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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마리아인의 우회 (눅 10:2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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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리아인의 우회 (눅 10:29~37) 
 
 
❚우선순위의 전환

1886년 미국 메사추세스 주의 작은 마을인 웨스트우드에 에드워드 스미스 어포드(Edward Smith Ufford)라는 목사님이 목회하고 있었습니다. 목사님은 목회하는 틈틈이 근처에 있는 낸터켓(Nantucket) 해변에 나가곤 했는데 이 해변은 변덕스러운 날씨와 해변 곳곳에 솟아있는 암초로 악명 높은 곳이었습니다. 

바람이 불고 파도가 치는 날이면 수많은 배들이 이 암초에 부딪혀 산산조각이 나고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워낙 난파사고가 많이 일어나다보니 이 해변에는 ‘해난구조본부’가 설치되어 꽤 많은 구조대원들이 상주하고 있었습니다. 이 구조대원들이 해변에 난파사고가 났을 때 그야말로 목숨을 걸고 난파당한 선원들을 구조하는 모습은 정말 감격스러운 장면이었습니다.

어느 날 이 어포드 목사님의 친구가 와서 자기가 직접 목격한 장면을 말해주었습니다. 배 한 척이 난파해서 구조대원들이 부지런히 구조활동을 벌이는데 배를 구하는 방법이 해변에서 큰 총을 가지고 굵은 밧줄을 쏴서 배에 걸치게 하더라는 것입니다. 이 배로 해변과 배를 연결해서 난파당한 선원들을 구해낸 것입니다. 

이 굵은 밧줄을 구조대원들은 ‘생명줄’(Life Line)이라고 불렀습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목사님은 그때로부터 구조활동에 큰 관심을 가지고 구조본부를 자주 방문하곤 했습니다. 어느 날 어포드 목사님이 구조본부를 방문했을 때 마침 구조훈련을 하는 광경을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 구조대장이 대원들을 향해 이렇게 외치는 것이었습니다. “생명줄을 던져라(쏴라)!” 이 모습을 목격한 어포드 목사님은 큰 영감을 받습니다. 

“그렇다. 저 구조대원들이 물 건너 생명줄을 던지는 것처럼 저 죽음의 바다에서 영적으로 죽어가는 영혼들을 향해 구원의 줄, 생명줄을 던져야 한다.” 바로 이 영감을 담아 쓴 찬송이 오늘 설교 마치고 부를 찬송가 500장 “물 위에 생명줄 던지어라”입니다. 그렇습니다. 내가 생판 모르는 사람이 물에 빠져 죽어갈 때도 우리는 마음이 급해집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전혀 모르는 사람이 물에 빠져 죽어갈 때도 목숨 걸고 물에 뛰어들어 구해냅니다. 하지만 이것은 대단히 위험한 행동입니다. 내가 아무리 수영을 잘해도 급한 마음에 뛰어들었다가는 물에 빠져 허우적대는 사람이 나를 붙들고 늘어져서 함께 빠져 죽는 일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이럴 때는 주변에 줄이 있을 때 던져주는 것이 최고의 방법입니다. 이 줄이 바로 ‘생명줄’인 것입니다.

그런데 하물며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 가족이나 친구나 소중한 사람이 물에 빠져 죽어가고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당연히 만사 제쳐놓고 그 사람부터 구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보다 더 급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생명이 달려 있는데 말입니다. 그 사람 생명 구하는 일보다 더 급한 일은 없습니다. 생명이 걸린 상황이면 그것이 가장 급한 상황인 것입니다.

제가 여러 번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선순위”라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입니다. 여러 가지 일이 한꺼번에 생겼을 때 우리에게 우선순위라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나름대로 기준을 가지고 먼저 처리할 일과 나중에 처리할 일을 구분해 순서대로 차근차근 처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선순위를 정하는 기준은 무엇일까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시급성’과 ‘중요성’ 두 가지를 꼽아볼 수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이 일이 얼마나 급하냐(시급성) 하는 것과 또 이 일이 얼마나 중요하냐(중요성)입니다. 

