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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지도자 (출 3: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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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자 (출 3:1~14)


I. 못나서 쓰신다

구약 성경의 기적 사건들을 통하여 살아 계신 하나님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시간에는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하나님께서 천지우주만물을 창조하셨기 때문에 온 우주의 관리권이 하나님께 있고 인생 살아가다가 고난을 당하고 문제에 부딪쳤을 때에 그것을 회복하시고 치유하실 수 있는 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이 사실을 믿으면 신구약 66권은 문이 열려집니다. 성경에 나타나는 하나님이 오늘도 우리 가운데 살아 계심을 경험하게 됩니다. 성경에 기록된 모든 사건들이 오늘 우리 가운데서 동일한 경험으로 다가올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 사건은 에녹의 승천사건을 통하여 동행이란 제목으로 말씀의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죄인된 인간이 어찌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있으며 온 우주의 어마어마한 존재 하나님께서 어찌 나를 지키시고 인도하시고 내 곁에 계시고 함께 동행하신단 말입니까? 이 땅에 살아가는 동안에 수많은 기적경험이 있지만 이것보다 더 엄청난 기적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 경험하기 세 번째 이 시간에는 「지도자」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본문 출애굽기 3장 1절로 14절 말씀은 꺼지지 않는 떨기나무 불꽃으로 하나님이 임재하셔서 모세를 지도자로 부르신 사건입니다. 이때부터 모세가 하는 모든 일들은 모세 자신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이 된 것입니다. 이 땅에 살아가면서 내가 하는 모든 일들, 내가 계획하고 꿈꾸고 이루어 가는 이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일이 되는 기적을 볼 수 있다고 한다면 이 엄청난 축복을 상상이나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나라 어떤 분이 이스라엘 국제공항 텔라비브에 도착했습니다. 택시를 탔습니다. 오, 모세의 나라여 할렐루야! 그랬더니 택시를 운전하던 기사가 아니 무슨 얘기를 그렇게 하십니까? 우리는 모세 때문에 죽을 고생을 하는데... 아니 모세는 당신네 나라의 영웅이 아니요. 아니 말도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나타나셔서 출애굽한 다음에 어디로 가고 싶으냐 물었는데 카나다로 가고 싶다고 해야 하는데 모세가 말을 더듬는 바람에 하나님이 그만 가나안 땅으로 보냈다고, 늘어지게 살 팔자인데 모세 때문에 우리가 이 고생을 한다고 농담을 하더랍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어 내려가다 보면, 인간적으로 모세는 영웅이라기 보다는 부족한 점이 많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한편 친근감을 느끼기도 합니다.

모세는 이스라엘이 애굽의 압제아래 종살이를 하던 시절에 태어났습니다. 모세가 출생할 때 애굽왕 바로가 히브리 남자 아이는 전부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모세의 어머니는 아이를 석달동안 숨겼으나 더 이상 숨길수가 없어 갈대상자에 아이를 달아 나일강 물에 던집니다. 때마침 강가에 목욕하러 왔던 공주와 궁녀들의 눈에 띄어 건짐을 받고 바로의 궁궐에 들어가 삽니다. 이러한 사건과 모세라는 이름 자체가 하나님의 커다란 계시입니다.

모세라는 이름의 뜻은 "내가 건져 낸다"는 뜻입니다. 물에서 건져냈기 때문에 지은 이름이지요. 그렇다면 "물에서 건져냄을 받은 자"라는 수동태가 되어야 되는데 모세의 이름은 "건져낼 자"라는 능동태로 되어 있습니다. 장차 자기 백성을 건져낼 자라는 암시와 사명이 담긴 이름 아닙니까?

모세는 어릴 때부터 자기 이름속에 숨겨진 하나님의 경륜을 알았습니다. "나는 언젠가 우리 백성을 애굽으로부터 건져내야 한다. 그리하여 모세는 그가 닦은 학문과 40년동안 축적한 힘으로 자기 동포를 건져 보겠다고 주먹을 쥐고 휘둘러봅니다. 자기 백성과 애굽인의 싸움을 보고 의분과 애국심에서 애굽인을 쳐 죽인 것이 자기 백성의 밀고로 탈로 됩니다. 실망과 실패의 한을 품고 망명길에 오릅니다. 이제부터는 하늘을 지붕삼고 떠나는 걸식객이 된 것입니다. 

