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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네 이름이 무엇이냐 (눅 8:2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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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이름이 무엇이냐 (눅 8:26~39)
  

본문에 나오는 거라사 지방은 갈릴리 호수 건너편에 있는 이방인 지역입니다. 
그 당시 유대인들이 지나가기조차 꺼려했던 이방인의 땅 거라사를 유태인인 예수님이 방문했다는 사실  자체가 혁명적인 사건이었습니다. 
거라사란 마을은 겉보기에는 부유하고 평화스러운 곳이었습니다. 
돼지사육을 주로 하는 동네였는데, 성경에 나타난 돼지 수만 해도 2천 마리에 달했습니다. 
그러나 이토록 좋은 동네에도, 이렇게 평화스럽게 보이는 마을에도 버려지고 그늘진 음지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일행이 배에서 내려 마을로 들어가는 길가에 공동묘지가 있었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대체로 인가와 멀리 떨어진 곳에 묘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중동지역에는 인가와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무덤이 있습니다. 
심지어 무덤 위에 사람이 살고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 무덤지역에 짐승처럼 보이는 한 귀신들린 남자가 예수님을 보고는 허공에 주먹질을 하면서 발광을 하고 있었습니다. 
거라사의 귀신들린 자에 대한 성경의 진술은 너무도 비참합니다. 
공동번역 성경으로 읽어봅니다. 
“오랫동안 버림받은 이 사람은 말도 잊어버리고, 짐승처럼 밤낮을 가리지 않고 슬프게 울고만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 몸을 바위에 대고 비벼 피가 번지고 있습니다.” 
거라사 동네 사람들은 이 사람을 붙잡아 아주 굵은 쇠사슬로 매어놓았습니다.

본문은 이 거라사의 귀신들린 자가 예수님을 만나 인간됨을 회복하는 과정을 세밀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27절에 보면, “.......오래 옷을 입지 아니하던.......” 사람이 35절에 “.......옷을 입고.......”있습니다.
29절에 보면, “........그 맨 것을 끊고 귀신에게 몰려 광야로 나갔던 ” 사람이 35절에 “.......예수의 발치에 앉아........” 있습니다. 
더욱이 귀신들렸던 사람은 정신만 온전하게 된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회복되어 예수님을 경배하고 있습니다.

본문은 선언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귀신들린 사람의 육체와 정신과 그리고 영을 회복시키는 메시아이시다.’ 
이것이 본문의 메시지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예수님은 여러분의 육체를 회복시킬 메시아입니다.
예수님은 여러분의 심령을 회복시킬 메시아입니다.
예수님은 여러분의 삶을 회복시킬 메시아입니다.
예수님은 여러분의 영혼을 구원할 메시아입니다.
오늘 예배를 통하여 메시아 되신 예수님을 만나길 바랍니다.

저는 이아침에 본문을 묵상하면서 받은 몇 가지 은혜를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1. “당신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28절 “예수를 보고 부르짖으며 그 앞에 엎드려 큰 소리로 불러 이르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당신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당신께 구하노니 나를 괴롭게 하지 마옵소서.”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당신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이 발언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어떻게 하든지 관계를 맺어야 할 것이 아닙니까? 
대통령의 고종사촌이라는 소리만 들어도 어떻게 하든지 그 사람과 줄을 대려고 하는데,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열 번, 백 번, 관계를 맺어야 할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이 사람은 서로 상관하지 말고 지내자고 요구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은 하지만, 예수님과 적당히 ‘거리’를 두고 싶어 하는 우리의 내면을 읽게 됩니다. 
“예수님, 저와 멀어지지는 맙시다. 그러면 불안하니까요. 달리던 승용차라도 뒤집히면 어떻게 합니까? 그리고 너무 가까워지지 맙시다. 그러면 불편하니까요. 너무 가까워지면 헌금도 해야 되고, 봉사도 해야 되고, 기도회에도 참석해야 되잖아요?…” 

불안과 불편 사이에 있고 싶어하는 우리의 내면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과 엉거주춤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적당히 신앙생활’을 하라고 사탄은 유혹합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마 26:58절에 보면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는 예수님을 멀찍이 따라가다가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하게 되었습니다. 
“베드로가 멀찍이 예수를 따라 대제사장의 집 뜰에까지 가서 그 결말을 보려고 안에 들어가 하인들과 함께 앉아 있더라.”
‘멀찍이’라는 거리를 나타내는 부사를 눈 여겨 보십시오.