이 시급성과 중요성을 가지고 나름대로 순서를 잘 정해 급하고 중요한 일부터 먼저 처리하는 것이 우선순위입니다. 여러분들도 이 우선순위라는 것을 잘 정해보기 바랍니다. “오늘 하루 해야 할 일 중에서 예배가 제일 먼저다, 그러니까 만사 제쳐놓고 예배부터 드리자, 그 다음에 중요한 일은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일이고, 그 다음엔 친구들 만나고...” 이런 식으로 순서를 정하시란 말입니다. 

물론 이 순서와 완전히 거꾸로인 분도 있겠지만 말입니다. 친구 만나고, 그 다음에 가족과 함께 시간 보내고, 시간 좀 남으면 예배드리러 가자, 이런 식으로 말입니다. 물론 이러면 안 되겠지요. 자, 아무튼 우리 모두는 나름대로 우선순위를 가지고 그 순서에 따라 일을 처리해야 합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예외가 있습니다. “오늘 이 일부터 먼저 하고, 그 다음엔 이 걸 해야지” 하고 아무리 계획을 세워도 생명이 걸린 일이 발생하면 무조건 모든 우선순위를 바꾸어야 합니다. 남의 생명 구하는 일이 생기면 기존의 모든 우선순위가 바뀌어야 합니다. 

소중한 사람이 물에 빠져 죽어 가는데 친구하고 약속한 일이 있다고 가버리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사람이 죽어가고 있는데 바쁜 일 있다며 두고 가버리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제정신인 사람치고 그런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그만큼 생명을 구하는 일은 모든 우선순위를 초월하는 가장 급하고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더욱 중요한 까닭은 생명구원이 하나님의 최고 우선순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세상 그 무엇보다 생명 구하는 것을 중요하고 급하다고 생각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내 우선순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우선순위 1순위를 따라가는 것이 마땅합니다. 생명 구하는 일을 낭비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최고순위를 따라가기 위해, 소중한 사람을 구하기 위해, 사랑하는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쓰는 시간이나 물질을 쓸데없는 짓이라고, 낭비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나 바빠요!

어떤 유대인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요즘 수요예배 때 성서지리를 배운 분들은 이 “내려간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아실 겁니다. “내려간다”는 말이 서울에서 시골로 내려간다는 뜻이 아니라 그야말로 정말 급한 내리막길을 내려가는 것을 뜻하는 말이지요? 예루살렘은 해발 800미터 산꼭대기에 위치한 도시고, 여리고는 저 아래 해발 -300미터에 있습니다. 그러니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려면 거의 1,100미터 높이를 급한 경사를 따라 내려가야 합니다. 

그 길은 가파르고 돌도 많아서 강도들이 많았습니다. 강도들은 바위 뒤에 몰래 숨어 있다가 길 가는 사람을 공격해 가진 것을 다 빼앗고 심지어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오늘 이 불쌍한 유대인도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다가 강도를 만납니다. 강도들은 유대인이 가진 물건을 빼앗고 옷까지 다 벗기고 그것도 모자라 아주 죽도록 두들겨 팹니다. 

정말 독한 강도들을 만났지요. 죽이려고 때린 건지, 때리다보니 죽을 지경이 되었는지는 잘 모르지만 아무튼 이 유대인은 죽도록 맞아서 30절에 보면 “거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다”고 합니다. 우리는 이 짧은 표현을 통해 이 유대인이 처한 상황을 잘 느낄 수 있습니다. 가진 것 다 빼앗기고 옷까지 홀랑 벗겨 가 알몸에다가 무엇보다 생명까지 위험한 급박한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잘 아시는 것처럼 그 자리를 지나가던 제사장과 레위인은 어떻게 합니까? 두 사람 다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갔다”(31, 32절)고 합니다. 왜 이 절박한 사람을 보고도 피해 지나갔을까요? 성경에는 그 이유가 나와 있지 않습니다만 추측해 볼 수는 있습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두 사람 다 정말 바빴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제사장이나 레위인이라면 모두 예루살렘 성전에서 일하는 사람들 아닙니까? 

