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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생명의 떡 (요 6:3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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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떡 (요 6:33~40)


여러분, 어려서부터 교회에 다니신 성도들은 오병이어의 이적에 대하여 수없는 말씀을 들었을 것입니다.  이 오병이어의 사건이 얼마나 대단한 사건이었고, 중요한 이적이었으면, 사복음서의 기자들이 이 사건은 빼놓지 않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수많은 이적들 중에 4복음서에 모두 기록된 사건은 오병이어의 사건뿐입니다.  그만큼 널리 알려진 사건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도 오병이어의 사건이 있은 연후에 말씀하신 것이기에 먼저 오병이어의 사건을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우리 예수님은 가버나움을 중심으로 하여 전도하셨는데, 많은 사람들이 병 고침 받기 위하여 몰려들었고, 주님은 찾아오고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바쁜 가운데서도 개인적으로 기도하시기 위하여 한적한 바다 건너편으로 가실 때가 있었습니다.  개인적으로 기도도 하시고, 휴식도 필요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배를 타시고, 갈릴리 바다, 곧 디베랴 바다의 건너편 벳세다 지역으로 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잠시도 쉴 수 없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벳세다에 계신다는 소문을 듣고 몰려드는데 큰 무리가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병자들을 고치신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옛날에는 무슨 병원이 있나요. 의학이 발전되지 않는 때이니 전문 의사가 없었습니다.  그러니, 사람들은 예수님에게 병고침 받기 위하여 찾아온 것입니다.  주님은 38년 된 중풍병자를 고치셨습니다.  눈먼 자를 고치시고, 귀신들린 사람을 살리시고, 말 못하는 사람을 말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에게 찾아온 병자들을 그냥 돌려보내신 적이 없다는 말을 듣고 수많은 병자들이 몰려들었습니다.  

때는 유월절이 가까웠습니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려는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는데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가려고 하였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육로로, 또는 배를 타고 예수님이 계시는 벳세다로 나왔습니다.    모처럼 조용하게 휴식을 취하고, 개인기도의 시간을 가지려고 하였는데, 예수님은 계속하여 병자를 고치시고 하나님의 나라의 말씀을 전파하셔야했습니다.   

그래도 예수님은 사람들을 돌아가라고 하지 않고, 목자 없는 양과 같이 유리방황하는 모습을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귀하게 여기셨고, 불쌍히 여기셨고, 한 영혼이라도 버리시지 않았고, 어린 영혼까지도 소중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보셨습니다.  

말씀을 계속해서 선포하시고, 가르치시다 보니 많은 시간이 흘렀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식사를 하지 못하였므로, 허기짐으로 지친 기색이 보였습니다.  해가 저물어갈 때에 제자들이 예수님께 와서 말했습니다. “이곳은 빈들이요 날도 저물어가니 무리를 보내어 두루 촌과 마을로 가서 무엇을 사 먹게 하옵소서”라고 했습니다.    이때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했습니다.  그 때에 예수님 앞에는 빌립이라는 제자가 있었습니다.  주님은 빌립에게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심은 친히 어떻게 하실 지를 아시고 빌립을 시험하고자 하심이었습니다.  

빌립이 말씀드립니다.  “빌립이 대답하되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빌립이란 제자는 매우 합리적인 사람이요, 그는 수많은 사람들을 보았지, 예수님을 바라보지 못하였습니다.    이 문제를 놓고 신앙적으로 풀어가지 못하고, 세상적인 눈으로 판단하면서 부정적인 말만 늘어놓고 있습니다.   빌립의 계산은 매우 합리적인 계산이요, 현실적으로 받아들여야 했습니다.  우리는 빌립을 보면서 합리적이며, 건전한 이해력은 알아주겠지만, 주님을 모신 제자로서 영적인 눈이 어두웠습니다.  한 마디로 신앙이 없습니다.   세상에는 모든 것을 돈으로 해결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현실을 냉철하게 직시하면서도 우리의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 주님의 능력을 믿어, 그 믿음으로 승리하여야 합니다. 

우리는 사도바울처럼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일을 할 수 있느니라”(빌4:13)고 해야 합니다.  가브리엘 천사가 마리아에게 말씀하실 때에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하지 못하심이 없느니라”(눅1:37)고 하셨습니다.   우리 주님이 귀신들린 아들의 아버지에게 하시는 말씀에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막9:23)고 하셨습니다.  우리 주님이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 중에 마가복음10:27에서 “예수께서 그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는 그렇지 아니하니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그 때에 제자 중에 동생인 안드레가 예수께 말씀드렸습니다.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사옵니까?”(요6:8) 라고 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안드레와 같은 사람이 참으로 좋은 사람이라고 봅니다.  그는 형을 주님 앞에 인도하였지만, 항상 형님 뒤에 가려지더라도 만족하고 있습니다.  오늘도 모든 제자들이 우왕좌왕하고 있을 때, 한 아이가 가지고 있었던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예수님 앞에 나아오고 있습니다.  우리는 안드레와 같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문제만 보지 말고, 가능성을 열어가는 사람이 되어야겠습니다.   

