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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광복절] 한결 같은 사랑으로 (시 147: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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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결 같은 사랑으로 (시 147:1~11) 


• 해방을 주신 하나님

네 소원이 무엇이냐 하고 하느님이 내게 물으시면, 나는 서슴지 않고, “내 소원은 대한 독립이오.”하고 대답할 것이다. 그 다음 소원은 무엇이냐 하면, 나는 또 “우리나라의 독립이오.”할 것이요, 또 그 다음 소원이 무엇이냐 하는 세 번째 물음에도, 나는 더욱 소리를 높여서, “나의 소원은 우리나라 대한의 완전한 자주 독립이오.”하고 대답할 것이다.

김구 선생님의 ‘나의 소원’이라는 유명한 연설문의 서두입니다. 
64년 전 우리나라는 36년간의 일제 식민지배로부터 벗어나 독립을 얻게 됩니다. 그날 1945년 8월 15일, 광복의 날에 날씨가 어떠했는지 모르지만 전국 방방곡곡이, 아니 조선인들이 흩어져 살던 곳이라면 그 어디라도 뜨거웠을 것입니다. 오랜 설움과 고통, 피눈물을 뒤로하고 자유로이 한 나라의 국민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기쁨에 가슴이 터질듯 했을 것입니다. 그 뜨거운 가슴으로 ‘대한독립만세’를 외쳤을 것이고, 그 열띤 함성은 조선반도를 가득 채웠을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시편 147편 또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복의 기쁨 가운데 부른 노래입니다. 이사야나 예레미야 같은 이들의 예언을 통하여 이 고된 바벨론 노예살이가 언젠가는 끝날 것이라는 기대 아닌 기대를 하고는 있었지만 그날이 언제 올지는 아무도 몰랐습니다. 

그런데 일본이 갑작스럽게 망한 것처럼 바벨론이 갑자기 패망합니다. 바벨론보다 훨씬 관대한 식민지 정책을 펼쳤던 신흥 패권국가, 바사는 바벨론에 억류되어 있던 여러 나라 사람들을 모두 제 고향으로 돌려보내줍니다. 주전 538년경의 일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입에서는 절로 함성이 터져 나옵니다. 그 함성은 ‘이스라엘 독립 만세’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입에서 나온 함성은 ‘할렐루야’였습니다. 

할렐루야. 우리의 하나님께 찬양함이 얼마나 좋은 일이며, 하나님께 찬송함이 그 얼마나 아름답고 마땅한 일인가!

이스라엘 사람들은 70여 년 전에 무너진 예루살렘성을 하나님이 다시 세우시리라 믿었습니다. 살길을 찾아 만 리 길 먼 타국으로 흩어져 디아스포라를 이루고 살던 이스라엘 백성들도 하나님이 다시 모으실 것을 믿었습니다. 

주님은 예루살렘을 세우시고, 흩어진 이스라엘 백성을 모으신다.

그 잘난 정치적 이념도, 지도자의 이름도 언급되지 않습니다. 물론 바사의 새로운 임금 고레스를 ‘여호와의 기름 부은 받은 자’로 칭송하지만 그 또한 하나님의 도구에 지나지 않습니다. 해방은 오로지 하나님이 하신 일입니다. 

함석헌 선생님은 우리나라의 해방은 ‘도둑같이 온 해방’이라 하셨습니다. 8월 14일까지는 아무도 몰랐고 그렇게 되리라 믿은 사람도 없다고 하셨습니다. 아무도 몰랐으니 아무도 꾸민 사람이 없는 게 당연하고 아무도 꾸민 사람이 없는데 찾아왔으니 그것은 하늘이 준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나 때문에 해방이 왔다’ 말할 자격이 아무에게 없습니다. 

단지 해방은 하늘이 이 땅의 사람들을 긍휼히 여겨 베푸신 선물 같은 것입니다. 가난하고 무지해서 아무런 세력도 형성 못하고, 출세도 못하고, 약삭빠르게 일본인에게 빌붙지도 못하고, 타고난 그대로 조선 사람으로 살 수밖에 없었던 이 땅의 민중들, 씨들에게 하늘이 베푸신 선물이 해방이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모든 해방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 같습니다. 

