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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네가 미쳤도다 (행 26:2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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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미쳤도다 (행 26:24~29) 


공산당원 중에는 세 종류의 공산당원이 있다고 합니다. 첫째는 안팎이 빨간 참 공산당을 토마토 공산당이라고 합니다. 그 다음에는 사과 공산당이 있다고 합니다. 사과는 겉보기에는 빨갛지만 껍질을 벗기고 보면 하얀 것처럼, 겉보기에는 공산당원 같지만 속은 공산당원이 아닌 사람을 말합니다. 그 다음에는 수박 공산당이 있다고 합니다. 수박은 겉으로 보면 파랗지만 속은 보면 빨갛습니다. 겉으로는 공산당이 아닌 것처럼 행동하는데 사실은 새빨간 공산당을 말합니다. 북한에는 5가구당 한 사람의 감독관이 있는데, 겉으로 보기에는 전혀 공산당원이 아닌 것 같은데 속은 새빨간 사람들, 이런 사람들이 주로 감독관이 된다고 합니다. 

이 원리는 비록 공산당원들 뿐만이 아니라 기독교인들에게도 적용이 되는 것 같습니다. 토마토 기독교인들은 안이나 밖이나 완전히 새빨간 참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그런가 하면 사과 공산당원처럼 사과 그리스도인들이 있습니다. 겉보기에는 예수님을 잘 믿는 것 가타고, 겉보기에는 좋은 신자 같은데 속은 아무 것도 없는 분들, 바로 종교인들을 말합니다. 그래서 예배드리는 것도 하나의 형식이요, 의식이고, 그 마음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는, 믿음이 없는 분들입니다. 중생의 체험을 못한 분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다음에는  수박 교인들이 있는데, 수박 교인들은 겉보기에는 별로 신앙이 없는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선조 대대로 예수를 믿는 분들은 그렇게 열심이 없는 듯 합니다. 또 모태신앙인들은 겉보기에는 잠잠하고, 열심도 없고, 그렇게 신앙이 좋아 보이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속을 보면 새빨간 수박처럼, 그 누구도 흔들 수 없는 견고한 신앙들이 있습니다. 

여러분! 오늘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토마토처럼 안과 밖이 믿음의 사람들로, 은혜의 사람들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뜨거운 신앙의 사람들이 되어야 될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이 사회를 변회시키고, 이러한 사람들이 사단의 권세를 깨뜨려버리고, 이러한 사람들이 하나님과 더불어 깊이 교제하는 모범적인 신자들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런 사람들을 가르켜서 오늘 본문은 '미친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에게 미쳤던 한 인물이 나오는데 그 사람이 바로 사도 바울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에게 완전히 미친 사람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많은 시련과, 어려움과, 괴로움 속에서 죽을 고비도 여러 번 넘기면서 3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집단으로 뭉쳐서 폭도가 되어서 사도 바울을 죽이려고 고소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온갖 고난을 다 당했습니다. 세상 부귀영화 다 버리고 복음을 전하다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갖히디고 하고 매도 수도 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40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다"고 고린도후서 11장 23-27절에서 고백합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 속에 있는 주님을 향한 뜨거운 열정은, 주님을 향한 그 뜨거운 마음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베스도 왕 앞에 섰을 때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왕이여 내가 이렇게 손 결박된 것 외에는 다 나와 같이 되기를 원하나이다." 

