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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양떼를 위한 기도(2) (빌 1: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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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떼를 위한 기도(2) (빌 1:9~11)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 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빌 1:9-11). 

Ⅰ. 본문해설 

조국교회가 진정으로 이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 필요한 영적인 실재를 소유하지 못한 채 그 빈 공간을 채우기 위해 과거에 시도한 방법론들이 많은 문제점을 낳고 있습니다. 마치 기독교라는 동종의 상품을 파는 기업과 같은 모습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이런 교회들은 두 가지를 완벽히 상실했습니다. 누가 진정한 교인인가 하는 것과 교인이라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와 관련된 올바른 생각입니다.

전자와 관련하여 자기의 죄를 십자가 앞에서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회심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조건인데 이 요구를 충족시키는 사람들이 점점 줄어들고 있기 때문에 교회들은 더 많은 교인들을 모으기 위해 이 기준을 낮추었습니다. 결국 기존의 교회의 수준을 떨어뜨렸고, 인간은 절망할 수밖에 없는 죄인이기에 회개해야 하며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이 필요하다는 선포는 자취를 감추게 되었습니다. 

후자와 관련해서는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삶에서 경건의 비밀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경건의 비밀은 그리스도이고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진노와 사랑을 발견하고 성령의 은혜를 받음으로써 주님을 두려워하면서도 사랑하는 경건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점차 이런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한 경험이 사라지면서 경건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들로 교회는 붐비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세속주의의 정신이 교회 안에 침투하게 된 것입니다. 

참된 교회의 모습은 그렇지 않습니다. 세상의 나라는 주님께 죄를 짓고 이후 숫자와 규모를 가지고 자기의 악을 보편화하려고 노력해 왔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교회의 가치는 세력이나 숫자와 규모가 아니라 ‘거룩함’에 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함과 경건함을 통해 이 세상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그리스도인이 누구이고 어떻게 사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육신하신 그리스도를 통해 사람이 사는 도리를 배웠던 것처럼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사는 인생의 목적이 무엇인지 그리스도인들을 통해 배워가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사도 바울은 이미 예수님을 잘 믿고 있는 빌립보 교회를 향하여 자신의 강력한 소망을 피력했습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바와 같이, 다른 많은 것들 가운데 참되고 선한 것을 분별할 수 있는 지성적 성숙 일, 진실하고 거스름 없는 성품의 성숙,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드러내는 생활의 성숙입니다. 이렇게 되는 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계획이고 창조하신 목적이며, 인간은 그 안에서 행복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이런 일들이 성도들에게 저절로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진정 구원을 얻고 예수를 믿는 성도라면 그들 중 누가 지성이 성숙하고, 진실하고 허물없이 하나님 앞에 참된 신자가 되는 일을 마다하겠습니까? 누군들 하나님 앞에 정욕의 열매만 가득하여 하나님의 교회에 누를 끼치고, 주님께 누를 끼치길 빌겠습니까? 문제는 바라는 모든 것이 소원이 아니요, 소원하는 모든 것이 그가 갈망하는 것이 아니라는 데에 있습니다. 그런 생각과 소원을 가지고 있어도 구체적으로 그 소원과 생각을 위해서 무언가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 댓가를 지불하지 않고 기대하는 것은 단순한 사행심이자 요행수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열심히 노력하고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구원 계획대로 사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길일뿐 아니라 우리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도 매우 중요합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기 전보다 우울한 것이 무엇 때문입니까?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은 그 진리를 따라 사는 사람들에게는 기쁜 소식이며 언제나 마음에 솟아나는 샘물이지만, 말씀대로 살기 싫어하는 사람들에게 진리의 빛은 쓰라린 고통일 뿐입니다. 


Ⅱ. 양떼를 위한 기도 

그래서 사도는 본문 말씀을 통해 신자로서 그렇게 지성과 성품과 생활의 성숙을 이루어 하나님께서 구원하신 목적대로 사는 원동력이 무엇인지 가르치고 있으며 그를 위하여 간절히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기도는 사도 바울이 목회자로서 하는 개인적인 기도가 아니라 영혼들을 돌보는 어머니로서의 교회가 모든 성도들과 함께 공동체적 봉헌 안에서 하나님께 올려야 하는 기도입니다.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이것이 양떼를 위한 기도였습니다. 

