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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위로하시는 하나님 (고후 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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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로하시는 하나님 (고후 1:3~7)
  

다윗이 지은 시 중에 이런 탄식의 노래가 있습니다. 
시31:9 “여호와여 내가 고통 중에 있사오니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가 근심 때문에 눈과 영혼과 몸이 쇠하였나이다. 

10 내 일생을 슬픔으로 보내며 나의 연수를 탄식으로 보냄이여 
내 기력이 나의 죄악 때문에 약하여지며 나의 뼈가 쇠하도소이다.

11 내가 모든 대적들 때문에 욕을 당하고 내 이웃에게서는 심히 당하니 
내 친구가 놀라고 길에서 보는 자가 나를 피하였나이다.”

험악한 인생을 살면서 아무런 상처 없이 사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누구에게나 아픔과 상처가 있습니다. 
그 상처가 나를 괴롭히는 원수 같은 사람 때문에 받는 경우도 있지만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받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가장 가까운 친구에게 받는 경우도 있고, 가족에게서 받는 경우도 있습니다. 
부모님이 나를 가장 사랑하는 분인 줄 알면서도 
그분들에게서 상처를 받아 괴로워하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당연히 용서하고 화해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게 안 되어 가슴 아파합니다.

또 우리의 잘못 때문에 받는 고난도 있지만, 
어떤 때는 너무나 억울하게 당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벧전2:19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20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오
그러나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부당하게 고난을 받는 경우가 얼마든지 있고,
심지어는 선을 행하였기 때문에 고난을 받는 경우도 있다는 것입니다. 
어떠한 종류의 고난이든지 그것은 우리에게 아픔과 상처를 남기게 됩니다. 

그런데 그 과정 속에 위로받지 못하면 파괴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습니다. 
어릴 때 받았던 상처가 마음에 한으로 쌓이게 되고 
이것이 결국 사회생활을 하는데 장애물이 되어, 인간관계를 잘 맺지 못하고
다른 사람에게 큰 피해를 끼치는 경우도 많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반드시 이러한 상처와 아픔을 치유받아야 합니다. 

반대로 우리에게 커다란 아픔과 상처가 있을지라도, 진정한 위로를 받을 때 
우리는 더욱 그것을 잘 극복할 수 있습니다. 

또 시119:71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 고백하게 됩니다. 
고난을 유익으로 바꿀 줄 아는 지혜와 믿음이 있기를 축원합니다. 

그런데 감사하게도 우리 하나님은 위로하는 분이십니다. 
오늘 본문에서 위로라는 말을 10번이나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 위로의 하나님을 만나게 되길 바랍니다. 

1. 하나님은 우리를 위로하는 분이십니다.(고후1:3-5)

찾아보고 만나보면 사람들은 한결같이
하나님의 위로를 필요로 하는 상처받아 고통 하는 존재들입니다. 
육신의 질병, 정신적인 억눌림, 물질적인 곤경, 영적인 문제로 
신음하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상한 갈대와도 같고, 꺼져가는 등불과도 같습니다. 
그래서 누구나 위로가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서로가 위로를 받으려 할 뿐
진정 남을 위로해 주는 사람을 만나기란 참으로 어렵습니다. 

누군가 위로를 해 준다고 해도, 진정 내 마음 깊은 상처를 싸매어주는 
참된 위로를 경험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참으로 우리를 위로해 줄 분은 누구입니까?
그분은 바로 우리 하나님, 위로의 하나님이십니다. 
오늘 본문에 기록된 위로라는 말은 원어로 ‘파라클레시스’입니다. 

그런데 이 말은 성령을 가리키는 말, ‘파라클레토스’와 같은 어원입니다. 
이 말은 모두 ‘파라칼레오’라는 말에서 나온 말들입니다. 
성령 하나님은 바로 ‘위로의 영’이십니다. 
성령은 우리를 돕는 분이시며, 변호자이시며, 위로자이십니다. 