그랬더니 베스도 왕이 뭐라고 말합니까?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 

여러분, 그래서 사도 바울은 세계 선교의 주춧돌을 놓는 대 선교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신약 성경의 절반을 기록하는 위대한 신학자가 되었습니다. 예수에게 미친 사람만이 그런 위대한 일을 할 수가 있습니다. 예수에게 미친 사람만이 어두운 사회를 변화시킬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가장 무서운 사람은 예수에게 미친 사람입니다. 로마 네로 황제를 비롯해서 300년 동안 기독교에 대한 핍박이 있었습니다. 그때 많은 기독교인들이 세상의 부귀영화를 다 버리고 이 땅 속에 굴을 파고 살면서 많은 고난을 당하며 신앙을 지켰던 사람들은 예수에게 미친 사람들이었습니다. 많은 핍박과 환난 속에서 매를 맞기도 하고 나중에는 순교를 당하면서까지도 신앙의 지조를 지켰던 사람들은 예수에게 미쳤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지금도 북한 땅에서 예수를 믿는 것이 알려지기만 하면 죽는데도 불구하고 지하 교회에서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예배하고, 찬양하는 신앙의 사람들은 바로 예수에게 미친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들은 세상 것에 미쳐 돌아가는 사람들이 아니라 예수에게 미치시기를 바랍니다. 사도 바울은 어느 정도 예수에게 미쳤는지, 빌립보서 1:20에서 빌립보 교인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나는 죽어도 좋고, 살아도 좋으나 오직 그리스도만이 높임을 받고 존귀히 여김을 받길 원한다는 사도 바울의 고백입니다. 얼마나 예수에게 미쳤으면 이런 고백을 합니까? 

또한 빌립보서 2:23-24을 보면 이런 고백도 합니다.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 내가 육신으로 있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 사도 바울은 죽어서 예수 그리스도와 천국에서 함께 사는 것을 더 소망할 정도로 그렇게 예수에게 미쳐 있었습니다. 


미쳤다는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 

1. 예수님에 대한 전문가다. 

여러분, 그렇다면 베스도 왕이 바울 사도에게 "네가 미쳤도다"라고 말했는데, 그 미쳤다는 말은 무슨 말입니까? 그것은 바로 예수 전문가라는 말입니다. 

여러분, 한국의 고대 언어를 보면 하대하는 말들이 있었습니다. 중국말들은 아주 높이고 한국말은 낮추는 풍토가 있었는데, 그러한 말들 중의 하나가 '쟁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예수쟁이" "점쟁이"등 이 말은 오늘 현대말로 바꾸자면 "박사"라는 말로 바꿀 수가 있습니다. "쟁이"라는 말은 "전문가"라는 의미입니다. "박사"라고 하는 것은 전체를 다 아는 것이 박사가 아닙니다. 

예를 들어서 "공학박사" 그러면 물론 박사과정을 하는 긴 시간 동안 전반적인 교과를 다 공부하기는 하지만 정작 박사학위는 지극히 전문적인 분야를 연구해서 받습니다. 그래서 어떤 분들은 꿀벌의 다리 하나를 연구해서 박사학위를 받기도 합니다. 적어도 꿀벌 다리에 관해서는 그 사람처러 많이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디의 전문가가 되어야 합니까? 예수 전문가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 전문가!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것은 좀 무식해도, 다른 것은 잘 몰라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만은 전문가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1) 유대인들의 신관: 하나님을 자기 민족으로만 알았다. 그러나 바울은 우주 만물의 하나님으로 증거한다. 
구약시대의 이스라엘 민족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자기들 민족들만의 신으로 알았습니다. 다른 밎족들과는 상관이 없는 신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그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을 초월해서 전 세계인류를 위한 신이라고 하는 것을 밝혔습니다.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분이 여호와 하나님이요, 온 세계 인류의 생사화복을 주장하시고, 민족 국가의 흥망성쇠를 주장하시는 분이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것을 밝혀냈습니다. 

2) 유대인들의 교회관: 솔로몬 성전의 제사만 예배라고 했다. 그러나 바울은 이방인의 교회에서도 예배를 드리게 했다. 
이스라엘 민족은 솔로몬의 성전, 즉 예루살렘 성전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했느냐 하면 그 성전은 우리 이스라엘 민족만을 위한 성전이요, 유대민족이 모여서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장소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성전은 누구나 다 나아와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장소, 누구나 하나님과 교제하는 장소라고 하는 것을 밝히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그 결국은 우리 주님의 몸이 바로 성전이라고 했습니다. 