• 치유하시는 하나님

어찌되었건 값없이 해방이라는 큰 선물을 받은 이스라엘은 오랜 세월 버려져 황량하기 그지없는 예루살렘을 바라보면서도 하나님을 기쁘게 찬양합니다. 해방을 주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회복시켜나갈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시편147편 기자는 하나님이 이루시는 회복의 역사를 보다 실감나게 아주 시적으로 표현합니다.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시고, 그 아픈 곳을 싸매어 주신다. 별들의 수효를 헤아리시고, 그 하나하나에 이름을 붙여 주신다. 

바벨론에서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은 정처 없이 떠도는 들짐승에 지나지 않았으며 어미 새의 돌봄을 받지 못한 채 울고 있는 까마귀 새끼에 지나지 않았다고 시편 기자는 고백합니다.(9절) 포로로 끌려가 노예살이를 한다는 것, 그렇게 수십 년을 살아야만 한다는 것은 조금만 상상해보아도 그 어려움을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차라리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저주스럽게 느껴졌을 것입니다. 

작년에 청년들과 함께 일본으로 생명∙평화∙역사 기행을 갔을 때의 일입니다. 후쿠오카에 있는 고쿠라라는 곳을 들렸습니다. 그곳은 일제 식민시대에 수많은 조선 젊은이들이 강제노역을 하던 곳입니다. 그곳에서 만난 고쿠라 한인교회의 목사님께서 유인물을 나누어주셨는데 거기에는 징용으로 끌려와 탄광에서 노동자로 일하던 조선인들이 부르던 노래가 적혀있었습니다. 

십오 세 소년은 몸이 아파서 하루 놀다가 뚜드려 맞았네
몽둥이 맞고서 굴 안에 끌려와서 천장이 떨어져서 이 세상 이별했네
죽은 아 꺼내서 손발을 만지면서 눈물을 흘리면서 이름만 불러봤네
감독놈은 몽둥이 들고서 죽은 사람 옆에 두고 숱 담아 내라했네
이 말을 듣고서 복장을 뚜들면서 나라 뺏긴 민족은 요렇게 서름 받나
몽둥이 맞을 때는 같이 맞지 하며 하꼬를 제쳐서 숯을 부어냈네
하꼬를 알바다서 죽은 사람 실어주고 눈물을 흘리면서 천장만 쳐다봤네
여기저기에서 죽은 사람은 많았는데 초상치는 것을 한 번도 못봤네

이후에 영생원(永生園)이라고 하는 곳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그곳은 일본으로 징용을 끌려와 탄광 노동자로 일하다 죽은 조선인들의 유골함이 모셔져 있는 곳이었습니다. 각 유골함마다 이름이 적혀있었습니다. 그런데 그중 어떤 유골함에는 ‘무명(無名)’, ‘불명(不名)’이라고 적혀있었습니다. 조선인의 유골이 맞기는 하지만 정확히 누구인지 알 수 없어 그렇게 표기해놓은 것입니다. 

바벨론에서의 70여년의 포로생활, 노예생활은 그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들은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았습니다. 몸과 마음 여기저기가 터지고 깨지고 상처가 났습니다. 그들의 존재가치는 밤하늘의 별들처럼 있는 듯 없는 듯 미미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해방이 찾아왔습니다. 정말 도둑같이 찾아온 해방이었습니다. 우리나라가 8∙15 광복을 맞을 때의 기쁨을 피천득 선생님은 다음과 같이 표현했습니다. 

그때 그 얼굴들. 그 얼굴들은 기쁨이요 흥분이었다. 그 순간 살아 있다는 것은 축복이요보람이었다. 가슴에는 희망이요, 천한 욕심은 없었다. 누구나 정답고 믿음직스러웠다. 누구의 손이나 잡고 싶었다. 얼었던 심장이 녹고 막혔던 혈관이 뚫리는 것 같았다.

살아있다는 것이 절망이요 죽을 만큼 싫은 일이었는데 한 순간 축복과 보람으로 바뀝니다. 얼었던 심장이 녹고 막혔던 혈관이 뚫리는 것 같습니다. 곤죽이 되었던 몸과 맘에 새로운 힘이 솟아납니다. 나의 존재는 모두에게 잊혀진 줄 알았는데 하나님께서 다가와 친히 이름을 불러 주십니다. 

