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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광복절] 다시는 종의 멍에를 매지 말라 (갈 5: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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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는 종의 멍에를 매지 말라 (갈 5:1~12)


마라나타, 아멘!
미국의 베스트셀러 작가 ‘스티븐 킹’의 “사계”에 수록된 중편소설 “리타헤이워드와 쇼생크 탈출”이 있다. 1994년에 “The shawshank redemption”이라는 제목으로 영화로 만들어졌다.  
종신형을 선고받고‘쇼생크’감옥에서 복역하고 있던 두 죄수의 이야기다.  
한 사람은 ‘앤디’라는 사람이다. 

한 때 성공한 은행가였던 이 젊은이는 그의 아내와 그녀의 정부를 살해했다는 누명을 쓰고 이 감옥에 왔다. 교도소에서 직업적인 능력을 발휘하여 간수들의 세금문제를 해결해주는 교도소의 비공식 회계사로 일하게 된다. 교도소 안에 도서관을 만들기 위하여 끈질기게 노력하여 성사해 내는가 하면 교도소의 생활 개선에 앞장선다. 그러면서 아무도 모르게 그 절망의 벽을 뛰어 넘을 희망과 계획을 가지고 꾸준히 탈출을 준비한다. ‘앤디’는 작은 망치로 20년간 꾸준히 인내하며 준비한 교도소 탈출에 성공한다. 새 삶의 희망을 가슴에 품고 달려간 태평양의 바닷가에서 자유를 만끽한다. 
 
다른 한 사람은 10대에 들어와 50년간 복역한 ‘브룩스’라는 사람이다. 
어느 날 자신의 출소하게 된다는 사실을 알고, 인질 소동을 벌이며 소리쳐 외친다.   
“난 여기 있고 싶다!” 
50년의 감옥생활, 이제는 교도소가 그의 모든 것이 되어 버렸기에 바깥생활을 상상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익숙하고 안전한 교도소를 떠난다는 것은 두려움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브룩스는 마침내 교도소를 떠난다. 교도소에서 마련해 준 임시거처 복지시설에서 식료품을 담는 일을 한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것은 그에게 도무지 맞지 않았다. 사고를 쳐서라도 교도소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노인이 되어 그럴 용기조차 없었다. 결국 교도소 밖의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스스로 목을 매어 생을  마감했다. 자유가 엄청 중요하고 좋은 것이지만 그것을 누린다는 것은 단순하지 않다. 

어제로 우리는 광복64주년을 맞았다. 
36년 동안의 그 지긋지긋하던 일본의 치하에서 벗어나 자유 대한민국국민으로 산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감격스러운 축복이었는가! 그런데 만약 64년 전으로 돌아가서 또다시 일본의 속국으로 살 수 있겠는가? 결코 그럴 수 없다. 

그런데 이와 같은 일들이 현실에서는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 놀랍지 않을 수 없다. 
오늘 말씀은 이 사실을 말하고 있다. 
갈라디아5:1이다. 다같이 함께 큰 소리로 읽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히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매지 말라.”

갈라디아교회는 바울사도가 1차 전도여행 도중 세운 교회이다.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구원을 받은 사람들이 이 교회를 세웠다.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감격과 긍지와 자부심으로 하나님을 섬기며 살았다. 그러나 이들의 삶에 영적인 도전이 다가 왔다. 
사도행전15:1 말씀이다. 
“어떤 사람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 

이 일로 인하여 갈라디아교회의 믿음이 뿌리 채 흔들리기 시작했다. 
갈라디아5:7말씀이다. 
“너희가 달음질을 잘 하더니 누가 너희를 막아 진리를 순종하지 못하게 하더냐?”

믿음이 흔들리고 있는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에게 올바른 믿음의 길을 가르친다. 

첫째, 얻은 자유의 소중함을 알아야 한다. 
 
