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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외국인과 나그네의 인생 (히 11:1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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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인과 나그네의 인생 (히 11:13~16)


영국의 이중국적 허용 정책에 따라  한국과 영국의 국적을 함께 가진 분들이 있습니다. 영국에 정착하면서 한국 국적을 포기하기는 하지만 언제라도 돌아갈 기회가 있으면 다시금 한국 국적을 회복할 마음으로 잠시 영국 시민권자로 사는 분들도 있습니다. 영국 시민권을 가지고 이 땅에서 살지만 여전히 몸 속에는 한국인의 피가 흐르고 고국의 부모형제에 마음을 두고 사는 사람은 표면상으로, 행정상으로는 영국 시민이지만 마음으로는 한국인으로 사는 이중국적자입니다. 그래서 이 땅에서는 외국인이요 나그네로 살고 있습니다.

바울도 유대인이면서 로마 시민권을 가진 이중 국적 소지자였습니다. 그 시대에 얻은 로마 시민권은 한때 아메리칸 드림을 안고 미국으로 건너온 이민자들이 갖은 고생 끝에 미국 시민권 얻은 것 이상으로 명예스러웠던 시민권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진정으로 자랑한 시민권은 로마 시민권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이었습니다.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으니 우리는 그곳으로부터 구주로 오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린다’ (빌3:20)고 하였습니다.  유대인으로서 혹은 로마인으로서 이 땅에 살고 있지만 최종 시민권은 영원한 하늘나라에 두고 사는 나그네 정신이 바울에게 강하게 드러납니다. 언제라도 하나님께서 부르시면 이 땅의 생을 마감하고 하늘나라 입국을 준비하고 살던 나그네였습니다.

에베소서 2장에서 이방인이었던 에베소의 성도들에게 말하기를, ‘여러분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그때에 여러분은 육체로는 이방인이요, 무할례자였고, 그리스도와 상관이 없었으며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었습니다.  약속의 언약에 대하여 외인이었고 세상에 소망이 없었으며 하나님도 없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여러분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이방인과 유대인 사이의 막힌 담을 허셨고 서로 하나가 되게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여러분은 외인도 아니고 손님 (나그네)도 아니며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가족이 되었습니다.’ 고 선언합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을 대하여는 나그네와 외국인으로 살지만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는 시민권을 가진 백성이요 하나님의 가족으로 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정식 시민권자가 되어 그 나라 백성의 권리를 누리는 은혜 입고 삽니다. 더 이상 이 땅의 화려함에 미련을 두거나 인간적 성공을 자랑거리로 앞세우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가 친히 모퉁잇돌이 되어 이방인과 유대인을 하나로 이어주셨습니다.  예수 안에서 더 이상 나뉨이 없고 둘이 함께 하늘나라의 동등한 시민이 되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이중 국적자입니다.   영국과 한국이 아니라 이 땅과 하늘나라를 동시에 살고 있는 이중 국적자들입니다.   

이 땅에 붙박이로 사는 것을 최종 목표 삼는 사람은 여기 이 땅에서 늘어나는 재산과 권력과  명예만을 위해 삽니다. 오로지 땅의 일만 생각합니다. 오늘 나에게 이득이 되는 일은 무엇일까 거기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오늘 얻은 것으로 내일 어떻게 즐기며 편리함을 누릴까 그리고 나를 존귀한 자로 만들어주고 있는 그것들을 어떻게 계속 움켜쥐고 유지하며 살아갈까 거기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그래서 내일을 준비하는 계획성이 치밀하고 자신감도 있습니다. 하지만 땅의 것만 생각하는 사람들이 인생을 멀리 내다본다면 내가 죽는 날, 딱 거기까지 뿐입니다.   그 다음은 내 알바 아니거나 나와는 상관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고국을 떠나 영국에 살고 있는 우리는 몇 개월 혹은 1년 정도 단기간 머무는 사람이든 몇 년 혹은 수십년 장기간 정착하고 사는 사람이든 모두가 나그네 삶의 의미를 나름대로 체득하며 살고 있습니다. 외국 유학생활을 이스라엘 백성의 삶에 비유하여 광야 생활이라고 합니다. 나그네 삶이라는 의미에서 그 말에 공감이 갈 때가 많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광야는 평생 머무는 곳이 아니라 언젠가 떠나야 하는 장소였습니다. 광야에서 천막을 치고 살다가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움직이면 출발 신호로 알고 서둘러 짐을 싸고 다음 목적지를 향해 행군하였습니다. 애굽을 막 탈출했 때 엘림과 같은 오아시스를 만나 위로와 안식을 누렸으며, 도중에 시나이 사막처럼 고생스런 곳들도  통과했습니다.    오아시스나 험한 광야 그 어느 곳도 그들에게 잠시 지나가는 자리였습니다.     

