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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자기 두루마기를 빠는 사람 (계 22: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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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두루마기를 빠는 사람 (계 22:10~15)
 

요한계시록하고 생각하면 몇 가지 떠오르는 말씀이 있습니다. 어떤 말씀이 떠오르십니까? [주님이 속히 오신다!] 라는 것과 [오시면 우리가 행한 것을 따라 심판하신다] 하는 것이 아마 가장 먼저 떠오를 것입니다. 천국은 어떤 곳일까? 정말 주님이 마지막 날 재림하시면 [한 순간에 우리는 휴거될까?] 아니, 나도 휴거될까? 이거 나만 남는 거 아니야? 하는 등등의 생각이 떠오를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당장 오늘이라도 주님이 오신다면, 거룩하고 깨끗한 흰 세마포 옷으로 갈아입은 후에 하나님 나라, 천국에 들어갈 확신이 있으십니까? 영상이 하나 있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주님이 오신 상황을 상상하여 만든 영상인데 함께 보시겠습니다.


갑자기 수많은 사람들이 사라지고 엄청난 혼란을 겪고 있는 주님 재림의 한 장면을 상상하여 만든 영상입니다. 이와는 좀 다르지만, 이 요한계시록의 말씀을 생각하게 되는 곳이 또 한 군데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장례식입니다. 장례식에 가면 요한계시록의 말씀이 종종 설교의 본문으로 등장합니다. 요한계시록 21장은 거의 모든 장례식에서 한 번은 등장할 정도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말씀입니다. 

누군가 내 사랑하는 사람이 죽음에 임했을 때 우리는 그의 죽음을 슬퍼하면서도 이제 그의 앞에 준비되어 있는 눈물도 고통도 아픔도 애통도 없는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면서 슬픔을 참고 언젠가 그 나라에서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면서 사랑하는 사람을 보내줍니다. 그렇다면 과연 이 요한계시록의 말씀은 과연 오늘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 말씀일까요? 막연히 [예수 믿으면 천국 간다는 말씀이지요] 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요한계시록의 말씀이 오늘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본문의 10절 말씀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 두루마리 예언의 말씀을 인봉하지 말라 때가 가까우니라.] 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12절의 말씀은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22:12)] 라고 말씀합니다. 이 요한계시록의 예언의 말씀을 덮어 두지 말고 이 말씀이 우리 가운데서 회자되게 하고 나누어지게 하라는 것입니다. 

모든 말씀이 물론 다 그렇지만 이 예언의 말씀이 우리 가운데서 나누어질 때 그 예언의 능력이 나타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또한 주님이 곧 다시 오실 것이기 때문에 이 예언의 말씀을 숨기지 말고 많은 사람들이 읽을 수 있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이 예언의 말씀이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읽고 깨달을 수 있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의 말씀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분명한 것은, 주님이 언제 오실지에 대한 시기는 철저하게 비밀에 붙여진 것이란 사실입니다. 예언의 말씀 요한계시록에서 조차도 그 시기가 임박하다고만 말하지 그 시기가 언제라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주님이 다시 오시는 그 시기는 철저하게 하나님의 비밀에 붙여진 사안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24:36은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24:36)] 라고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그 시기는 철저하게 비밀에 붙여져 있고 하나님께서는 어느 날 갑자기 예고도 없이 오셔서 우리의 행한 대로 우리를 심판하신다고 한다면 우리는 그 날을 대비해 무엇을 행하고 무엇을 준비해야 할까요? 우리의 행한 대로 심판 하신다고 했는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행하라고 하신 것은 그럼 무엇일까요? [율법의 모든 의로운 행위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행해야 한다] 는 무거운 종교적 굴레와 율법의 억압으로부터 우리를 자유하게 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더 행하고 무엇을 또 더 준비해야 한다고 하시는 것일까요? 

이런 면에서 요한계시록에는 우리가 무엇을 준비해야 할까 하는 면에서 우리의 눈길을 끄는 한 단어가 있습니다. 그것은 [흰 옷] 이라는 단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흰 옷]을 준비하라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이 흰 옷은 무엇이며, 그리고 이 흰 옷은 어떻게 준비할 수 있는 옷일까요? 하나님께서 준비하라고 하시는 것은 반드시 준비해야 하는 것입니다. 해도 되고 말아도 되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감사하게도 정말 반드시 준비되어야 할 것이 이 흰 옷임을 깨닫게 해 주는 말씀이 아주 분명하고 선명하게 계시록에 기록되어 있는데, 바로 요한계시록 19장 7-8절입니다. 19장 7-8절에 보면 주님이 다시 오시는 날인 어린양의 혼인 잔치가 열리게 되는 그 영광스럽고 장엄한 날의 유일한 조건이 되는 것이 바로 이 흰 옷이라는 것입니다. 