그러니까 이 두 사람이 이 길을 지나간 것은 성전에 근무하러 예루살렘 쪽으로 올라가는 길이었거나 성전 근무를 마치고 여리고 쪽으로 내려가는 길 중에 하나였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뭐가 그리 바빴을까요? 근무시간이 다 되어가서 너무 마음이 급했을까요? 저 사람 불쌍하긴 한데 나는 엄연히 성전에서 중요한 일을 맡은 제사장이요 레위인이니까, 내가 안 가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수 없으니까 미안하지만 두고 갈 수밖에 없다고, 나 아니라도 다른 사람이 꼭 도와줄 거라고 생각했을까요? 아니면 이제 겨우 근무 끝나고 집에 돌아가는데 몸은 피곤해 죽겠지, 가족은 빨리 보고 싶지, 미안하지만 두고 갈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을까요? 하지만 이 두 가지 다 변명에 불과합니다.

버클레이라는 주석가는 이런 날카로운 질문을 합니다. “만약 당신이 주일예배에 참석하려고 부지런히 가는 길이라고 칩시다. 예배시간이 다 되어가서 서둘러 가는 길에 교통사고 당한 사람을 만났습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여러분 한 번 대답해 보세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예배 시간에 맞춰 가야 하니까, 이하준 목사한테 예배가 세상에서 제일 먼저라고 배웠으니까 미안하지만 그 사람 놔두고, 다른 사람이 도와주리라 기대하고 지나가야 할까요? 아니면 예배 시간에 늦더라도 그 사람 도와줘야 할까요? 여러분, 생명이 중요합니다. 

물론 이런 상황이 여러분이나 저에게 실제 일어나지 않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만약 이런 일이 생긴다면 생명부터 구하십시오. 하나님이 “너 어떻게 나한테 예배 안 드리고 그 사람부터 구하냐?”고 책망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이 말 듣고 괜히 “이 목사가 예배 늦어도 된단다” 하지 마세요. 저는 지금 생명을 구하는 일에 대해 말하는 겁니다.

또 이런 생각도 듭니다. 제사장이나 레위인은 강도 만난 자를 돕는 것이 낭비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지금 나도 바쁜데, 빨리 가봐야 하는데 왜 저 사람을 위해, 생판 얼굴도 모르는 사람을 위해 내 귀중한 기간을 낭비해야 해? 이렇게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낭비가 싫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사마리아인은 어떻게 합니까? 똑같이 그 곳을 지나가다가 강도 만난 자를 봅니다. “보는” 것까지는 제사장이나 레위인이나 똑같습니다. 그런데 제사장과 레위인은 보고도 바빠서, 낭비하는 것이 싫어서 그냥 “지나갔습니다.” 하지만 사마리아인은 똑같이 보고 어떻게 합니까? 33절을 보세요. “보고 불쌍히 여겨”라고 했습니다. 반응이 전혀 다릅니다. 

이 불쌍히 여겼다는 말은 단순히 보고 동정심이 들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사마리아인은 지금 강도 만난 유대인을 보고 상황을 판단한 것입니다. 지금 상황이 어떤 상황입니까? 저 사람 강도 만나 있는 것 다 빼앗기고 옷까지 홀랑 벗고 있으니 물론 불쌍하지요.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지금 저 사람이 맞아서 거의 죽어간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죽어가는 사람을 보고 불쌍히 여기는 것 누가 못합니까? 강도 만난 사람 보고, 죽어가고 있는 사람 보고 참 불쌍하다고 생각하는 것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솔직히 앞서 지나간 제사장이나 레위인도 불쌍한 마음 정도는 들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단순히 불쌍한 마음만 들고 끝나면 아무 소용없습니다. 불쌍하다는 마음이 든 후 구체적으로 내가 어떤 행동을 하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불쌍하긴 한데  내 일이 더 급해서, 낭비가 싫어서 그냥 지나갑니다. 하지만 사마리아인은 불쌍한 마음이 든 후에 구체적인 행동에 착수합니다. 그를 도운 것입니다. 그의 생명을 구한 것입니다.

