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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령께서 인도하는 삶이 가장 복되다 (행 1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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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께서 인도하는 삶이 가장 복되다 (행 13:1~5)


오늘 여러분들 중에는 ‘안식월에서 돌아온 유목사가 과연 어떻게 변했을까?’ 궁금한 마음을 가지고 오신 분들이 많으실 것입니다. 저도 교회로 돌아오면서 깊이 생각했습니다. ‘나는 이 한달 동안 무엇이 달라졌나? 그저 쉬다가 가는 것만은 아닌가?’ 안식월을 떠날 때 모든 교우들이 한결같이 말씀하기를 “푹 쉬다가 오셔요!” “아무 것도 생각하지 말고 교회 일도 다 잊어버리고 푹 쉬세요!” 했었습니다. 그러나 정말 내가 그저 쉬다가 왔다고 하면 교인들이 너무 실망하지 않을까? 

제게 얼마 전부터 위기감이 생겼습니다. 사람을 만나는 것이 반가와야 하는데, 전화가 오면 겁부터 나고 사람들이 만나자고 하면 부담스러워지는 것입니다. 

최근에 받은 어느 목사님 메일 때문에 마음이 많이 아팠습니다.
“저는 목사님의 책을 읽고 목사님은 진실 된 목사님이실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또 한번 실망을 했습니다. 목사님의 책을 읽으면서 나 지신의 나약함을 회개하고 강팍함을 회개했는데... 배부른 목사의 말 속임이었을 수도 있다는 아픈 상처를 받았습니다. 

저는 목사님께 마구 흔들리는 저 자신의 목사로서의 정체성을 어떻게 하면 회복할 수 있을까 상담하고 싶어서 여러 번 전화를 하고 전화를 받지 않아 문자를 보내고... 이메일을도 보냈는데... 아무 응답이 없군요. 목사님은 참 바쁘신가 보네요. 목사님은 참 겸손하고, 예수님의 마음을 닮은 분이라고 생각했는데... 목사님도 여느 목사들처럼 말만 멋있는 것 같습니다. 지난 번 보낸 메일을 회수 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작년부터 많은 분들이 보낸 상담 메일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제게 답장을 드릴 힘이 없었습니다. 내용이 단순하지 않은 것이 대부분이고 너무 많은 메일이라 답장을 거의 포기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물론 제 어려움은 메일만이 아닙니다. 교회 안에서 담임 목사로서 해야 할 일과 교회 외부에서 말씀과 강의에 대한 요청과 지방 감리사로서 공적으로 수행해야 하는 일들, 게다가 최근 감리교 사태로 말미암아 어쩔 수 없이 참석하게 된 각종 모임 등 제 일정은 거의 공황 상태에 빠져있었습니다. 문제는 앞으로 형편이 더 나빠질 것이라는 것입니다.

분명히 심각한 문제가 생겼습니다. 제 사역과 삶을 점검해 볼 시간이 필요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형편에서 안식월은 주님의 소환 명령이었습니다. 주님께 모든 사역을 맡기고 예수님을 바라보며 지낼 시간을 가지라는 것이었습니다.
결론적으로 이 한 달은 제 사역과 삶의 새로운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제 삶과 사역을 철저히 성령의 인도하심에 맡기게 하시는 훈련을 갖게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저를 통해서 역사하신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실제로 경험한  한 달이었습니다.