여름철에 가족 여행을 떠나는 분들이 많아집니다.  호텔에 머물거나, 영국식 전통주택 코티지에 한 주간 머물거나 경치 좋은 캠핑 사이트에 탠트를 치고 쉬러가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분들 보고 거기서 아예 살라고 하면 그러겠다고 할까요? 나그네가 거쳐가는 자리는 5 star, 6 star 호텔처럼 안락하고 흥미진진한 곳이라 할지라도 때가 되면 떠나야 합니다. 경치가 아름답고 공기가 맑은 휴양지에서 야영하다가 때가 되면 텐트를 걷고 떠나야 합니다. 반대로, 거친 광야에서 물도 없고 뜨거운 열기가 사람을 혼미케 하지만 조금만 고생하고 더 견디다 보면 그 힘든 환경도 벗어날 때가 옵니다.   환경이 좋든 거칠든 그곳은 잠시 지나는 임시거처이기 때문입니다.   

몇 일 이곳을 떠나 여행하다가 히드로 공항에서 집을 향해 돌아올 때 M25를 지나 이곳의 이정표가 보이면 벌써 마음이 편안해지고, A40 도로로 접어들면서 우리 교회 앞을 지나면 이제 집에 다 왔구나 하는 안도감이 듭니다.  여기가 나의 나그네 여정의 한 지점이지만 그래도 다른 지역으로 여행을 다녀올 때는 여기가 안식처가 되어 나를 반깁니다. 사랑하는 가족이 있고 이웃들이 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원리에서 우리 모두는 짧은 인생 여정을 마치면 돌아갈 집이 있는 나그네들입니다.    그 집을 하늘 나라에 두고 돌아가는 사람도 있고, 그 집이 어디에 있는지 확인이 안 되어 여전히 방황하는 사람들도 무척 많습니다.  안타깝게도 영원한 멸망의 자리에 그 집을 건축하고 있으면 무감각하게 사는 사람들도 참 많습니다. 어디로 돌아갈 예정입니까? 

결국 몇 주째 비슷한 주제로 말씀을 드립니다. 이 세상에서 나그네와 행인으로 혹은 외국인으로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바른 자세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고백으로만 다 끝이 아닙니다. So what?   그래서 어떻게 살고 있느냐? 의 문제입니다. 믿는 성도면 성도답게, 하나님의 자녀면 자녀답게 살아야 정말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닐까요? 나는 신앙고백처럼 사는 그리스도인입니까? 길과 진리와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살기를 힘쓰는 사람인가, 새장에 갇힌 앵무새처럼 입술로만 고백하고 좁은 새장 속에서 푸드덕거리며 이 땅의 것에만 관심을 두는 사람입니까? 본향을 그리워하고 거기 가는 날을 바라보며 기대감 속에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베드로는 ‘옛날에 욕심을 좇아 살던 일을 본 삼지 말고 거룩한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은 자처럼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하였고,  ‘너희가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 (벧전1:14-17 참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자들아 나그네와 행인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벧전 2:11) 합니다.   이 땅에서 나그네로 살지만 주께서 은혜 베푸시는 그날에 주를 알지 못하고 비방하던 이방인들로 하여금 우리의 선한 행위를 보고 하나님의 거룩함을 깨달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합니다. 이것이 이 땅에 사는 나그네의 본분이요 책임입니다.   

