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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까지 (출 16:35, 눅 22: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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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까지 (출 16:35, 눅 22:16~18)


외국인이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한국말이 여럿이 있다고 합니다. “얘야, 손님 받아라”는 말이 있습니다. 한국 식당에 가면 손님을 막 던지는 줄 안답니다. “엄청 애먹었다”는 말이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아이를 잡아먹어?”라고 한답니다. “오늘은 네가 쏴라”라고 합니다. 이 말을 들으면 무시무시하잖아요? 또 식당에 가면 “애야, 식탁 훔쳐라”고 합니다. 식탁을 잘 훔치면 도둑질하고 칭찬을 받습니다. 우리말의 관습에 보면 먹는 문제와 많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전에 굶주림에 살다보니 먹는 문제가 심각한 생존의 문제였습니다. 먹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어떤 문제도 즐거움이 될 수 없습니다. 먹는 문제는 미래의 가장 심각한 세계적 문제가 될 것이 분명합니다. 
  
인간의 삶에서 먹는 것을 빼면 재미가 없을 것입니다. 먹는 재미로 먹지 않는다고 해도 먹지 않으면 죽습니다. 먹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재미없는 삶을 살고 가장 비참한 삶을 사는 자가 지구상에 무수히 많습니다. 이런 자를 흔히 절대빈곤자라고 합니다. 절대빈곤자란 타인의 도움 없이는 절대로 먹지 못하는 자를 말합니다. 
  
그래서 인간에게 가장 즐겁고 가장 기본적인 먹는 문제를 절제하는 것이 영성훈련의 중요한 도구입니다. ‘금식’은 아주 중요한 영성훈련의 방법입니다. 저의 경험으로는 금식하면 좋은 점이 몇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시간이 아주 절약됩니다. 먹고 치우는 시간이 하루 시간 가운데 상당히 많습니다. 둘째는 생각이 아주 단순해집니다. 비우면 비워집니다. 셋째는 약간은 배가 고픈 것이 건강에 좋습니다. 그래서 일부러라도 건강을 위해 금식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금식은 그리스도인의 영적인 여정을 심화시킵니다. 금식은 하나님의 음성을 분별하는 데 도움이 되는 훈련입니다. 인간의 집중력은 보통 때보다는 배고픔이 심한 기아 상태에 있을 때에 놀라울 정도로 향상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금식은 영성가들에게 있어서 중요한 훈련의 도구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먹는 문제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아시고 해결하셨습니다.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이 있습니다. 보리떡 일곱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사천 명을 먹이신 기적도 있습니다. 같은 유의 기적을 두 번씩이나 베푸셨습니다. 사람들을 먹이신 기적을 ‘메시아적 기적’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배고픈 사람들을 먹이셨고, 또 그들과 함께 먹는 것을 즐겨하셨습니다. 
  
누가복음 7:34에는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너희 말이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인생의 참 즐거움을 아셨습니다. 아무리 맛있는 음식이라도 누구와 먹을 것인가는 중요합니다. 싫은 사람과 함께 밥을 먹어보세요. 아무리 진미라도 맛이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필 죄인들과 함께 먹고 죄인과 함께 하셨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죄인과 함께 먹는 것을 고자질하려고 주시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그 일을 하셨습니다. 
  
군대에서의 사진이 인터넷에 올라왔습니다. 참모총장이 부대를 시찰하러 와서 사병식당에서 사병과 함께 식사를 합니다. 참모총장은 사병과 친근감을 표현하기 위하여 제일 졸병과 함께 앉아 식사를 합니다. 그런데 그 졸병은 밥이 제대로 들어가겠습니까? 그 사진의 제목이 “밥 맛 없는 날”입니다. 좋은 사람과는 아무 것이나 먹어도 맛이 있습니다. 그렇게 볼 때 음식이 아니라 사람이 맛을 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잔치에 자주 가셨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왜 금식을 안 하셨습니까?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이런 시비를 했습니다. 예수님은 잔치에서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냐고 하셨습니다.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오리니 그 때는 금식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공생애의 마지막이 다가옵니다. 이제 신랑을 빼앗길 날이 가까웠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 만찬을 드시면서 오늘의 말씀을 주십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까지 다시 마시지 않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유월절 잔치의 의미를 다시 보면서 우리의 잔치가 하나님의 나라의 잔치가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 하나님의 나라는 유월절 잔치의 성취입니다. 