• 새로운 기준

시편 147편 기자는 해방을 가져다주신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그의 치유하심에 대한 찬양 끝에 이스라엘이 지향해야할 새로운 삶의 기준을 제시합니다. 그리고 그 기준을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것과 좋아하시는 것으로 표현합니다. 

주님은 힘센 준마를 좋아하지 않으시고, 빨리 달리는 힘센 다리를 가진 사람도 반기지 아니하신다. 주님은 오직 당신을 경외하는 사람과 당신의 한결 같은 사랑을 기다리는 사람을 좋아하신다.

이는 어찌 보면 위험한 발언입니다. 아직 국가의 정비가 이루어지지 않아 주변 나라들이 언제 다시 침범해올지 모르는 상황입니다. 일반적인 경우라면 군비를 확충하고 카리스마 있는 지도자를 내세워 나라를 확고하게 세워가는 것이 보통입니다. 그러나 시편 기자는 그런 긴박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에게 필요한 것은 강한 군대도 뛰어난 지도자도 아니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한결 같은 사랑을 기다리는 것이 필요하다 말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역사를 숙고하며 새로운 역사적 진리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상 다윗 솔로몬 이후에 영토를 가장 넓게 확장시키고 강한 군대를 가지고 경제를 부흥시켰던 왕들의 시기가 실은 하나님으로부터 가장 멀어졌던 시기였습니다. 북왕국의 부흥기는 오므리 왕조 시대로 왕으로 치자면 오므리 왕과 아합 왕이 다스리던 시기였습니다. 

그 때 북 이스라엘은 사마리아를 사들이고 새로운 수도를 건설하였고 군대를 징집해 군사력을 증대 시켰으며 주변 국가들과 정략결혼을 통해 혈맹공동체를 이루었으며 무역과 건설에도 상당한 발전을 이루었습니다. 그들은 강한 나라를 만들었습니다. 아니 늘 강한 나라를 만들기 위해 혈안이 되어있었습니다. 

그러나 성서는 오므리와 아합을 하나님 앞에 패역한 왕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방 여인으로 여왕이 된 이세벨을 통하여 유입된 우상숭배와 나봇의 포도원사건은 하나님 앞에 가증스러운 것이 되었습니다. 열왕기서 기자는 아합에 대해 이렇게 기술합니다. “일찍이 아합처럼 여호와 앞에서 악을 행하는 데만 정신이 팔린 사람도 없었다”(왕상21:25) 남유다의 번영기는 웃시야 왕 때가 최고조였습니다. 

솔로몬 통치 이후에 가장 큰 번영을 누렸습니다. 활발한 무역을 펼쳤으며 그를 통한 재원확보로 강한 군대를 보유할 수 있었고 그 강력한 군사력을 앞세워 그 당시 남진해오던 '아람-이스라엘 동맹'에 맞서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웃시야는 교만에 빠져 제사장들만이 할 수 있는 성소의 분향을 직접 행하는 등 하나님의 말씀을 저버린 생활을 하다가 결국 문둥병에 걸려 죽게 됩니다.(왕하15:1-7)

힘센 준마와 힘센 다리를 가진 사람에게 의지하는 순간에 이스라엘은 그보다 본질적인 것을 놓치게 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을 놓친 채 세운 강한 나라는 그들을 지켜주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을 놓친 채 세운 나라는 비록 강하고 부유한 나라였을지언정 바르고 공평한 나라는 아니었습니다. 바르고 공평하지 않았기에 무너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수많은 눈물과 피를 흘리고 깨달았습니다. 참으로 비싼 댓가를 치르고 배웠습니다. 무너져 내린 채 오랜 세월 방치된 예루살렘 성과 성전을 바라보며 깨달았습니다. 자신들이 그릇된 기준 위에 나라를 세워왔음을, 이제는 올바른 기초 위에서 새롭게 출발해야 함을 깨닫게 됩니다. 

• 하나님 경외

시편 기자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제시하는 첫 번째 기준은 하나님 경외입니다. 
하나님을 경외(敬畏)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삶의 제1 원리와 기준으로 삼고 살아간다는 말입니다. 하나님보다 돈과 명예, 성공과 안전을 삶의 중요한 원리로 삼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나라는 세워갈지언정 하나님의 나라는 세워갈 수 없습니다. 