하나님만이 참된 위로자이십니다. 
고후1:3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오 
자비의 아버지시오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4.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5.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가 받는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왕상18장에 보면, 엘리야가 바알 선지자들과 대결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450:1의 경쟁에서 당당히 이기고 승리의 개가를 부른 엘리야입니다. 
바알의 선지자들은 모두 죽음을 당하게 되었습니다.(왕상18:40)
이 소식을 듣고서 왕비 이세벨이 엘리야에게 사신을 보내어 
“내일 이맘때에는 반드시 너를 죽이리라” 경고를 하게 됩니다. 

이 말을 들은 엘리야는 광야로 도망을 갔습니다. 
혼자 하룻길을 더 깊이 들어가서 한 로뎀나무 아래 앉아서 죽기를 구합니다. 
불로써 응답하신 살아계신 하나님을 경험한 엘리야가 
왕비가 죽인다는 말에 겁에 질려 도망하여 죽여달라는 상황이 이해되십니까?
죽겠다는 것은 모든 희망을 잃어버리고 절망하는 사람의 결심입니다. 

지칠 대로 지쳐 로뎀나무 아래 쓰러져 자고 있는 엘리야에게
하나님은 천사를 보내어 그를 어루만지면서 위로해 주십니다. 
“일어나서 먹으라” 그의 머리맡에는 숯불에 구운 떡과 한 병 물이 있었습니다. 
엘리야는 이것을 먹고 힘을 얻어 사십 주 사십 야를 호렙산에 머물렀습니다. 

여기서 보면, 엘리야처럼 대단한 선지자도 이렇게 지칠 때가 있습니다. 
믿음이 좋은 사람도, 대단한 영적인 체험을 한 사람도, 큰 승리의 사람도
넘어질 때가 있으며, 절망하고 좌절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이때야 말로 하나님의 위로가 필요한 때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때를 놓치지 않으시고, 찾아오셔서 위로해 주십니다. 할렐루야!

고후1:8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9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

사도 바울은 살 소망까지 끊어질 정도로 극심한 환란을 당했습니다. 
마음에 사형선고를 받은 것 같은 고난과 시련을 겪었습니다. 
이제 그는 자신을 의지하는 것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가를 깨닫게 됐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을 의지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그는 큰 위로를 얻게 되었습니다. 
위로하시는 하나님을 만난 것입니다. 
하나님은 마음이 곤고하여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인생들을 위로하기 원하셔서
예수의 모습으로 이 땅 위에 찾아오신 것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이것이 바로 위로하시는 주님이 우리를 부르시는 음성입니다. 

베드로는 밤새도록 고기를 잡았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실패를 경험한 것입니다. 
빈 그물을 씻으며 낙담해 있는 베드로에게 주님은 찾아오셨습니다. 
“깊은데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주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고기를 잡아 올렸습니다. 

이렇게 위로를 받은 베드로는 이제 그물을 버려두고 주님을 따르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고기를 낚는 어부가 아니라, 사람을 낚는 어부로 변화되었습니다. 
주님의 위로가 베드로를 더욱 위대한 존재로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주님의 위로를 받는 사람은 누구나 더욱 위대한 사람으로 변화될 수 있습니다. 

주님을 모른다고 3번씩이나 부인하고 떠나갔던 베드로에게 주님은 찾아오셔서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고 물으시며 “내 양을 먹이라”고 
위로해 주십니다. 책망을 들어야 마땅한 베드로는 위로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주님의 위로를 받은 베드로는 이제 목숨 걸고 복음을 전하는 사도가 됐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오면 누구든지 이런 위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위로하시는 하나님을 만나는 사람은 누구나 위대한 사람이 됩니다. 
하나님 안에서 이러한 위로를 받으시길 바랍니다.

2. 하나님은 우리가 위로하는 자가 되게 하십니다. (고후1:6-9)

바울이 당했던 고난이 무엇입니까?
고후11:23이하의 말씀을 보면, 
그는 옥에 갇히기도 많이 했고, 매도 수없이 맞았고, 
40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이나 맞았으며, 3번 태장으로 맞고, 
돌에 맞아 죽을 뻔하기도 했습니다. 