A. 풍성한 사랑 

사도는 사랑이 풍성해지도록 간구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지성과 성품, 생활의 성숙을 이루어 구원하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원동력입니다. 즉 하나님이 기뻐하신 삶으로 나아가게 만들어주는 근원적인 하늘의 자원이 사랑인 것입니다.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많은 문제를 만납니다. 예수를 믿고 변화되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이 속에서 가끔 착각을 합니다. 우리의 인생의 곤고함의 불행이 물질과 지식의 부족, 세상의 악함, 인간관계의 파탄 때문이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들은 도구일 뿐 입니다. 우리에게 이런 것들은 죄를 주입하지 못합니다. 죄는 우리 자신이 마음 안에서 악한 것을 선택하고 사랑하는 데서 발생합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은 바로 우리들이 매일매일 하나님을 버리고 이 세상을 택하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 없음에 기초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의 인생에 문제가 많은 것 같아도 더듬어 올라가면 언제나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없음이 원인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없이는 예전에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모하였을 때에는 능히 극복하며 살던 것들에도 걸려 넘어지게 됩니다. 예전에는 시련 가운데서도 감사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높였는데 이제는 불평과 불만으로 가득 찬 원망의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런데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주여 주여”라고 부르는 자마다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까? 마음에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사랑과 참된 애정이 없는데 어떻게 그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할 수 있겠습니까? 인간은 철저히 자아에 붙잡힌 존재입니다. 그의 본성은 자기를 신처럼 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이것은 결코 깨뜨려질 수 없습니다. 

그래서 본문 말씀의 사랑을 희랍어 성경에서는 ‘아가페’사랑으로 적고 있습니다. 우리의 육정에서 우러나오는 사람의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에게 부어지는 사랑인 것입니다. 이 사랑이 우리로 하여금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대로 살게 만들고 우리로 하여금 지성과 성품과 생활의 성숙을 이루어 창조의 목적에 부합하는 삶을 살게 하며 우리도 그 안에서 행복하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정중하게 무릎을 꿇고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한 것에 대해 회개한 때가 언제입니까? 항상 우리는 인생의 문제를 우리의 관점에서 봅니다. 하나님을 향한 불평과 불만으로 하나님의 섭리는 잃어버리고 자기 힘으로 자신의 인생의 문제를 해결해 보려고 합니다. 그러면서 교회 생활은 하나의 껍질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이 마음에 가득하고 풍성하였을 때는 고난과 시련이 와도 그 안에서 감사했습니다. 유혹이 와도 능히 극복할 수 있었고, 미워할 수밖에 없는 사람도 용서하고 나를 아프게 한 사람을 바라보며 눈물로 기도할 수 있었습니다. 결국 죄에 대한 뉘우침인 회개는 하나님보다 자기를 사랑한 것을 하나님 앞에 회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사랑은 돌이켜야 하지만 돌이킨 것에서 물러나면 자기를 저절로 사랑하게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여러분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사그라지는 것이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해 본 적이 있으십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면 좋지만 그저 그런 것은 특별한 사람들이 하는 것이고, 만약 있다면 내 인생에서도 특별한 때에 그런 것이라고 여기며 일반적으로 그냥 그렇게 사는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환난과 시련이나 육신의 괴로움 때문도 아니고 어느 한 순간 주님은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자기를 다 버리기 까지 사랑하셨는데 주님을 향한 나의 사랑은 어떻게 이렇게 초라할까 생각하며 눈물을 쏟으며 기도한 적이 언제입니까? 사랑이 없이는 결코 지성도 성숙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가슴에 박혀 말씀 하나하나가 커다란 감동으로 다가올 때 역시 하나님을 사랑할 그때였습니다. 

아무리 많이 자란 나무도 뿌리가 잘리면 크기와 상관없이 마르게 됩니다. 예수를 아무리 오래 믿었더라도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더 요란한 소리를 내며 쓰러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니님의 사랑에서 계속 자라나는 것은 성경의 그림일 뿐이며, 실제 그런 삶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저는 매일 매일 그런 분들을 봅니다. 물론 한때는 생애적으로 주님을 만나고 교회에 뼈를 묻겠다고 하다가도 마른 뼈처럼 되어버린 사람도 봅니다. 

그 차이가 무엇입니까? 한 사람은 끊임없이 주님을 사랑한 것입니다. 이것은 절대 운명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아무리 많이 부어졌더라도 부어진 그대로 있는 것이 아니라 출렁이는 물과 같습니다. 그 큰 사랑을 받은 사람답게 언약관계 안에서 하나님이 주신 믿음의 원리를 따라 살아야지만 내적인 생명이라고 부를 수 있는 하나님 사랑이 충만히 유지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끊임없이 하나님 앞에 자기 마음속에 하나님의 사랑이 어떠한지 스스로 되돌아보아야 합니다. 영적인 체온계를 여러분의 심장에 꽂아볼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기도는 얼마나 잡다한 것들로 가득 차 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많은 교리를 알고 있고 타락한 적이 없다고 해도 주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도 없습니다. 문제는 오늘날 시대에 자기가 사랑을 받지 못하기 때문에 고민하는 사람들은 많아도, 자기 안에 하나님 사랑이 없다는 것 때문에 고민하거나 회개하는 사람은 적다는 것입니다. 신앙의 형식은 오래 교회에 다녔기 때문에 반듯합니다. 