  16절에는 “이 유월절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이루기까지 다시 먹지 아니하리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진정한 유월절 잔치 의미를 일러주십니다. 유월절 잔치를 제자들과 함께 잡수시던 예수님은 잔치의 진정한 의미를 말씀하십니다. 이 잔치는 예수님의 지상에서의 마지막 유월절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예수님의 공생애가 3년이란 증거가 되기도 합니다. 
  
유월절은 애급에서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때에 누룩 없는 떡을 먹게 하고,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르게 하던 바로 그 때를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그 때 하나님은 애급의 모든 처음 난 것을 다 죽이셨지만 문설주에 어린양의 피를 바른 집은 죽음이 지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유월절’이라고 합니다. 영어로는 지나갔다는 의미로 ‘passover’이라고 합니다. 

유월절 식사는 애급에서의 마지막 식사입니다. 최후의 잔치입니다. 유월절 잔치의 음식은 어린양이었습니다. 이 유월절은 하나님의 나라의 잔치의 모형이고 상징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린양이십니다. 어린양이신 예수님의 피로 우리가 죽음을 면하고 영원히 살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이 땅에서의 유월절 잔치는 하나님의 나라의 잔치 없이는 무의미합니다. 그 옛날 애급에서 나올 때의 유월절 잔치를 보세요. “빨리 서서 먹고 나가라”고 하셨습니다. 아무리 맛있는 음식이라도 급히 맛도 모르고 먹는 음식이 맛이 있겠습니까? 잔치가 재미있겠습니까? 세상에서의 잔치는 이렇게 불완전합니다. 
  
유대인들은 유월절을 7일 동안 기념합니다. 기념하기 위하여 누룩 없는 빵을 먹습니다. 그래서 유월절을 무교절이라고도 합니다. 가족끼리 모여 특별한 식사를 합니다. 이 식사를 그들 말로 ‘세데르'라고 합니다. 함께 앉아 기도와 아가서 낭독을 합니다. 유월절이 되면 엄격하게 식사법을 따라 음식을 먹고 노동도 제한합니다. 왜냐하면 유월절은 가장 큰 절기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유월절 잔치는 이 세상의 것보다 더 크고, 더 즐겁고, 완벽한 잔치입니다. 이스라엘 후손들에게 유월절 잔치는 가장 즐거운 잔치입니다. 그러나 최초의 유월절 잔치는 슬픔의 잔치입니다. 가장 고통스런 잔치입니다. 애급에서의 마지막 잔치입니다. 430년의 애급의 삶을 마감하는 잔치입니다. 
  
최후의 만찬은 잔치지만 슬픈 잔치입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셔야 하는 잔치입니다. 사랑하는 제자들과 이별해야 하는 잔치입니다. ‘이별여행’이란 말이 있지요? ‘이별여행’이라는 노래도 있습니다. 또 이 이름의 만화도 있습니다. 세상에서의 마지막 유월절 잔치는 세상과 단절하는 잔치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하나님의 나라와 다시 연결하는 잔치입니다. 세상과 단절하고 난 후에 하나님의 나라의 잔치가 있습니다. 이것이 유월절잔치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잔치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유월절 잔치의 성취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잔치는 최후의 유월절 잔치입니다. 우리가 완전히 구원받은 후의 잔치가 얼마나 재미있을까요? 얼마나 즐거울까요? 하나님의 나라의 잔치는 완전한 구원 다음에 주시는 잔치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는 어린양의 혼인잔치라고 합니다. 이 잔치는 최상의 잔치입니다. 
  