행 20:9절에 보면 유두고라는 청년은 바울이 설교할 때, 창문에 걸터앉아 한 발은 예배당 안에 한 발은 예배당 밖에 놓고 졸다가 삼층에서 떨어졌습니다. 
“유두고라 하는 청년이 창에 걸터앉아 있다가 깊이 졸더니 바울이 강론하기를 더 오래 하매 졸음을 이기지 못하여 삼 층에서 떨어지거늘 일으켜보니 죽었는지라”

마음을 확고히 정하지 못하고 세상과 교회, 욕망과 그리스도 사이를 왔다 갔다 하다가 겪은 비극이 아닙니까?
‘적당히 신앙생활’하려는 태도는 비극을 초래하게 된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창 32장의 야곱이 얍복강변에서 천사와 씨름했던 이야기는 어떤 태도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지를 알려주는 사건입니다. 
야곱이 환도뼈가 부러져서 장애가 되면서도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창 32:26)라고 매어달린 것은 야곱이 어떤 삶의 정황에서도 주님을 놓치지 않는 믿음의 태도를 보여줍니다. 

예언자 말라기는 이런 야곱의 태도를 높이 평가하여 “하나님은 야곱을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셨다(말 1:3)”로 표현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당신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이것이 말이 됩니까?
어떻게 해서든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주님과 더욱 돈독한 관계를 맺어야지요!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께 더 가까이 다가가 매어 달리는 여러분이 되길 권면합니다.

그런데 목회를 하다보면 가장 가까이 다가가 매어달려야 할 때에 짐짓 떨어지는 사람이 있어요. 
자존심이 조금만 상해도 “뭐 이래!” 하면서 떨어져요.
사업이 어려우면 “예수 믿어도 별거 없네!” 하면서 떨어져요.
부부사이에 갈등이 생기면 “예수 믿는다는 집이 왜 이 모양이야!” 하면서 떨어져요.
자녀가 속을 썩이면 “우리 집은 되는 일이 없어!”라고 극단적으로 말하면서 떨어집니다.
사실 그 때가 가장 예수님께 붙어 있어야 할 때인데도 말입니다. 

찬송가 338장(통 364장)에서 시인은 “내 주를 가까이 하게 함은 십자가 짐 같은 고생이나 내 일생 소원은 늘 찬송하면서 주께 더 나가기 원합니다.”라고 어떤 일이 있더라도 주님께 더 나가길 소원하고 있습니다.
어떤 일이 일어나도 주님을 놓지 않기를 바랍니다.
‘주님,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로 떨어지지 않겠습니다.’고 다짐하길 바랍니다.

2. “네 이름이 무엇이냐?”

30절 “예수께서 네 이름이 무엇이냐 물으신 즉 이르되 군대라 하니 이는 많은 귀신이 들렸음이라”
예수님은 그 귀신들린 자에게 “네 이름이 무엇이냐?”라고 묻습니다. 
귀신들린 자는 ‘군대’라고 대답했습니다. 
귀신 이름이 ‘군대’라는 것은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장가 못 가고 죽은 오촌당숙이다’라든가, ‘시집 못 가고 죽은 처조카이다.’라고 대답한다면 그럴듯한데…….
그러면 ‘군대’라고 대답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희랍어로 ‘Region’(레기온)인데, 로마 군인이 6,000명이 있을 때의 군대 단위입니다. 

로마군에서 가장 규모가 큰 단위입니다. 
공동번역 막 5:19절을 보면, “대부대라고 합니다. 수효가 하도 많아서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저는 이 말씀을 이렇게 이해합니다. 