그러나 거기에 어울리도록 주님을 더욱 사랑하지 않으면 그것은 고도의 위선이 됩니다. 그래서 사도는 너희가 거룩하게 살기 위해서 가장 절실히 필요한 것은 너희의 하나님의 계획대로 너희 사랑이 점점 더 풍성해지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곧 자기를 죄에서 구원한 하나님의 사랑,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나타난 아버지의 사랑이 한없이 큰 것이기에 그 사랑을 끊임없이 본받고 은혜의 감화를 통해 그 사랑이 증진되는 가운데, 예전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게 되는 생활을 꿈꾸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사도바울이 바라보았던 성화의 길이기도 합니다. 

“내가 주님을 풍성한 사랑으로 사랑하고 있는가?” 제일 먼저 우리는 이 제목을 가지고 회개하여야 합니다. 대부분의 성도들에게는 첫사랑의 때가 있었습니다. 우리가 그것을 잊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풍요로운 환경 때문이 아닙니다. 고난과 시련으로 가득 찬 시기였고 아는 것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때 우리의 마음속에는 순수한 사랑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친히 우리의 허물은 용서해주시고 마음은 바꾸어주셨으며, 어두운 지성은 밝혀주시어 주님의 손에 이끌려 신앙생활을 하도록 하셨습니다. 

우리의 예배에는 눈물이 있었습니다. 기도에는 참회가 있었고, 삶에는 거룩함이 있었으며, 교재 속에는 희생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잃어버린 것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하나님의 사랑 말고 무엇이 있습니까? 삶 거룩함 교재 속에슨 희생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잃어버린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 이것말고 무엇이 있습니까? 매순간 주님이 내게 베풀어 주신 사랑을 기억하고 그 사랑으로 돌아가는 성도들이 되십시오. 사도는 사랑에서 점점 더 풍성하게 되기를 권고했습니다. 여러분이 이 풍성한 사랑을 회복하게 해달라고 어린 아이처럼 참회의 눈물을 흘렸으면 좋겠습니다. 

B. 지식과 총명 안에서 

다음으로 사도는 지식과 모든 총명 안에서 그 일을 하라고 말합니다. 사랑이 어떻게 풍성해질 수 있겠느냐에 대한 사도의 대답인 것입니다. 여기에 나오는 총명은 미학이라는 뜻을 가진 영어 aesthetics의 어원인 히랍어 아이스테시스입니다. 곧 총명은 무엇인가 통찰해보는 것입니다. 아름다운 풍경을 보고 아름답다고 할 때 그것을 말로 설명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느낄 수 있지 않으십니까? 그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우리들이 직시하면서 하나님이 왜 아름다우신지 몰라도 그분의 진리가 아름답고 하나님의 속성의 나타남이 아름답고 하나님의 성품이 예쁘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것은 공부를 통해서 얻는 것이라기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어린 아이처럼 순전한 마음으로 믿는 대서 발생하는 통찰입니다. 지식이 이론적인 교리에 대한 깨달음이라면 총명은 믿음을 통한 직관인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마음에 계속 생겨나게 될 때 이것은 사랑을 끊임없이 점점 더 불러일으키는 재료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조나단 에드워즈 목사님은 이것을 놓고 우리 안에 일어나는 사랑의 감정이 불길이라면 지식과 총명은 그 불 속에 던져지는 장작이라고 말했습니다. 쌓아놓은 장작은 저절로 불을 일으킬 수 없듯이 교리적 지식이나 하나님 성품에 대한 어떠한 믿음 자체가 하나님을 사랑하게 만들어주지 않습니다. 성령께서 바로 그 지식과 그러한 총명의 내용과 함께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개혁파 정통주의 신학자들은 성령의 역사와 말씀을 경첩에 비유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깨달음과 믿음의 성경적인 통찰을 통해서 성령이 역사하신다고 본 것입니다. 성령은 총명과 지식으로 밝혀지는 성경 지식과 더불어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논증은 유혹의 화살이 언제나 인간의 지성을 먼저 공격하는 문제와도 관련이 있습니다. 


Ⅲ. 결론: 영적으로 자라가라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알고 있는 신앙의 세계는 지극히 일부분입니다. 왜 배우려고 하지 않습니까? 더 많은 지식과 총명이 있어야 합니다. 사랑의 감정은 논리를 추방하고 논리의 지식은 사랑의 불을 끈다고 생각하십니까? 성경은 그렇게 설명하지 않습니다. 너희 마음에 사랑이 있을 지라도 지식과 총명이 없다면 곧 식을 것이고 너희 사랑이 작은 것 같아도 끊임없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총명의 빛이 주어진다면 그것을 연료로 하여 너희 사랑이 타오를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다하여 신앙의 본질로 돌아가십시오. 변화받고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면 가장 나쁜 일이 가장 좋은 일을 위한 수단이 됩니다. 그 때문에 성경이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8:28)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여러분은 영적으로 자라가야 합니다. 그를 위해 새로운 계기가 필요합니다. 마음과 성품을 다하여 주님을 새롭게 만나는 성도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김남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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