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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아름다운 선택(2) : 희망 (고후 1: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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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선택(2) : 희망 (고후 1:8~11)


미국에 기독교 작가중에 프레드릭 뷰크너(Frederick Buechner)라는 분이 있습니다. 그의 가족은 3세대 전 독일에서 미국으로 이민을 온 가정이었다고 합니다. 열심히 가족들은 일하고 공부했습니다. 할아버지도 아버지도 프린스톤 대학에서 공부하고 전문 분야에 진출하여 성공하고 많은 재산을 모았습니다. 그러나 1930년대 미국 경제 대 공황이 닥쳐왔을 때 프레드릭의 아버지는 한꺼번에 전 재산을 잃어버리는 손실을 감수해야 했고 이런 비극을 감수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던 그는 폭음을 하기 시작했고 알콜 중독자가 되어 가고 있었습니다. 

어느 주일 새벽 술 취함에서 깨어난 프레드릭의 부친은 자동차 차고에 들어가 문을 건채 시동을 걸고 가스에 질식되어 죽은 것으로 발견되었습니다. 그때 어린 프레드릭은 열 살이었다고 합니다. 그 날부터 소년 프레드릭이 가장 곤혹스러웠던 것은 친구들이 너의 아버지가 왜 죽었느냐고 묻는 질문이었다고 합니다. 차마 아버지가 자살했다고 대답할 수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어린 프레드릭은 교회 나가고 있었기 때문에 기도를 했다고 합니다. “오, 하나님, 내 친구들에게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하나요?” 그때 어린 소년의 머릿속을 스치는 대답이 떠올랐습니다. “맞아, 아빠는 마음이 아프고 고통스러워 돌아가신 거야. 그냥 심장 질환(heart trouble)이라고 대답하면 되는 거야” 사실, 그 대답은 거짓말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때부터 네 부친은 왜 돌아가셨느냐는 질문을 받으면 그는 서슴없이 “심장 질환으로 돌아가셨어요”라고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모든 절망은 환경이나 상황 자체보다도 그 환경이나 상황을 넘어설 수 없었던 마음의 두려움에서 시작됩니다. 그때 우리는 삶을 포기하고픈 유혹을 받습니다. 그리스도인도 그럴 수 있습니까? 그럴 수 있습니다. 그 증거가 바로 본문입니다. 바울도 그런 유혹을 받은 것입니다. 

본문 8절은 그런 바울의 상황을 묘사합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여기 바울은 살 소망 까지 끊어졌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무슨 사건인지는 정확하게 스스로 묘사하지 않았기 때문에 알 길이 없습니다. 아마도 전도하다가 오해받고 동역 자들은 등을 돌리고 감옥에 투옥당하여 언제 사자의 밥이 될지 모르는 등의 상황적 고난이었을 것입니다. 어쨌든 그에게 더 이상 살 소망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 살 소망이 없는 절망 중에서도 바울은 절망이 아닌 희망을 선택했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우리는 바울이 절망 속에서 선택한 희망-그 희망의 근거는 도대체 무엇이었을까를 알아보고자 합니다. *절망을 만난 그리스도인들의 희망의 근거는 무엇입니까?

1. 하나님이십니다.

바울은 이 절망 중에서도 하나님을 기억해 낸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누구이신가를 묵상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묵상의 결론이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을 의지하기로 결단한 것입니다. 9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 많은 경우 절망은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자기라는 우상을 내려 놓게 하시는 하나님의 특단의 교육의 비책입니다.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 한마디의 고백을 위해서 다시 말하면 하나님 앞에서 인생을 살면서도 그를 신뢰하기보다 나 자신만을 더 붙들고 사는 나를 깨트리시기 위해 하나님이 준비하시는 교육의 마당이 바로 환난의 마당인 것입니다. 

여기 <하나님 만>이라는 표현을 주목하십시오. 과거에 바울이 하나님을 의지안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지금까지 자기도 상당히 믿고 하나님도 믿고, 자기 인생에서 자기 자신과 하나님이 거의 동등한 권위를 지니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자아의 죽음을 경험하면서 바울은 비로소 온전히<하나님만>의지하는 자가 된 것입니다. <나도, 하나님도>의 신앙이 <하나님 만>의 신앙으로 성숙하는 순간이었습니다.

