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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이 세대의 비유 (마 11:1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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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대의 비유 (마 11:16~19)


1. 오늘의 시대 - 3무시대(三無時代) “무관심 무감각 무기력” 

1) 무관심하다. 타인과 공동. 사회와 정치, 경제. 자기의 이익과 기분에 맞는 사람에게는 관심이 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는 관심이 없다. 앞집에 강도가 들어왔다 해도 나에게 피해가 없으면 다행이라고 생각. 무관심이다. 

2) 무감각. 옳고 그름에 대한 감각이 없다. 함께 사는 사회에서의 윤리적인 감각이 없다. 자기 혼자 즐기고, 자기 혼자 즐거우면 되는 것이지 다른 사람에 대한 감각이 없다. 내가 편하면 그만이지 다른 사람이 불편한 것에 대해서 무감각하다. 

3) 무기력합니다. “에이 모르겠다. 될 대로 되라”고 포기하며 무기력하게 산다. 도전하기를 싫어하고, 귀잖아 하면서 안주한다. 모든 일에 무기력해져 버린다. 

우찌무라 간조는 “하나님이 인간을 저주하신다면 질병이나 실패나 죽음 따위로 저주하시지 않고 성경을 읽어도 믿지 못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이 살아 계시는 것을 믿지 못하는 마음으로, 감사하는 마음이 우러나오지 않는 마음으로 저주하실 것이다.” 무감각 무관심 무기력은 저주입니다. 

그래서 요즘 사람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감동을 주는 일이다. 모든 일이 감동을 주어야 합니다. 장사도 감동을 주어야 하고, 광고도 감동을 주어야 하고, 가르침도 감동을 주어야 하고, 설교도 성도들에게 감동을 주어야 하고, 심지어 예배도 감동을 주어야 한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감동이 없는 시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꼬?” 라고 말씀하시면서 시장에서 놀이하는 어린아이들의 놀이를 비유로 말씀하셨다. 


2. 예수님이 진단하신 그 세대 

예수님 당시의 이스라엘의 어린이들의 부모님을 따라 시장에 가서 아이들끼리 모여 논다. 두 편으로 나누어서 한쪽에서 피리를 불면 다른 쪽에서는 춤을 춘다.(결혼식같은 놀이) 또 한쪽에서 울기 시작하면 다른 쪽에서는 가슴을 치면서 논다.(장례식 놀이) 만약에 이 놀이를 잘 맞추어서 하면 사람들이 박수를 치면서 또 어른들은 돈을 던져주기도 했다. 그런데 만일 한쪽에서 피리를 불었는데 다른 쪽에서 춤을 추지 않는다. 한쪽에서 울기를 시작하였는데 다른 쪽에서 가슴을 치지 않는다. 그러면 이 놀이는 흥이 깨지고 놀이는 스톱이 된다. 

예수님의 세대와 오늘의 세대는 똑같다. 사람들이 피리를 불어도 춤을 안 추고, 사람들이 울어도 가슴을 치는 일이 없다. 기뻐도 기뻐하지 않고, 슬픈 일을 만나도 슬퍼할 줄 모른다. 

노 전대통령이 죽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추모하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그의 죽음을 폄하한다. 그 사람이 싫고 그 사람의 정책과 생각이 안 맞아서 그럴 수도 있다. 그가 선택한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나 어쨌든 대통령이 죽었다는 것은 슬픈 현실이다. 슬픈 것은 슬픈 것이다. 국민으로서 슬픔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것은 나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맹자는 측은지심이 인간의 본심이라고 했다. 이것이야말로 인간을 인간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라고 했다.
예수님이 진단하신 그 당시 사람들처럼 이 세대 역시 사람들은 피리를 불어도 춤을 추지 않는다. 사람들은 울기를 시작하여도 가슴을 치지 않는다. 

몰트만같은 신학자는 신앙을 놀이라고 표현했다. 부정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긍정적인 의미에서. 놀이는 누가 시켜서는 하는 것이 아니다. 자발적이다. 놀이를 통해서 우리는 역할을 배우게 된다. 놀이는 참 재미가 있다. 신앙도 자발적으로 해야 재미있다. 신앙을 통해서 나의 역할을 배운다. 부모, 자녀, 그리고 하나님을 섬기는 한 사람(피조물)의 역할.... 또 신앙은 재미있어야 한다. 신앙이 재미가 없으면 시시해지고, 시들해지고, 결국 떠난다. 