갈라디아5:1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다.”
구원받은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이 있다.  
우리를 자유롭게 하기 위하여 주 예수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의 소중함을 아는 일이다.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인간의 몸으로 세상에 오셨다. 
하나님의 인간되심은 그 자체가 사랑의 극치이다. 가끔 장애체험을 하는 프로그램이 있다. 성한 사람이 장애인이 되어 잠시나마 함께 살아보는 것이다. 그것이 얼마나 불편한 일인지는 경험해보지 않으면 알 수가 없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불완전한 인간의 몸으로 세상에 오셨다. 
그리고 온갖 모욕과 고난을 다 받으셨다. 
마침내 인간의 죄 값을 다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죽으셨다. 
여기까지 주님이 저와 여러분을 위하여 하신 일이다. 
로마서6:23말씀이다.  
“죄를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라.”
갈라디아1:4말씀이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자기 몸을 주셨으니”

할렐루야!
우리가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생각해보면 너무 쉽게 얻은 축복이다. 
돈으로 된 것도 아니고, 노력으로 된 것도 아니고, 누구의 빽으로 된 것도 아니다. 오직 하나 예수그리스도의 행하신 이 일의 은혜로 얻은 것이다. 
그러므로 쉽게 얻었기 때문에 소홀히 여길 수 있다. 대개 복권당첨이나, 도박으로 얻은 재물이 헤프게 낭비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한다. 십자가의 피 값의 소중함을! 
구원받기 전의 내 죄를 정직하게 인정하고, 나를 구원하신 십자가의 은혜를 정확하게  알게 되면 믿음생활에 상당한 진전이 있을 수 있다.  

갈라디아2:16이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우리도 그리스도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기억하라.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의로워진 것은 율법을 지킨 노력으로 얻은 것이 아니다. 
만약에 그 노력으로 얻은 것이라면 언제 다시 떨어질는지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우리의 의로움은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은 은혜이다.  
찬송가268(202)이다.
1.“죄에서 자유를 얻게 함은 보혈의 능력, 주의 보혈! 
시험을 이기고 승리하니, 참 놀라운 능력이로다. 
(후렴)
주의 보혈 능력 있도다. 주의 피 믿으오. 
주의 보혈 그 어린양의 매우 귀중한 피로다.”

우리는 부모님의 은혜를 기린다. 노래한다. 
그러나 부모의 진정한 사랑을 알고 감사할 수 있을 때에는 한 참 후에 일이다.  
작가 신경숙씨의 소설 “엄마를 부탁해”에서 이 이야기를 읽을 수 있다. 
엄마의 수고, 엄마의 눈물, 엄마의 고독을 알 때 비로소 효도가 시작된다.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알 때이다. 그 값을 알아야 한다. 
 
둘째, 자유의 진리 위에 굳게 서야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라.”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를 속여서 선악과를 먹게 한 사단이다. 
유대광야에서 금식하며 기도하시는 예수님을 시험하던 사단이다. 
이제는 택한 자라도 넘어뜨리려고 우리를 시험하려고 교묘하게 다가온다. 

갈라디아교회 성도들에게는 율법과 할례라는 무기를 가지고 달려들었다. 
“예수 믿는 것 당연히 믿어야 한다. 그러나 그것만 가지고는 안 된다. 모세를 통하여 주신 소중한 축복인 율법을 지켜야 하고 할례를 행하여야 거룩한 백성이 된다.”
이 말은 처음 신앙생활을 시작하는 사람들에게는 엄청난 혼란을 가져다주었다. 

그러므로 바울사도가 전한 복음의 진리에서 시작한 믿음이 흔들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 일에 대하여 갈라디아5:11에는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다. 
“형제들아 내가 지금까지 할례를 전한다면 어찌하여 지금까지 박해를 받으리요. 그리하였으면 십자가의 걸림돌이 제거되었으리라.” 
그렇다.

만약에 바울 사도가 할례를 함께 행해야 구원을 받는다고 전하였으면 유대인들에게 박해를 받아야 할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할례를 아무리 행하여도 그것으로는 구원받을 사람이 없다. 율법으로는 사람이 죄인이라는 사실 밖에는 깨닫게 하신 것이 없다. 

