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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불쌍히 여기사 (막 6:3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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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쌍히 여기사 (막 6:30~44)


취직 대란이라고 합니다. 청년 실업자가 갈수록 늘고 있다고 합니다. 한데 정말 심각한 것은 어쩌면 고학력인지도 모릅니다. 너나 할 것 없이 대학을 나왔습니다. 한데 그들이 한결같이 취직하고 싶은 곳은 대기업입니다. 그런데 대기업에서 뽑는 인원이라야 전체 대학 졸업생의 1/10도 안 됩니다. 그렇다면 나머지는 아무리 가고 싶어도 대기업에 취직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실력은 있느냐 하면 그것도 아닙니다. 그런데도 대기업 아니면 안 된다고 하니 그런 어쩌란 말입니까? 

중소기업은 오히려 사람이 없어서 할 수 없이 외국인 노동자를 쓸 수밖에 없는 현실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 같이 기대 수준만 높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나도 대학 나왔으니 그에 맞는 대우를 받아야 된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그럼 정말 실력은 있는 거냐 하면 그것도 아닙니다. 4년 간 배운 것은 실컷 놀고먹는 것이었습니다. 고등학교까지는 공부에 시달렸습니다. 

그러다가 어찌됐든 대학이라는 곳에 들어가기라도 했다 치면 그때부터는 마음껏 게으름을 피웁니다. 하지만 좋은 것을 얻고자 한다면 그만큼 대가를 치러야 됩니다. 실력을 갖추어야 됩니다. 그럼 사회에서 필요로 하는 실력이나 기술을 갖추었냐 하면 그것도 아닙니다. 우리네도 그런 현실을 보지 않습니까? 차라리 대학 포기하고 처음부터 기술을 배우고 밑바닥부터 시작하겠다고 덤벼들면 그 사람 취직하는 것 어렵지 않습니다. 그리고 기술을 익히고 실력을 쌓아나가면서 독립을 합니다. 

그래 처음에는 혼자서 공장이나 가게를 운영하다가 조금씩 규모를 늘려 나가다 보면 그 사람은 사장 소리도 듣고 먹고 사는데도 아무 지장이 없습니다. 자기 사업이니 은퇴도 없습니다. 하지만 대기업에 들어간다고 해봐야 그 사람은 평생 남의 밑에서 월급을 받는 사람에 불과합니다. 그나마 40대 중반만 되도 퇴직을 걱정해야 됩니다. 그렇다고 퇴직 후의 삶이 보장이 되어 있느냐 하면 그것도 아닙니다. 나와서 무슨 사업을 해보고자 해도 그에 걸맞은 특별한 기술이 없습니다. 

그래 쉽게 도전하는 것이 장사입니다. 제일 많이 도전하는 것이 음식점 아니면 옷가게나 편의점입니다. 하지만 성공하는 사람은 아주 극소수에 불과합니다. 자 그렇다면 우리는 냉정하게 생각하고 판단해야 합니다. 대학이 전부가 아닙니다. 체면 그것이 다가 아닙니다. 그런데도 거기에만 목숨을 매는 사람들보면 참으로 불쌍합니다. 대기업에 취직한다고 해도 살아남기가 쉽지 않습니다. 왜요? 대학 4년간 놀기만 했잖아요. 그런데 대기업이라는 곳이 그저 건성건성 일해도 되는 곳이 아니란 말입니다. 책임도 대단합니다. 그래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고 합니다. 

어찌됐든 기업에서 이야기하는 말은 한결같습니다. 쓸 만한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월급은 적고 일은 힘드니 누가 하겠냐고 합니다. 그래 놀고만 있으면 뭐가 됩니까? 그나마 조금 나이를 먹으면 더더욱 취직은 힘들지 않던가요? 그러다 보니 불쌍한 사람들만 가득합니다. 하지만 정말 불쌍히 여김을 받을 만한 사람은 그중 얼마나 될까요?  

예수님은 쉴 겨를도 없는 제자들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사람은 바빠야 합니다. 딴 생각할 겨를도 없을 정도로 바빠야 합니다. 언제 시간이 이렇게 갔어 할 정도가 된다면 더 바랄 것이 없을 것입니다. 한 가지 조심할 것은 거기에 체력이 따라주느냐 입니다. 그러기에 체력 관리도 해야 됩니다. 몸이 따라 주지 않으면 일을 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체력도 실력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적당히 쉴 줄도 알아야 됩니다. 