본문은 말씀하기를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 그의 아내가 자신을 준비하였으므로 / 그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하셨으니 / 이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19:7-8)] 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역으로 말하면 성도들이 이 흰 옷을 준비하지 못하면 어린양의 혼인잔치가 열리지 못하고 천국 잔치가 이루어지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반드시 이 흰 옷을 준비해야 합니다. 이 흰 옷이 없으면 어린양의 혼인 잔치,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 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 흰 옷은 과연 어떤 옷일까요? 이 흰 옷이 어떤 옷인지에 대한 또 하나의 힌트는 요한계시록 3장 5절과 17-18절에 나오는데 주님께서 사데교회(5절)와 라오디게아 교회(17-18절)에 편지하면서 이 흰 옷을 준비해 입으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이 부분에서 우리는 이 흰 옷이 어떤 옷인지를 감사하게도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특히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해서 하신 말씀에서입니다. 계시록 3장 17-18절을 보면 [너의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느냐? 내게서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라] 라고 말씀하는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흰 옷은, 입을 자격이 충분히 있어서 입는 옷이 아니라 우리의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가려주는 옷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놀라운 흰 옷은 떳떳하게 당연하게 입을 수 있는 옷이 아니라 감사하게 감동으로 은혜로 입을 수 있는 옷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옷을 준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 옷을 어떻게 준비할 것인가? 본문의 22장 14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자기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그들이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받으려 함이로다(22:14)] 라고 말입니다. 

자기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 즉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권세를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의 이 두루마기를 빨아야 하겠는데 무엇으로 빨아야 할까요? 우리의 이 먼지와 땀으로 범벅이 된 옷을 깨끗하게 빨아야 하겠는데 무엇으로 빨아야 한단 말입니까? 

이 말씀의 은혜를 간직하기 위해 요한계시록을 찾고 찾다보면 어떻게, 그리고 그 옷을 무엇으로 빨았는지 알 수 있는 곳이 있습니다. 바로 요한계시록 7장입니다. 요한계시록 7장의 4, 9, 13절 이하에 보면 인치심을 받은 144,000이라는 구원 받은 사람들의 상징적인 수에 대한 말씀이 기록된 곳이 있는데, 이 구원 받은 장엄한 무리의 사람들이 입고 있는 희고 깨끗한 옷이 어떻게 준비되었는지를 알 수 있는 구절이 있습니다. 

9절에는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나오는데 그들이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양 앞에서 찬양하며 나아 왔다고 합니다. 그러자 이 장엄한 영광의 광경을 바라보던 천국의 24장로 중의 한 장로가 놀라움과 감격함으로 선포합니다. [이 흰 옷 입은 자들이 누구며 또 어디서 왔단 말인가! 그들은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한 자들이니라!] 라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흰 옷은 우리의 노력이나 우리의 자랑으로 입게 된 옷이 아닙니다. 우리가 한 일이라고는 고작 우리를 향하여 거대한 탁류처럼 흘러내려오는 주님의 보혈에 우리의 옷을 담근 것뿐입니다. 우리의 죄와 우리의 연약함과 우리의 병들고 찌들고 깨진 우리의 이 모든 것을 주님의 십자가 보혈, 인류를 위하여 대속하여 흘려주신 그 피,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에 그저 담근 것뿐입니다. 

우리가 한 일이라고는 고작 하여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고 무엇으로도 가릴 수 없는 이 육신을 가릴 수 있는 옷, 그 사랑의 옷을 위해 주님의 십자가 보혈, 그 보혈의 강에 우리의 옷을 담그고 그 옷을 비벼서 빤 것뿐이란 사실입니다. 아무것도 한 것이 없지만 요한계시록을 통하여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 주님의 보혈에 자기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다.] 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복된 사람들이 된 것입니다. 

어제 청년들과 청년부 2차 여름수련회로 철원의 한탄강에서 래프팅을 하고 왔습니다. 비가 적절하게 와서 급류도 여러 군데 있었고 수량과 유속이 적절해서 스릴이 만점이었습니다. 우리나라에도 이렇게 아름다운 강이 있었나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화산 지대라서 강의 주변을 이루는 절벽이나 바위들이 장관이었습니다. 

