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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세우시는 하나님 (왕상 19: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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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우시는 하나님 (왕상 19:1~18)


어떤 영화에 이런 장면이 나옵니다. 
한 남자의 젊은 아내가 갑자기 장티푸스에 걸려 죽습니다. 그러자 그 남자는 좌절한 나머지 실성한 사람처럼 방황합니다. 매일 술에 만취해서 사람들과 다투기 일쑤이고, 괜히 남의 물건을 훔치고, ... 그러다가 결국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늙은 아버지가 면회를 가서 이렇게 호통을 칩니다. “얘야,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사람이 너 하나뿐인 줄 아느냐? 슬퍼하며 사는 게 바로 인생이란 걸 몰랐니!” 

도종환 시인의 「흔들리며 피는 꽃」이란 시가 있습니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면서 피었나니
흔들리면서 줄기를 곧게 세웠나니

흔들리지 않고 가는 사랑이 어디 있으랴
젖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빛나는 꽃들도 
다 젖으며 젖으며 피었나니 
바람과 비에 젖으며 따뜻하게 피었나니

젖지 않고 가는 삶이 어디 있으랴

우리 눈에 곱게 핀 것처럼 보이는 꽃들도 다 저마다의 아픔을 이겨내며 꽃을 피웁니다. 매서운 바람에 가지가 쓰러지고 잎이 찢기기도 하고 늦가을 된서리를 이겨내며 꽃을 피워냅니다. 우리 인생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실패의 아픔, 좌절의 순간을 맞지 않는 사람 누가 있겠습니까? 남모르는 아픔을 가슴에 안고 살아가지만 그래도 이겨내며 자기만의 고운 꽃을 피워내며 사는 것이 인생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는 누구입니까?
그는 구약을 대표하는 가장 위대한 선지자였습니다. 그는 하늘의 초자연적인 능력을 이 땅에 자유롭게 가져오는 놀라운 기적의 사역자였습니다. 

그는 오늘 본문 앞의 17-18장에서 기근 때에 사렙다 과부 집의 식량이 떨어지지 않게 했으며 그 과부의 외아들이 갑자기 죽었을 때 그를 기도로 살려낸 사람입니다. 갈멜산에서 자기 혼자와 850명의 거짓 선지자들과 능력대결을 하여 여호와가 참 하나님이심을 증명했던 기념비적인 사람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가 기도함으로 3년 6개월 동안 말랐던 하늘이 열리고 장대비가 쏟아지게 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가 지금은 이전과는 너무나 대조되게 초라한 사람이 되어있습니다. 오늘 본문 3-4절을 보면 천하무적이었던 그가 자신을 현상수배한 이세벨의 조치를 듣고 두려움가운데 도망가고 있고 로뎀나무 아래서 하나님을 원망하며 죽고 싶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엘리야의 모습은 우리 눈을 의심케 합니다. 그 위대한 선지자의 모습은 오간데 없고 두려움 중에 도망가고 있는 연약하기 짝이 없는 인간이다니. 

여러분, 잘나가던 엘리야가 하루아침에 무너져 초라한 사람이 되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교훈을 줍니다. 아무리 위대한 사람이라도 결국 그도 한 인간에 불과할 뿐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인간이 위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위대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으면 인간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엘리야도 누구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로뎀나무 아래 쓰러진 엘리야에게 찾아오셔서 그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하나님의 모습이 나옵니다. 오늘 이 시간은 쓰러진 엘리야를 멋지게 일으켜 세우시는 하나님을 통해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여러분, 지금 엘리야는 어디에 있습니까? 오늘 본문 3-4절을 보면 자기 생명의 위급함을 느끼자 엘리야는 사환과 함께 유다에 속한 브엘세바에 까지 도망갑니다. 그 후 자기의 사환을 그 곳에 두고 자기만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가서 한 로뎀 나무 에 이릅니다. 다시 말해 그가 있는 곳은 광야입니다. 광야란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외딴 곳입니다. 