그런데 쉬고 싶어도 시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격적으로 쉬지 못하는 사람도 있는 반면 쉬고 싶지만 할 일이 많아서 쉬지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지금 제자들이 그렇습니다. 저들은 둘씩 둘씩 짝을 지어 여러 마을을 다니며 복음을 증거하고 귀신도 쫓아내고 병든 자들에게 기름을 바르며 고쳐주는 귀한 일을 하다가 막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자기들이 나가서 다니는 동안 나타났던 모든 역사에 대해 예수님께 보고를 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힘겨운 여정이었기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한적한 곳으로 가서 잠깐 쉬어라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오고 가는 사람이 많아 음식 먹을 겨를도 없었기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많은 제자들 가운데서 예수님은 12명을 사도로 부르셨습니다. 

그리고는 그들에게 귀신을 제어하는 능력을 주시고 저들을 세상에 보내셔서 말씀을 전하며 귀신을 쫓아내고 병든 자들을 고쳐주도록 하셨습니다. 그래 저들이 막 나갔다 돌아왔습니다. 아주 신이 나서 지난 일들을 보고 합니다. 이제는 잠시 쉬어야 할 때입니다. 쉬어야 다음 할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그동안 나타났던 많은 역사를 보고들은 사람들이 그들을 한가하게 놔두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죽하면 식사할 겨를도 없었다고 하겠습니까? 

우리가 흔히 쓸데없는 일에 분주하다는 말을 합니다. 정신없이 왔다 갔다 하기는 하는데 그렇다고 뭐가 되는 일은 없습니다. 규모 없이 일을 할 때 그렇습니다. 한꺼번에 너무 많은 일을 하려고 하다 보니 그럴 수 있습니다. 도무지 마무리가 되지 않아서 그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절제하지 못해서 그럴 수도 있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능력을 벗어나는 일에 매달릴 때도 있습니다. 어찌됐든 일이라고 하는 것이 해도 해도 아무 표식도 없는 것도 있습니다. 또 해도 해도 끝도 없는 일도 있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 일이 어떤 일이든 간에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분량만큼만 감당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 능력 밖의 일을 하려고 하다보면 여기 저기 문제가 생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 같은 일을 해도 즐겁게 해야 합니다. 억지로 마음에도 없는 일을 하려고 하다가는 생각지도 않던 문제가 생길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한데 문제는 나는 쉬고 싶은데 다른 사람들이 쉬도록 놔두지를 않을 때입니다. 

지금 제자들이 바로 그렇습니다. 지금 저들은 기쁨으로 가득합니다. 그들이 나가서 많은 일을 하고 돌아왔는데 많은 귀신을 쫓아냈죠. 병든 자에게 기름을 발라 고쳤죠. 그러니 얼마나 신이 나겠습니까? 그래 그걸 신이 나서 이야기를 합니다. 하지만 이제는 좀 쉬어야 합니다. 심지어 밥도 못 먹었다는 것입니다. 당연히 예수님으로서는 그들이 좀 쉬도록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아무리 바빠도 제대로 먹을 것을 챙겨먹어 가면서 해야 되는 것 아닙니까? 아니 예수님으로서는 제자들이 굶주리며 쉬지도 못하고 있는 것을 그냥 두고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 한적한 곳으로 가서 쉬도록 하라고 하셨습니다. 이게 바로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아무리 마음이 바빠도 아무리 일이 많아도 쉴 때는 쉬어야 합니다. 일거리가 태산 같은데 어떻게 쉴 수가 있냐고요? 그러기 때문에 오히려 쉴 때는 쉬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몸이 견딥니다. 예수님 자신도 너무 피곤해서 풍랑 가운데서도 주무시기도 하셨습니다. 얼마나 피곤하면 그 난리 중에 주무신단 말입니까? 그런데 사람이 정말 피곤하면 이건 어쩔 수 없는 것입니다. 얼마나 피곤하면 차를 몰고 가면서도 주무시는 분 계시지 않습니까? 하지만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결코 악덕 기업주가 아닙니다. 오히려 오고 가는 사람들이 많아 음식 먹을 겨를도 없는 제자들을 보시며 너희는 따로 한적한 곳으로 가서 쉬어라 말씀하셨습니다. 이게 사랑입니다. 배부른 소리 하지 말라고 일할 때 일해야지 무슨 소리냐고 하시는 분도 계십니다. 일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쉴 때 쉬라는 것은 그만큼 내 몸 관리를 하라는 말입니다. 졸면서 뭐를 하기 보다는 잠깐 눈이라도 붙이고 나서 맑은 정신으로 하는 것이 더 낫다는 것입니다. 