3번이나 배가 파선되어 일주일씩 바다에 떠다는 신세가 되기도 했습니다. 
때로는 강도를 만나고, 잠을 못자고, 배고프고, 춥고, 떨고, 굶주렸습니다. 
이것은 모두 예수를 믿고 그를 전하다가 당한 고난이었습니다. 
예수 믿고 고난이 떠나간 것이 아니라 예수 때문에 고난을 당하게 됐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원망하거나 좌절하지 아니하고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고 권면하면서 
남을 위로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나의 가난이 유익할 수 있습니다. 
사업에 실패한 사람을 위로하려고 하면, 나의 실패가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제가 아는 어느 집사님은 공장에 큰 불이 났었습니다. 
간신히 그 고난을 딛고 일어섰는데, 또 불이 났습니다. 

정말 이제는 절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잿더미 속에서 인간의 노력이 아무 것도 아님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일주일을 넘게 두문불출하고 집안에 틀어박혀 절망하고 있다가 
따뜻하게 위로해주시는 하나님의 위로를 받게 되었습니다. 
힘을 내어 심방을 갔더니, 경제적인 어려움 속에 있는 분이 용기를 얻었습니다. 

이 분은 이제 사명이 생겼습니다. 
자신의 실패의 경험이 오히려 다른 사람을 위로할 수 있음을 깨닫게 됐습니다. 
그분은 부지런히 심방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분 때문에 오히려 많은 사람이 위로를 얻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실패도 유용하게 사용하십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반드시 건강해야 하고, 다 형통해야만 영광 돌리는 것 아닙니다. 
믿음의 사람에겐 실패 속에도 하나님의 섭리가 있습니다. 
실패를 통해서 하나님은 더욱 큰 것을 얻게 하십니다. 
우리의 극심한 고통에도 하나님의 큰 뜻이 있습니다. 
또한 고난 후에도 찾아오시는 하나님의 위로가 있습니다. 
실패와 절망의 늪을 통과해 본 사람만이 실의에 빠진 이웃을 건져낼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많은 고난 속에서 위로를 받으면 
이제 그러한 고난을 당하는 사람들을 볼 때 위로해 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로하시되 
때때로 우리를 통해서 다른 사람들을 위로하게 해 주십니다. 
이러한 위로의 고리가 이어가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경상남도 어느 농촌교회를 목회하시는 목사님의 이야기입니다. 
그 교회에 충성되고 모범적으로 교회를 섬기는 장로님이 계셨습니다. 
그 아들이 서울에 일찍이 올라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 법대에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하게 되었습니다. 

온 가정과 교회와 동네에 경사가 났습니다. 
이제 입학금을 내야하겠기에 아버지가 야간열차를 타고 쌀과 밑반찬을 준비해
서울역에 새벽5:30에 도착을 했습니다. 
마중을 나오기로 한 아들이 아무리 기다려도 나타나질 않습니다. 

하는 수없이 택시를 타고 만리동에 있는 자취방으로 찾아갔습니다. 
방 문 앞에는 신발이 가지런히 놓여 있고, 방 문은 잠겨있었습니다. 
이상한 생각이 들어 문을 부수고 안을 들어가 보니, 
그 전날 밤 이 아들은 연탄가스에 질식하여 그만 죽고 말았습니다. 

어떻게 이런 청천벽력 같은 일이 일어날 수 있단 말입니까?
급하게 목사님께 연락을 하여 장례를 치릅니다. 
공부 잘하던 자랑스런 아들은 어느 새 한 줌의 재가 되어 버렸습니다. 
온 동네 사람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합니다. 