그래서 엘리야는 지금 누구로부터도 위로받을 수 없는 곳에 있다는 것이지요. 그는 지금 깊은 고립 속에 있는 영혼입니다. 그의 지난날의 업적은 사람들로부터 잊어져가고 있었습니다. 미래를 꿈꾸기는커녕 그의 인생자체가 끝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아무도 그의 고통을, 그의 눈물을 알 수 없는 곳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3절을 보면 하나님은 누구도 알지 못하는 바로 그 광야 깊은 곳까지 알고 천사를 보내 엘리야를 위로하여 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시편 139편의 말씀대로 우리의 하나님께서는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실 뿐아니라, 내가 새벽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할지라도 거기서도 주의 오른손으로 나를 붙들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기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어떤 어려운 곤경에 처하더라도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의 눈빛과 손길이 미치는 곳에 있음을 알아야합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희망을 포기할 수 없는 이유입니다. 날 사랑하시는 주님이 남은 몰라도 내 영혼이 슬퍼하는 이유와 내 삶의 형편이 곤고하다는 것을 정확하게 아십니다. 그리고 내가 있는 그 곳까지 찾아오셔서 위로하시고 세워주십니다. 그곳이 내 영혼의 바다 가장 깊은 곳이라도 말입니다. 

이제 우리가 주목할 점은 하나님이 쓰러진 엘리야를 어떻게 대하시는가?입니다.
바로 여기에 엘리야를 행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모습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1) 하나님은 엘리야의 쓰러짐을 용납하셨습니다.

4절 로뎀나무에서의 엘리야의 불평을 봅시다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소서 나는 내 조상들보다 낫지 못하나이다” 하나님, 나, 이제 할만큼 일했잖아요. 이제 내 생명을 거두어 주십시오 라는 말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대선지자가 할 말이며 태도입니까? “너 왜 이렇게 못난 짓을 하는 것이냐, 이 무슨 너답지 않는 꼴이야?”라고 책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5절을 보면 하나님은 쓰러져 자는 엘리야를 부드럽게 어루만져주며 오히려 용납해주십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가 연약할수록 오히려 측은해하시고 감싸주시고 위로해주시는 분이십니다. 이 하나님을 이사야는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시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는” 분이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사람이 이 세상 살면서 야, 참 죽고 싶다. 삶이 왜 이리 고달프냐라는 생각 한 두 번 안해 본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제가 아는 신실한 믿음의 사람, 너무 힘들어서 건물옥상에서 뛰어내리고 싶다)누구나 그럴 수 있습니다. 세상사는 것이 너무 힘들어 어디론가 멀리 떠나버리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우리 인생이 어찌 늘 한결같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가 때때로 쓰러짐을 용납해주십니다. 또한 우리 스스로도 용납하기를 원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남이 쓰러지는 것도 용납해주기를 원하십니다. 

2) 하나님은 엘리야의 지친 육체의 회복을 도와주셨습니다. 

5절-6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로뎀 나무 아래에 누워 자더니 천사가 그를 어루만지며 그에게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 하는지라 본즉 머리맡에 숯불에 구운 떡과 한 병 물이 있더라 이에 먹고 마시고 다시 누웠더니” 

제가 청년때 시험에 떨어지거나 실연의 아픔을 겪고 낙심되어 집에 들어와 쓰러져 잘 때가 있었습니다. 그럴 때면 꼭 어머니가 머리맡에 과일이나 맛있는 것을 준비해주셨어요. 먹고 원기를 회복하라고. 낙심해 쓰러져 자는 자식을 짠하게 생각하는 어머니의 마음이지요. 쯧쯧 얼마나 힘들었니? 그러게, 사랑은 아무나 하냐? 물론 어머니도 속상하시지요. 하지만 내색하지 않고 자식을 위로하시는 어머니와 같은 하나님이 바로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사실 돌이켜 보면 엘리야가 얼마나 피곤했겠습니까? 갈멜산에서 바알 선지자들과 대결했죠, 비가 오도록 사력을 다해 기도했죠, ... 그런 가운데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쉬지도 못했습니다. 그의 육체는 아마 파김치처럼 지쳐 있었을 겁니다. 그런 가운데 또 이세벨의 협박에 마음이 무너지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런 엘리야에게 하나님은 기도가 부족하다고 책망하지 않았습니다. 말씀 들으라고 다그치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잘 먹이고 충분히 잠을 재우셨습니다. 