그건 공부도 그렇고요. 일도 잠시 허리를 펼 시간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메뚜기도 한 때라는 말도 있지만 그럴수록 쉴 때 쉬기도 하는 여유를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아니 쉴 때는 쉴 수 있도록 우리 모두가 함께 만들어 주어야 합니다. 모든 것이 다 그렇습니다만 내가 감당할 만큼 만입니다. 너무 욕심 내지 마십시오. 그런데 일에도 아주 욕심이 많은 사람도 있습니다. 그건 뭐 천성적으로 어쩔 수 없다고는 하겠지만 그걸 이용해서 쉬지도 못하게 만들지는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더 나은 내일을 위해 오늘 잠시 멈추어 서서 한숨을 돌릴 수 있는 여유를 가지고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목자 없는 양 같음을 보시고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따로 한적한 곳에 가서 잠깐 쉬어라 하시니 제자들이 배를 타고 한적한 곳으로 갑니다. 한데 그들이 가는 것을 보고 많은 사람이 그들인 줄 알았습니다. 그냥 강을 건너는 것이 아니라 호수를 건너가는 것이니까 사람들이 그들을 보고는 모든 고을로부터 도보로 그들이 가는 곳으로 달려와 그들보다 먼저 가서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보면서 예수님이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큰 무리로 모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목자 없는 양 같았다는 것입니다. 목자 없는 양은 갈 길을 알지 못합니다. 그래 이리 저리 헤매다가 사나운 짐승들에 의해 잡아먹히거나 아니면 먹을 것을 얻지 못해 굶어 죽거나 험한 산에서 굴러 죽음에 이르기 십상입니다. 한 마디로 목자 없는 양은 기다리느니 죽음뿐입니다. 

그래 누군가가 돌보아 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제자들을 보고 달려와서 먼저 기다리고 있는 그 사람들이 목자 없는 양 같았다는 것입니다. 누구하나 그들을 지도해주고 돌보아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도무지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그 길도 모릅니다. 그저 죽음을 향해 줄달음질 치고 있는 사람들일 뿐입니다. 그러니 누군가는 그 길을 알려주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이 땅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문제는 그들이 어디로부터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많은 철학자들이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고 있는가?” 머리를 싸매고 고민하고 있지만 그들은 결코 그 길을 알지 못합니다. 아니 자기 정체성을 알지 못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정체성을 분명히 알아야합니다. 

우리는 주님이 돌보아 주지 않으면 결국 죽음에 이를 수밖에 없는 광야의 양과 같다는 것을 먼저 알아야 합니다. 내 딴에는 내가 똑똑하고 나보다 잘난 사람이 없을 것 같지만 아무리 내가 잘 났다고 떠들어봐야 결과는 마찬가지입니다. 조금 더 가지고 있고 덜 가지고 있고 조금 더 잘 입고 잘 먹고 뭐 어쩌고저쩌고 해 봐야 결과는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모두는 죽음에 이르는 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목자가 필요합니다. 살아갈 길을 알려 주어야 합니다. 

여기 예수님께서 이들을 불쌍히 여기셨다고 했습니다. 그리고는 저들을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기 시작하는데 날이 저물어갈 때까지 계속하셨습니다. 이게 바로 우리를 향한 주님의 사랑입니다. 갈 바를 알지 못해서 각기 제 길로 가는 것을 예수님은 그냥 두고 보실 수 없었던 것입니다. 잘 알다시피 양은 근시라 멀리보지 못합니다. 그렇다고 자기를 지킬 능력도 없습니다. 누군가가 그러기에 먹을 것이 있는 곳으로 인도해야 하고 쉴만한 물가로 이끌어주어야 합니다. 또 보호하고 지켜주어야 합니다. 