저는 설교 준비를 위하여 오늘 본문을 읽으면서 하나님께서 안식월을 갖는 저에게 주시는 응답이라고 느꼈습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메시지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사도 바울을 통해서 이방인 선교가 본격적으로 시작이 될 때, 이방인 선교의 중심인 안디옥 교회가 사도 바울을 순회 선교사로 파송하는 부분입니다. 사도 바울과 바나바가 이방인 선교를 위해서 순교 선교사로 피송을 받는 장면이 오늘 본문인데, 본문을 읽으면서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성령님께서 너무나 구체적이고 분명하게 말씀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안디옥 교회가 성령의 실제적인 인도하심을 받는 장면입니다.
[2절]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이르시되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오늘 이 본문 말씀을 읽으면서 여러분은 어떤 느낌을 받으십니까? 안디옥 교회 지도자들이 성령님이 하시는 말씀을 다같이 들은 것입니다. 한 사람이 들은 것이 아닙니다. 교회 지도자들이 다 성령님이 그들에게 지시하신 말씀을 들었습니다. 바나바와 바울을 따로 세워서 그들을 순회 선교사로 파송하라. 그런 지시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안디옥 교회는 사람들이 회의해서 어떤 일을 결정하는 교회가 아니라, 성령님께서 구체적으로 지시하시는 교회였던 것입니다.
성령께서 친히 말씀하시는데 누가 감히 아니라고 하겠습니까?
[3절]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 
[4절] 두 사람이 성령의 보내심을 받아 실루기아에 내려가 거기서 배 타고 구브로에 가서 
안디옥 교회의특징은 성령님께서 정말 실제적이고 구체적으로 말씀하시고 인도하신 교회였다는 것입니다.

사실 안디옥 교회는 정말 하나 되기가 참 어려운 교회였습니다.
1절 말씀에 안디옥 교회 지도자들의 명단이 나오는데, 같은 부류의 사람이 한 사람도 없습니다. 맨 먼저 나오는 바나바는 부자입니다. 밭을 팔아 교회에 바쳤던 사람이었고, 시므온과 루기오는 출신은 달랐지만 흑인이었고, 마나엔은 헤롯 왕의 젖동생이라 귀족 출신이었습니다. 그리고 사울은 철저한 유대인으로 바리새인 출신입니다. 하나가 되기에는 너무 다양한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게다가 그들이 결정해야 할 일이 교회로서는 너무나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자신의 교회에서 가장 실력있고 영향력이 있는 바나바와 바울을 순회 선교사로 아낌없이 내어 놓은 것입니다. 우리 교회로 말하면 담임 목사인 저를 여러분이 순회 선교사로 파송하라. 이런 문제로 의논하게 될 때 의견이 쉽게 하나가 된다는 것이 그게 더 이상한 일입니다. 

그런데 안디옥 교회는 그 문제를 분명하게 결단하고 순종했습니다. 그 이유는 성령님이 그렇게 하라고 분명히 강력하게 지시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런 문제를 다룰 때, 조그만 갈등도 없이 금식하고 기도하여 안수하고 파송할 수 있다는 것은 성령의 강력한 역사가 아니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여기에 우리의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제게 주시는 메시지가 있었습니다.  안디옥 교회는 성령님이 그렇게 구체적이고 분명히 지시하시고 말씀하셨는데, 왜우리에게는 그렇게 하지 않으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지금도 성령님께서 우리 교회에 되어지는 일에 대하여 지시하는대로 하면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주님의 뜻을 이해하는 것이 참 어려운 일이지 않습니까? 여러분 개인 가정일이나 여러분 일터의 어떤 문제, 또 교회 공동체의 모든 부서의 일들이 하나같이 주님의 뜻을 알기가 참 어렵지 않습니까? 

성령님께서 우리에게는 안디옥 교회처럼 분명히 역사하지 않으시는 것 같다는 것입니다. 성령님이 안디옥 교회처럼 역사하신다면 무엇이 문제이겠습니까?교회 일은 일사천리로 되어질 것이고 하나님의 영광은 놀랍게 드러날 것입니다. 

그러나 깊이 묵상하는 중에 그렇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성령님께서는 안디옥 교회 뿐 아니라 지금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말씀하시고 계시는 것을 알았습니다. 
여러분, 안디옥 교회가 받은 성령의 인도가 무엇입니까? “사랑하라” “하나 되라” “선교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 내용이 모르시는 내용입니까? 