그 귀신들린 자가 대답한 ‘군대’라는 말은 ‘나는 군대라는 귀신이 들렸다’라고 단순하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나의 이름은 6,000개나 되어서 뭐라고 대답할지 모르겠습니다. 정신이 혼란스럽습니다. 도대체 나는 내 자신이 누군지 모르겠습니다. 그냥 ’군대‘라고 해두지요.”라는 의미로 받아들입니다.

비슷한 예가 성경 요 4:1-30절에도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수가성 우물가의 사마리아 여인에게 ‘네 남편을 불러오라’고 하십니다. 
여자가 대답하기를, ‘제게는 남편이 없습니다.’합니다. 
이 여자에게 남편이 없었나요? 
아니지요! 

사실 이 여자에게는 남자가 다섯이나 있었습니다. 
남자가 다섯이 있었기에 누구를 딱 집어 ‘내 남편’이라고 불러올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게는 남편이 없습니다.’라고 대답한 것입니다. 
남편이 많아 남편을 데려올 수 없는 여인입니다.

마찬가지로 이 거라사의 귀신들린 자도 그 이름이 너무 많아 혼란스럽기 때문에 그냥 ‘군대’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름이 너무 많아 이름을 잃어버린 사람이 되었습니다. 
자기를 채우려는 욕망이 너무 많아 자기를 상실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좇아가는 목표가 너무 많아 자기 길을 잃어버린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거라사의 귀신들린 자의 혼란입니다. 
이것이 바로 거라사의 귀신들린 자의 문제입니다.

저에게 이런 경험이 있습니다. 
저와 비슷한 연배의 장로님이신데 사업을 하십니다. 
한번은 명함을 건네 주길래 받았는데, “○○구 청소년 선도위원”으로부터 시작해서 명함 뒷면에 무슨 직함이 그렇게 많은지…. 제가 한마디 했습니다. 

“장로님, 국회의원 선거에 나오시려고 그러십니까? 몇 가지 일도 제대로 하기 어려운데 뭐 그렇게 직함이 많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누군가 여러분께 다가와서 “당신의 이름이 무엇입니까?”라고 묻는다면 뭐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저는 이제 설교를 준비하면서 “내 이름은 뭘까?”를 생각해봤습니다. 

물론 저의 이름은 김진홍입니다. 
누구의 아버지입니다. 
누구의 남편입니다. 
교회의 목사입니다. 

이런 생각을 하다가 가져서는 안 될 이름은 없을까?
지워도 괜찮은 이름은 뭘까? 
그리고 세월이 지나도 없어져서는 안 될 이름은 뭘까? 
이 이름이 없으면 다른 이름이 별 의미가 없는 그 이름은 뭘까? 

이 이름이 없으면 내 삶이 온통 허물어지고 물거품이 되고 마는 그 이름은 뭘까? 
곰곰이 생각해봤습니다. 
여러분은 그 이름이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그것을 ‘하나님의 아들’이란 이름이라고 확신합니다. 
이 이름은 세월이 지나도 없어져서는 안 될 이름입니다. 
이 이름은 이 세상에서 뿐만 아니라 저 천국에서도 소중하게 여겨질 이름입니다.
이 이름이 없으면 이 땅에서 어떤 성공을 거두었더라도 삶이 물거품이 되고 마는 이름입니다.

3. 1: 2,000

본문 33절에 “귀신들이 그 사람에게서 나와 돼지에게로 들어가니 그 떼가 비탈로 내리달아 호수에 들어가 몰사하거늘”이란 말씀이 있습니다. 
귀신들이 돼지에게로 들어가자 2,000마리의 돼지 떼가 일시에 비탈로 내리달아 호수에 빠져죽고 말았습니다. 

돼지 2,000마리를 잃은 거라사 동네에는 큰 소동이 일어났습니다. 
거라사 사람들에게는 말도 안 되는 사건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돼지 한 마리당 얼마인지는 모르지만 10만 원만 쳐도 2,000마리면 2억 원입니다. 
돼지 파동 같은 일이 벌어지지 않는다면, 앞으로 많은 수입을 보장할 것입니다. 