주님이 바로 그 일을 하셨고 지금도 예수님은 우리의 목자가 되십니다. 그리고 그 목자 곁에는 양을 함께 돌보는 양몰이 개들이 있습니다. 목자나 양 몰이 개가 때로는 양을 위협하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습니다. 괴롭히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건 그들이 바른 길로 가고 안전한 길로 가도록 하는 배려입니다. 양을 키울 때 그 안에 염소도 함께 키운다고 했습니다. 

대개의 경우 염소는 자기 기분이 나쁘면 대듭니다. 그리고 자기 멋대로 가려고 합니다. 그건 양들도 그런 양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번 고집부리기 시작하면 정말 누구도 감당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럼 길이나 알고 그러느냐 하면 그것도 아닙니다. 우리네야 그저 집에 있는 우리에 넣어 놓아다가 아침이 되면 산이나 들로 나가서 풀어놓고 저녁이 되면 다시 우리로 몰고 오고 하니 길을 알 수도 있을 수 있겠지만 이스라엘 땅은 다릅니다. 

한번 길을 나서면 광야에서 거의 반년 이상을 지나게 됩니다. 소위 유목민입니다. 그래 길을 잃어버리면 그건 끝장입니다. 어찌 그들이 끝장나도록 보고 있을 수 있습니까? 그래 살 수 있는 길로 이끌어가려고 하다보면 때로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지날 때도 있습니다. 그러지 않고서는 물 있는 곳으로 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누군가가 목자가 되어 이끌어주지 않는다면 갈 방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목자 없는 양처럼 불쌍한 것도 없습니다. 결국 죽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자기 죽을 줄 모르고 잘난 줄만 알고 들고 뛰는 사람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다 자기 잘 난 멋에 살아갑니다. 하지만 그 끝이 어디입니까? 마치 낚시 바늘에 매달린 지렁이에 욕심 부리다가 자기 목숨이 달아나는 물고기와 같이 자기 죽는 줄 모르고 욕심 부리는 어리석음이 오늘 우리들에게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예수님이 불쌍히 여기십니다. 그것은 주님이 선한 목자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모두 목자 되신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주님의 발자취를 그대로 따라야 합니다. 

우리역시 목자 없는 양처럼 방황하는 세상 사람들을 불쌍히 여겨야 하고 그들에게 말씀을 전하고 가르침으로 그들로 하여금 생명의 길로 나아오도록 이끌어 주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 올 자가 없느니라.” 주님이 유일하신 길입니다. 그것도 생명과 진리로 이끄는 유일하신 길입니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 

우리에게 구원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주신 적이 없으십니다. 오직 예수님을 통해서만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습니다. 세상의 풍요도 마찬가지입니다. 풍요롭다는 것은 그만큼 사나운 짐승이 우굴 거린다는 뜻입니다. 눈앞의 풍요만큼이나 죽음이 가깝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풍요만 좇고 있지 않습니까? 쥐덫이 있는데 거기 먹을 것이 있다고 쉽게 먹을 수 있다고 들어갔다가는 죽음입니다. 세상에 쉬운 일이 어디 있습니까? 

주님을 따르기가 너무 힘들다고요? 그럼 어느 길인들 쉬운 길이 있습니까? 죽기는 쉽습니까? 그런데 주님은 우리에게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을 보여 주셨습니다. 단지 그 길이 가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리로 가는 사람이 적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 길만이 생명으로 나아가는 길입니다. 왜요? 주님만이 우리의 참 목자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 모두는 목자의 음성을 들어야 하고 앞서가는 목자의 뒤를 따라 다른 양떼를 다독여 함께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아니 아직 그렇지 못했다면 이제부터 예수님을 나의 목자로 삼으십시오. 예수님의 말씀을 귀담아 듣고 그 뒤를 따르십시오. 그러면 거기에 생명의 길이 활짝 열려지게 될 것입니다. 이 귀한 생명의 자리에서 주님이 주시는 모든 풍요를 우리 모두 함께 누리시기를 축원합니다.

예수님은 굶주리는 사람들을 보시고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우리는 단 한 시간 말씀 듣는 것도 힘들어 합니다. 무슨 설교가 그렇게 기냐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뭐 그렇게 할 말이 많냐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TV 연속극을 볼 때는 뭐가 그렇게 짧으냐고 합니다. 사실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거기에 몰입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몸에 좋은 약은 입에 쓰다고도 합니다. 그런데 쓴 약은 안 먹으려고 합니다. 