1919년부터 1945년까지 36년 동안 일본의 다스리심을 받았을 때 처음부터 친일파들이 많이 등장하지는 않았다. 최근에 친일파 후손들의 재산문제를 다루는 한 분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1930년 이후에 적지 않은 분들이 일본에 협조하는 방향으로 전환하였다는 것이다. 도저히 독립의 기미는 보이지 않고, 일본의 기세는 갈수록 거세지는 가운데 돌아서게 되었다는  말이다. 
거기 우리 선조들의 아픔이 얼마나 컸겠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오늘도 사탄은 우리를 공격한다. 
우리의 믿음을 떨어지게 하고 시험에 들게 하고 교회를 혼란스럽게 한다. 
싸움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무장 해제할 시간이 아직도 이르다. 
기독교를 모욕한다. 기독교인들의 추태를 들어나게 만든다. 
이런 자들이 있는데도 예수 믿겠냐고 다그친다.  

그렇다. 
세상을 바라보면 우리를 낙심시킬 요인들이 너무나도 많다. 
교회도 예외가 아니다. 교회는 본질적으로 거룩하고 완전한 성령의 공동체이다. 그러나 현실교회는 그렇지 못하다. 불완전하고 세속적인 모습이 있다. 그래서 문제가 있다. 그런데 실수를 용납하지 않으려고 한다. 나의 실수에는 관용하면서 남의 실수는 큰 문제로 여긴다. 
“내가 하면 로멘스이고, 다른 사람이 하면 스캔들이라고 말한다.”

사람들의 실수 때문에 오직 주님만 바라보고 십자가를 붙들고 나아가야 한다.   
오직주님만 바라보아야 한다. 십자가만 붙들어야 한다. 인간은 누구나 죄인이기 때문에 그들의 허물을 들추어내기 시작하면 정죄를 당하지 않을 사람이 별로 없다. 
교회 예배당 중심에 십자가를 세우듯, 각자 믿음의 중심에 십자가를 세워야 한다. 
사람들의 말은 시시각각으로 변한다. 해석도 상황에 따라 변한다. 영원히 변치 않는 진리, 성경말씀만 붙들어야 한다. 그리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아야 한다. 

갈라디아5:7의 경고를 들어보라. 
“너희가 달음질을 잘 하더니 누가 너희를 막아 진리를 순종하지 못하게 하더냐?”
누가 당신의 성장하는 믿음을 막고 있는가? 
무엇이 당신의 달음박질에 걸림돌이 되고 있는가?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 중에 유익한 사람이 있는가하면 그렇지 못한 사람이 있다. 
만남으로 오는 손익을 계산해 볼 필요가 있다.  

내 믿음과 삶에 해를 끼치는 사람이라면 단호하게 정리할 필요가 있다. 
갈라디아5:10이다.
“나는 너희가 아무 다른 마음을 품지 아니할 줄을 주 안에서 확신하노라. 그러나 너희를 요동하게 하는 자는 누구든지 심판을 받으리라.”
갈라디아5:12이다.
“너희를 어지럽게 하는 자들은 스스로 베어버리기를 원하노라.”

셋째, 과거를 청산하라. 퇴로를 차단하라고 하신다.   

갈라디아5:1말씀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여기서 세 번째 주는 교훈은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는 것이다.  
이 말은 다시 종의 멍에를 메어야 할 경우가 생긴다는 것을 전재하는 말씀이다. 
갈라디아교회를 향한 바울사도의 말씀은 단호하다. 

갈라디아3:1-3말씀이다.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내가 너희에게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혹은 듣고 믿음으로냐?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그렇다. 
우리 믿음의 삶이 여기서 한계를 경험한다. 
삶의 변화이다. 
예수 믿고 신앙의 삶을 살면서 하루아침에 삶까지 변화가 되면 얼마나 좋겠느냐?
더욱이 처음 신앙생활에는 신선함이라도 있었는데, 시간이 가면서 그 신선함마저 시들해지고 나면 교회생활을 하는 것 이외에 모든 것이 다시 원점으로 돌아 간 듯한 내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낙심한다. 

히브리서10:38,39말씀이다.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우리는 뒤로 물러가 멸망할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 
  
예수믿음으로 구원받은 사람들은 실로 다시 뒤로 돌아갈 수 없는 존재이다. 
고린도후서5:17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요한복음3:5-8에는 거듭난다고 했다. 
우리는 시계의 시간은 뒤로 되돌릴 수 있지만, 지나간 시간은 다시 되돌릴 수 없다. 
 
