둔 양식을 너도 나도 내놓았다는 것이지요. 
‘어린이가 자기 먹을 것을 내놓는데 어른이 되어 너무 이기적이지 않는가?’하는 일말의 양심의 가책을 받아 자기의 것을 내놓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먹고도 남았다는 얘기지요. 
그럴듯하지요?

2) 또한 그것은 ‘사랑의 식탁’이었다는 것입니다.

오천 명 이상 되는 사람들이 실제로 떡을 배불리 먹은 것이 아니라 그 공동체에 오고가는 사랑의 분위기에 도취되어 배부름을 느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어머니들이 이런 말씀을 하셨던 것을 자주 들었을 것입니다.
“너희들이 맛있게 먹는 것을 보니 나는 안 먹어도 배가 부르다. 나 걱정하지 말고 어서 먹어라.” 

환갑잔치를 열어놓고 싱글벙글하시는 어른께, “뭘 좀 드셔야지요? 그렇게 좋아만 하시면 배가 부릅니까?” 라고 질문하면, “예, 너무 좋아서 먹지 않아도 배가 고프지 않네요! 하하.......”
벳사다 광야의 식탁은 공동체에 오고가는 사랑의 분위기에 도취되어 배부름을 느낀 그런 식탁이었다는 것입니다. 
일리가 있는 얘기입니다. 

그러나 이런 설명들이 이 기적이 가지는 실체적 진실을 훼손한다면 우리는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여러분, 본문의 진술을 보십시오! 
성경의 진술에는 어떤 호들갑도, 과장도, 억지도 없습니다. 
그저 일어난 실체적 진실 그대로를 차분하게 담담하게 우리에게 전해줄 뿐입니다. 
따라서 이 사건은 ‘이해가 되느냐, 안 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믿느냐, 안 믿느냐’의 문제입니다. 
그리고 그 ‘믿느냐, 안 믿느냐’는 우리의 몫입니다.

2. 그러면 복음서가 이 허무맹랑한 듯한 사건을 기록한 목적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서 누리는 풍요로운 삶을 드러내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만나면 그 삶이 풍요로워집니다. 
그 삶이 만족스러워집니다. 
그 삶이 행복해집니다. 할렐루야.

예수님을 제대로 만나지 못해서 그렇지, 제대로 만나기만 하면 ‘광야의 풍성하고 풍요로운 식탁’처럼 그 인생의 식탁은 풍요로워집니다. 
반드시 그렇습니다! 
이제 본문을 살펴보면서 ‘어떻게 하면 우리의 삶이 풍요로워질 것인가’를 좀 더 구체적으로 알아보겠습니다. 

1) 우리의 삶이 풍성해지려면 ‘절대 가능성의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5절하 “… 빌립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 하시니”라는 예수님의 질문이 있습니다. 
그리고 6절에 보면 “이렇게 말씀하심은 친히 어떻게 하실지를 아시고 빌립을 시험하고자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도 시험하십니다. 

시험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test라는 의미의 ‘시험’과 temptation이라는 의미의 ‘시험’이 있습니다. 
본문의 시험은 test라는 의미의 ‘시험’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유익하게 하기 위해서 특별한 상황으로 몰고 간다는 거지요.

그 예로,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독자 이삭을 바치라는 시험을 들 수가 있을 것입니다.
아브람이 그 시험을 통과했을 때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창 22:12절 “…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예수님은 지금 제자들의 믿음을 테스트하십니다. 
사람이 노력해서 될 일이라면 대답하기 쉽습니다. 
“그럼요! 먹일 수 있지요! 한번 해보겠습니다.” 
그러나 오늘의 상황은 그들의 힘과 능력의 한계를 넘는 것이었습니다. 
그 무리를 먹일 수 있는 200데나리온이란 금액은 보통 사람들이 수중에 넣고 다닐 수 있는 만만한 돈이 아닙니다. 
부자들의 금고 속에나 있을법한 많은 돈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게 하겠느냐?” 라는 예수님의 질문에 뭐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잠시 여러분의 믿음을 체크해보세요. 
아주 단순하게 우리는 그분의 크신 능력을 믿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까?