이 세상의 잔치는 미완성입니다. 아무리 잘 준비해도 늘 부족하기 마련입니다. 우리나라에도 보면 잔치마다 특징이 있습니다. 평안도 잔치는 녹두지짐으로 시작합니다. 녹두지짐이 없으면 잔치가 아닙니다. 전라도잔치는 맛의 트리오가 있습니다. 막걸리, 돼지고기, 홍어랍니다. 경상도 잔치는 무엇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전라도의 홍어회를 보세요. 홍어회가 없으면 잔치가 아니랍니다. 홍어회는 코감기에 걸려 코가 막힌데 특효라고 합니다. 흑산도 홍어가 유명하다고 합니다. 옛날에는 흑산도에서 홍어를 잡아 배 밑창에 보관하고 오면 홍어의 요산이 암모니아산으로 변해서 냄새가 그렇답니다. 아무리 잔치를 잘 준비한다고 해도 풍족하거나 만족한 잔치는 없습니다. 
  
예수님의 첫 번째 기적을 보세요. 혼인잔치에 가셨는데 포도주가 모자랐습니다. 왜 모자랐을까요? 유대인들의 혼인잔치는 보통 7일 동안 잔치가 계속됩니다. 길게는 14일 동안 잔치를 합니다. 그래서 잘 준비한다고 하지만 모자라기 일쑤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잔치는 풍족합니다. 만족합니다. 이 땅의 유월절 잔치의 성취가 하나님의 나라의 잔치입니다. 그 곳에서의 잔치는 끝없는 영원한 잔치입니다. 일주일이 아니라 영원히 계속되는 잔치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잔치는 구원받은 자의 잔치입니다. 영원하고 만족하고 부족이 없는 기쁨이 넘치는 잔치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끊임없이 경축해야 합니다. 우리는 파티와 만찬, 축제 그리고 흥겨움에 사로잡혀야 합니다. 부활신앙 때문에 우리는 참다운 기쁨의 잔치에 참여해야 합니다. 이미 하나님의 나라에 있으므로 우리의 잔치는 계속됩니다. 플라톤은 신은 인간을 불쌍히 여겨 인간들이 힘든 일을 하다가 숨을 돌릴 수 있도록 매년 잔치의 날과 축제를 주었다고 했습니다. 또 축제의 친구로 예술의 여신이며 아름다운 목소리를 가진 뮤즈와 그의 동반자인 신 중의 신인 아폴로와 술과 황홀경의 신인 디오니소스를 주었다고 하였습니다. 그 잔치가 완벽합니까? 세상에서는 어떤 잔치도 완벽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잔치는 유월절 잔치의 성취로 유일하게 완벽한 잔치입니다. 

둘째, 지상에서의 마지막 잔치입니다. 

18절에는 “내가 이제부터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까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성만찬에서 잔을 나누시며 하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의 초점은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첫째는 유월절 포도주는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둘째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기 전까지는 유월절 포도주가 아무 의미 없다는 뜻입니다. 포도주를 나누는 곳에서는 하나님의 나라가 실현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성만찬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이루어야 합니다. 성만찬을 행할 때마다 항상 마지막이라는 마음으로 성찬의 떡과 잔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사상은 항상 종말적입니다.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사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 사상입니다. 오늘이 마지막 날이며, 오늘 이 식사가 마지막 식사이며, 오늘의 만남이 마지막 만남이며, 오늘의 이 예배가 마지막 예배이며, 오늘 하는 일이 마지막 일이라고 생각하면 우리의 마음이 얼마나 간절할까요? 성만찬이 문자적으로 최후의 만찬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사모하는 마음이 종말적이 될 수 있습니다. 
  
출애굽기 16:35에는 “사람이 사는 땅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 자손이 사십 년 동안 만나를 먹었으니 곧 가나안 땅 점경에 이르기까지 그들이 만나를 먹었더라”고 합니다. 가나안에서는 만나를 안 먹었습니다. 만나는 광야의 음식입니다. 가나안에 들어가서 마지막 만나의 식사는 아마 감동적이었을 것입니다. 이제 더 이상 먹을 수 없다는 마음이 아마 그들에게는 또다른 감동을 주었을 것입니다. 
  