장인의 양을 치는 목동이 되어 험한 산야를 헤매며 밤낮 자기 백성, 이스라엘을 못 잊어 눈물을 뿌려 40년 세월을 보냅니다. 미디안 광야생활 춘풍추우를 보내고 모세의 나이 이제 80입니다. 지금까지의 모든 계획이 다 일장춘몽이요, 이제는 늙은 양의 젖을 짜며 남은 세월을 보내야겠다 모든 것을 접어야 했습니다. 

바로 이때 하나님이 모세를 찾아오십니다. 
하나님은 실패를 통하여, 실수를 통하여 모세를 부르셨습니다. 
여러분, 지금까지 실패했다고 앞으로 실패할 것이라 생각하지 마십시요. 지금 당신은 하나님을 만날 기회가 온 것입니다. 

몇 년 전 애리조나 다이아몬드 백스팀에 한국의 자랑스런 아들 김병현이란 선수가 있었습니다. 한국 선수로는 사상 처음 미국 월드시리즈에 출전하는 영광을 얻었습니다. 전통의 명문 뉴욕 양키즈팀과 맞붙어 3승 1패, 우승이 눈앞에 보이는 5회전, 6회전 마무리 투수로 김병현이 등판합니다. 공교롭게도 두 게임 모두 9회말 투아웃 투스트라이크 쓰리볼 - 공 하나면 우승이 보이는 바로 그때 동점 홈런, 역전 홈런을 맞고 또 6회전에서도 역시 동점 홈런을 맞고 말았습니다. 땅 바닥에 고개를 떨구고 앉아있던 20대 초반 어린 청년의 모습은 보는 이들의 마음을 아프게 했습니다. 다행히 7회전에서 다이야몬드 백스팀은 승리 -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이 사건이 있은 후 저는 세 가지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첫째는 애리조나 야구팬들의 태도입니다. 
그가 돌아왔을 때 모든 지방신문은 김병현 선수에게 격려를 보냈습니다. "김병현이 없었더라면 우리는 월드시리즈에 진출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아직도 우리는 김병현을 사랑한다." 

둘째는 다이야몬드 백스팀의 감독의 태도입니다. 
"나는 아직도 김병현을 믿는다. 다시 기회가 오면 또 다시 김병현을 마운드에 세우겠다." 한번의 실수로 선수를 꺽지 아니하고 다시 믿어주고 다시 세워주는 감독의 지혜입니다.

셋째는 김병현 자신의 태도입니다. 
고국 땅을 밟았을 때 기자들이 그때 심정이 어떠했느냐고 물었더니 "그 엄청난 실패의 순간을 잊어버리기가 여간 어렵지 않았지만 한번 던져진 공은 다시 생각하지 않는다. 모든 것을 잊고 다시 공을 뿌리겠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인생을 살아가다 보면 김병현 선수가 당했던 동일한 일들이 우리라고 왜 당하지 않겠습니까? 인생사에 다반사로 일어나는 것들이 이런 문제 아니었습니까? 

학창시절 거창고등학교를 다닐 때에 당시 전영창 교장선생님이란 훌륭한 설교가가 계셨습니다. 생각해 보면 그 선생님의 나이가 지금 제 나이쯤 되었는데 "얘들아, 너희들 앞으로 인생을 살아갈 때에 어려움이 있을 수 있을 게야. 너희 힘으로 도무지 해결할 수 없는 인생의 거대한 바위 앞에 서 있을 때가 있을 게야. 울어도 울어도 해결되지 않는 인생의 절망 가운데 빠질 때가 있을 거야. 

그러나 하나님이 살아계시다고 한다면, 너희들이 하나님을 신뢰하고 믿는다면 절대로 포기해서는 안된다." Don't give up hold on Never Nnever Never. 이 말씀을 하시다가 틀니가 앞으로 폭 빠져나왔습니다. 그러자 내려오셔서 먼지 묻는 틀니를 쓰윽 닦더니 다시 끼우고 Don't Give Up. 고압선에 감전된 것처럼 우리의 몸은 감전된 듯이 전율을 느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분의 외침이 지금도 내 핏속에 뼛속에 살 속에 녹아 있습니다.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아직도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아직도 우리를 신뢰하십니다. 우리를 소중하다 말씀하십니다. 우리를 쓰시겠다 말씀하십니다.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이 부름에 응답하는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역사의 마운드에 다시 세우시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II. 지배자 vs. 지도자

시대가 영웅을 낳는가 영웅이 시대를 만드는가? 사가들의 질문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을 불러 리더, 지도자로 세우시고 그를 통해 역사를 이루어 가십니다. 