‘아무개 장로가 예수를 믿더니 망했구먼’
그 말이 더 듣기가 괴로웠습니다. 
그 장로님은 가슴을 찢는 괴로움을 간직하고 하나님 앞에 엎드렸습니다. 
도대체 하나님의 뜻은 어디에 있는 것인지......
하나님 앞에 엎드려 울고 또 부르짖는 과정 속에 십자가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아들을 십자가에 희생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몸서리쳐지도록 느껴지게 됩니다.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치던 그 말씀들이 살아납니다. 

“예수 나를 위하여 십자가를 질 때, 세상 죄를 지시고 고초 당하셨네.
예수여, 예수여, 나의 죄 위하여 보배 피를 흘리니 죄인 받으소서”

과거에 수도 없이 불렀던 찬송이지만 이제는 그 의미가 다릅니다. 
아들을 잃고 난 뒤에 더 깊은 진리를 깨닫는 위로가 있었습니다. 
골이 깊도록 상처 진 그 마음에 채워지는 하늘로부터 오는 위로가 있었습니다.

이제 장로님 내외분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삶을 살기 시작했습니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들을 자기 아들과 딸처럼 여기고
장학금을 지급하고 격려합니다. 
어려움 당하는 가정들을 제일 먼저 뛰어다니고 찾아다니며 소망을 줍니다. 
예수 안에서 새로운 삶이 시작된 것입니다. 

우리를 위로하시는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께 받은 그 위로로써
모든 환란 중에 있는 자들을 위로하게 하신다고 4절은 말씀합니다. 
6절 “우리가 환난 당하는 것도 너희가 위로와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요,
우리가 위로를 받는 것도 너희가 위로를 받게 하려는 것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 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

미국에 이민 와서 적응을 잘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해서
특별히 목회하는 윌리암 페니라는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어느 주일 날 강단에서 설교를 하셨습니다. 
“여러분, 이웃에게 친절하십시오. 한번 뿐인 인생이 아닙니까?
다투지 마십시오. 지나고 보면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친절과 사랑이 생각나거든 표현하십시오. 
감사의 말을 가족들에게 나누며 사랑의 말을 전하며 살아가십시오.”

이 설교를 한 지 몇 주가 지난 뒤에 간증하기 원하는 한 남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교회에 출석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분입니다. 
표정은 무뚝뚝하고 별로 다정스러워 보이지 않는 남자였습니다. 
“저의 아내는 간암으로 고생을 하고 있습니다. 
몇 주 전에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저는 병원에 입원한 아내에게 갔습니다. 

그리고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아내의 손을 잡고 ‘당신은 정말 훌륭한 아내였소’ ‘나는 당신을 사랑하오’
그리고 이 무뚝뚝한 남편의 얼굴에서 침대에 누워있는 아내의 얼굴에 
눈물방울이 뚝뚝 떨어졌습니다. 

아내는 이 위로의 말을 듣고
‘여보 그게 정말이오. 그러면 왜 그런 말을 진작 해 주지 않았어요?’
그런데 이 날부터 아내에게는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습니다. 
죽어가는 줄 알았던 아내의 질병이 나아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얼굴에 생기가 돌고, 윤기가 나기 시작합니다. 
그는 건강을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위로의 말은 천국의 말입니다. 
격려의 말은 천국의 말입니다. 
감사의 말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담겨주신 말입니다. 
이런 말들을 들으며 살아갈 때, 생명이 살아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여러분 가족과 이웃에게 위로와 감사, 격려와 축복의 말을 하십시오. 

여러분이 하나님 안에서 위로를 받았습니까? 이제 찾아보십시오. 
주변을 살펴보십시오. 
여러분의 위로를 필요로 하는 분들이 누구인지요? 
그 사람에게 찾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받은 위로로 그를 위로해 주십시오. 

여러분 때문에 그가 놀라운 위로를 받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에게는 놀라운 기쁨과 보람의 열매가 맺어질 것입니다. 
또한 그러한 여러분의 모습을 보며 우리 주님께서 미소 짓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 안에서 이런 놀라운 역사를 이루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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