촬스 콜슨(Charles Colson)이라는 이름을 기억하십니까? 그는 미국 닉슨 대통령 시절 특별 보좌관으로 대통령 집무실 바로 옆방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의 목적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대통령의 등도 밟고 지나갈 사람, 면도날, 우리 시대의 최고의 에고이스트 이런 별명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워터 게이트 스캔들이 터지고 대통령은 하야하고 콜슨도 감옥으로 갑니다. 더 이상 붙들 수 있는 권력도 자신도 없어진 그는 감옥의 차디찬 바닥에서 그를 위해 기도하던 크리스챤들이 집어 넣어준 C.S. 루이스의 신앙서적과 성경을 읽고 예수님을 영접하고 무릎을 꿇어 예수님을 자신의 주인으로 고백을 합니다. 자기 인생의 벼랑 끝에서 그는 하나님을 만난 것입니다. 그는 감옥에서 나오며 <거듭남> <러빙 갓>이라는 불멸의 베스트셀러를 저술하고 감옥의 수인들을 전도하기 위한 을 만들어 수많은 수인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종교 노벨상인 템플톤 상을 수상하고 지금은 미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거룩한 영향을 끼치는 지도자로 다시 태어 난 것입니다. 벼랑 끝에서 그를 만나주신 하나님-그 하나님이 그의 새 희망의 근거, 새 인생의 근거가 되어 주신 것입니다. 

2. 하나님 체험입니다.

바울 사도를 절망에서 일으킨 또 하나의 중요한 요소가 있습니다. 그것은 과거의 하나님 체험이었습니다. 그는 오늘이라는 캄캄한 어둠속에서 지나간 과거에 하나님이 그를 도우셨던 일을 기억해낸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이 지나간 날 나를 도우셨다면 그는 오늘 이 순간도 나를 도우실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10절의 고백입니다. “그가 이 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실 것이며 이 후에도 건지시기를 그에게 바라노라”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의 믿음의 근거가 되는 계시의 말씀인 성경을 잘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신앙이 살아있는 신앙이 되려면 이제 그 말씀을 우리의 삶속에서 실제로 체험하는 일입니다. 영성 운동에서는 보통 말씀을 로고스와 레마로 구별합니다.(때로는 중복적으로 동의로 사용되기도 하지만)많은 경우 로고스가 기록된 말씀 혹은 선포되는 말씀이라면 레마는 성취되는 말씀, 체험된 말씀을 의미합니다. 

신학교 졸업식에서 한 학생이 성경을 손에 들고 나와 졸업식 대표 인사를 하며 “교수님들 아무 걱정 마십시오. 우리는 이 말씀을 붙들고 살 것입니다.”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날 설교를 하시던 교수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다고 합니다. “제군들이 말씀을 붙들고 살겠다는 것은 정말 좋은 결심이네. 그러나 제군들이 진정한 승리를 경험하기 위해서는 제군들이 말씀을 붙드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제군들을 붙들어 주는 경험이 필요하네. 그때 제군들은 정말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갈 것일세” 

그렇습니다. 지나간 날 말씀이 나를 붙들고 그 말씀으로 고난에서 벗어난 경험이 있는 사람은 결코 오늘의 환난에서 절망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신 주님이 어제 내 기도를 응답하시고 어제 약속의 말씀으로 건지신 이가 오늘도 기도를 응답하시고 오늘도 약속의 말씀으로 지키실 것을 믿습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에 체험이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의 체험은 항상 말씀의 근거위에서 이루어져야 하지만 신앙의 동력성은 체험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고 말합니다. 절망을 이기는 희망의 근거-하나님 체험입니다.

3. 하나님을 체험하는 기도입니다.

바울을 절망에서 살린 것은 하나님 신앙과 하나님의 경험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믿는 하나님을 구체적으로 경험하게 한 것은 바로 기도이었습니다. 그래서 기도를 배울 때까지 아직 우리의 신앙은 온전하지 못합니다. 종은 울릴 때까지 종이 아니고, 노래는 노래할 때까지 노래가 아니고, 사랑은 사랑할 때까지 사랑이 아닙니다. 그런데 믿음은 기도할 때까지는 믿음이 아닙니다. 기도가 바로 믿음을 경험하게 하는 현장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절망을 거부하고 절망의 자리에서 하나님을 붙들고 일어서면서 이 편지를 읽는 고린도 교인들에게 중보 기도를 부탁합니다. 

11절입니다. “너희도 우리를 위하여 간구함으로 도우라 이는 우리가 많은 사람의 기도로 얻은 은사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우리를 위하여 감사하게 하려 함이라” 바울이 기도로 일어서면 바울을 위하여 기도한 많은 사람들과 함께 진정 감사하고 진정 희망을 나누게 될 것을 믿는다는 말입니다.