그 말씀을 처음 들은 사람이 있으십니까? 그 말씀을 우리 모두가 다 듣고 있습니다. 못 들었다, 몰랐다고 하실 분이 누가 있습니까? 여러분, 그것을 어떻게 아셨습니까? 성령님께서 여러분에게 깨닫게 하신 것입니다. 안디옥 교회 뿐만이 아니고 지금 우리에게도 성령님께서 원하시는 일들을 분명하게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하반기 전 교인 필독서 한 권을 추천합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책을 쓰신 켄블랜차드의 [사랑으로 소문난 교회] 책입니다. 이 책의 내용은 어떻게 하면 교회가 프로그램이 아니라 사랑으로 굴러갈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교회 공동체 안에만 고여 있지 않고 교회 밖으로까지 사랑이 흘러넘치게 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우리의 이웃을 단지 전도 대상자로만 볼 것이 아니라, 진심 어린 사랑의 대상자로 볼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갈등과 반목의 현 시대에서 교회가 화해와 사랑의 메신저가 될 수 있을까? 하는 주제를 다루면서, 따뜻한 유머와 날카로운 통찰력을 바탕으로, 교회 안에 고여 있는 사랑을 밖으로 흘러넘치게 하는 성경적 비결을 공개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 책을 읽으면서 성령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교회가 사랑으로 소문난 교회가 되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마 여러분이 이 책을 읽으시면 성령의 음성을 들으신다는 느낌을 받으실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성령님은 분명하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여러분 심령도, 여러분 가정도, 교회 공동체 안에도 사랑하고 하나가 되라고 하시는 말씀을 지금도 성령님은 분명히 하고 계십니다.

저는 이번 안식월 동안 귀한 선교사님 한 가정을 만났습니다. 그 선교사님은 무섭게 기독교를 박해하는 중동의 한 나라를 마음에 품고 있는 분이었습니다. 그 분은 이제 연말쯤 그 나라로 갈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순교도 각오하고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증거되고 교회가 세워지는 일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자신들의 순교를 원하신다면 그렇게 하겠다고 준비했습니다. 
  
그러나 13살 된 아들과 9살 된 딸이 마음에 걸렸습니다. 그래서 순교할 상황에 대비해야 하겠다는 생각에서 아이들에게 순교의 축복에 대하여 계속 강조하였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큰 아들이 불쑥 이렇게 얘기하더랍니다. “아빠, 걱정하지 마. 하나님께서 아빠가 순교하게 해 주실 거야!” 그 말을 듣고 너무나 당황하였답니다. 이 아들은 아빠가 그렇게 좋아하는 순교를 하나님이 허락해 줄 것이라고 아빠를 격려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선교사님들 안에 역사하시는 성령의 말씀은 우리가 너무나 많이 듣고 있습니다.

성령께서 안디옥 교회에만 역사하고 계신 것이 아닙니다. 지금 우리에게도 놀랍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허전합니까? 성령께서 직접 내게 말씀하고 계시다는 느낌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오늘 본문 말씀에서 읽은 것 처럼 성령께서 그렇게 직접 말씀해주실 수는 없을까? 나도 그렇게 성령의 인도하심을 직접 들을 수는 없는 것일까? 

여러분.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그렇게 분명히 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성령께서는 우리를 막연하게 인도하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성령님의 인도하심이 막연하다고 생각이 드는 것이지요? 성령의 실제적인 역사가 우리 삶에는 분명히 나타나지 않는다고 여겨집니까? 
그것은 우리가 성령님께 온전한 믿음과 순종으로 반응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은 우리 안에 계십니다. 단 우리가 어떤 물질을 보고 만지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보고 만질 수 없을 뿐 입니다. 이것이 많은 사람들을 답답하게 만듭니다. 그런 성령님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때때로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우리 인생을 맡기려고 할 때 마음에 주저함이 오고 두려움이 오고 그리고 의심이 생기는 것입니다. ‘성령님이 정말 내 인생을 책임져주실 수 있을까? 성령님이 정말 우리의 길을 인도하시는 것일까?’ 