어느 목사님께 결혼한 지 7~8년 된 부부가 인사를 왔습니다. 
그러니까 그동안 타향에서 생활하다가 주례해 주신 목사님께 인사를 온 거지요.
“그래 아이는 몇인가?”

“아이는 없어요! 의사 말이 우리에게는 아이를 가질 능력이 없대요. 그래서 포기했어요.” “무슨 말이야! 하나님께서 ‘생육하고 반성하라.’고 축복하셨는데, 믿고 노력해 봐!”
“아이고, 목사님도! 의사가 안 된다고 했는데 노력한다고 되나요?”
목사님이 그 대답을 듣고 한참 있다가 불쑥 하시는 말씀이 “너, 참 믿음이 좋구나!”였습니다. 

부부는 어안이 벙벙했습니다. 
목사님이 이어서 하시는 말씀은 이랬습니다. 
“어떻게 의사의 말은 그렇게 잘 믿으면서 성경에 나온 하나님의 말씀은 그렇게 안 믿느냐?”
어쩌면 우리도 여기에 해당되지 않습니까?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 하실 수 있다.’는 사실을 믿을 때 그때 비로소 하늘이 열리는 것입니다. 
믿으면 되는데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는 믿지 못하는 요소가 너무 많습니다.
풍요로운 삶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절대 가능성의 믿음’이 있을 때만이 누릴 수 있습니다.

2) 우리의 삶이 풍성해지려면 ‘긍정적인 시각’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의 질문에 대한 빌립과 안드레의 대답을 비교해봅시다. 
빌립의 대답입니다.
7절 “…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
“부족하리이다!” 

물론 이 표현은 “이백 데나리온의 떡으로도 모자랄텐데…”라는 의미를 한국말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채택한 표현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부족하리이다.’라는 표현은 우리의 시선을 끕니다. 
빌립의 상황인식은 정확합니다. 
하지만 빌립의 시선은 ‘없는 것’에 고정되어 있습니다. 
그는 지금 부족한 것을 보고 있습니다.

이에 반하여 안드레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9절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나이다.........” 
안드레의 대답은 “여기 지금 사람이 몇인데 누구의 코에 바르려고 그런 말을 하느냐?”고 핀잔을 받을 만 했을 것입니다. 
“너는 어떻게 매일 그렇게 말 같지도 않는 말만 하느냐”고 바보 취급을 당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안드레는 ‘아직 남아있는 것을 볼 줄 아는 시각’을 가졌습니다.

사업에 실패한 두 사람의 사업가가 있습니다. 
한 사람은 ‘나는 이제 돈도 없고, 사람도 없다.’라고 말합니다. 
또 다른 한 사람은 ‘나에게는 아직 건강이 남아있다.’라고 말합니다. 
누가 사업의 재기란 기적을 이룰 가능이 많을까요? 

‘나에게는 아직 건강이 남아있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아니겠어요?
‘대로우 밀러’가 쓴 ‘생각은 결과를 낳는다.’라는 책이 있습니다. 
저자 ‘대로우 밀러’는 1981년부터 20여년이 넘도록 국제기아대책기구에서 일한 사람입니다. 
그는 왜 사람들은 가난한가를 조사하고, 분석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가난은 가난의 문화에 뿌리를 두고 있는데, 이는 사람들이 지니고 있는 일련의 사고방식으로서 그 사고방식은 사람들의 행동을 규정하게 되며, 그 행동은 가난을 불러 오게 된다. 이것을 빈곤주의(pauperism)이라고 한다. 이 빈곤주의에 젖은 사람들은 ‘빈곤’의 안경으로 세계를 본다.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가난해, 나는 언제나 가난할 것이고, 내가 그것에 대하여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어!’” 
대로우 밀러가 지적한 핵심은 빈곤의식이 가난을 만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풍요로운 삶을 누리려면, 긍정적인 시각을 가져야 합니다.

