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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공법을 물같이 정의를 하수같이 (암 5:1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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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법을 물같이 정의를 하수같이 (암 5:18~27)


(18) 화 있을진저 여호와의 날을 사모하는 자여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날을 사모하느뇨 그 날은 어두움이요 빛이 아니라 (19) 마치 사람이 사자를 피하다가 곰을 만나거나 혹 집에 들어가서 손을 벽에 대었다가 뱀에게 물림 같도다 (20) 여호와의 날이 어찌 어두워서 빛이 없음이 아니며 캄캄하여 빛남이 없음이 아니냐 (21) 내가 너희 절기를 미워하여 멸시하며 너희 성회들을 기뻐하지 아니하나니 

(22) 너희가 내게 번제나 소제를 드릴지라도 내가 받지 아니할 것이요 너희 살진 희생의 화목제도 내가 돌아보지 아니하리라 (23) 네 노래 소리를 내 앞에서 그칠지어다 네 비파 소리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 (24) 오직 공법을 물같이, 정의를 하수같이 흘릴지로다 (25) 이스라엘 족속아 너희가 사십 년 동안 광야에서 희생과 소제물을 내게 드렸느냐 (26) 너희가 너희 왕 식굿과 너희 우상 기윤 곧 너희가 너희를 위하여 만들어서 신으로 삼은 별 형상을 지고 가리라 (27) 내가 너희를 다메섹 밖으로 사로잡혀 가게 하리라 이는 만군의 하나님이라 일컫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여호와의 날을 사모하는 자

1980년대에 신유 사역으로 유명했던 분으로 현신애 권사님이 있습니다. 이 분이 수많은 병자들을 고치셨습니다. 그런데 이분이 나이 들어 돌아가시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다 죽었다고 생각하고 장례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분이 갑자기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다시 산 것도 놀라웠지만 이분이 죽은 상태에서 보았던 천국 이야기가 사람들을 더 놀라게 했습니다.

현신애 권사님이 죽어 천국 길을 가고 있었는데 거기에 커다란 문이 하나 있고 그 앞에 하얀 옷을 입은 분이 서 계시더랍니다. 현 권사님은 한 눈에 그분이 예수님임을 알아보았습니다. 반갑게 “예수님 저 왔어요. 현신애입니다.” 하고 주님께 인사를 했습니다. 그러자 주님이 “현신애?” 하시더니 고개를 흔들며 잘 모르겠다고 하였습니다. 현 권사님은 주님이 놀리시는 줄 알고 “예수님, 저 현신애에요. 서울의 서대문 근처에서 제단을 쌓고 늘 주님의 이름으로 사람들 병을 고쳐주던 현신애에요.” 하고 큰소리로 외쳤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이름을 도무지 모르겠다고 하시며 자기가 이름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이 문을 통과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막막해진 권사님은 돌아가려다가 이왕 여기까지 온 것 자기가 알고 있는 다른 사람들의 이름을 대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 그러면 조용기 목사님 아세요?” 하니까 예수님께서 “조용기? 도무지 모르겠는데.” 하셨습니다. 이번에는 “예수님 한경직 목사님은 아세요.” 하니까 예수님이 기억을 더듬듯이 이름을 떠올리면서 “조금 알 것 같애.” 하더랍니다. 결국 그렇게 해서 그 문을 통과하지 못해서 다시 살아오게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이 소리를 듣던 사람들이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현신애 권사님이나 조용기 목사님 같은 분도 예수님이 모르신다니 그러면 누가 천국에 들어갈 수 있겠는가? 하고 두려워했습니다. 이 체험을 하고 난 후 현 권사님은 크게 깨달은 바가 있어서 자기 전 재산을 북한선교원이란 곳에 기증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 때 예수님께 그 이름을 물어봤던 목사님들을 찾아가서 자기 경험을 이야기 했다고 합니다. 아마 그때 조용기 목사님도 크게 회개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이 일은 1980년대 중반에 있었던 사건입니다. 지금으로부터 20여 년 전의 이야기입니다. 그 20년 사이에 우리는 더 충성스러워졌습니까? 물질을 탐욕하지 않고 자기 영광을 취하지 않습니까? 한국교회는 더 거룩해졌습니까? 20년 전 그래도 비교적 순수했던 그때도 천국 문을 통과하기 어려웠는데 지금의 한국 교회 지도자들이나 목회자들은 그 문을 통과할 수 있겠습니까? 이 질문을 다른 사람에게 하지 말고 자기 스스로에게 해 보십시오. 

우리는 그 문을 통과할 자신이 있습니까? 우리는 그럴 때마다 예수님에 대한 온전한 믿음만 있으면 된다고 대답합니다. 그렇다면 현신애 권사님이나 조용기 목사님 같은 분들이 그런 믿음이 없었습니까? 주님은 믿음 이상의 것을 우리에게 요구하고 계십니다. 그것은 순종입니다. 순종의 열매가 없다면 주님도 우리를 모른다 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복음을 전할 때 ‘예수 천당 불신 지옥’ 합니다. 설교에서도 찬송가에서도 ‘천국’에 대한 이야기가 빠지질 않습니다. 바람직한 신앙인이라면 누구나 천국에 들어가기를 사모하고 믿는 자들은 죽으면 당연히 천국에 들어갈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마지막 날이 구원의 날이 아니라 만약 심판의 날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 날이 밝음이라 생각했는데 어두움이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오늘 아모스가 선포하는 메시지의 핵심이 여기에 있습니다. 18절입니다. “화 있을진저 여호와의 날을 사모하는 자여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날을 사모하느뇨 그 날은 어두움이요 빛이 아니라” 여호와의 날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날을 말합니다. 