그런데 여러분, 너무나 놀라운 약속이 나와 있습니다. 우리가 정말 성령님이 우리와 함께 계심을 믿고 이제는 더 이상 어떤 일도 두려워하지 않고 염려하지 않고 그리고 성령님을 진정으로 환영하고 사랑하면서 나아가면 성령님은 정말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과 우리를 인도하시는 것을 드러내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음과 사랑으로 성령님께 반응하면 우리는 성령께서 정말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를 인도하시는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됩니다.

요 14:15~17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우리가 이와 같은 놀라운 일을 사람들 사이에서도 경험합니다. 우리는 가족이나 친구에게서 특별한 느낌을 받습니다. 우리가 힘들 때, 위기 때, 고통스러울 때 가족과 친구는 얼마나 위로가 되고 큰 힘이 되는 지 모릅니다. 그것은 서로 사이에 믿음과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가족과 친구 사이에 있는 끈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너무나 실제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눈에 보이지는 않습니다. 믿음과 사랑으로만 경험됩니다. 

여러분, 여기에 있는 사람들 중 누가 여러분의 친구이고 가족인지 겉으로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느낍니다. 내 가족이 옆에 있고 내 친구가 저쪽에 있는 것을 나는 느낍니다. 여러분이 성령님이 막연한 이유는 성령님에 대한 믿음과 사랑에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정말 성령님을 믿고, 믿는다는 말을 더 이상 성령님이 나와 함께 계시는 것을 믿고 두려워하고 염려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내가 성령님을 환영하고 사랑하게 되면 성령님은 나와 함께 계시는 것이 가족이나 친구가 내게 위로가 되고 힘이 되는 것과 정말 비교할 수 없을만큼 내 삶을 지켜주는 힘이시고 그리고 내 길을 인도하는 정확한 인도자라는 사실을 놀랍게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안식월 기간 중 감사한 것은 프랭크로바크 선교사(Frank Laubach)에 대하여 알게 된 것입니다. 그 분은 1884년생이신데, 달라스윌라드, 필립얀시, 맥스루카도 같은 분들이 강력하게 추천한 분입니다. 
  
그는 필리핀의 외로운 선교지에서 사역하셨던 선교사로서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사람들에게 읽고 쓰는 법을 가르쳤던 분으로 세계 문맹퇴치선교회 (World Literacy Crusade)를 설립하였고, 미국 우표에 등재되신 유일한 선교사이고 정치적 지위 없이도 세계 2차대전 후 미국의 외교 정책에 적잖은 영향력을 미쳤던 분입니다.  그가 이러한 삶을 살게 된 것은 그가 항상 하나님의 임재하심 안에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도 45세가 될 때까지는 신앙 생활에 만족을 느끼지 못하고 고민하였습니다. 그도 우리가 가졌던 비슷한 신앙적인 갈등을 갖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정말 우리의 모든 삶에 함께 하실까? 순간순간 하나님의 임재 안에 사는 것은 가능할까? 숨 쉬고, 생각하고, 밥을 먹고, 직장에 나가 일을 하고, 쉬고, 운동을 하고, 집에 돌아오는 자동차 안에서 하나님과 함께 수 있을까? 잠들 때 그 분의 품 안에 잠들고, 다시 그 분의 임재 안에 깰 수 있을까? 하나님과 24시간 함께 하고 있다는 친밀함을 과연 느낄 수 있을까? 
  
이렇게 갈등하다가 1930년 그는 남은 인생을 이 질문의 답을 찾는 실험으로 삼으리라! 결심하게 됩니다.
1월부터 그는 한 가지 실험을 했습니다. 분마다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께서 인도해 주시기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아침에 잠에서 깨어난 순간, 내면의 소리에 의식적으로 귀를 기울이는 것부터 시작했다. 끊임없이 “아버지, 뭐라구요? 제가 말하기를 원하세요? 제가 지금 이 일을 하기를 원하세요?" 발걸음마다 묻는다. "하나님, 지금 뭘 바라시죠? 
  