옛날 어느 철인은 대낮에도 등불을 들고 사람을 찾아 다녔다고 합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뜻을 사람을 통해 이루시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께 쓰임 받는 사람을 우리는 지도자라 합니다.

「지도자」하면, 흔히 남을 지배하고 다스리는 사람을 연상합니다. 나라의 정권을 잡은 사람, 회사의 사장, 어느 단체의 기관장... 그러나 지배자와 지도자는 엄연히 다릅니다. 다른 사람을 넘어뜨리고 싸워 이겨서 얻은 세상의 자리, 지배자는 될 수 있을지 모르나 지도자가 될 수는 없습니다. 

지배자는 다스리고 군림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러나 지도자는 섬기는 사람입니다. 지도자는 부러움의 대상이 아니라 존경의 대상입니다. 우리시대의 불행이 있다고 하면 지배자는 많으나 지도자가 없다고 하는데에 있습니다. 

지도자는 부러움의 대상이 아니라 존경의 대상입니다. 성공한 정치가들은 부러움의 대상은 되고 있으나 존경의 대상이 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많은 기업가들도 부러움의 대상은 되고 있으나 존경의 대상이 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큰 교회를 세운 많은 목회자들 또한 부러움의 대상은 되고 있으나 존경의 대상이 되지 못하고 있다고 하는 데에 오늘 이 시대의 불행이 있습니다. 지도자는 언제나 자기를 부정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생각합니다. 지도자는 자기는 죽고 다른 사람의 생명을 살립니다.

지배자의 소리는, 한때 세상을 지배하는 듯 하나 역사 속에서 사라지고 맙니다. 정치가의 소리도 사라졌고 회장, 총회장의 소리도 부흥사의 소리도 사라집니다. 그러나 순교자 손양원 목사님과 주기철 목사님은 오늘도 살아서 한국교회 한 가운데 살아 숨쉬고 있습니다. 한국교회는 저들의 소리를 듣고 저들을 양식으로 먹고 삽니다. 수많은 군왕들의 소리는 모두 사라졌으나 우리민족 한가운데 도산 안창호의 소리, 백범 김구 선생의 소리, 사육신의 소리는 영원히 살아 숨쉬고 있습니다. 

지배자는 땅이 쓰는 사람입니다. 기업에 필요하고 정당에 필요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지도자는 하나님이 쓰는 사람입니다. 지도자는 하나님이 보내시고 하나님이 세운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지배자가 아니라 지도자로 살아갑니다.

내가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된 것이 최고의 기적이요 내가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하나님의 일군 된 것이 기적입니다. 

III. 행복은 쓰임 받는데 있다

「내가 하나님 앞에 붙들리고 쓰임 받는다.」 여기에 나의 행복이 있습니다. 사람의 행복은 내가 가치 있는 존재임을 깨닫는데 있습니다. 사람의 가치와 가격은 다른 것입니다. 그의 재산이 얼마냐? 지식이 얼마냐? 월급이 얼마냐? 하는 것은 가격은 될 수 있을지 모르나 그것이 곧 그 사람의 가치는 아닙니다.

사람의 가치는 그가 어떤 일에 쓰임을 받느냐? 무엇을 위해 사느냐? 에 따라 평가됩니다. 때문에 사람은 그가 어디에 가든지 하나님 앞에 쓸모 있는 사람, 꼭 필요한 존재, 가치 있는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집안에 작은 그릇 하나만 해도 그렇습니다. 아침 저녁으로 들락날락 쓰임 받는 밥그릇, 국그릇이 있는가 하면, 찬장 맨 꼭대기에 언제나 모셔져 있는 그릇이 있습니다. 이사갈 때 한번씩 꺼내 먼지를 닦고 제일 먼저 챙겨지는 비싼 그릇, 그러다가 밥 한번 담아 보지 못하고 깨져서 버리는 그릇! 우리는 그런 인간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이란? 밥을 먹고사는 존재가 아니라 보람을 먹고사는 존재, 가치를 먹고사는 존재입니다. 잘 먹고 잘 입고 살면 행복할 줄 알지만 그렇지가 않습니다. 누군가 나를 필요로 하고 있다. 나는 하나님 앞에 쓰임 받는 존재가 되었다. 거기에 행복이 있고 기쁨이 있고 보람이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 시간, 「나는 아무쓸모 없는 존재다. 나는 아무데도 유익하지 못한 존재다.」 낙심하고 고개를 떨구고 계신 분이 계십니까? 아닙니다. 바로 당신을 필요로 하는 분이 계십니다. 당신에게 기대를 가지고 계신 분이 있습니다. 바로 우리 아버지 하나님이십니다. 내 모습 이대로 소명이요 행복입니다. 