그들이 세워가는 나라는 부국강병(富國强兵)이라는 그럴싸한 탈을 뒤집어쓰고는 있지만 그 이면에는 승자독식(勝者獨食)이라는 무서운 이빨을 감추고 있습니다. 그들이 말하는 부(富)는 과연 누구를 위한 부이며, 그들이 말하는 강병(强兵)은 과연 누구를 위한 강병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일반 민중은 그 부와 강함을 체감할 수 없습니다. 아니 오히려 역사를 살펴볼 때 하나님을 잃어버린 이들이 부국과 강병을 외칠수록 민중은 더욱 가난해지고 두려움에 몸을 떨어야만 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아가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저는 ‘조심스러운 사람’ 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만물 속에 존재하시며 모든 관계 속에 살아계시니 만나는 사람 하나하나, 주어진 일 하나하나 막 다룰 수 없습니다. 조심해야합니다. 아니 조심하게 됩니다. 지금 내 앞에 있는 이가 하나님이요, 지금 내가 하는 일이 하나님이 맡기신 일이니 조심스럽게 대하게 됩니다. 

짧은 인생 동안 함께 살아가라고 허락 받은 귀한 인생들을 막 대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아가는 사람이 아닙니다. 자신과 이웃을 이롭게 하라고 허락 받은 귀한 일을 오직 돈벌이로만 여겨 대충대충 감당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조심(操心)은 말 그대로 마음을 잡는 것입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마음이 하나님 앞에 있도록 붙잡는 것입니다. 조심할 때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조심(操心)’을 잃어버린 것 같습니다. 사람은 자연을 조심스럽게 대하지 않습니다. 강을 파헤치거나 산에 구멍을 내거나 갯벌을 메우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닌 것이 되어버렸습니다. 고용주는 노동자들을 조심스럽게 대하지 않습니다. 잠시 싼값을 주고 쓰고 잘라버리면 그만입니다. 정부는 국민을 조심스럽게 대하지 않습니다. 인권이고 뭐고 없습니다. 

이메일부터 사생활까지 다 감시하고 사찰합니다. 조금이라도 반대하는 목소리에는 철퇴를 날립니다. 
위험합니다. 조심을 잃어버린 사회는 위험한 사회입니다. 조심을 잃어버린 것은 하나님을 잃어버린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잃어버린 사회는 오래 갈 수 없습니다.

• 한결같은 사랑으로

시편 기자는 하나님 경외함과 더불어 한 가지의 기준을 더 제시합니다. 그것은 주님의 한결 같은 사랑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주님의 한결 같은 사랑을 기다린다’, 이 말에는 이스라엘 자신이 주님의 한결 같은 사랑을 기다리지 못했음에 대한 반성이 담겨 있다고 생각합니다. 70년은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닙니다. 물론 예레미야가 이스라엘의 노예살이가 70년이 될 것이라 미리 말하기는 했지만, 그 이후에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될 것을 말하기는 했지만 그 약속 하나 믿고 견디기는 너무 힘든 시간이었습니다. 내생에 다시 만나자는 지아비의 약조 하나 믿고 평생 수절하는 과부의 심정으로 견뎌 보지만 무자비한 바벨론은 매일 같이 이스라엘을 겁탈합니다. 

시간이 갈수록 이스라엘의 민족혼은, 야훼 신앙은 조금씩 좀 먹어 갑니다. 적지 않은 이들이 바벨론에 동화되어 갔고 야훼 신앙을 저버렸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견디는 이들도 있었지만 문득문득 그들은 스스로 보기에도 바보 같아 보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 해방이 찾아왔습니다. 고향 예루살렘에 돌아왔습니다. 예언이 성취되고 약속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 순간 이스라엘이 깨닫게 되는 것은 정작 자신들은 상황에 따라 흔들렸지만 하나님은 한결 같은 사랑으로 그 자리에 자신들을 기다리고 계셨다는 사실입니다. 이스라엘도 그러했어야 했다는 마음이 뒤늦게나마 들었습니다. 자신들의 흔들림, 두 마음이 부끄럽게 느껴지며 앞으로는 그 어떤 상황에도 주님을 향한 마음이 흔들리지 않기를 다짐해보는 것입니다. 

