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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신앙의 초보를 버리자 (히 5:11 ~ 히 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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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초보를 버리자 (히 5:11 ~ 히 6:2)


전에 유행했던 말이 있다. “왜 이래? 아마추어같이?”
어떤 사람이 말도 안되는 유치하고 치사한 말을 하면 한 마디 했다. 왜 이래 아마추어같이?
아마추어는 영어의 매처(mature)-성숙로부터 왔다. 매처에 부정어 a(r)를 써서 “성숙하지 못한 사람, 미성숙한 사람”을 뜻한다. 

성숙은 보통 또 다른 하나의 생명을 잉태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을 때 쓰는 말이다. 
즉 생물이 각각 종(種)으로서의 특징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게 되었을 때 성숙하다는 말을 쓴다. 예를 들어 식물에서의 성숙은 꽃이 피고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상태가 되는 것이고, 동물 또한 생식능력을 가진 상태로 여러 형질이 완성되는 것을 말한다. 사람은 정신적·육체적으로는 완전한 성숙을 이루지 않았는데도 성적으로 성숙하는 수가 있다. 보통 사람의 육체적인 성숙은 남자는 24∼25세, 여자는 이보다 조금 빠르다.

신약성경은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에 대해서 분명하게 말씀한다. 
그것은 성숙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성숙한 인격과 신앙을 가진 사람이 되라고 하신다. 

성경은 사람에는 세 종류의 사람이 있다고 하신다. 

첫째, 성숙한 사람. 둘째, 미성숙한 사람. 셋째, 영적으로 퇴보해버리는 사람. 

우리의 목표는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이 되는 것인데, 사람들 가운데는 여전히 미성숙한 상태로 머물러 있기도 하고, 오히려 퇴보하거나 타락해 믿음을 저버리는 사람도 있다. 나는 과연 어떤 사람인가? 

미성숙한 사람의 특징은 ?
(12a) “때가 오래 되었으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되었을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에 대하여 누구에게서 가르침을 받아야 할 처지이니....”

① 이 사람들은 성장할 수 있는 시간과 기회가 많았다. 그러나 그들은 성장하지 못했다. 
내가 믿은 지가 오래되었다는 신앙의 연수가 결코 성숙을 결정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오래 믿을수록 믿음에 있어서 신뢰할만하다. 오래 믿은 사람은 양은냄비처럼 쉽게 뜨거워졌다고 쉽게 식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신앙의 뿌리가 있다. 그러나 신앙의 연수=성숙함은 아니다. 

② 그들이 오래 믿었어도, 선생이 되지 못했다. 선생은 가르치는 사람이다. 가르침은 아무나 할 수 없다. 가르칠 때 사람은 더 큰 성장이 일어나는 것 같다. 열 번 학생으로서 배우는 것보다 한 번 선생으로서 가르치면 더 많이 기억에 남고, 더 정리가 잘 된다.
선생은 가르침을 주는 사람에게 모범을 보일 수 있는 사람이다. 내가 누군가를 가르친다고 하면서 아무런 모범을 보이지 않고, 단순히 입으로만 교훈한다면 아무도 나를 따르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다른 사람에게 모범이 되고 있는가?

③ 이 사람들은 가르칠 수 없어서 다른 사람에게 말씀의 초보에 대해서 또 배워야 하는 사람들이었다. 

(12b) “단단한 음식은 못 먹고 젖이나 먹어야 할 자가 되었도다.”
미성숙한 사람들의 특징은 단단한 음식을 먹지 못한다는 점이다. 단단한 음식을 먹지 못하는 것은 그들은 아직 이가 없기 때문이다. 이가 없는 것은 그들은 아직 영적인 유아기 상태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젖만 먹는, 우유만 먹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엄마가 없으면 굶어죽는 어린아이처럼 누군가에게 의존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었다. 여전히 누군가를 기대야만 하는, 의존적인 신앙이 문제이다. 사람은 젖을 먹을 때는 의존적이 된다. 젖을 먹는 유아기 때 아기들은 혼자서 대소변을 가리지 못한다. 엄마가 계속 그 뒤치다꺼리를 해주어야만 한다. 

ex) 미국이나 유럽의 부모들은 자녀들이 성년이 되기 전까지는 모든 것을 돌보아주지만, 성년이 되면, 독립적이 되게 한다. 공부하는 것, 결혼하는 것, 돈을 버는 것 등을 자녀에게 맡기고, 책임적인 존재가 되게 한다. 그런데 한국의 자녀들은 20살, 30살, 결혼 후에도 부모에게 의존해서 살아간다. 이건 좀 뭔가 잘못된 것 같다. 

자녀들이 또 자녀를 낳으면 한국의 부모들은 거의 손자 손녀보기에 매달린다. 여성의 지위가 높아지고, 직장생활을 계속해야 하고, 가족의 구조가 변화된 것 때문에 할 수 없지만, 부모들이 자식을 키우지 않고, 할아버지 할머니에게 맡기는 것도 사실은 다 좋은 것만은 아닌 것 같다. 그렇게 한국의 자녀들은 끝까지 부모의 등골을 빼먹는다. 독립적 존재가 되지 못하고, 의존적 존재로 인생을 살아간다. 
  
또 그들이 우유만 먹는 신자들이었다는 사실은 그들의 관심이 오직 “자신의 필요를 어떻게 채울까?”에만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젖 먹는 아기가 “엄마는 어떻게 점심식사를 하셨는가?”에 관심을 기울이는가?
우유병 빨고 있는 아기가 “결손가정의 자녀가 어떻게 점심을 먹었을까? 아프리카의 난민들이 어떻게 하면 영양실조에 걸리지 않고 먹을 수 있을까? 이 나라에서 고통 받고 있는 사람들의 고통과 아픔이 빨리 사라졌으면 얼마나 좋을까?” 이런 것에 관심을 기울일까?