3) 유대인들의 구원관: 자기 민족에게만 구원이 있고 이방인들은 개처럼 취급했다. 바울은 이방인에게도 구원이 임한 것을 가르쳤다. 
구원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행하므로 구원 받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율법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바로 예수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영접함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성경에 대해서 사도 바울은 얼마나 잘 알았는지 모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에 대해서만큼은 석학 중의 석학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무엇보다도 예수에 대해서는 잘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늘 성경을 많이 읽어야 합니다. 하루에 최소한 10장씩은 읽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에 대해서 잘 알아야 합니다. 바로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알면 알수록 예수님과 가까워지게 되고, 예수님을 알면 알수록 깊은 교제를 갖게 되고, 예수님을 알면 알수록 예수님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조지 워싱턴은 말하기를 "성경을 가지지 않고서는 나라를 다스릴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러스킨은 말하기를 "세상에는 많은 책들이 있지만 임시적인 책과 성경 두가지 밖에 없다. 임시적인 책은 성경 이외의 모든 다른 책이요, 영원한 말씀의 책은 성경을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2. 예수로 충만했다. 

여러분! 여기에 "네가 미쳤도다"라는 말은 예수로 충만했다는 것을 가르키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처럼 예수로 충만한 사람이 또 있었겠습니까? 다른 성경과는 달리 '주 안에서'라는 말이 자그마치 164번이나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말은 무슨 말인가 하면 '주 안에서''엔토크리스토' 이 말은 바로 신비적인 주님과의 연합을 가르킵니다. 이것을 신학적인 용어로 '신비적인 결합''미러클유니트'라고 합니다. 

여러분,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친히 체험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핍박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잡아 옥에 가두었습니다. 그런 일에 열심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도 다메섹으로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으러 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메섹 도성에서 갑자기 환한 빛이 비추었습니다. 너무 강렬한 빛 때문에 눈이 멀었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주여, 뉘시나이까."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니라."  

그때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만나고 이름을 사울에서 바울로 바꾸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지금까지는 개념적으로만 알았던 율법주의자 사울이 이제부터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체험하고, 주님 안에, 내가 주 안에, 주님이 내 안에 살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이 뭐라고 말씀합니까?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나의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한복음15:7) 

여러분 "주는 내 안에, 주님 안에 내가"라는 것은 완전한 혼연일체를 말하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2:20에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는 것이라"라고 했습니다. 이제는 인간 '나'는 다 죽었습니다. 그리고 내 생각, 내 주장도, 내 교만성도, 타락성도, 부패성도 다 죽었습니다. 내 성품도 다 죽었습니다. 이제는 예수님만이 내 속에 충만히 거해서 우리가 예수님처럼 생각하고, 우리의 말이 예수님처럼 말하고, 우리의 삶을 예수님처럼 살아가는 제2의 예수님처럼 변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모습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 나타나야 합니다. 


3. 열심이 특심이다. 

그 다음 "네가 미쳤도다" 라는 말은 뜨거운 열심을 갖추었다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열심이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는 복음을 전하면서 그 많은 환난과 시련을 당하면서도 끝까지 열심을 잃지 않았던 사람입니다. 뜨거운 열정을 가지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어떤 열심이 필요한가? 

1)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다(요2:17) 

여러분, 그리스도인은 열정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난미도 열심 있는 분입니다. "여호와의 열심이 이루리라" 그랬습니다. 우리 하나님도 열심이 있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열심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성경을 보니 그 열심은 어떤 열심입니까? (요한복음2:17)에 보니 "여호와를 사모하는 열심"이라고 했습니다. 오늘 여러분들이 여호와를 사모하는 열심으로 하나님께 나와서 예배를 드리는데 말세가 가까울수록 더 열심히 모여야 합니다. 모이기를 폐하는 자들처럼 하지말고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모해서 그 날이 가까울수록 더욱 열심히 모이시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열심을 내야 합니다. 찬송을 불러도 열심히 해야 합니다. 기도를 드려도 열심히 해야 합니다. 봉사를 해도 열심히 해야 합니다. 열심이 있을 때 그 곳에 성장이 있고, 발전이 있고, 열심이 있을 때에 그곳에 기적이 일어나고, 변화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2) 선한 일에 열심이 있어야 한다.(딛2:14) 

여러분, "선한 일에 열심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악한 일에는 자연히 되지만 선한 일에는 열심이 없으면 안됩니다. 

