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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마 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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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마 6:13) 
 
 
주님께서는 인간의 필요를 세 가지로 요약하여 기도하도록 가르치셨습니다. 일용할 양식과 죄 사함과 유혹 문제의 해결인데, 뒤쪽으로 갈수록 인간의 삶에서 보다 근원적이고 내면적인 문제입니다.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라는 가르침은 우선적으로 성도의 삶에 ‘시험이 있음’을 말해줍니다. 인간 타락 이전의 에덴동산조차 시험은 있었습니다. 흔히 중생을 체험하고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성도들은 이 땅에서 더 이상 시험 받지 않고 살아갈 것처럼 착각합니다. 하지만 이미 하나님 나라가 임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나라는 아직 아니 완성되었음을 생각해야 합니다. 

아담을 시험했던 사단은 예수님조차 시험하려 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결정적으로 패배하였으나 그 영향력을 아직은 완전히 상실하지 않았습니다. 시험은 완성된 천국, 즉 새 하늘과 새 땅이 임할 때라야 더 이상 있지 않을 것입니다.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는 시험 받는 환경에 계속 머물러 지내면서도 시험 속으로 빠져들지 않게 해달라는 뜻이 아닙니다. 시험에 저항할 수 없는 자신의 연약성을 철저히 인정하고 아예 시험받는 영역으로 들어가는 일조차 없도록 그런 환경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게 해달라는 의미입니다.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역시 시험에 맞서서 악을 극복해 나갈 수 있는 힘을 달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스스로의 힘으로는 도무지 악에서 빠져나올 수 없음을 인정하고 오직 하나님의 구원을 의뢰하는 태도입니다. 시험과 관련하여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기도는 어떤 성도라 할지라도 감히 ‘시험’과 관련하여 자신을 신뢰하지 않도록 합니다.

오늘날의 문화는 인간을 신뢰하도록 부추기며 인간의 연약성보다 강인함을 말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중 누구라도 자신을 자만하거나 장담하지 않아야 합니다. 성경은 나보다 더 나의 연약성을 정확하게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고 장담한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닭 울기 전에 세 번 주님을 부인했습니다. 예수님을 저주하기까지 했지요(마 26:31-34, 69-75). 그 후 베드로는 자신의 서신서에서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벧전 5:8)라고 권면했습니다.

누가 시험에 들까요? 누구라도 시험에 들 수 있습니다. 다윗은 그리스도의 그림자라 할 만큼 신앙이 좋은 인물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도 목욕하는 밧세바를 보고는 시험에 들었습니다. 그녀와 간음하고 그녀의 남편을 암살하는 사악한 일을 행했지요. 연약한 사람만이 아니라 매우 강인해 보이는 사람조차 시험에 빠지는 일들을 우리네 삶의 현장에서 종종 목격하곤 합니다. 

성경은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 10:12)고 경고합니다. 어느 누구도 시험 문제에 있어서는 예외가 있을 수 없습니다. 자만하지 않아야 합니다. 일용할 양식과 죄 사함 문제뿐만 아니라 시험문제에 있어서도 성도는 철저히 하나님만을 의지해야 합니다.

무엇이 시험거리가 될까요? 무엇이든 시험거리가 될 수 있습니다. 사단은 정확하게 약점을 공격합니다. 돈에 약한 자는 돈으로, 정욕에 약한 자는 정욕으로, 명예에 약한 자는 명예로 유혹합니다. 하와는 아담에게 주신 최상의 선물이었습니다. 하지만 바로 그녀가 최대의 시험거리가 되었습니다. 요셉이 보디발의 집으로 인도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였으나 바로 그곳이 시험 장소가 되었습니다. 

히스기야는 기도의 응답으로 수명이 연장 되었으나 바로 그 기간 동안 시험에 빠졌습니다.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많은 은사들로 인해 오히려 시험을 받았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주신 최상의 은혜와 은사조차도 시험거리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무도 시험하지 않으시는 분이신데(약 1:13), 왜 사람들은 시험에 들까요? 사람의 내면 상태에 따라 똑 같은 환경이 복이 되기도 하고 시험거리가 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인터넷이 많은 유익을 주지만 내면 상태가 바뀌면 강력한 유혹의 수단이 됩니다. 시험과 관련된 간구(13)는 죄 사함과 용서에 관한 말씀 사이에 있는데요(12, 14), 

죄 사함의 은혜를 누리며 용서하는 내면은 주어진 모든 환경을 감사거리로 받게 합니다. 하지만 죄를 품고 있거나 용서하지 못하는 내면은 주어진 복도 시험거리로 만듭니다. 참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는 자에게 힘을 가진다는 것은 복이 되지만 복수나 욕망에 사로잡힌 자에게 힘은 오히려 시험거리가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삶에 모든 필요를 채워주십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채워 주셔서 그 자체로는 선하고 좋은 것이라 할지라도 우리 마음을 강하게 사로잡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이라 할지라도 시험거리가 될 수 있음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예를 들면, 신앙에 있어서 지성과 감성과 의지는 모두 중요합니다. 