목사와 조폭의 공통점이 있답니다. 첫째는 까만 양복을 즐겨 입는답니다. 둘째는 몰려다니기를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음식점에서 절대로 밥값을 안 낸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틀린 것 같습니다. 저는 밥값을 잘 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모두가 안 냅니다. 모두가 안 낸다고 하기보다 모두가 이미 다 냈습니다. 이미 다 냈다기보다 주인의 아들딸인데 낼 필요가 없습니다. 모두에게 공짜이며 모두에게 풍성한 잔치입니다. 
  
제가 아주 어렸을 때는 누가 멀리 가신다면 전송이 아주 요란했습니다. 저의 선친께서 미국에 가실 때만 하더라도 역까지 교인들이 빽빽하게 나와서 둘러서서 찬송을 부르고 기도를 했습니다. 공항에서도 그랬습니다. 그 때 찬송은 “우리 다시 만나볼 동안”을 불렀습니다. 정말 다시 못 볼 것같이 찬송을 부르고 전송을 했습니다. 
  
바울도 그랬습니다. 사도행전 20장을 보면 바울이 에베소 장로들에게 고별설교를 합니다. 에베소는 바울이 3년 동안 사역하던 곳입니다. 그는 밀레도에서 에베소의 장로들을 만나 말씀을 나눈 후에 헤어집니다. 성경은 “다시 그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 한 말로 말미암아 더욱 근심하고 배에까지 그를 전송하니라”고 합니다.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헤어졌습니다. 모두가 슬퍼하였습니다. 모든 마지막 일은 의미가 있는 법입니다. 
  
날마다 우리의 일이 지상에서의 마지막 잔치, 마지막 날, 마지막 일이라고 생각하고 살기를 바랍니다. 어떤 분은 늦으막하게 어떤 지위의 일을 맞게 되면 “마지막으로 주신 사명인줄 알고 열심히 일하겠다”고 합니다. 이런 마음으로 중요한 직책을 맡은 분은 아마 최선을 다해 일할 것입니다. 
  
오늘이 내 생애의 마지막 날이라면 어떻게 살겠습니까? 오늘의 식사가 마지막 식사라면 어떻겠습니까? 마지막으로 알고 대하는 일들이 얼마나 의미가 새롭겠습니까? 이런 새로움이 우리에게도 있기를 바랍니다. 요한복음 13:1에는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고 하십니다. 마지막 사랑은 정말 절절한 사랑입니다. 
  
‘주역’에는 “막다른 골목에 달하면 변화하게 마련이고 변화하게 되면 밖으로 뚫고 나가게 마련이다”(窮則變 變則通)고 합니다. 우리가 흔히 듣던 궁하면 통한다는 말입니다. 막다른 골목에 다다르면 돌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를 돌아가게 하는 것은 마지막이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잔치라면 이제는 돌아가야 합니다. 어디로 돌아가야 합니까? 하나님의 나라의 잔치로 돌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잔치를 위해서는 이 나라의 잔치를 마감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유월절 잔치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마감 잔치였습니다. 

결론 

피아니스트 루빈스타인은 “나는 한 번도 실수하지 않고 피아노를 연주해본 적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물론 그 분이 건반을 잘못 누른 것은 아닐 것입니다. 이런 그의 자세가 위대한 예술을 만들어냈습니다. 그는 언제나 피아노에 앉을 때마다 이번이 마지막 연주라고 생각하고 연주했다고 합니다. 이런 간절함과 자신에 대한 엄격함이 대가를 만듭니다. 
  
무엇을 하든지 마지막이라는 간절함으로 하십시오.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나라가 살현 되게 하십시오.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십시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하십시오. 
  
우리가 먹는 것, 일하는 것 이 모든 것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실현되게 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가면 이 땅에서의 모든 것이 성취될 것입니다. 이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의 작은 모형으로 살고, 하나님의 나라를 사모하며 살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가면 이 땅에서의 미완성이며 부족한 것들이 완전하게 성취될 것입니다. 이미 이 좋은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으로 사는 이 땅의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성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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