기도로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고 그 희망을 많은 사람들과 나누게 된 한 사람의 이야기를 들려 드리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무주택자들에게 주택을 지어 공급하는 해비타트 운동에 대하여 들으셨을 것입니다. 흔히 이 운동은 지미 카터 대통령이 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지미 카터는 이 운동의 봉사자일 뿐 이 운동을 시작한 사람은 밀라드 훌러(Millard Fuller)라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밀라드 훌러로 하여금 이런 일을 하도록 동기를 부여한 또 다른 사람이 있는데 그는 클라렌스 조던(Clarence Jordon)이라는 미 침례교 목사입니다. 그는 본래 조지아 대학 농과대학을 졸업하고 농사에 꿈을 가진 사람이었지만 당시 주변에 가난한 흑인들의 절망적인 인생을 바라보고 또한 흑백 인종의 차별이 가져온 남부의 갈등을 고통스럽게 바라보며 신학밖에는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느껴 미 남침례교 신학교에 입학합니다. 그는 너무나 공부를 잘해서 최단 시일에 신약학을 전공하고 박사학위를 받습니다. 그는 졸업후 성경 번역을 하고 여러 우수한 신학서적을 집필합니다. 

그러나 그는 성경을 읽으면 읽을수록 차별받고 절망하는 흑인들을 그대로 두고 볼 수 없다는 생각이 사로잡습니다. 그는 깊은 기도에 들어갑니다. 그리고 마침내 사도행전에 나타난 코이노니아 공동체를 시작하라는 성령의 인도를 경험합니다. 그는 교수직 초청도 큰 교회 초청도 사양하고 조지아 주 시골에 들어가 백인과 흑인이 어우러져 사는 코이노니아 공동체를 시작합니다. 

1942년부터 1969년까지 그는 주변에 가난하고 버림받은 흑인들을 데려다가 백인들로 그들을 섬기게 하고 함께 예배하고 함께 기도하고 함께 손을 잡고 함께 집을 짓고 함께 농촌을 개간하게 합니다. 마치 김용기 장로님이 가나안 농군학교를 시작하신 것과도 유사한 모습이었습니다. 미국 남부에서 거리마다 지방마다 흑백 인종의 갈등이 하루도 신문에 보도 안 될 날이 없었을 때에 코이노니아 공동체에서는 흑인과 백인들의 웃음소리가 떠나지 않은 기적 같은 현장이 펼쳐지고 있었습니다. 

1965년 몇 시간 이 공동체를 방문 할 목적으로 이 곳을 찾아온 청년 밀라드 풀러(Millard Fuller)는 여기서 충격을 받고 몇 일을 머물다가 자기의 전 재산을 정리하여 1968년 이 곳으로 이주해 지도자중의 한 사람이 됩니다. 그가 여기서 담당한 사역이 집짓기 사역이었고 이것이 바로 후일 해비타트 운동이 된 것입니다. 

1969년 10월 29일 클라렌스 조던 목사는 심장 마비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납니다. 코이노니아 공동체 식구들이 모인 조던 목사의 장례식은 조촐하게 진행되었고 순서를 따라 마지막 하관식이 이 공동체 코너의 나무아래서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공동체 식구들은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가는 이 순간을 어쩔줄 모르고 깊은 슬픔에 잠겨 있었습니다. 

그때 갑자기 한 흑인 아이가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무슨 노래인줄 아십니까? “Happy birthday to U, Happy Birthday Dear 조던 목사님” 갑자기 누눈가가 소리쳤습니다. “맞아 오늘은 조던 목사님이 하늘에서 다시 태어나시는 날이야” 사람들은 슬픔을 멈추고 이 장례식에서 생일 노래를 부르기 시작합니다. 슬픔의 자리는 순간 놀라운 희망의 축제로 바뀌기 시작합니다. 

밀라드 풀러는 이 자리를 이렇게 회상합니다. “조던의 그 날의 장례의 광경은 바로 그의 일생의 상징이었다. 그는 수많은 절망한 이웃들에게 희망의 생일을 선물하였다. 마지막 가는 길 그는 진실로 생일 축하를 받기에 합당한 우리들의 희망의 영웅이었다.” 절망의 사건들이 쌓이는 인생은 아직도 우리의 선택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냥 사시다가 절망하시겠습니까? 아니면 희망의 하나님을 선택하고 희망을 남기는 인생을 사시겠습니까!  (이동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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