그런데 지성의 매력에 사로잡힌 자에게는 지식이, 감성에 목말라하는 자에게는 감성적 체험이, 의지를 강화하는 자는 강한 의지가 시험거리가 될 수 있습니다. 지성이든 감성이든 의지든 하나님의 가르침인 성경의 말씀에 철저히 복종시키지 않는 한, 언제라도 사단은 그러한 것을 수단으로 시험으로 유도할 수 있습니다.

시험에 들지 않기 위해서 성도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예수님은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마 26:41)하셨습니다. 기도가 없으면 내면 상태나 죄악 된 환경에 대해 무신경해지고 방심하게 됩니다. 성도는 기도함으로써 거룩하시며 모든 것을 감찰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늘 자신을 성찰하면 깨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약점을 고백하고 시험 받을 수 있는 상태가 발생하지 않도록 기도할 필요가 있습니다. 배우자와 자녀들이 무엇에 쉽게 유혹되는지를 분별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한 몸의 지체들로서 서로의 약점들로 인해 “우리”가 시험에 들지 않도록 간구해야 할 것입니다.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라는 기도는 기도자의 책임 있는 행동을 요청합니다. 기도자는 보디발 여사가 유혹하는 현장에서 적극적으로 도피한 요셉처럼 할 수만 있다면 시험에 들게 할 수 있는 환경으로부터 피할 필요가 있습니다(창 39:10). 다윗은 옥상에서 아름다운 여인의 알몸을 훔쳐보는 자리에서 빨리 피했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 악한 환경에서 떠나기를 원치 않다가 시험에 빠졌습니다. 정욕에 약한 줄 알고서도 밤늦도록 홀로 인터넷을 사용한다는 것은 자기의 연약함을 인정하지 않고 과신하는 행위입니다. 유혹 받는 현장에 계속 머물러 있으면서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라고 기도 한다면 자기 마음을 속이는 일이 될 것입니다.

성경은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 4:23)고 말하고 있습니다. 할 수 있는 힘을 다해서 죄악 된 환경으로부터 피해야 하겠지만 그것만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습니다. 지구를 떠나 달에 간다고 해서 죄로 부터 마음을 지킬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죄를 피해 수도원으로 도피할지라도 죄는 수도원까지 따라갈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비옵는 것은 저희를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오직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요 17:15)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세상에서부터 분리되도록 기도하시지 않고 세상 속에서 구별되도록 기도하셨습니다.

성도 스스로 죄를 피할 수 있고, 마음을 지킬 수 있었다면 예수님의 이 기도는 필요치 않았을 것입니다. 죄가 관영한 가운데서도 성도가 보전되는 것은 성도의 경건한 노력 때문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기도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성경은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 4:6-7)고 말합니다. 마음과 생각을 지켜주시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에 속했으나 그 은혜는 가만히 있는 자에게가 아니라 구하는 자에게 주어집니다.

일용할 양식을 위한 간구는 오늘 하루 하나님 백성답게 살아가는데 필요한 모든 것과 관련됩니다. 죄 사함을 위한 간구는 지난 시간 하나님 백성답게 살지 못한 문제를 용서해 주시도록 요청하는 것과 관련됩니다. 시험과 관련된 간구는 앞으로 하나님 백성답게 살아가도록 보호해 주실 것과 관련됩니다. 

이처럼 현재와 과거와 미래의 모든 필요들을 간구하게 하신 목적이 무엇일까요? 성도가 부단히 기도해야 하는 까닭은 자아 완성이 목적이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함입니다. 어떤 이유로도 어떤 시간에도 하나님과의 교통함이 깨어져서는 안 되겠기 때문입니다.

주기도문의 송영(doxology)은 후대의 사본들에 등장합니다. 원래의 기도문에는 없었을 수도 있어서 괄호로 표시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내용은 기도문을 잘 요약해주며 성경 전체의 가르침과도 조화가 됩니다. “나라”는 하나님께 속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그분의 백성들이 만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분의 백성들에게 은혜로 주시는 선물입니다. 

또한 “권세”도 하나님께 속했습니다. 사단의 권세조차 하나님의 주권 하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권세를 넘어선 독립된 권세란 없습니다. “영광”도 하나님께 속했습니다. 인간은 내 세울 수 있는 아무런 공로도 없기 때문입니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습니다. “아멘.”

우리의 기도를 주기도문에 비추어 보면 언제나 철저하지 못함이 드러날 것입니다. 만일 온전한 기도를 준비해서 드리려고 한다면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그 날까지도 도무지 기도할 수 없을 것입니다. 현실적으로 성도는 현재 깨닫고 있는 수준에서 기도하되 담대히 기도해야 합니다. 자녀를 사랑하시는 아버지는 어린자녀의 어눌한 말을 통해서도 교통하시기 때문입니다. 

다만 유아상태로 머물러 있지 않고 자라가는 것이 필요하겠지요. 주기도문을 통해 주님께서 원하시는 기도의 수준이 어떠한지를 봅니다. 부족하더라도 담대히 기도하는 가운데 그 수준을 향해 나아가는 기도생활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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