우리는 그 동안 일본에 대하여 좋지 못한 감정을 가지고 있는 부분이 있었다. 
왜 2차대전이 끝난 후에 독일처럼 깨끗이 자신들의 패배와 잘못을 인정하고, 전쟁의 피해를 준 나라들에 대하여 보상하고 신사적이 되지 못할까? 

그런데 1999년에 미국 MIT공대 역사학과 교수 존 다우어가 쓴 “패배를 껴안고”라는 책에서 그 이유를 읽을 수 있었다. 그것은 전쟁에서 승리한 맥아더의 영향이었다는 것이다. 1945년 8월 15일 정오쯤, 당시 일본인들에게 평생 잊지 못할 일이 일어났다. 왕좌에 으른 뒤 ‘신민’들에게 직접 뭔가를 말한 적이 한번도 없었던 천황 히로히토가 라디오 방송으로 육성을 공개한 것이다. 마흔 네 살의 군주는 방송에서 ‘항복’이라든가 ‘패배’라는 단어를 절대 입에 올리지 않았다. 

“적은 수많은 무고한 자들을 죽이고 불구로 만드는 잔혹한 폭탄을 새로이 사용했으며 중상자의 수는 헤아리기도 힘들 정도이다. 전쟁을 계속 수행함은 우리 민족의 절멸 뿐 아니라, 전체 인류문명과 파괴로 이어질 것이다.” 
일본의 종전은 항복이 아니라, 나라와 인류를 구하기 위한 고귀한 결단아라고 하였다. 그리고 맥아더는 후에 천황을 평화의 애호자로 둔갑시켜 면죄부를 주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일본에서 신사참배문제가 계속되는 까닭은 그들을 스스로 전범이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임을 알 것 같다.   
회개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국제관계도 사실 전혀 새로워질 수 없는 것이다. 
그들은 과거를 청산하지 않았다. 이것이 아직도 정신대 문제를 깨끗이 청산하지 못하는 까닭이다. 

이스라엘이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방법은 전쟁과 정복이다. 
이 과정에서 하나님은 대단히 단호한 전쟁을 명령한다. 적군의 흔적을 남기지 말라는 것이다. 심지어 노획물, 탈취물까지 가지고 오지 말라고 하셨다. 이것은 하나님의 잔인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두 가지를 염두에 두신 명령이었다. 
하나는 전쟁의 목적은 오직 승리에 목적을 두고 하는 일이지, 노획물, 탈취물에 관심을 두면 눈이 멀러진다는 것이다. 

아간의 범죄를 중히 다스린 이유가 여기에 있다. 
다른 한 가지는 적들의 잘못된 종교적인 습관이나 전통문화의 영향으로 타락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사용하던 물건을 깨끗이 청산하도록 명령하신 것이다. 
허락하신 새 땅에 들어가서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기 위하여 지난 과거의 잔재를 깨끗이 청산하기를 원하셨던 것이다.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았다고 하는 분들 가운데도 가끔 신앙의 이중성을 가는 경우를 보게 된다. 
하나님이 축복하시면 반드시 좋다는 것을 안 믿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기왕이면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으면 더 좋다는 식이다.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과거의 습관들을 청산하지 못하고 계속 이어가는 분들이 있다. 
이를테면 대선 후보 중에는 승리를 위하여 부모의 묘를 명당자리로 이장하기도 한다. 

사무실을 옮기거나 새 건물을 짓고 난 다음에는 고사를 지내기도 한다.   
이사 갈 방향, 이사할 날을 택일하기 위하여 점을 치기도 한다.  
자녀들 결혼을 위해 선을 보고는 궁합이 맞는지에 관심한다. 
조상신을 잘 모셔야 복을 받는다는 생각에 제사를 정성껏 모시기도 한다.   
 
홍해를 건너게 하신 이유를 아는가? 
다시는 애굽으로 되돌아가지 못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뜻임을 알아야 한다. 
교회에서 세례를 교회의 회중가운데서 공개적으로 받게 하는 이유를 아는가? 
성도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자녀로 살겠다는 분명한 결단을 촉구하는 것이다.  

다시는 종의 멍에를 매지 말라.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자유의 소중함을 잊지 말라. 
자유의 진리 위에 굳건하게 서라. 
어떤 경우에도 과거로 돌아가지 말라. 
오직 주님만 바라보고 앞으로 전진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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