어린 아기는 그런 것에는 오직 관심이 없다. 지금 내가 배가 고프니 빨리 젖 달라고 울어야 하고, 내 배만 부르면 그만이다. 내 배만 부르면 나는 금 새 행복해진다. 

나는 과연 성숙한 그리스도인가? 내 문제, 내 행복, 내 가정의 문제만 해결되면 다 되었다고 생각하는가? 아니면 나는 기꺼이 다른 사람의 아픔에 동참하는가? 그들의 아픔이 하루 빨리 지나가도록 기도하고 있는가? 내가 만약 나의 필요만 채울까만 생각한다면 나는 아직 젖을 먹고 있는 어린 아기에 불과하다. 

(13절) “이는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 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젖만 먹는 어린아이, 미성숙한 사람은 아직 말씀을 진실로 경험해 보지 못한 사람이다.
말씀을 지식으로는 알고 있다. 그러나 아직 “그 말씀이 의롭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이 옳습니다.” 하는 곳에까지는 가지 못했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는 의로운 하나님의 말씀을 경험할 수 있을까? 
호세아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이 백성이 지식이 없어서 망한다”고 하면서, “여호와를 힘써 알자.”라고 외쳤다. 여기에서 호세아 선지자가 말하는 지식은 지적은 지식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거기에서 지식이란, 하나님과의 신실한 언약관계를 이루어가는, 하나님과의 친밀함과 깊은 교제를 말한다.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가고, 경험해 갈 때는 단순한 지적인 지식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나눌 때 가능해진다. 

(14절)에서 “단단한 음식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그들은 지각을 사용함으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별하는 자들이니라.”고 했다. 지각을 사용하고, 연단 받고, 선악을 분별하는 것은 삶 속에서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나눌 때 가능해 진다. 

(6:1-2)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 데로 나아갈지니라.”

히브리서 기자는 미성숙한 성도들을 향해 기독교 진리의 초보를 버리라고 하면서, 6개의 초보적인 교리를 소개하고 있다. 6개의 초보적인 교리가 잘못되었기에 버리라는 말은 아니다. 이것은 가장 기본적인 기독교의 교리이므로, 알아야 하지만, 거기에 너무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이것은 어쩌면 유대교와 기독교를 잘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향해 말씀하고 있다고도 생각된다.  

- 죽은 행실을 회개함 : 회개는 좋은 것이지만, 과거의 지나간, 이미 죽어버린 나의 잘못과 행실에 집착해서는 안 된다. 깊은 죄책감으로부터 나와서 믿음으로 나아가야 한다. 
- 하나님께 대한 신앙 : 그리스도를 인정하지 않는 유일신 신앙 (유대교의 주장처럼)
- 세례 : 유대인의 정결예식.
- 안수 : (영적인 은사를 부여해주는 것과 관련되어 있는데), 어떤 영적인 유익도 주지 못하는 의식에 관한 문제들에 몰입해 있는 상태.
- 죽은 자의 부활 : 부활의 신앙이 아니라, 고린도교회가 가진 것과 같은 죽은 자들은 부활할 것인가 말 것인가와 같은 부활에 대한 의심들.
- 영원한 심판 : 이 교리 역시 중요한 것이지만, 하나님의 사랑과 오래 참으심과 같은 가르침을 배제할 정도의 한쪽으로 치우친 가르침이라고 할 수 있다. 

*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이것이 잘못된 교리이기 때문에 버리라는 것이 아니라, 이것은 기독교의 가장 기초적인 초보에 해당하는 교리인데 사람들이 너무 여기에만 머물러 있는 것이 문제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신앙의 초보에서 벗어나라고 한다. 

여러분은 이 6가지 기독교의 기초적인 진리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가? 히브리서 기자는 이것이 가장 기초적인 것이라고 했는데, 우리가 만약 이런 것에 대해서도 잘 모른다면, 우리는 그야말로 왕초보다. 

히브리서 기자는 미성숙을 벗어나서,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를 벗어나서, 완전한 데로 나아가라고 한다. 그가 말한 완전한 데는 어디인가? 

첫째,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게까지 자라나는 것이다. 히브리서 기자가 지금까지 계속 강조해 왔던 것은 그리스도이다. 그리스도 중심성, 그 분을 믿을 때 우리에게 다가오는 구원의 충만을 누리는 것이다.

둘째, 오늘 본문 바로 앞에 이런 말씀이 있다. 

(5:8-9) “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셨은즉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고난과 순종을 동시에 본다. 고난과 순종은 우리가 따라야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다. 진정으로 성숙한 그리스도인은 누구인가? 
고난 속에서도 순종할 수 있는 사람이다. 


나는 과연 어떤 사람인가? 

오랫동안 예수 믿으면서도 누군가에 나를 본받으라고 가르칠 수 없다면 나는 아직 아니다.
내가 여전히 누군가를 의존해서 신앙생활하려고 한다면, 나는 아직 성숙하지 못했다. 
내가 나의 필요만을 생각하는 이기적인 사람이라면, 나는 아직 미성숙한 자다. 
내가 이미 다 마스터하고 다음단계로 넘어가야 함에도, 언제나 똑같은 자리에 맴돌고 있다면 나는 여전히 영적인 어린아이다.

진정으로 성숙한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자기의 시선을 집중하고, 고난 가운데에서 순종하신 예수 그리스도처럼,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고 나가는 사람이다.
예수님처럼 고난을 통해서 순종을 연습하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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