우린 보통 영적인 것만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를 영혼과 육체를 가진 존재로 만드셨습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육체가 건강하도록 잘 돌보는 것도 중요합니다. 오늘 지친 엘리야에 내린 하나님의 처방은 세 가지입니다. 잘 먹어라, 잘 마셔라, 잘 자라 입니다. 그러므로 때로는 우리는 잘 먹고 잘 쉬고 잘 자는 것이 신앙적이라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그런데 이 말 듣고 야, 이거 멋진 복음이다 하며, 막 먹자, 막 자자하며 너무 먹는 것만 밝히거나 낮 12시까지 대책없이 자면 곤란하죠(여러분은 막 먹고, 쉬고, 자는 것 별로 안 좋아하시는가 봐요? 반응이 없으니 말이어요). 어디까지나 균형과 조화가 필요합니다. 아무튼 우리 가운데 열심히 살아옴으로 기력이 쇠해진 분들은 우선 잘 먹고 잘 쉬어야 합니다. 그래야 후일을 기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준비해준 것을 먹은 엘리야는 이제 회복되기 시작합니다. 8절. “이에 일어나 먹고 마시고 그 음식물의 힘을 의지하여 사십 주 사십 야를 가서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니라” 기력을 회복하기 시작한 엘리야는 호렙산까지 나아갑니다.

3) 하나님은 엘리야의 고갈된 영혼의 회복을 도와주십니다.

하나님은 엘리야가 육의 회복만으로 온전히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오늘 본문 9절 그리고 13절 이하를 보면 하나님은 엘리야와 대화를 하시고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듣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 엘리야의 영혼이 살아납니다. 하나님의 사람에게 제일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과의 대화입니다. 하나님의 친밀한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낙심하는 이유는 하나님과의 대화가 단절되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낙심하고 지친 자가 소생케 되는 이유는 하나님께 들은 음성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음으로 하나님이 정말 나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만 확인되면 우리는 새 힘을 얻습니다. 

4) 하나님은 사명을 잃은 엘리야에게 새로운 사명을 주십니다.

사람이 아무리 육적으로 영적으로 회복되었다 해도 만일 그가 살아가야할 이유를 알지 못한다면 다시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사람은 모름지기 자신이 할 일, 즉 하나님이 맡겨 주신 사명이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계속 활기찬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를 아시기에 하나님은 15절 이하에 보면, 그에게 새로운 사명을 주십니다. 무슨 내용입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 나라와 주변 국가를 이끌어갈 계획이 있다는 겁니다. 네가 그 일을 준비하라는 겁니다. 

하나님이 지정한 세 사람, 아람 왕 ‘하사엘’, 북 이스라엘 왕 ‘예후’, 후계자 ‘엘리사’ 을 세우라는 것입니다. 그들을 통해 하나님이 뜻을 펼쳐갈 것이라는 겁니다. 그 말씀을 들은 엘리야는 새로운 의욕을 가지고 떠납니다. 그리고 그 모든 사명을 완수합니다. 바로 여기까지가 로뎀나무 아래에 쓰러진 엘리야를 찾아오셔서 그를 사랑으로 대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오늘 로뎀나무 아래의 엘리야의 이야기에서 우리가 한 가지 꼭 짚고 넘어갈 의문이 있습니다. 18장까지 그렇게도 당당했던 엘리야가 로뎀 나무 아래서는 왜 이리도 비참하게 자기 생명을 포기할 생각을 하기에 이르렀는가하는 것입니다. 저는 그 중요한 이유는 하나님의 침묵이며, 하나님의 손길의 부재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만약 그가 원하는 대로 다되었다면, 그가 기도한대로 하나님의 능력의 손길이 나타났다면 그는 어떤 사람이 되었을까요? 아마 나중에는 하나님 없이도 자신이 위대한 사람이라고 여기게 되었을 것입니다. 자만심에 빠졌을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의 길을 막으셨습니다. 그의 일이 안되게 하셨던 것입니다. 