인공적인 폭포가 아닌 자연 폭포가 곳곳에서, 떨어지는 나뭇잎과 함께 물안개를 일으키며 한탄강으로 쏟아지고 있었습니다. 그 깎아지른 듯이 솟아 있는 절벽의 한 가운데를 유유히 흘러가는 한탄강, 그 강물에 몸을 맡기자 우리가 탄 보트는 목적지까지 우리를 데려다 주었습니다. 때로는 강물에 입수하여 1m가 넘는 높이로 우리를 덮쳐 오는 급류를 온 몸으로 느끼기도 했습니다. 정말 짜릿하고 좋았습니다.

주님의 보혈의 강, 주님의 보혈의 급류도 그렇게 우리를 향하여 덮쳐 옵니다. 우리에게 놀라운 생명으로 은혜로 감격으로 기쁨으로 우리를 덮쳐 옵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단지 우리를 그 보혈의 강에 담근 것뿐인데 하나님은 보혈의 강을 만드시고 그 거대한 은혜로 우리를 품으신 것입니다. 사도요한이 바라 본 환상 그보다 수백 년 전에 에스겔은 성전에서 요한의 환상과 같은 환상을 보았습니다. 보좌로부터 물이 흘러 닿는 것 마다 새로워진 환상이었습니다. 

에스겔 47장 6절부터 12절 사이에는 이 놀라운 감격적인 환상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보좌로부터 흘러나온 물이 강물을 이루었는데 이 강물이 이르는 곳마다 모든 생물이 살고 또 고기가 심히 많으리니 이 물이 흘러 들어가므로 바닷물이 되살아나겠고 이 강이 이르는 각처에 모든 것이 살 것이며... 강가에는 각종 과실나무가 자라서 그 잎이 시들지 아니하며 열매가 끊이지 아니하고 달마다 새 열매를 맺으리니 그 물이 성소를 통하여 나옴이라 그 잎사귀는 약재료가 되리라] 라고 말입니다.

이것이 요한계시록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환상의 의미이며 우리를 위해 예비된 하나님 나라의 의미입니다. 그리스도의 보혈에 한 번 몸을 담근 우리는 이미 천국의 백성입니다. 그 후에 우리에게 남은 것은 이 보혈의 강에 깊게 더 깊게 날마다 우리를 담금으로 우리 믿음의 능력을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천국이 이미 주어졌으니까 이제는 아무것도 하지 말고 무의 도식하라고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무슨 큰 의를 행하라고 하시는 것도 아닙니다. 

주님께서 일곱 개 초대교회에 보낸 편지 중에 책망의 내용이 다 그렇습니다. 에베소교회에 [너희 처음 사랑을 회복하라!]는 것이고, 라오디게아 교회에 [차지도 뜨겁지도 않은 과거에 부자였다 과거에 부요했다 말하지 말고 오늘 너의 수치를 나의 옷으로 가리고 네가 열심을 내라!] 라는 것이 아닙니까? 그 은혜로 그 사랑으로 날마다 너희를 새롭게 하라는 것입니다. 

죽은화산이 되지 말고 살아서 용솟음치는 능력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라는 것입니다. 말씀이 내 안에서 요동치고 찬양이 우리를 견딜 수 없게 하는 예배의 능력으로 예배의 힘으로 일어서는 그래서 삶을 향해 나아가고 주님 오심을 기다리는 나의 백성이 되라는 것입니다.

사실 알고 보면 간단한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보혈의 은혜로 우리가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유치부 아이들도 배워 아는 것입니다. 교회 다니는 사람은 다 압니다. 문제는 그 안다는 것이 화석화된 지식에 머물고 마는 메마르고 메마른 먼지 나는 앎인지 아니면 날마다 처음 사랑처럼 우리를 뜨겁게 하고 우리를 불타게 하고 우리를 정열적이 되게 하는 살아있고 능력 있는 오늘의 믿음의 능력인지 그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이 예언의 말씀을 가슴에 담고 가슴에 품고 살아가는 능력의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우리의 예배가 그렇게 부흥하기를 원합니다. 예배 가운데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충만한 임재로 가득하는 은혜가 있기를 원합니다. 천국에 대한 소망이 권태기에 빠진 사랑처럼 무미건조한 소망이 아닌 오늘 우리를 못 견디게 하는 능력의 소망이 되기를 원합니다. 마지막 때의 시대를 가고 있는 오늘의 교회를 향하여 주신 요한계시록의 환상과 은혜가 우리의 예배와 여러분의 삶의 자리에 가득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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