IV. 하나님이 찾아 오셨다

하나님은 지도자를 찾고 계십니다. 야훼의 사자가 모세를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모세와 대화를 할 때보면 야훼의 사자가 아니라 하나님이 직접 모세와 대화를 하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성서신학자들은 이 분이 구약의 예수님 일 것이라고 추측을 합니다.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로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 만약 제가 이 사건을 주도하는 연출자였다면 이렇게 했을 것입니다. 모세는 벅찬 기쁨의 눈물을 두 주먹으로 닦으며 장인에게로 갔습니다. "장인 어른, 하나님이 드디어 나를 찾아 오셨습니다. 이제 저는 내 백성을 건지기 위하여 가겠습니다." 그리고 아내의 손을 붙들고 "여보, 드디어 때가 왔소". 그래서 모세는 특급 천리마를 타고 광야의 먼지를 일으키며 "이랴, 애굽으로 가자!" 얼마나 스릴있고 박진감이 넘치며 신나는 일입니까?

그러나 11절을 보십시오. 직역하면 이렇습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고하되 제가 왜 갑니까?" 여러분, 이 말을 이해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이 찾아오셨습니다. 그때 모세는 "내가 어떻게 갑니까?" "하나님 저는 알다가도 모를 분이 바로 당신입니다. 왜 이제 오셨습니까? 제 팔에 알통이 남아있고 머리에 총명이 반짝이고 가슴엔 사명으로 불타던 그때 제가 하나님 편에서 손을 쓸 때는 왜 가만히 계셨습니까? 

이제 와서 가라구요. 제 얼굴을 보십시오. 주름지지 않은 곳이 어디 있습니까? 이 늙은 몸을 가지고 누구에게 가며 어떻게 내 백성을 인도한단 말입니까? 하나님 너무 하십니다." 아마 군대 졸병이 말대꾸를 하더라도 속된말로 귀 싸데기를 한데 쳤을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달래고 설득합니다. 이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제가 오늘 아침 이해할 수 없는 난제가 여기 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사명을 가지고 주먹을 휘두를 때는 그것이 불신앙이라고 단정하고 있다가 죽을까봐 미디안 광야로 도망을 간 그 비겁한 사건을 보고 히브리서 11장은 신앙으로 간 것이라는 것입니다. 27절 "믿음으로 애굽을 떠나" 그럼 내 힘으로 할 때는 불신앙이고 하나님께서 나를 몰아쳐서 할 수 없이 끌려 갈 때는 신앙이란 말인가? 적어도 오늘 본문은 그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 불과 열정으로 하면 불신앙이고 하나님의 불과 하나님의 뜻으로 하면 신앙입니다. 

그래도 모세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묻습니다. 그러시는 하나님 당신은 누구십니까? 하나님의 대답은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이게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I am that I am. "나는 나다. 나는 내 맘대로 한다" 그런 말입니다. 하나님이 부르면 부르고 버리면 버림받는 거지요. 80살에 부르면 80살에 아멘이요, 10살에 부르면 10살에 아멘이요, 120살에 부르면 120살에 아멘입니다. 

I am that I am.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온 천하는 그 앞에 잠잠할지니라. 조용합니다. 할말이 없습니다. 옹기가 어찌 그 만드는 이를 향하여 "나를 왜 장독으로 만들었습니까? 나를 왜 오강으로 만들었습니까? 나를 왜 국그릇으로 만들어요?" 뭐라고 대답할까요? "내가 만들고 싶어서 만들었다. 필요해서 만들었다."

칼빈은 "하나님께서 나를 지옥에 내려가라 해도 그것이 하나님의 명령이라면 아멘! 찬송하며 내려가겠다"고 했습니다. 