여기에는 엘리야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있다. 하나님은 엘리야가 갈멜산의 승리도 경험하지만, 로뎀 나무 아래에서의 처절한 참패 또한 경험할 필요가 있음을 아셨습니다. 하나님은 엘리야가 긍극적으로 일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세우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셨다. 우리가 사역을 할 때에 일을 하는 것은 누구라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사람을 세우는 일입니다. 그 일은 아무나 할 수 없습니다. 그 일은 하나님 앞에서 겸손한 사람, 영혼의 아픔을 아는 사람, 자신의 연약함을 아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깊은 침체와 어려움을 통과한 사람에게 사람을 맡겨주십니다. 지금까지 엘리야는 능력있는 사역자였습니다(그 모습). 그러나 사람을 세우는 일을 위해서는 아직 준비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이제 하나님은 자신의 능력의 손길을 거둠으로 그가 얼마나 하나님없이는 작은 자라는 것을 알게 하셨다. 자신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라는 것을, 자신도 하나님의 긍휼이 필요한 존재라는 것을 알게 하셨다. 그리고 깊은 좌절을 통해 영혼의 아픔을 경험한 사람만이 또다른 영혼의 아픔 치유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하셨다. 

엘리야에게 이 일 이후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난 것을 우리는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15절을 보면 이후에 하나님은 그에게 일이 아니라 사람을 세우는 사명을 맡기심을 봅니다. 이것은 예수께서 베드로를 세울 때도 마찬가지였다. 언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사람을 맡기는가? 그가 주님을 위해 무엇을 하겠다고 자신감에 찰 때인가? 아니다. 

요한 21장을 보면 주님은 “나는 안돼, 나는 이 정도밖에 안돼.”라고 낙담한 중에 있는 베드로를 찾아가셨습니다. 그리고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물으십니다. 그런 다음에 “베드로야 내 양을 먹이라”라고 주님은 말씀 하십니다. 자기를 아는 사람, 자기의 연약함과 부족함을 아는 사람, 자기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인정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사람을 맡기십니다. 

영혼의 소중함을 잃은 채로 사역을 한다면 교회는 메말라 버릴 것입니다. 한 생명 한 생명이 얼마나 소중합니까? 일을 잘하는 것은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영혼의 소중함을 보지 못하고 일로써 뭐든지 하려고 했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떠나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깊은 침체에 있습니까? 거기에는 나를 온전히 세우시려는 주님의 뜻이 있습니다. 귀한 사람이 되는 데 꼭 필요한 것을 갖추는 시간입니다. 그래서 훨씬 더 존귀한 일을 맡기고자 하는 하나님의 섭리가 있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성도여러분, 살다보면 로뎀나무 아래에 있는 엘리야처럼 쓰러져 초라한 자신을 볼 수 있습니다. 한때는 잘나가는 남부러워하는 사람이었는데, 한때는 그 누구 못지않게 열정적으로 주님을 섬겼는데, 한때는 산을 옮길만한 믿음으로 도전과 모험을 시도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달려갔는데, 지금은 침체의 늪에서 방황하는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 가운데 그런 분이 있습니다.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깊은 광야 속에 홀로 버려져있습니다. 

그 누구도 나의 아픔을 알지 못합니다. 누구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아 뒤돌아서서 흘리는 나의 눈물을 알지 못합니다. 나의 영혼이 폭탄 맞은 것처럼 황폐해져있다는 것을 모릅니다. 나의 마음이 지금도 얼마나 끝없이 방황하고 있는지를 알지 못합니다. 

그러더라도 우리 주님은 아십니다. 측은히 여기십니다. 찾아와 위로해주십니다. 그리고 날 세우시길 원하십니다. 그 사랑의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들아, 힘들지? 너의 기대대로 이루어지는 것만이 너를 위한 것이 아니란다. 지금은 너를 향한 내 선한 목적이 이루어지고 있는 시간이란다. 때가 되면 내가 널 찾아올 거다..잠잠히 기다리렴. 그동안 너 자신의 몸을 추스리렴. 내가 너를 찾아갈 때 너는 나와 함께 다시 비상하게 될 거야, 그때는 내가 널 세워줌으로 너는 높은 산에 우뚝 서게 될 거야, 내가 널 세워줌으로 폭풍우 몰아치는 바다도 걷게될 거야. 넉넉하게 마음을 가지렴.. 내 생명보다 더 소중한 내 아들아..

여러분, 때로는 내가 어떻게 하려고 아무리 발버둥쳐도 소용이 없을 때가 있습니다. 그때는 오직 전능하신 하나님만이 내게 오셔만 됩니다. 그분이 오셔서 날 세우셔야 만이 일이 풀리기 시작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급하더라도 잠잠히 기다려야합니다. 그분이 오셔서 일하실 때까지, 그분이 오셔서 날 세우실 때까지, 그때가 되면 지금보다 훨씬 더 존귀한 모습으로 내가 일어서게 될 것입니다.