베드로가 말하는 나그네는 외국인을, 행인은 낯선 사람을 의미하는 반복적 강조법입니다.1년 혹은 3년 비자를 받고 또 연장하며 공부하고 일하는 사람은 임시 체류자들입니다. 제한된 기간이 다 차고 체류 목적을 이루었으면 고국으로 돌아가야 하는 사람은 외국인입니다. 영주권까지 받았지만 시민권이 없는 사람은 여전히 이 나라의 국민이 아니라 외국인입니다. 공항 입국 심사대에서 1개월, 3개월 혹은 6개월 방문 스탬프를 받고 입국한 사람들은 말 그대로 방문자 혹은 여행자(행인)들입니다.   머무는 기간과 목적은 좀 다르지만 이 땅에 영주하지 않고 고국으로 돌아갈 목적으로 임시 거주하는 점에서는 모두 외국인일 뿐입니다.    

고향을 떠나온 사람들, 특히 외국에 나와 사는 사람들은 낯선 문화에 이질감을 느낄 때마다 '아, 나는 역시 나그네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곳이 아무리 안전하고 환경이 좋다 해도 입국비자를 받아 임시로 체류하는 외국인이나 잠시 거쳐가는 방문객들에게는 낯선 타향일 수밖에 없으며 내가 낳고 자란 고국이 그리워지고 언젠가 부모형제가 있는 곳으로 돌아가리라는 마음을 가지고 살게 됩니다.   이것이 나그네 의식입니다

외국인은 자국민에 비해 신변 안전에 약점을 가진 사람입니다. 자국민 우선 보호정책을 펴는 나라에서 재해나 전쟁 등 위험상황을 만나면 외국인은 가장 불안한 대상이 됩니다.   하나님 나라를 본향으로 삼고 이 세상에 대하여 외국인과 나그네로 사는 사람들은 세상으로부터 공격을 받고 위협을 당하며 버림을 받기도 합니다. 이 세상의 가치관과 기준을 거절하는 사람은 이 세상으로부터 이상하고 낯선 나그네 취급을 받기 마련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가나안 땅에서 그렇게 살았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로마제국 안에서 그렇게 살았고 우리 믿음의 선배들이 천국 소망때문에 그렇게 살았습니다. 

하늘나라 시민권을 가지고 이 세상에서는 나그네로 사는 사람은 하늘나라를 소망하며 사는 사람입니다. 죽어서 천당 가는 것만을 말하지 않고 살아서 이 땅에서 벌써 천국 시민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아브라함이 그렇게 살았고 그의 자녀 이삭과 야곱과 요셉이 그런 정신으로 살았습니다. 그들은 가나안에서 우거(寓居)하던 나그네였습니다. 이 땅에서는 하나님의 약속을 눈으로 확인하지 못했지만  하나님이 예비하신 본향을 바라보고 믿음으로 환영하였으며 그 나라를 향해 하루 하루 가까이 가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들은 마음만 먹었으면 가나안에서 벽돌 집을 짓고 가나안 사람들처럼 정착생활을 할 수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을 떠나 물이 많고 목초지가 넓게 펼쳐진 동쪽 소알 땅으로 갔던 조카 롯의 삶이 바로 그런 본보기였습니다. 눈에 보이는 물질 충만과 성공 예감 이런 것들이 결국 롯을 소돔과 고모라의 백성 중 한 사람이 되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달랐습니다. 전쟁에서 승리하고 공을 세우고 돌아온 아브라함에게 소돔 왕이 재물을 상급으로 주었습니다. 소돔 왕의 선물은 아브라함과 군사 동맹을 맺고 이제부터 외국인이 아니라 본국인 대우를 하겠으니 우리와 하나가 되어 우리 방식으로 살자는 제안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그 선물을 받고 동맹을 맺으며 그 성의 주류로 편입되어 그 사람들처럼 살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소돔 왕의 제안 뒤에 숨겨진 ‘이 세상 사랑하기 식’ 삶보다는 하나님이 약속하신 그 나라를 기다리며 사양하였습니다.  ‘천지의 주재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 손을 들어 맹세합니다.   내가 아브라함을 부자로 만들어 주었다고 당신이 말할까봐 당신에게 속한 것은 실 하나도 신발끈 하나도 받지 않겠습니다’(창14:22, 23)  단호하게 그리고 당당하게 사양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 역시 천막 생활을 하며 유목민으로 살면서 가나안 본토 사람들이 우물을 빼앗으려고 할 때 순순히 넘겨주고 다른 곳으로 이동하여 또 다른 우물들을 파면서 불필요한 싸움을 피하였던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이 없었다면 목숨 걸고 당장 그 땅을 지키려고 싸우다 정말 목숨을 버릴 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삭은 가는 곳마다 우물을 새로 파고 거기에서 하나님께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런 이삭에게 아버지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을 재확인시키시고 복을 주셨습니다.