보리떡, 보리빵은 가난한 사람들의 양식이었습니다.  물고기라고 하는 것도 크고 좋은 고기도 아니고 작은 물고기였습니다. 

예수님은 많은 사람들로 잔디에 앉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떡을 가지고 감사기도 드리시고는 앉아 있는 자들에게 나누어 주시고, 물고기도 그렇게 그들의 원대로 주셨습니다.  제자들은 광주리에 떡과 물고기를 받아가지고 나가서 제자들에게 나누어주었습니다.  예수님의 손에서 위대한 능력이 나타났으니, 그 능력은 창조의 능력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손에는 항상 보리떡이 들려 있었고, 제자들에게 나누어주실 때에는 엄청난 핵분열이 일어나 광주리에 가득가득 채워주셨습니다.  

오늘 예수님의 능력에 대한 말씀을 다 드릴 수도 있고, 제자들의 믿음에 대한 말씀이나, 오병이어가 주는 의미에 대하여 말씀드릴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런 능력을 행하시는 예수님은 과연 누구신가 하는 문제입니다.  

다음 날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아 나섰습니다.  바다 건너편에 가보니, 예수님이 계시지 않습니다. 가버나움에 가서야 예수님이 거기 계신 것을 알고는 “랍비여 언제 여기 오셨나이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따라가기만 하면 오늘도 떡을 얻어먹을 것이요, 예수를 왕으로 모시기만 하면 우리 민족의 먹고 사는 문제는 해결된 것이나 다름없다는 생각을 하고 찾아온 것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메시아대망 사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메시야로 생각하였습니다. 

어제 오병이어로 이적을 베푸신 것은 말할 수 없는 기적이요, 엄청난 사건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능력이 많으시는 말을 들었지만, 그렇게 능력이 많으신 분이신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그 분의 손은 하나님의 손이었습니다.  예수님만 따라다니면 먹고 사는 것은 문제도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단호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인치신 자니라”(요6:26-27)고 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은 표적을 보았으나, 표적의 의미도 모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썩는 양식이 무엇이며,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은 무엇입니까?  썩는 양식이란 육신을 도모하기 위한 모든 일을 가리킵니다.  재물이라는 것도 우리 생활에 꼭 필요하고 요긴하지만, 영원한 생명에 대한 해답이 아닙니다.    우리가 건강을 지켜야 하고 건강해야 주의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그래도 그 건강은 우리의 해답이 아닙니다. 

우리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지어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코에 생기를 불어넣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사람은 육적인 배고픔이 있고, 영적인 배고픔이 있음도 알아야 합니다.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은 우리 주님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을 믿으면 영생하게 하십니다.   우리 주님은 창조와 구원의 능력으로 우리에게 영생을 주십니다. 

사람은 하루 세 때 먹어야 살아갈 수 있습니다.    여기에는 동서고금에 남녀노소 어떤 한 사람도 예외가 없습니다.  여러분, “목구멍이 포도청”이란 말을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옛날에 포도청이란 가장 무섭고 두려운 곳이었습니다.   옛날에 포도청에서 나왔다고 하면 벌벌 떨었습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려고 하면 누구나 먹고 사는 문제에 부딪히기 마련입니다.  포도청이 죄인을 향하여 호령하듯이 목구멍이 시키는 일이라면 꼼짝 못하고 끌려 다니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호구지책이 가장 시급한 일이요, 쌀독에서 인심 나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은 먹어야 사람이 됩니다. 

사실 오병이어로 5천명을 먹이신 사건은 엄청난 사건이지만, 다음 날이 되면 또 배고파야하고 한번 공짜로 얻어먹었다고 하여 문제가 다 해결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한번은 엄청난 사건이요, 굉장한 사건이지만 사람의 먹는 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되는 것도 아닙니다.  

오늘 예수님이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여주신 것은 이러한 기적을 통하여 예수님이 누구신가? 하는 문제를 바라보라고 하십니다.  하루 식사를 해결해주었다고 또 다시 기적을 바라고 예수님을 따르지 말고, 예수님을 깊이 알아야 합니다. 


1.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우리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라. 이 양식을 인자가 주리라”(요6:27)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듣고 물었습니다.  “그들이 묻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까” 라고 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오해하여, 영생의 대가(代價)로서 인간적인 업적을 생각하였습니다.   영생을 얻으려면 하나님의 많은 일들을 감당해야 하고, 어떤 공로가 있어야 영생을 얻는 것으로 판단하고,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까”라고 물은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느냐고 물었던 것입니다.  노동을 해야 하고, 선한 공로를 쌓아야 하고, 고된 노동으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었습니다. 

오늘도 선한 마음을 가지거나 선한 행동으로 구원받을 수 있다고 말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선한 이는 하나님 한 분뿐이십니다.  사람이 선하면 어디까지 선할 것입니까?  한번 선한 것으로 영원히 선하다고 할 수 있습니까?  무슨 공로를 쌓아야 구원받는다면 정말 구원받을 사람이 있겠습니까? 