짐승과도 같았던 일개 귀신들린 자를 고치기 위해 2,000마리의 돼지가 희생된 것은 너무나 비싼 대가였습니다. 

“아무 탈 없이 잘 지내던 동네가 아닌가? 묘지 한 가운데 묶여둔 한 명의 귀신들린 자가 무슨 상관이 있는가? 죽이려면 아무 소용도 없고 일만 만드는 귀신들린 사람을 죽여야지. 왜 잘 크는 돼지를 죽이는가?”
묘지에 쇠사슬로 단단히 묶어 놓았으니 하루에 한번쯤 먹을 것만 던져주면 그만이었습니다. 

귀신들린 자가 혼자 울던지, 웃던지, 짖어대든지, 몸을 바위에 부딪쳐 피를 흘리든지, 죽든지........ 알바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달랐습니다.

한 사람의 구원을 위해서는, 한 사람의 인간회복을 위해서는 돼지의 희생쯤은 문제가 안 되었습니다. 
숫자로 비교하면 1대 2,000이지만, 그 ‘1’은 비록 귀신들린 자였으나 인간이며, ‘2,000’은 돈값어치는 많을지 모르지만 돼지일 뿐입니다.
2000:1의 가치관! 
거라사 사람들의 가치관과 예수님의 가치관 사이에는 엄청난 거리가 있었습니다.

지금 우리는 전쟁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TV에 비춰진 전쟁의 참화는 사람들의 머리가 깨어지고, 팔다리가 떨어져 나가고, 배가 터지고…. 사람들은 그렇게 죽고, 죽어가고 있습니다. 
전쟁은 가장 비인간적이고, 야만적이고, 반문명적입니다.

그런데 인간 역사를 뒤돌아보면, 대부분의 전쟁은 그 어떤 명분에도 불구하고 경제적인 이익을 보호하기 위한 싸움이었답니다. 
한마디로 돈 때문에 사람을 죽인다는 거지요! 
말은 그럴듯하게 하지만 다들 돼지 2,000마리에 몰두해 있습니다.

여러분, ‘생명사랑, 밤길 걷기’ 캠페인에 대하여 들어보셨지요?
이 켐페인은 우리의 생명을 존중히 여기자는 운동입니다.
제발 자살하지 말자.
제발 남의 생명을 해하지 말자.
서로의 생명을 소중히 여기자.
올해도 9월 10-11일에 실시합니다.

이번 행사에는 우리 감리교 서울 연회의 ‘희망봉사단’이 특별히 참여합니다.
우리 교회에서도 ‘사회봉사부’를 중심으로 적극 참여해야 할 것입니다.
그 단체의 보고에 의하면, 우리나라 한해 자살자 수는 12,174명입니다.(통계청,2008)
그 통계를 분석해보면, 하루에 33명이 자살하고, 42분마다 1명이 자살한다는 것이지요.
이것은 대구 지하철 참사를 1주일에 한 번씩 경험하는 어마어마한 사건입니다.
우리는 지금 이렇게 생명을 하찮게 여기는 풍토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막 8:36-37절에서 주님은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자기 목숨과 바꾸겠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인간을 2,000마리 정도가 아니라, 온 천하보다도 더 귀한 존재로 여겼습니다. 
이것이 우리 기독교인들의 가치관입니다. 
이 2,000:1의 가치관을 회복하는 일에 여러분의 기도와 헌신이 있기를 바랍니다.

이제 오늘 말씀을 정리합니다.

㉠ ‘당신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사탄은 우리에게 예수님과 엉거주춤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적당히 신앙생활’을 하라고 유혹합니다.

㉡ ‘네 이름은 무엇이냐?’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하나님의 딸이라는 identity, 이 이름을 상실하지 맙시다.
그것은 이 땅에서 뿐만 아니라 하늘나라에서도 ‘특권’입니다.

㉢ ‘1: 2,000의 가치관’
인간의 존엄성이 말살되는 전쟁의 시대에 인간의 소중함을 일깨우신 예수님의 1:2,000의 가차관을 반드시 회복해야 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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