3. 성경은 우리의 무관심, 무감각, 무기력을 치유하는 방법으로 공감을 가르쳐 주셨다 “즐거워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로 함께 울라”(롬 12:15) 관심을 가지고, 사랑을 가지고, 함께 웃어주고 함께 울어주는 공동체의 모습이 있을 때 우리의 놀이, 우리의 신앙은 재미있고 흥이 넘치는 신앙이 된다.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은 왜 공감하지 못했는가? 첫째, 비판하는 것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세례 요한을 비판했다. 당시 사람들은 "요한은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는다하여 귀신이 들렸다."라고 하면서 요한은 하나님의 사람이 아니라 귀신들린 사람이라고 비판했다. 사실 요한은 당시의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사람으로서 완전히 다른 삶을 살았다. 그는 광야에서 약대 털옷을 입고 허리띠를 띠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면서 살았다. 세례요한은 금욕주의자였다. 그는 주님의 길을 예비한 자로서 오직 회개와 천국에 대하여 외치는 하나의 소리였다. 때문에 그들은 세례 요한을 귀신들렸다 비판했다. 

반면에 예수님은 금욕주의자인 세례 요한과는 달리 일반 사람들과 똑같이 먹고, 같이 자고, 같이 동행하면서 생활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세례 요한과는 전혀 다르신 예수님까지도 비판했다. 요한은 먹지 않으니까 귀신들렸다고 하더니, 예수님께서 잡수시는 것을 보고는 "그는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마11:11) 라고 비판했다. 사실 우리 예수님께서 그 어떠한 경우에도 비판받을 만한 일을 하신 적이 없다. 불쌍한 사람들과 같이 먹고, 자며, 행하는 것이 어찌 비판받을 일인가? 그것은 오히려 한없는 존경과 축복을 받아야 할 일임에도 그들은 예수님을 비판한다. 이렇게 해도 비판하고, 저렇게 해도 비판하고... 도대체 어느 장단에, 어떻게 하라는 말인가? 

어떤 목사님이 설교 중에서 이런 하소연을 하는 것을 들어보았다. 

목사가 젊으면 - 경험이 부족하여 불안하다고 하고, 늙으면 - 시대에 맞지 않고 희망이 없다고 합니다. 잘 생기면 - 제비 같아 위험하다 하고, 못 생기면 - 품위가 없어 틀렸다고 합니다. 

자식을 많이 낳으면 - 무절제 한 사람이라고 하고, 아들만 낳으면 - 욕심이 많다 하고, 딸만 낳으면 - 기도해서 그 정도도 해결 못 받았냐고 합니다. 

좋은 집에서 잘 살면 - 사치한다고 하고, 못 살면 - 축복도 받지 못한 목사라고 천시합니다. 

좋은 차를 타면 - 어려운 사람들은 생각하지 않고 과소비 한다하고, 나쁜 차를 타면 - 장로님들과 교인들에게 사랑도 받지 못한다고 합니다. 

십일조에 대한 설교를 하면 - 돈만 안다고 하고, 안 하면 - 가르치지 않는 무책임한 목사라고 합니다. 

잘못을 지적하고 책망하면 - 너무 냉정하다고 하고, 잘못을 지적치 않으면 - 정의감이 없다고 합니다.

도데체 어떻게 해야 한다는 말인가? 
성경은 여러 곳에서 비판하지 말라고 하신다. “비판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않을 것이요 정죄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정죄를 받지 않을 것이요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서를 받을 것이요”(눅 6:37)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판단하느뇨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뇨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롬 14:10) 

공감하지 못하는 둘째 이유는, 개인주의(이기주의) 때문이다. 
공감하지 못하는 셋째 이유는, 나의 선입견(편견, 생각, 주장, 관점)를 내려놓지 못하기 때문이다. 


4. 결론 

우리가 어떤 시각으로 보느냐가 중요하다.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볼 수 있어야 한다. 사람이 미워지면 잘해도 밉고 못해도 밉다. 그러나 사랑하면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다. 사랑을 하면 다 좋게 해석되고 다 좋게 받아들여진다. 

미래교회학자 레너드 스윗은 “의문을 벗고 신비 속으로”를 썼다. 그가 말하는 신비란 “관계”이다. 그리스도인과 교회와 기독교가 관계를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다는 것이다. 우리가, 교회가, 기독교가 낯선 사람, 슬픈 자, 상처 받은 자, 아픈 자들에게 다가가 관계를 맺고 그들과 소통해야 한다. 

“이 세대를 무엇에 비유할꼬?” 여러분은 어떤 모습으로 그 비유 속에 등장하기를 원하는가? 

그리고 우리교회는 어떤 모습일까?, 이 나라 이 민족은 어떤 모습일까? 

“이 세대를 무엇에 비유할까?”말씀하신 주님은 우리가 서로 사랑하기를 원하신다. 주님은 우리가 서로 기뻐하시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은 우리가 서로 슬픔을 함께 나누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은 우리가 서로 공감하기를 원하신다. 격려 받고 용기 받기가 힘든 이 세상에서 하나님은 우리가 서로 격려하기를 원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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