3) 우리의 삶이 풍성해지려면 ‘기꺼이 드리는 헌신’이 있어야 합니다.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는 그 당시 한 어린이에게는 너무도 소중한 것입니다. 
보리떡과 물고기는 이스라엘의 가난한 사람들이 먹는 한 끼 식량입니다. 
그 당시 부자들은 보리떡 대신에 밀떡을 먹었다고 합니다. 
그 어린이는 자기의 것을 기꺼이 예수님께 드렸습니다.

예수님은 그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없이도 오천 명을 먹일 수 있었습니다. 
본문 6절에 보면, “이렇게 말씀하심은 친히 어떻게 하실 지를 아시고…”라는 말씀이 있는데, 이 말씀에 비추어보면, 분명 예수님은 그것 없이도 이적을 행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보리떡을 받아들었습니다. 
그리고 하늘 아버지께 감사기도를 드렸습니다! 
그것은 제자들에게 헌신의 소중함을 가르치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턱도 안 되는 한 아이의 작은 헌신을 통하여 일하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헌신’이라는 단어가 익숙지 않은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받는다.’는 것은 너무나 익숙한데, ‘드린다.’는 것은 뭔가 어색하고 불편해요! 
솔직히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는 ‘헌신’이라는 단어를 신앙생활에서 잃어가고 있습니다.

순교자 주기철 목사님은 이렇게 기도를 드렸습니다.
“나는 바야흐로 죽음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나의 목숨을 빼앗으려는 검은 손은 시시각각으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내가 폐결핵 환자로 요양원에 누워있지 않고, 예수님의 종으로 감옥에 갇혀 우는 것은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자동차에 치어 죽는 죽음도 있는데, 예수님의 이름으로 사형장에 가는 것은 얼마나 큰 영광입니까! 주님을 위하여 일백 번 죽는 것은 좋지만, 주님을 버리고 천년을 산다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오! 주여! 내 목숨을 아끼다 주님께 욕되지 않게 하옵소서. 이 몸이 부서져 가루가 되어도 주님 계명을 지키게 하옵소서. 주님 나 위해 죽으셨거늘 나 어찌 죽음을 무서워하여 주님을 모르는 체 하오리까! 다만 일사각오(一死覺悟)가 있을 뿐입니다. 아멘.”

주님 때문에, 주님 위해서 감당하는 희생, 손해, 헌신이 몹시 그리워지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찬송가 249장

1. 주 사랑 하는 자 다 찬송할 때에 그 보좌 앞에 둘러서 
그 보좌 앞에서 둘러서 큰 영광 돌리세 큰 영광 돌리세.

2. 주 믿지 않는 자 다 찬송 못하나 하나님 자녀 된 자들 
하나님 자녀 된 자들 그 기쁨 전하세 그 기쁨 전하세.

3. 저 하늘 황금 질 나올라 갈 때에 시온성 언덕 위에서 
시온성 언덕 위에서 수많은 천사들 날 인도하리라.

4. 내 눈물 다 씻고 늘 찬송 부르리 저 임마누엘 주 앞에 
저 임마누엘 주 앞에 나 영광 누리리 나 영광 누리리.

저 밝고도 묘한 시온성 향하여 가세 내주의 찬란한 성에 찬송하며 올라가세.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움켜쥔다고 쥐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건강, 재물, 지위, 친구, 명예 ........ 어느 것 하나 움켜쥔다고 쥐어지지 않습니다.
다 술술 빠져나가요.

친국(시온성)만이 영원합니다.
이 천국을 확신할 때 우리는 비로소 헌신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풍요로운 삶을 누리려면, 기꺼이 드리는 헌신이 있어야 합니다.

이제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본문의 주제는 14절입니다.
“그 사람들이 예수께서 행하신 이 표적을 보고 말하되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하더라.” 아멘!
예수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은 참 메시아이십니다! 
그 분을 만나기만 하면 광야의 풍성한 식탁과 같은 풍요로운 삶을 누리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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