V. 떨기나무

호렙산. 하나님이 모세를 찾아온 산이 호렙산입니다. 
구약성경을 읽어 내려가다 보면 호렙산이 나오고 시내산이 나옵니다. 동일한 장소인데 성경학자들이 연구를 해 보니까 산전체, 산등성이 전체는 호렙산이고 산정상, 산꼭대기가 시내산이라고 합니다. 호렙산에 가장 많이 널려져 있는게 떨기나무입니다. 

하나님 제 나이 80인데 이제 와서 무엇을 하자는 겁니까? 이 질문에 대한 가시적인 대답이 "떨기나무 불꽃"입니다. 

떨기나무란 곧 가시나무를 말합니다. 호렙산 광야에 많은 나무들이 있지만, 그 가운데 많고 많은 나무가 이 떨기나무요, 꾸불꾸불하고 쓸모없는 나무가 가시나무였습니다. 기둥감은 고사하고 석가래 감도 못되는 가시떨기, 천대꾸러기 나무였습니다. 사막의 열기에 가끔 불을 안 붙여도 불이 난다고 합니다. 화악~ 한번 불길에 타오르다 푹 꺼지면 그만입니다. 이 보잘 것 없는 떨기나무 - 노예로 살아가는 히브리인을 얘기하고 있고 40년 동안 남의 종살이하는 모세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떨기나무의 불꽃은 좀 이상합니다. 나무가 타지 않습니다. 보통, 불이란 연소할 재료가 있어야 불꽃이 유지되는 법입니다. 지금 떨기나무 불은 혼자서 타고 있습니다. 여기에 깊은 의미가 숨어 있습니다. "모세야, 너는 40년전에 너 자신을 태워 내 일을 하려고 했다. 너를 태우자 두 번도 못태우고 24시간만에 홀랑타고 남은 것이라곤 재밖에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은 네 몸 태워서 하는게 아니고 하늘로부터 능력 받아서 하는 것이다. 100kg도 안되는 네 몸이 역사를 뒤집는 땔감으로 될 것 같으냐?

여러분! 하는 일마다 힘들고 어지러운 이유가 무엇입니까? 자신을 태우는 방법밖에 모르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기껏해야 24시간 땔감밖에 못됩니다. 그래서 네 발의 신발을 벗으라는 것입니다. 네 인생은 끝났다. 모세, 너는 죽었다. 공주의 아들이 되어 애굽에서 신던 신발 벗어라. 학문과 경험의 신발도 벗어라. 지위와 권세의 신발도 벗어라. 낙심, 절망의 신발을 벗어라. 네 발로 걷던 것은 무엇이든지 벗으라는 말입니다. 네 힘 내려놓고 겸손해 지라는 것입니다. 네 발로 걷지 말고 하나님이 인도하는 데로 걸어가라는 말입니다. 

신발 벗고 사는 사람은 노예밖에 없습니다. 네가 사령관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나의 종으로 가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진정한 지도자인 것이다. 

사람들이 일하러 갈 때 내 놓는 게 있습니다. 이력서라는 겁니다. 네 이력서를 집어 던지라 말씀하는 겁니다. 이력서란 밟을 리(履), 신바닥 력(歷) 즉 자기 발로 걸어온, 신이 다닌 경로를 쓰는 것이요, 신이 다닌 자취를 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하나님 앞에서는 이력서를 포기하고 하나님의 발로 다니란 말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과 하나님의 일은 내 이력서, 내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일은 자기를 포기한 때부터 가능합니다. 인생의 마지막이 곧 하나님의 시작입니다. 인간이 궁지에 몰렸을 때가 곧 하나님께서 일을 시작하는 기회입니다. 

40년전 모세는 생각하기를 큰 나무더미가 아니면 큰 불을 일으킬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즉, 큰 인물이 아니고서는 큰 일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그 일을 자기 자신이 해야겠다고 결심을 하고 자신의 힘과 능력과 그가 배운 학식과 재능과 경험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해 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생각은 하루 아침에 풍비박산이 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레바논의 백향목을 태우지 아니하시고 보잘 것 없는 몇 포기 가시나무에서 꺼지지 않는 놀라운 불을 일으키셨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① "모세야, 역사는 백향목이나 상수리 나무같은 거목이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에 붙들린 자가 하는 것이다. 너 자신을 백향목으로 생각하고 있는 한, 너는 그 일을 할 수 없다. 40년동안 네가 미디안에서 고생한 이유를 알겠냐? 백향목 같은 네 고집이 가시나무로 낮아지고 꺽여 지기 위함이었다. 모세야, 너는 가시떨기 같은 존재니라." 바로 이 말입니다.