무더운 여름입니다. 잘 먹고 잘 쉬고 지친 몸을 추스르기 바랍니다. 작년 올림픽기간 동안 제가 중국경찰에게 쫓겨 사랑하는 가족과 성도들을 두고 상해를 떠나올 때가 있었습니다. 그때 제 영혼에 폭탄을 맞은 것 같았습니다.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때 제가 한 것은 어머니가 만들어 주신 맛난 음식 잘 먹고 좋은 영화 많이 봤습니다. 건강 돌보십시오. 후일이 또 있습니다. 

얼마 전에 세상을 떠난 장영희 교수님의 유고집인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을 보면 '다시 시작하기'라는 제목의 수필이 있습니다. 80년대 중반에 장교수님이 뉴욕 주립대학교에서 겪은 체험담입니다. 하루는 LA에 사는 언니네 집에 다녀오기 위하여 6년 동안 고생해서 마무리지은 학위 논문을 다른 짐과 함께 대충 꾸려서 자동차 트렁크에 실어 여행을 갔답니다. 

그런데 도둑이 차 트렁크를 열고 장교수님의 짐꾸러미를 몽땅 훔쳐 달아났습니다. 그런데 그 짐꾸러미 속에는 2년 동안 온갖 정성을 기울여 쓴 박사학위 논문도 들어가 있었습니다. 그 당시 컴퓨터의 워드프로세서가 대중화되지 않아 모든 작업을 전동타자기로 하던 시대였답니다. 그러니 오늘처럼 다른 곳에 저장을 해놓을 수 도 없었던 거지요. 2년 동안 힘들게 작성한 그 복잡한 박사학위 논문을 다시 복원해낸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래서 장교수님은 도둑맞은 소식을 듣자마자 기절을 해버렸고 사흘 동안 방문을 꼭 걸어 잠가놓고 전화 코드도 빼놓은 채 식음을 전폐하며 차라리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답니다. 그러다가 한 닷새쯤 되는 날 장교수님은 자신의 내면 깊숙이에서 들려오는 세미한 음성을 듣게 되었습니다. "괜찮아. 다시 시작하면 되잖아. 다시 시작할 수 있어. 기껏해야 논문인데 뭘 그래. 살아 있잖아…. 논문 따위쯤이야." 

이 세미한 음성을 들은 장교수님은 다시 시작했습니다. 그리하여 정확히 1년 후에 잃어버린 논문보다 더 훌륭한 학위논문을 끝낼 수가 있었습니다. 장영희 교수님은 박사 학위 논문 맨 앞쪽의 헌사를 쓸 때 이렇게 적었답니다. "내 논문 원고를 훔쳐 가서 내게 삶에서 가장 중요한 교훈; 다시 시작하는 법을 가르쳐 준 도둑에게 감사합니다." 

그렇습니다. 다시 시작하면 됩니다. 오늘 여러분의 가정에, 직장에, 사업에 큰 어려움이 있습니까. 잠잠히 기다리십시오. 고요히 마음을 정리해서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들어보십시오. 하나님이 함께 계십니다. 여러분을 돕습니다. 다시 하면 됩니다. 한 순간의 실수나 실패가 끝이 아닙니다. 얼마든지 재기할 수 있습니다. 

요즘 복음성가 가수 소향이 부르는 ’날 세우시네’라는 찬양이 있습니다. 영어제목 ”You raise me up“라는 곡을 번역해서 부른 곡입니다. 아름다운 멜로디와 가사 덕분에 많은 사람들이 즐겨 부릅니다. 쓰러진 나를 주님이 강하게 세워주신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생각하며 그 가사를 들으면 큰 울림이 다가올 것입니다.

“내 영혼이 힘들고 지칠 때, 괴로움이 밀려와 나의 마음을 무겁게 할 때, 당신이 내 옆에 와 앉으실 때까지 나는 여기에서 고요히 당신을 기다립니다. 당신이 나를 일으켜 주시기에, 나는 산에 우뚝 설 수 있고, 당신이 나를 일으켜주시기에 나는 폭풍우 몰아치는 바다도 건널 수 있습니다. 당신의 어깨에 기대어 있으면 나는 강해집니다. 당신이 나를 일으켜주시기에 나는 내가할 수 있는 것보다 더 큰 일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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