처음에는 쉽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나는 물살을 거꾸로 헤쳐 올라가기 위해 노를 젓는 사람 같았다. 나는 차분하게, 그러면서도  끊임없이 하나님께 귀를 기울였고, 쉬지 않고 다른 사람들을 위해 기도했으며, 사람들의 옷이나 신체, 또는 마음이 아니라 그들의 영혼을 바라보았다.”
처음에는 30분에 한 번씩 하나님을 바라보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일 분에 한 번씩 하나님을 마음에 떠올리는데 성공했고, 그 간격은 점점 줄어 들었다.
  
1930년 기록한 프랭크로바크 선교사님의 일기가 맥스루케도의 「예수님처럼]에 일부 실려 있습니다. 그 중 몇 구절을 읽어드리겠습니다.
1930.01.26. 매 순간 하나님을 느끼고 있다. 지금 타자기를 두드리고 있는 이 손가락도 하나님이 인도해 주시기 바란다. 내가 걷는 걸음을 통해서도 하나님이 흘러나오기 바란다.
1930.03.01. 보이지 않는 한 손이 내 손을 잡아 이끄시고 또 다른 손이 앞에서 내 길을 예비하신다는 의식이 내 안에서 날마다 자라가고 있다.

1930.04.18. 하나님과의 교제의 참맛을 느끼자 그분께 합당치 않은 모든 일들이 역겹게 느껴졌다. 
오늘 오후 하나님의 임재 의식에 강하게 붙들리면서 말할 수 없는 기쁨을 맛보았다. 
전에는 모르던 것이다. 

이런 경험은 이제 한 주에 여러 번씩 찾아온다. 
이것을 경험하고 나자 모든 더러운 것들이 그렇게 싫을 수가 없다. 
1930.05.14. 매 순간 끊임없이 하나님을 만나며 하나님을 내 생각의 주제로 삼고, 내 대화의 짝 삼는 것, 이것이야말로 평생 접해 보지 못한 가장 놀라운 일이다. 
점점 된다. 물론 아직은 한나절도 못 간다. 그러나 언젠가는 하루 종일 그렇게 될 날이 있을 줄 믿는다. 

1930.05.24. 요즘은 걱정이 전혀 없고 잠도 잘 잔다. 거의 온 종일 기쁨에 사로잡혀 있다. 
거울을 봐도 내 눈빛과 얼굴에 새로운 광채가 있다. 어떤 일에도 더 이상 조급한 마음이 없다. 모든 일이 잘 된다. 
1930.06.01. 오 하나님, 하나님은 더 이상 낯선 분이 아닙니다! 주님은 온전히 제 안에 계십니다. 여기에... 

  
정말 믿고 성령 하나님은 내 안에 계시다는 사실, 그리고 그는 항상 하나님을 마치 육신으로 같이 있는 어떤 한 사람을 보듯이 그렇게 보기를 실험했습니다. 계속 예수님을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물었습니다. 주님께 계속 대화를 시도했습니다. 그리고 6개월이 지나서 하나님이 정말 자신과 함께 계시다고 하는 놀라운 임재하심 속에 살게 된 것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프랭크로바크는 수도원에 살았던 것이 아닙니다. 바쁜 일상 생활을 하면서도 주님과 신비로운 만나며 동행할 수 있음을 증명했습니다. 그러기를 6개월 만에 하나님께 온전히 자신을 의지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는 교육대학 학장을 역임했고, 신학교 설립을 도왔으며, 아프리카 부족들 속에서 사역했습니다. 가난한 이들을 섬겼으며, 문맹 퇴치를 위해 전 세계를 누비고 다녔습니다.
필리핀 외로운 선교지에서 하나님은 프랭크로바크를 그리스도를 위한 세계 정치가요 그 분의 대변자의 지위로 들어올리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성령님의 인도를 받는 자가 가장 복된 자입니다.
성령의 인도를 받는 교회가 가장 복된 교회입니다.
여러분, 정말 믿음으로 그리고 성령님을 사랑하므로 주님을 바라보게 된다면, 우리의 삶 속에서 주님은 분명하게 우리의 삶을 인도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다 경험하게 됩니다.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만큼이 곧 우리의 믿음의 수준입니다. 내가 예수를 믿고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내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것이 막연하다면 아직 내 믿음은 어린아이의 믿음인 것입니다. 그냥 사람의 노력으로 열심히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렇게 되기를 원하시지 않습니다. 우리를 인도하시는 성령님은 정말 살아계신 주님이십니다. 