오늘 아침 우리를 향한 메세지가 여기 있습니다. 네가 대단한 사람이라서 내가 큰 사명을 주는 줄 아느냐? 너는 쓸모없는 떨기나무다. 그러나 나 여호와가 너 같은 떨기나무에 임재할 때 너는 큰 불을 일으킬 수 있다! 이것이 겸손입니다. 이것이 지도자의 성품입니다. 여기에 쓰임 받는 감격이 있습니다. 

이 사실이 바로 여러분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거룩한 메시지임을 믿으십니까? 쓸데없는 교만과 자아가 불쑥 불쑥 튀어 오르거든 이 말씀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나는 가시떨기다. 교만하지 말자. 깨끗이 죽자." 

호렙산 떨기나무에 타올랐던 그 불은 나무를 태우는 불이 아니었습니다. 그 불은 인간의 마음을 태워 뜨겁게 하는 불이었습니다. 그 불은 식은 소명을 새롭게 하는 불이었고, 인간의 삶을 거듭나게 하는 불, 죄를 태우는 불, 성령의 불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이 땅에 불을 던지러 왔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이 불을 받으면 세상을 태우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때문에 교회사는 불의 역사였고 사도행전은 불의 행전이었습니다. 성령의 불이 타오르는 곳마다 어둠이 변하여 빛이 되었고, 좌절이 변하여 새 역사를 창조하게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날 밤 꺼져가는 모닥불 앞에서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고 도망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오순절 다락방에 그 불이 내려지자 예루살렘을 태웠고 로마를 태웠습니다. 환란도 핍박도 죽음도 그 불을 끄지 못했습니다. 그 불은 내 몸을 뜨겁게 하고 마음을 뜨겁게 하고 내 삶, 내 사역을 뜨겁게 하는 불이었습니다. 

개척교회에서는 사람들 일군이 모자라니까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고 열심히 일을 해봅니다. 그냥 불같이 일을 하지요. 그러다가 교회가 성장되면 일거리가 많아지고 사람도 많아지다 보면, 내가 하는 사역이 외소하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당장 하는 얘기가 있습니다. "목사님도 인정해 주지 않는데 뭐, 하나님이나 알아 주는지 모르겠다." 불평하고 원망하는 사람들을 보게 됩니다. 그 불은 소명의 불이 아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자기를 태우는 불이었기 때문에 꺼져 버리고 재가 되버리고 만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인간적인 열심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하늘의 불로 하는 것입니다. 하늘의 불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② 동시에 떨기나무 경험은 나 같은 것도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나 같은 가시떨기도 하나님이 붙들어 주시면 일어설 수 있다는 소망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연료 여하에 상관이 없이 큰 불을 일으키십니다. 
나를 통해서도 하나님은 큰 불을 일으킬 수 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타나 남은 숯덩이 조각으로 자처하는 요한 웨슬레를 불러 하나님은 영국 교회에 큰 불을 붙여 주시고, 오늘 세계에서 가장 큰 교단중의 하나인 감리교를 만들게 했습니다.

한나모아 여사는 이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마을 예배당엔 노인들 몇 사람이 모여 예배를 드리고 있었고, 성경책은 단 한권 그것도 화분 받침대로 사용되고 있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불에서 끄집어낸 타다 남은 조각이라고 고백하는 요한 웨슬레에 불을 내려 그를 태우셨고, 요한 웨슬레 한사람의 불길은 영국 전역을 태우고도 세계를 태우고도 넉넉히 남음이 있었다. 할렐루야.

예수님께서는 보잘 것 없었던 평민 어부들을 불러 사도를 만드시고, 성령의 불을 일으켜 오늘날 세계를 복음의 불로 태워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늙어 마른 막대기가 된 아브라함과 사라를 불러 이삭이라는 자식을 주시고 믿음의 조상으로 삼으셨습니다. 사도바울은 고린도전서 1:25에서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다"고 말씀하십니다. 메마른 아론의 지팡이에 하나님의 손이 닿자 싹이 나고 꽃이 피었습니다. 열매를 맺었습니다. 