공동번역 성서기자는 '하나님의 한결 같은 사랑을 기다리는 자들' 이라는 부분을 ‘당신 자애에 희망을 두는 이들’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저는 지난주에 하나님의 한결 같은 사랑을 기다리는 사람, 주님의 자비로운 사랑에 희망을 두고 살아가는 한 사람을 만났습니다. 

천안 독립기념관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단비교회가 있습니다. 지난주에 청년부가 농활을 갔던 교회입니다. 그리고 우리 교회가 매 주일 식사할 때 사용하는 유기농 쌀을 공급하는 교회이기도 합니다. 
저는 10년쯤 전에 그곳에서 3개월 정도 머물며 정훈영 목사님의 농사일을 도운 적이 있습니다. 그 이후로 지금까지 인연이 계속 되고 있는데 그 인연의 기간이 긴만큼 단비교회가, 정훈영 목사님이 겪은 어려움의 사정도 많이 알고 있습니다. 

18년 전에 축사를 개조해 교회를 처음 시작한 이야기, 농사를 처음 시작하며 온 동네 어르신들 밭 갈아 드리다가 양쪽 무릎을 모두 상해 고생한 이야기, 어렵게 땅을 마련하게 된 이야기, 갑자기 마음씨 고약한 축사 주인이 나타나 터무니없이 권리금을 주장한 이야기, 그래서 축사에서 나와 비닐하우스에서 예배드린 이야기, 사택도 없어져 갓난아기까지 다섯 식구가 컨테이너에서 겨울을 나며 고생한 이야기, 사택 짓고, 이듬해부터 교회를 짓기 시작해 7년째 혼자 교회 짓고 있는 이야기. 

지난주 농활을 마치고 주일 예배를 단비교회 교인들과 함께 드릴 때였습니다. 정 목사님이 설교 가운데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저는 지난 18년간 이곳에서 농사짓고 목회하며 희망을 잃어버린 적이 없습니다. 희망이 어려움을 겪은 적은 있었지만 희망을 잃지는 않았습니다. 그 희망은 날마다 더욱 커져만 가고 있습니다."
사람 좋은 얼굴을 하고 히죽이 웃는 정 목사님의 얼굴이 갑자기 밝게 빛나보였습니다. 

목사님은 자신의 한결 같음을 자랑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한결 같은 사랑을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그의 상황은 충분히 좌절하고 절망할 만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잔잔한 미소가 얼마나 부러웠는지 모릅니다. 

시편 147편 기자의 고백이 우리들의 고백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들의 상한 마음을 고치시며 상처를 싸매시는 주님을 찬양하며 삽시다. 저 밤하늘의 뭇별의 수효를 헤아리시며 그 각자의 이름을 불러주시는 주님이 우리의 이름을 부르고 계심을 잊지 말고 살아갑시다. 바벨론의 유혹과 압박이 제아무리 거세다 할지라도 하나님을 삶의 중심원리로 삼고 삼가며 조심스럽게 살아갑시다. 무엇보다도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하심이 한결 같음을 잊지 말고 그분의 약속이 이루어지는 날 부끄럽지 않은 모습으로 서길 바라며 하루하루 믿음을 지키며 살아갑시다. 

조국의 광복과 독립을 얻은 지 64년이 지나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반쪽짜리의 광복과 독립임을 잊지 맙시다. 이제라도 올바른 기준을 붙잡아야합니다. 50년이 넘도록 조국의 허리를 잘라 두 동강을 내고 있는 38선을 바라보며, 임진강물속에 흐르는 수많은 이들의 피눈물을 보며 깨달아야 합니다. 

더 이상 부국강병이 기준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더 이상 힘센 말과 파쇼적인 지도자를 의지해서는 안 됩니다. 김구 선생님의 말씀처럼 우리의 부력(富力)은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의 강력(强力)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한 것입니다. 우리를 조심케하시는 분, 한결 같은 사랑으로 우리를 기다리시는 분, 하나님이 우리의 희망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기준입니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경외하며 그분의 한결 같은 사랑을 마음에 품고 살아가는 이들이 늘어갈 때 이 땅에 진정한 광복과 독립, 평화로운 통일의 역사가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그런 귀한 일을 이루시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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