그 때에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요6:29)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고, 영생을 얻는 것은 하나님이 보내신 우리 주 예수님을 믿는 것이요, 그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이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분, 우리 구주 예수님이 하나님의 구원을 다 이루어주셨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 하나님이 보내신 아들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다고 할 때, 하나님이 아들을 보내어 우리의 구원을 성취하시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아들을 불신하는 것은 아버지를 불신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다시 묻고 나옵니다.  “그러면 우리가 보고 당신을 믿도록 행하시는 표적이 무엇이니까? 하시는 일이 무엇이니까? 기록된 바 하늘에서 그들에게 떡을 주어 먹게 하였다 함과 같이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나이다.”(요6:30-31)라고 달려들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여전히 예수님이 한번 더 권능을 행하시고, 떡을 먹게 해달라고 조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 모세는 우리 조상들이 광야에 있을 때에 40년 동안 만나를 내려주어 먹게 하였습니다.  당신이 그렇게 만나를 내려주어 먹게 할 수 있는 사람이라도 됩니까?  지금 이 자리에서 다시금 떡을 만들어 우리도 먹게 하고, 당신이 과연 모세와 같이 하나님이 보내신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믿게 하라’고 달려들었습니다.  

이적이라는 것은 때로는 위대한 능력을 나타내는 수단이 되지만, 이적의 가치란 크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은혜를 받아야지, 이적을 보았다고 하여도 그 때뿐이지, 믿음이 오래가지 않습니다.  

이때에 예수님은 그 만나를 먹이신 것이 모세가 한 일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모세가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떡을 준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참 떡을 주시나니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요6:32-33)고 하셨습니다.  모세 시대에 만나를 먹여주신 것은 하나님이 참 떡을 주신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신 것이었습니다.  우리 하나님이 참 떡이 되십니다.  

유대인들은 영생을 주는 떡, 하늘로부터 오는 떡, 생명을 주는 떡을 원했습니다.  “그들이 이르되 주여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34)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주시는 영원한 생명을 위한 떡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2.  예수님은 생명의 떡과 음료가 되십니다. 

오늘 예수님은 당신이 누구이시며, 무엇을 위하여 이 세상에 오셨는지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요 6:35)고 하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생명의 떡이 되십니다.     예수님에게 돌아온 자는 결코 주리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은 성도들은 목마르지 않습니다.  

지금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큰 이적을 행하시는데도 그 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지 아니합니다.  36절 말씀에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나를 보고도 믿지 아니하는도다 하였느니라”고 지적하셨습니다.  

오늘에도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하신 일을 듣고 알면서도 주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우리의 구세주가 되시는 것을 믿지 아니합니다. 

그래도 예수님은 한없는 사랑으로 기다리고 계십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요 6:37)  우리 주님은 당신에게 나아오는 자들은 결코 내쫓지 아니하십니다.  그리고 지금도 한 사람도 멸망하지 않고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딤전2:4에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고 하셨습니다.  

벧후3:9에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고 하셨습니다.  


3.  하나님의 뜻은 아들을 믿어 구원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 주님이 이 세상에 내려오신 귀한 뜻을 말씀하시는데,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요6:38)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뜻을 행하시지 않고, 당신을 이 세상에 보내신 아버지의 뜻을 행하시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습니까?  39절 말씀에서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40절입니다.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우리 주님은 마7:21에서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졌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뜻은 우리 구주 예수님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것이었습니다.  

마지막 날, 하나님의 역사적인 심판이 있는 날, 우리 주님이 천사장의 호령과 나팔 소리로 좇아 강림하시는 날에 다시 살아남을 입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아들 예수님을 믿어 영원한 생명을 받았으며, 그 생명은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풍성한 생명입니다.  

오병이어의 이적을 통하여 우리는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영생하는 양식이 되십니다.   하나님의 일이란 그의 아들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란 아들을 보고 믿어 영생을 얻는 것입니다.   

우리는 부모님을 통하여 한번 이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그것은 한번 태어난 것이지, 계속하여 먹어야 하고, 공급받아야 생명이 유지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먹는다고 하는 것은 생명을 먹는다는 말과 같습니다.  

먹고 산다는 것을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로 들어가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 안에서, 우리 주님을 사랑하며 주님과 호흡하고, 주님을 먹고 마시듯이 내 안에 모시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일용할 양식이십니다.  우리는 매일 세 번씩 식사하는 것처럼 우리도 날마다 때마다 예수님을 묵상하며, 예수님으로 구원받은 것을 감사하며, 예수님을 만족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나의 생명이십니다.  예수님은 나의 사랑이십니다.  예수님은 나의 전부이십니다.  예수님은 나의 살아가는 이유요, 죽을 수 있는 이유가 되십니다.  예수님은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 사랑합니다.  

우리는 육신의 양식을 먹어야 사는 것처럼 영의 양식인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풍성한 생명을 유지합니다.    예수님을 한번 모셔들인 것으로 만족하지 말고, 계속해서 주님과 교통하며, 주님을 사랑하며, 육의 양식을 먹는 것처럼 주님의 말씀을 먹고, 주님을 내 안에 모시고 주님과 연합하여 살아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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