이 시간 나 자신을 아무리 돌이켜 보아도 마른 막대기라고 생각하시는 분들 계십니까? 한 포기의 떨기나무에 불과하다고 생각하시는 분이 계십니까? 여러분 가운데 성령의 불이 떨어지면 그 크신 역사를 여러분이 이루어 가게 될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처음 시작되어졌을 때에 저는 제가 개척을 하면 한달 두달내에 사람들이 물밀 듯이 밀려올 것이라는 꿈을 가지고 개척교회를 시작했습니다. 육개월동안 예배당을 구하지 못하여 남의 유치원에서 안방에서 기도하며 하나님앞에 예배당을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빈 들판에 돗자리 한 자락 깔고 성경책 한권 올려놓을 자리가 있으면 판자조각 위에서라도 복음을 전하겠다고 뛰어다녔습니다. 그리고 능곡 조그만한 지하실에 예배당을 구하여 예배를 드리는 데, 한달이 지나고 두달이 지나도 사람들이 몰려오기는 커녕 한사람, 두사람 오히려 내 곁을 떠나가고 있었습니다. 

어느 토요일 오후 한 두 집사님과 함께 의자 밑을 기어다니며 물을 닦았고 청소를 했습니다. 집사님들이 떠나고 난 다음에 강대상 밑에 엎드려 하나님 앞에 울며 울며 기도를 했습니다. 몸이 피곤했던지 깜박 잠이 들었던 모양입니다. 어릴 때 우리 집앞에서 불이 나는 것을 본적이 있는데 그 장면을 꿈속에 한 컷트를 보게 되었습니다. 

어릴 때 살던 우리집 앞에 큰 불꽃이 솟아오르는데 사람들이 구름 떼처럼 새까맣게 몰려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불이야! 소리를 지르길래 깜짝 놀라 깼습니다. 긴 꿈도 아니고 한 컷트 사진이 달카닥 하고 지나갔는데 이것이 무엇을 의미한단 말인가? 개척교회하는 사이에 지칠대로 지쳐서 내 몸은 사늘하게 식어져 있었던 것이지요. 기도는 식어졌고, 사랑은 식어졌고, 꿈꾸던 소망도 비젼도 다 사라지고 제가 비어있는 상태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제게 그렇게 말씀 하셨습니다. "종아, 너의 가슴이 불이 붙어야 하느니라. 너의 눈에 사랑의 눈물이 쏟아져야 하느니라. 너의 손끝에 사랑의 불이 붙어야 하느니라. 네 무릎에 기도의 불이 붙어야 하느니라. 네 입술에 복음의 불이 붙어야 하느니라. 네 머리에 성령의 불이 떨어져야 하느니라. 너의 가슴이 식어있는데, 예배당이 사늘하게 식어져 있는데 사람들이 몰려왔다 추워서 도망가는 게지. 불나면 사람들 모일게다. 불이 나야 하느니라." 그래서 엎드려 울었습니다. 

"하나님, 불나게 해 주세요. 내 가슴에 불이 나게 해주세요. 내 아내의 가슴에 불이 나게 해주세요. 우리교우들 가슴에 불이 나게 해주세요. 무릎에 기도의 불이 나게 해 주세요. 손끝마다 사랑의 불이 나게 해 주세요. 입술마다 복음전도의 불이 붙게 해 주세요." 

시간을 측량할 수 없을 만큼 긴 시간이 흘러 갔습니다. 마음이 뜨거워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 복음을 전해야지!" 그리고는 60일동안 준비기도를 하고 40일동안 부흥회를 했습니다. 그렇게 몰려오지 않던 사람들이 40일 부흥회를 통하여 한명 두명 등록하기 시작을 했고, 썰렁하던 예배당에는 40일 부흥회가 끝나던 그 주일! 100명이 넘는 교인들이 한자리에 모여서 예배를 드리는 교회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때 내려졌던 그 불길이 우리 교회의 시작이 되었고, 오늘까지 우리를 태우는 능력이 되었던 것입니다. 

VI.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

모자라도 하나님의 부름 앞에 아멘하면 하나님이 감당할 불을 주십니다. 

기억하십시다. 
하나님은 우리가 끝까지 거절하면 다리를 꺾어서라도, 손발을 묶어서라도 보내고야 마시는 분이십니다. 여러분 순종하면 하나님이 불을 주십니다. 하나님이 도와주십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 

신림동 사거리에 한 고등학생이 서울대학에 가는 길을 몰라서 쭈삣쭈삣 하고 있었습니다. 마침 지나가는 아저씨가 있어서 길을 물었습니다. "아저씨 서울대학 가려면 어떻게 가요?" "떼기 이놈! 공부 열심히 해서 실력 쌓아야 가지!"