그의 아들 야곱 역시 유목민으로 험한 세월을 살다가 사랑하는 아들을 잃는 슴픔을 당하였습니다.    그러나 20여 년 세월이 흐른 후 죽은 줄만 알았던 요셉이 애굽에서 성공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아들의 초청을 받아 애굽으로 내려가 애굽의 바로를 만나는 영광도 누렸습니다. 바로가 야곱에게 ‘당신의 연세가 얼마입니까?’  물을 때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일백삼십년입니다.   나의 연세가 얼마 못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세월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냈습니다’ 하고 대답했습니다.    

외국에서 성공 출세한 요셉의 집에서 남은 17년의 세월을 편안하게 살았지만 아들에게 남긴 마지막 유언은 ‘내가 죽거든 나를 애굽에 장사하지 말고 조상들의 무덤에 안장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애굽에서 왕 다음으로 높은 자리에 올랐던 요셉이 남긴 유언 역시 하나님께서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에 믿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너희들을 이 땅에서 인도하여 조상들에게 약속하신 그 땅에 이르게 하실 것이니 너희는 여기서 내 해골을 메고 올라가겠다고 맹세하라’ 이것이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요셉의 믿음입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떠날 때 모세는 요셉이 자손들에게 단단히 맹세하게 한 그 약속대로 요셉의 해골을 메고 애굽을 떠났습니다(출13:19). 결국 믿음의 조상들은 가나안에서든 애굽에서든 한결같이 나그네의 삶을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다윗 왕의 고백은 어떤가요? 아들 솔로몬에게 사명으로 주어진 성전을 짓기 위해 다윗이 백성들과 함께 성전 건축에 필요한 물질을 하나님께 모아 드린 후 감격에 겨워 하나님께 찬송을 하였습니다. 다윗은 그 찬송 중에 ‘주 앞에서는 우리가 우리 조상과 다름이 없이 나그네와 우거한 자입니다.   세상에 있는 날이 그림자 같아서 머무름이 없습니다’ (대상 29:15) 일국의 왕이요 부귀영화를 한 손에 쥐고 있던 다윗은 왕중의 왕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겸손히 낮추었습니다. ‘천지에 있는 모든 것이 다 주의 것입니다.   영광도 주권도 부귀와 능력이 다 주의 손에 있습니다.   우리는 다만 주의 손으로부터 받은 것으로 주께 드렸을 뿐입니다’    

나그네는 타향에서 무소유자이기도 합니다. 임시 거처에 평생 살 것처럼 꾸미고 차리고 사는 사람은 드뭅니다. 최소한의 비용을 들여 기본적으로 생활할 비품들만 갖추고 임시로 살다가 떠나는 것이 나그네 생활입니다.   한 주간 캠핑 떠나는 사람들이 일년 살 것처럼 이것저것 싸들고 간다면 이해가 되지 않을 겁니다. 여행 가방에 옷을 잔뜩 넣어갔다가 입지도 않고 고스란히 다시 가져온 경험이 있습니다.    결국 짐만 되었을 뿐입니다.   임시 생활을 할 때는 생존에 불편이 없을 정도로 기본적인 것들만 챙겨 살면 됩니다. 다만 하나님이 빌려주신 땅에서 정한 기간 동안 머물다 떠납니다. 마치 그림자 같아서 항상 머무름이 없는 존재 그것이 나그네와 행인의 삶입니다.   