3) 서로 사랑하기를 열심히 해야 한다.(벧전4:8) 

"열심을 품고 서로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사랑하는 것도 열심히 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노력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사랑은 서로가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가정교회가 왜 필요한 것입니까? 가정교회에서는 대예배를 통해서 체험하지 못하는 따뜻한 사랑을 서로 만들어가는 곳입니다. 열심히 서로를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서로 사랑을 주고 받고, 받는 가운데 그 사랑이 자라게 되고, 사랑이 만들어져서 더 큰 사랑으로 발전해 나가는 것입니다. 

교회는 사랑이 없으면 안되는 곳입니다. (고린도전서13:1-3)을 보면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만한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라고 했습니다. 아무리 열심이 있고, 또 예배도 열심히 참석하고, 봉사도 열심히 한다고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4) 전도하는 일에 열심을 내야 한다.(고전15:10) 

여러분, 전도하는데 열심히 하라고 했습니다. (고전15:10)을 보면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 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최권능 목사님은 전도에 얼마나 열심이 있었는지 일을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을 잡고 전도를 시작합니다. 
"일을 끝내고 어디로 가십니까?" 
"집에 가려고 합니다." 
"집에 가서는 무엇을 하려고 합니까?" 
"예, 조금 푹 쉬려고 합니다." 
"푹 쉰 다음에는 무엇을 하려고 합니까?" 
"아이들을 위해서 열심히 일해야지요." 
"열심히 일해서는 무엇을 합니까?" 그렇게 묻다보니 나중에는 무엇이라고 대답을 합니까? 
"죽어서 공동묘지에 가야지요." 그러니까 최권능 목사님이 이렇게 말합니다. 
"공동묘지를 넘어서 우리 함께 천국에 갑시다." 그러면서 복음을 전합니다. 

또 어떤 때에는 저 산꼭대기에서 한 젊은이가 나무를 하느라고 땀을 뻘뻘 흘리고 있는 모습을 봅니다. 최권능 목사님은 산 밑에서 "이봐요! 젊은이 청년 청년" 하고 다급하게 부르기 시작합니다. 젊은이가 보니 한 노인이 산 밑에서 자기를 부르고 있습니다. 노인이 부르시니 어떻게 안 내려갑니까? 
젊은이는 일하는 것을 잠시 접어 두고 숨을 헐떡이며 열심히 뛰어내려갔습니다. 
"무슨 급한 일이 있습니까? 무슨 일로 부르셨습니까?" 
"청년, 우리 예수 믿고 천국 갑시다." 

최권능 목사님은 이렇게 전도하는데 열심이 있었던 분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이렇게 열심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언제 어느 때나 예수로 충만해야 됩니다. 최권능 목사님은 새벽 4시만 되면 평양 시내를 누비면서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을 외치고 다녔습니다. 그러다가 일본 순사들의 핍박을 받게 됩니다. 일본 순사들이 잡아다가 실컷 매로 때립니다. 이상한 것은 핍박을 받을수록 매를 맞을수록 최권능 목사님 입에서는 "예수 천당"이라는 말만 계속해서 나오는 것입니다. 일본 순사들이 제발 예수 얘기는 하지 말라고 하니까 최권능 목사님은 "나의 마음 속에는 예수로 충만해서 때릴수록 예수만 나옵니다. 어쩔 수가 없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마지막 때에는 어떤 신자가 필요합니까? 예수에게 미친 성도, 예수 전문가, 예수로 충만한 사람,예수에게 열정적인 사람이 필요합니다. 이런 성도가 신자 구실을 할 수가 있습니다. 사회를 변화시키게 됩니다. 또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나게 합니다. 우리 모두 사도 바울처럼 예수에게 미쳐서 이 어두운 세상에 빛과 소금의 역할을 잘 감당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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