하나님의 종들의 실력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학위가 아닙니다. 지식이 아닙니다. 백그라운드가 아닙니다. 어떤 목사님은 자기 바둑실력이 3급이라고 자랑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볼링 에버러지가 200이라고 자랑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것은 주의 종들의 자랑이 아닙니다. 주의 종들의 실력이 아닙니다. 주의 종들의 실력은 순종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거기에 순종하는 사람을 하나님이 들어 쓰십니다.

떨기나무가 내게 임하는 경험 한번만 하고 나면 살아계신 하나님이 내게 불을 주시는 경험 한 번만 하고 나면 내 앞에 가는 것들이 열려지게 되는 것입니다. 내 속에 문제가 소멸됩니다. 나를 묶고 있는 악한 사단의 밧줄이 소멸되어 지는 것입니다. 

장로님들이 모인 어떤 자리에서 교육을 하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제가 물었습니다. "장로가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충성스런 장로님이 대답하셨습니다. "목사님을 잘 도와서 목회에 잘 협조하는 일이지요." 제가 아멘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목사는 장로님 도움 없어도 하나님의 도움으로 주의 일을 합니다. 장로님들은 더 큰 일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은혜 받는 일입니다. 

말씀에 순종하는 일입니다. 장로님이 은혜 받지 않으면 목회는 안됩니다. 장로님이 순종하지 않으면 목회는 어려워집니다. 은혜받지 않고 일만 하려고 하니까 시험 드는 겁니다. 순종하는 법을 배우지 못하고 교회 일부터 배우려 하니까 교회가 어지러워집니다."라고 호소했습니다. 

교회 지도자가 누구입니까? 누구보다 은혜를 잘 받는 사람입니다. 누구보다 순종을 잘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순종하여 나아가는 사람을 버리시지 않습니다. 맨손으로 그냥 보내시는 법이 없습니다. 오늘 본문 마지막 12절입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

"내가 누구관대 당신의 일을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라는 모세의 물음에 하나님은 어떻게 대답하십니까?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출3:12) 이제는 주님이 주인이십니다. 

하나님 당신이 누구입니까? 묻는 질문에 대해 하나님은 대답하십니다. "네가 누군지 아느냐 하나님이 함께 하는 존재다! 너는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함께 하는 존재다. 역사의 주인이 함께 하는 존재이다. 전능한 하나님이 함께 하는 존재이다." 할렐루야.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시는 그 순간, 전능하신 그 주님, 능력의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시고 내 삶을 붙잡는 그 순간 우리는 벌떡 일어섭니다. 가시덤불 같은 내 인생의 나무에 하나님께서 불을 붙여주신 것을 느낍니다. 당신에게 이 불이 붙었습니까? 

아프리카 선교사 리빙스턴이 선교 보고차 고국에 들렸다가 옥스퍼드 대학에서 명예 박사학위를 받게 됩니다. 이 자리에서 누가 물었습니다. 이미 이 때는 리빙스턴이 사자에게 물려 한쪽 팔이 떨어져 나가 빈소맷자락이 덜렁거리고 있었습니다. 굶고 못먹어 얼굴은 말이 아니었습니다. 그를 바라만 보고서도 모인 모든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선교사님, 사나운 맹수, 야만인들 속에서 그토록 어려운 일을 기쁨으로 감당할 수 있었던 힘이 무엇입니까?" 리빙스턴이 대답했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는 약속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순종하여 지도자로 나서는 사람을 홀로 버려 두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친히 함께 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사람은 누구나 지도자입니다. 

내일 아침이면 모두 다 직장에 가겠지요. 혼자 가는 사람이 있고 하나님이 함께 가 주시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가 주시는 사람은 직장의 지도자입니다. 오늘 이 예배를 마치면 여러분의 아파트로 여러분의 마을로 다 돌아가시겠지요. 혼자 가는 사람이 있고 하나님과 함께 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가는 사람이 그 마을의 지도자입니다. 내일 아침이면 우리 학생들 다 학교에 가겠지요. 저 혼자 가는 아이가 있고 하나님과 함께 가는 아이가 있습니다. 그 아이가 지도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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