아무리 몸에 좋다고 해도 우선은 입에서는 쓰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아무 중병이 걸렸는데 청양고추 한 그릇을 먹어야 된다고 하면 어떨까요? 살기 위해서는 먹어야 되는데 그거 그래도 다 먹을 수 있을까 모르겠네요? 특히나 고추를 전혀 먹지 못하는 그런 사람이라면 어떻겠어요?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 듣기를 이렇게 힘들어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거 들으면 뭐가 어떻게 되는 줄 알아요. 

그래 도망치는 사람들도 있어요. 하지만 예수님께서 말씀을 전하기 시작하는데 목자 없는 양과 같음을 보셨기에 예수님은 한 두 마디로 끝낼 수가 없었습니다. 한 가지라도 더 전해주고 싶어서 말씀을 하시다보니 어느새 저녁때가 되었습니다. 날이 저물어 갑니다. 한데 그곳이 빈들이라는 것입니다. 마을까지는 한참 가야 되는데 문제는 그 많은 사람을 먹일 만큼 많은 빵을 그 어디서도 살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빵이 있어서 살 수 있다면 자그마치 이백 데나리온 어치를 사야 된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천만 원 어치를 사야 그들이 먹을 수 있다니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들이 약 이만 명가량이나 되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주님께서는 그들을 직접 먹이기시로 작정을 하셨습니다. 그래 그들 가운데 먹을 것을 지니고 있는 사람이 누가 있는가 알아보았더니 마침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어린 아이 하나가 있어 그것을 내어 놓았다는 것입니다. 

흔히 벼룩의 간을 내어 먹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 많은 사람들 가운데 그래 빵을 가지고 나온 사람이 이 어린아이 하나밖에 없었다니 참 기가 막힙니다. 그래도 어떡합니까? 있는 것은 그것밖에 없는데 그래 예수님께서는 그 빵과 물고기를 가져오라 하시고는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풍성하게 주심을 감사하며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는 빵과 물고기를 나누어주시는데 놀랍게도 그 많은 사람이 다 배불리 먹고도 오히려 남은 것을 거두었더니 열두 광주리가 되었다고 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주님은 결코 우리가 굶주리는 것을 그냥 두고 보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배고파하는 것을 불쌍히 여기십니다. 이는 곧 우리에게 마땅히 있어야 할 것이 없어서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주님이 불쌍히 여기신다는 뜻입니다. 우리 가운데 아파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몸이 아파서 힘들어 하는 사람도 있고 마음이 아파서 힘들어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들이 누구든 간에 예수님은 그들을 불쌍히 여기십니다. 불쌍히 여기신다는 것은 곧 그들의 문제를 해결해 주신다는 뜻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있는 부족한 것을 채우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에게 있는 문제를 해결해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바로 잡아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내게 있는 것으로 주님 앞에 드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먼저 이 무리들은 시간을 주님께 드렸습니다. 날이 저물어갈 때까지 자기들의 시간을 주님께 드렸습니다. 아니 그들은 배를 타고 갈릴리 호수를 건너시는 주님을 보고는 길로 달려서 먼저 가 기다릴 정도로 주님을 따랐습니다. 

그리고 주님 앞을 떠나지 않고 말씀을 들었습니다. 배고픈 것도 모를 정도였습니다. 아니 어쩌면 배고픈 것을 참고서였을 수도 있습니다. 그들은 주님께 시간과 마음을 드렸습니다. 거기다가 어린 아이는 자기가 자진 보리빵과 물고기까지 드렸습니다. 참으로 보잘 것 없는 먹을거리입니다. 하지만 아이는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있는 그대로를 주님께 드렸더니 그것이 놀라운 기적의 도구가 되었습니다. 모두의 입에 이 보잘 것 없는 먹을거리가 꿀맛과 같아서 다 배불리 먹었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그 많은 사람들에게 빵과 물고기를 나누어주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무리들은 떼로 오십 명씩 백 명씩 질서 있게 앉아서 순서를 기다렸습니다. 거기에 아무런 불평도 없었습니다. 왜 누구는 먼저고 누구는 나중이냐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순종하는 마음을 드렸습니다. 그 결과는 모두에게 놀라운 감동이었습니다. 다 배불리 먹고도 남은 것이 열두 광주리 이건 역사에 없던 일이었습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했습니까? 