 저는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믿으면서도 매번 갈등이 있습니다. 성령님은 눈에 보이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이번 안식월을 갖는 것도 망설임이 많았습니다. 제가 안식월을 가지면서도 처음에는 어떻게 한 달을 보내야 될지 상당히 갈등이 심했습니다. 허둥지둥하기도 하고 생각이 바로 잡히지도 않았습니다. 한 달을 쉬게는 되었는데, 우리 교인들 중에 한달의 안식월을 가질 수 있는 분이 몇 분이나 되십니까? 그런데 저는 그런 특별한 복을 받았습니다. 내가 안식월을 갖는 것이 과연 성령께서 인도하심일까? 그런데 문제는 한 달이 지나고 난 다음에 제가 아무 것도 제게 도움이 되지 않고 그냥 놀고만 왔다고한다면 좇겨나지 않을까? 한달 동안 쉬라고 허락은 받았지만 끝날 때가 문제였습니다.

안식월을 가지면서 처음에는 이것을 해야 하나, 저것을 해야 하나, 헛되게 보내면 어떻게 하나? 긴장하고 염려하고, 조급했습니다. 방학을 시작하는 학생처럼 계획만 잔뜩 세웠습니다. 책도 보아야 되겠고 기도도 많이 해야 되겠고. 하여튼 한 달 뒤에는 역사가 일어나야 되지 않겠습니까? 제 손에서 불이 나오든지. 이런 강박관념이 제 마음 속에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더 힘든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것을 기뻐하시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끊임없이 노력하고 노력하는 것은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하셨습니다.

주님은 안식월을 어떤 계획을 세워서 보내려 하지 말고 예수님을 계속 바라보라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다 맡기고 지내도 한달 뒤에 보람되었다고 느낄 수 있을지 확신이 없었습니다. 오직 성령님을 믿고 맡길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 다 맡기기로 했습니다. 주님이 하십시오. 제가 읽어야 할 책이 있으면 말씀해 주시고, 제가 만나야 할 사람이 있으면 말씀해 주시고, 제가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되는지 다 주님이 지시해 주십시오. 주님이 인도하시는대로 하겠습니다. 그러면서도 마음이 불한했습니다. 주님이 인도 안해주시면 어떻게 하나? 정말 주님이 인도해주실까? 

제가 제주도에 가서 한달을 보냈습니다. 제주도에 가서 어촌 마을에 방 하나를 구해서 보냈습니다. 
저희들이 제주도에 도착한 다음 날이 저희 결혼 기념일이었는데, 마을 교회 새벽 기도회를 갔습니다. 그런데 새벽 기도회 시간에 목사님께서 택하신 설교 본문이 에베소서 5장 21-33절이었습니다. 부부에게 주시는 말씀이었습니다. 깜짝 놀랐습니다. 우리 결혼 기념일에 맞춘듯한 본문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순간 성령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의 결혼 기념일도 준비해 주셨음을 깨달았습니다. 제 마음 속에 한 달 동안 주님의 인도하심을 완전히 신뢰할 수 있는 믿음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정말 한 달을 주님께 맡길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에게도 동일하게 하십니다. 성령님은 지금 우리와 같이 계시고 여기까지 우리를 인도하셨습니다. 우리에게 말씀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고민하고 있는 문제, 우리가 힘들어하는 문제, 주님은 그 문제에 대해서 말씀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 교회를 친히 이끄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와 함께 하시는 주님을 찬양하십시다. 정말 그 분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성령님을 환영하고 사랑하시기를 바랍니다. 

주님 안디옥 교회에 역사하신 것처럼 제게도 우리 교회에도 그렇게 역사해 주시옵소서. 말씀해 주시옵소서. 제가 주님을 믿습니다. 주님을 사랑합니다. 제 삶을 주님께 맡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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