다윗은 그것을 정확히 알고 고백하였으며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우리의 진정한 왕은 오직 하나님 한 분이심을 고백하였습니다. 지나온 날들도 하나님의 손에 있었고 지금 풍성한 예물을 하나님께 드릴 수 있음도 하나님의 은혜임을 고백하였습니다. 자신이 죽은 후에 아들 솔로몬을 통해 이루실 일들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손에 내일을 맡기는 믿음의 사람 다윗 역시 분명한 나그네 정신으로 살았던 사람입니다.     나그네 의식은 지나가는 사람으로 적당히, 대충 머물다 떠난다는 것은 아닙니다.    다윗의 찬송처럼 내 나그네 삶 전체 속에 일하고 계시는 하나님 앞에서 사는 삶입니다.   

이곳에 잠시 머물다 가지만 그 짧은 1년을 수 년 동안 지낸 것처럼 인상깊게 머물다 가는 분들이 있습니다. ‘목사님, 제가 교회를 위하여 뭐 도울 일, 할 일은 없습니까?’ 이렇게 자청하며 열심히 섬기다 가신 분들인데 그분들을 가만히 보면 전에 있던 곳에서도 그랬고 지금도 몸 담고 있는 곳에서 적극적으로 섬기며 삽니다. 진정한 나그네 정신이 그런 것 아닐까요?    

사람들의 성격상 적극적이고 혹은 소극적인 성향이기도 하지만 어딜 가도 항상 손님으로만 머물다 훌쩍 떠나고 기억에서 잊혀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남에게 신세도 안 지려고 하지만 그렇다고 남의 어려움을 도우려는 의지도 없이 그냥 나홀로 조용히 내 자신, 내 가족만 생각하며 사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 정도가 아니라 잠시 머무는 동안 이상한 바람만 일으키다 떠나 남은 사람들이 뒷수습을 해야만 하는 회리바람 같은 나그네들도 있습니다.  아름다운 사람은 머물다 간 자리도 아름답다고 하지 않던가요? 잠시 머물지만 내가 머문 그 현장에 아름다운 발자취를 남기고 갈 수 있고 악취를 남기고 갈 수도 있습니다. 누구든지 자리를 떠난 후에 공정한 평가를 받습니다.

결국 어디에 나의 뿌리를 두고 살고 있는가에 따라 내가 그 땅의 나그네이기도 하고 정착민일 수도 있습니다.  나의 즐거움과 만족과 관계 없이 우리 모두는 이 땅을 떠나야 할 날이 옵니다.   그리고 나그네 삶의 평가는 이 땅을 떠나는 순간 받게 됩니다.  히브리서 11장에 열거된 믿음의 조상들은 이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선언하고 저 멀리 바라 보이는 본향을 사모하며 살았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믿음의 사람들의 하나님이심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셨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준비하셨습니다.    이 세상에 대하여 나그네 의식, 외국인 의식으로 살고 있습니까?     

이 세상을 임시 처소로 이해할 수 있습니까?  언제든지 떠날 준비를 하고 보따리 풀었다 다시 싸는 일을 잘 하는 사람이 나그네 아닐까요?  나그네 의식으로 살 때 우리의 영성이 오히려 건강해집니다.  땅에 있는 것을 의지하고 자랑하기 보다 하늘의 것을 기대하고 사모하는 자세가 건강한 나그네의 영성입니다.  이 땅에서 하나님께 받은 것을 감사함으로 누리십시오.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기쁨으로 사용함으로 보다 영원한 그 나라 창고에 들이는 지혜로운 나그네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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