❚거룩한 낭비

여기서 우리는 사마리아인이 왜 대단한 사람인지 깨달아야 합니다. 그는 무려 세 가지 한계를 다 극복한 사람이었습니다.

첫째, 유대인인데도 도왔다는 사실입니다. 유대인은 사마리아인들을 정말 무시하고 사람 취급 안 했습니다. 이방인과 유대인 사이에 태어난 혼혈이라며 개 취급 하고 정말 경멸했습니다. 그런 유대인이 지금 강도 만나 쓰러져 있는데 평상시 감정이라면, 내가 그동안 당한 무시와 억울한 일 생각하면 그냥 지나갈 법도 한데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둘째로, 사마리아인은 정말 바쁜 사람이었습니다. 성경에는 그가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인지 안 나와 있지만 34절에 나온 것처럼 자기 짐승, 나귀라고 생각되는데, 이 나귀를 끌고 다닌 것을 보면 그는 아마 상인, 즉 물건을 사고파는 장사였을 것이라고 봅니다. 그런데 장사라면 시간이 금 아닙니까? 그야말로 시간이 돈이지요. 잠시의 시간도 낭비하면 안 됩니다. 

예루살렘으로 가던 길인지, 여리고로 가는 길이었는지 모르지만 한시라도 빨리 가서 장사해야 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바쁘기로 치면 제사장이나 레위인보다 더 하면 더 했지 덜하지는 않은 사람입니다. 게다가 혹시 이 자리에서 꾸물거리고 있다가 아까 출몰한 강도라도 다시 만나면 자기 가진 것 다 빼앗기고 이 사람처럼 목숨까지 위협 당할 지도 모르는 급박한 상황입니다. 강도 만난 자를 본 그 짧은 순간에 어떻게 이렇게 많은 생각을 했겠냐고요? 충분히 가능합니다. 장사하는 분들은 머리가 빨리 돌아가야 합니다. 강도 만난 자를 본 순간 머리가 핑핑 돌아가서 손해와 이익 계산이 쫙 나오지요. 그런데 이렇게 바쁜 사람이, 이렇게 손해와 이익에 민감해야 할 사람이 지금 엄청난 손해를 보고 있습니다.

셋째, 그러기에 사마리아인은 엄청난 낭비도 감수한 것입니다. 이 사마리아인이 지금 얼마나 손해를 많이 보고 낭비를 많이 하고 있는지 살펴볼까요? 34절을 같이 읽읍시다.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니라

34절 한 절에만도 이 사람이 얼마나 많은 일을 합니까? 손해와 이익 차원에서 살펴봅시다. 우선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지요. 이 기름과 포도주는 일종의 구급약 같은 역할을 합니다. 먼 거리를 다니며 장사를 하다보면 어떤 불의의 사고를 당할지 모르니까 늘 지니고 다녔겠지요. 만약의 상황에 내가 쓰려고 준비한 포도주와 기름을 이 사람을 위해 씁니다. 큰 낭비지요. 

둘째로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에 데리고 갑니다. 그 시간이 얼마입니까? 시간이 돈인 사람이 시간을 엄청나게 낭비합니다. 마지막으로 주막에 가서 꼬박 하룻밤을 직접 돌보아주다가 그것도 모자라서 35절에 보면 이튿날 떠날 때 주막 주인에게 두 데나리온을 줍니다. 내가 지금 급한 일이 있어 가야 하는데 내 대신 이 사람 좀 돌봐달라고 말입니다. 만약 비용이 더 들면 나중에 돌아와서 갚겠답니다. 이 말은 급한 일 마치는 대로 다시 주막에 들르겠다는 뜻입니다. 