여기에 드림이 있었습니다. 순종이 있었습니다. 인내가 있었습니다. 감사가 있었습니다. 무엇보다도 무리들의 배고픔을 불쌍히 여기시는 주님의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로 모두가 배불리 먹고도 남는 역사가 있었습니다. 그 출발은 예수님이 무리들이 배고파하는 것을 불쌍히 여기셨다는 것입니다. 
그 예수님이 오늘 우리들을 불쌍히 여기십니다. 

우리들이 무엇 때문에 힘들어하는지 주님이 아십니다. 그것을 주님이 기쁨과 감사로 바꾸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들의 부족한 것을 주님께서 풍족한 것으로 바꾸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들의 연약함을 넉넉한 강함과 온전함으로 바꾸시기를 원하십니다. 배고픈 자는 먹이시고 아픈 자는 고치시고 부족한 부분은 채워주시고 고통당하는 자를 위로하시며 외로운 자의 기댈 언덕이 되어 주시며 슬픈 자의 위로가 되시기를 주님이 원하십니다. 그러니까 오병이어의 기적은 단순히 배고픈 자를 먹이신 역사가 아닙니다. 거기에는 우리 삶의 모든 조화가 함께 들어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무엇 때문에 힘들어 합니까? 이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는 주님께 나아가십시오. 주님 앞에 여러분의 염려를 여러분의 아픔을 여러분의 힘든 사정을 그대로 아뢰십시오. 주님은 우리를 불쌍히 여기십니다. 다시 말해서 주님은 우리들에게 있는 그 어떤 문제라도 다 바로 잡아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그 주님의 은혜로 오늘 우리들이 다 평안을 누리고 만족함을 누리는 귀한 삶을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주님이 우리를 불쌍히 여기신다는 것은 곧 주님의 사랑이 그만큼 크고 귀하다는 뜻입니다. 내가 아파하는 것 이상으로 나 때문에 아파하시는 분입니다. 아이가 아플 때 밤새 그 곁을 지키는 어머니는 더 아파하듯 우리를 향한 주님의 마음이 바로 그렇습니다. 그 예수님이 우리 대신 아파하셨고 우리 대신 죽어주셨습니다. 그만큼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러나 문제 해결의 열쇠를 주님이 하늘에서 내리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있는 것 우리들이 함께 드리는 작은 것으로부터 시작하십니다. 

그것은 곧 우리의 마음이 하나 되기를 바라는 주님의 마음입니다. 분명 주님은 하늘에서 가장 귀하고 좋은 것으로 내려서 주실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순식간에 만나를 내리듯 그렇게 하실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그렇게 하지를 않았습니다. 너희 중에 무엇이 있는지 알아보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작은 것이라도 함께 나누기를 주님이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사랑으로 서로를 위로하시기를 원하십니다. 내게도 보잘것없고 부족하지만 거기에 사랑이 더해진다면 그것은 귀하고 비싼 것보다 더 큰 감동입니다. 바로 거기에 놀라운 역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오히려 배부른 내 배를 두드려가면서 적선하듯 무엇을 나누는 것이 아닌 나도 배를 곯면서도 오히려 나누어주는 그것을 주님이 더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때 주님은 나도 너도 함께 배부르고도 남도록 만들어주십니다. 여기에 하늘의 비밀이 있습니다. 분명 부족했습니다. 

그나마 보잘 것 없기까지 했습니다. 하지만 주님께 먼저 드리고 함께 나누게 되면 그것이 가장 좋고 귀한 것으로 바뀐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움켜쥐면 부족해도 흩어 구제하면 더욱 부하게 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함께 하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함께 나누는 것입니다. 함께 있는 것입니다. 함께 가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서로를 불쌍히 여겨줄 수 있을 때 그 마음이 바로 주님의 마음입니다. 예수님이 원하시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오늘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는 주님 앞에서 서로가 위로가 되고 서로가 힘이 되며 서로가 문제를 해결해 주는 귀한 디딤돌이 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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