한 데나리온이면 당시 일군이 하루 품삯에 해당됩니다. 당시 하룻밤 여관비는 12분의 1 데나리온이었다고 하니 두 데나리온이면 자그마치 24일치 여관비를 주고 간 셈입니다. 보세요. 사마리아인이 어떤 낭비를 했습니까? 이 생판 모르는 사람을 위해, 그것도 자기를 그토록 멸시한 유대인을 위해 시간 낭비해요, 엄청난 돈 낭비해요, 관심까지 낭비해요 낭비가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참 바보 같은 사람이지요. 아마 제사장이나 레위인이 보면 바보라고 놀렸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사마리아인의 낭비는 그냥 낭비가 아닙니다. ‘거룩한 낭비’입니다. 왜 거룩한 낭비입니까? 그냥 나 자신을 위해서, 혹은 내 욕심을 채우기 위해 했다면 그냥 쓸데없는 낭비일 뿐이지만 다른 사람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한 낭비이기에 거룩한 낭비인 것입니다. 앞서서 분명히 말씀드렸습니다. 우리의 우선순위가 중요하지만 이 모든 우선순위는 생명 앞에 다 바뀌어야 한다고 말입니다. 물에 빠져 죽어가는 가족 두고 다른 약속 급하다고 가는 사람 없듯이 다른 사람의 생명 앞에서 손해 이익 따지고, 우선순위 따지고, 낭비냐 아니냐 따지는 것은 잘못입니다. 생명구원은 그만큼 모든 우선순위를 초월하는 가장 급하고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다른 사람의 생명을 구하는 것보다 중요한 일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전도 이론 중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투자를 해라!”입니다. 사마리아인이 한 행동과 똑같습니다. 거룩한 낭비를 하라는 것입니다. 그 사람 생명 구하기 위해 아낌없는 투자를 하라는 것입니다. 사마리아인처럼 시간 투자, 물질 투자, 관심 투자 세 가지 투자를 하라는 것입니다. 세 가지 거룩한 낭비를 하라는 것입니다. 전도하겠다면서, 한 사람의 영혼을 구하겠다면서 나는 조금도 손해 안 보고 하겠다는 것은 거짓입니다. 그 사람 생명 구하기 위해 들어간 시간과 돈과 관심이 낭비처럼 여겨진다면 절대 전도 못합니다. 생명 구원의 역사는 일어날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요즘 시리즈로 설교하고 있는 ‘거룩한 우회’(迂廻)가 무엇입니까? 지금 사마리아인은 거룩한 우회를 하고 있습니다. 자기 갈 길도 바쁜데, 그래서 제사장이나 레위인처럼 보고도 그냥 피해 지나가면 가장 쉽고 빠른데, 손해보고 낭비할 일도 없는데 이 사마리아인은 먼 길을 삥 돌아갑니다. 

시간 낭비하고 돈 낭비해가며 강도 만난 자를 싣고 주막에 가서 치료해주고 나중에 볼 일 보고 또 돌아온 것입니다. 무엇을 위한 우회입니까? 무엇을 위한 낭비입니까? 바로 세상에서 가장 급하고 중요한 생명 구하는 일을 위해서입니다. 지금 우리가 생명줄을 던져야 할 대상들은 누구입니까? 우리가 “보고” 그냥 피해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보고” 죽어가는 것이 불쌍해서 내 가진 것을 투자하고 낭비해야 할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별 생각 없이 혼자 “이만하면 잘 믿고 사는 거지” 하고 살면 안 보이지만, 조금만 영적인 눈을 뜨고 주변을 둘러보면 나에게 살려달라고 손을 휘저으며 물에 빠져 죽어가는 사람들이 도처에 널려 있습니다. 강도 만나 죽어가면서 제발 도와달라고, 나 좀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지금 내 주변에 고통과 아픔 중에서 내 기도와 관심과 도움이 절실히 필요한 사람은 또 누구입니까? 그 사람들을 위해 주저하지 않고 생명줄 던지는 여러분 되기 바랍니다. 

어떤 생명줄입니까? 내가 가진 것을 던지면 됩니다. 내가 가진 것 가운데 소중한 것을 던지고 낭비하면 그것이 곧 그 사람을 구하는 생명줄이 될 것입니다. 그 한 영혼을 살리기 위해 주님은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자신의 가장 귀한 생명을 아낌없이 낭비하셨습니다. 나는 그들을 위해 무엇을 낭비하겠습니까? 생명구원의 이 위대한 사업을 위해 얼마든지 더 먼 길, 더 힘든 길, 더 손해 보는 길도 주저하지 않고 우회해 돌아가는 여러분 되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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