그 때에 하나님은 이스라엘은 구원하시고 이스라엘을 대적했던 주변 원수들은 다 멸하실 것이라는 믿음을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지고 있었습니다. 오늘날과 비슷한 종말신앙입니다. 그들은 역사의 마지막이나 전쟁의 결국은 이스라엘의 승리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런 믿음을 가진 자들을 가리켜 아모스는 여호와의 날을 사모하는 자들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아모스는 이들의 이런 기대를 여지없이 무너뜨리고 맙니다. 여호와의 날은 승리의 날이 아니라 오히려 패망의 날이요, 빛으로 가득한 영광의 날이 아니라 어둠으로 가득한 탄식의 날이라고 합니다. 아모스는 그때의 광경을 아주 리얼하게 묘사합니다. 19절입니다. 

사람들이 사자를 피하여 갔는데 공교롭게도 이것보다 더 사나운 곰을 만나게 된 것과 같다고 합니다. 설상가상입니다. 가까스로 곰을 피하여 집에 들어가 쉬고 있는데 이번에는 벽에서 뱀이 튀어나와 결국 죽음에 이르고 맙니다. 고대의 허름한 가옥구조를 생각하면 벽에서 뱀이 나오는 것도 이해할 만합니다.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다는 경고입니다.

아모스만 그랬는가? 아닙니다. 예수님도 산상수훈에서 동일하게 우리의 기대를 뒤집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7:21-23)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고, 또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적을 행했던 자들이 거부를 당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기대했던 여호와의 날이 오히려 심판의 날이 되고 있습니다. 왜 이런 일이 발생한 것입니까? 그것은 그들이 주님의 뜻대로 믿은 것이 아니라 자기 생각 대로 믿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산상수훈 말씀을 통하여 이웃 사랑과 용서와 거룩함과 가난함과 섬김과 겸손과 하나님에 대한 철저한 신뢰를 요구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대신 능력과 축복과 사람들의 인정과 영광을 추구했습니다. 그러면서 교묘히 믿는 자는 누구든지 구원을 받는다는 말로 자기 죄를 덮으려 하였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믿음이 아니라 우리의 행함을 보시겠다고 합니다. 그러면 믿음은 무엇인가? 주님은 믿음이 좋으면 반드시 행함의 열매를 맺게 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열매가 잘못되었으면 믿음 또한 잘못된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이 믿음이 있다고 착각한 것입니다. 

아모스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몰랐습니까? 그들이 하나님의 선택을 받지 않았습니까? 그들의 예배가 모자랐습니까? 아닙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안다고 생각했고 하나님을 향한 헌신도 충분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잘못되었습니다. 

하나님 뜻대로가 아니라 자기 생각대로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실상 하나님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아모스의 바통을 이어서 이스라엘의 마지막 때에 예언했던 선지자 호세아는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호6:6)고 외쳤습니다. 제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고 무엇을 기뻐하시는 지 제대로 알라는 호소였습니다. 

너희 절기를 미워하며

이스라엘이 드리던 예배를 하나님이 얼마나 싫어하셨는지 21절 이하의 말씀들을 보십시오. 내가 너희 절기를 ‘미워한다.’ ‘멸시한다.’ 너희 성회들을 ‘기뻐하지 아니한다.’ 너희가 번제나 소제를 드릴지라도 내가 ‘받지 아니할 것이다.’ 살진 희생의 화목제도 ‘돌아보지 않을 것이다.’ 네 찬양하는 비파소리도 ‘듣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얼마나 싫어했으면 구구절절이 부정적인 단어로 가득 차 있겠습니까?

특히 23절을 보십시오. “네 노래 소리를 내 앞에서 그칠지어다 네 비파 소리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 노래와 비파는 찬양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찬양 소리도 듣기 싫어합니다. 여기에서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아모스 6장 5절은 더 신랄합니다. “비파에 맞추어 헛된 노래를 지절거리며 다윗처럼 자기를 위하여 악기를 제조하며” 예배의 찬양을 헛되다, 지절거린다고 신랄하게 비판합니다. 마치 자기들이 다윗이나 된 것처럼 악기를 만드는 데 그 목적은 자기를 위해서라고 합니다. 

이 말씀을 보면서 우리의 찬양은 어떠한지 반성이 되었습니다. 요즘은 찬양이 찬송가만 있는 것이 아니고 복음성가를 지나 CCM까지 있습니다. 이제는 찬송가에도 빠른 랩이 들어왔습니다. 대중가요와 구분이 안 됩니다. 일전에 제가 경배와 찬양으로 유명한 모 교회 집회에 참석한 적이 있습니다. 수많은 젊은이들이 열정적으로 찬양을 부르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손을 들고 껑충껑충 뛰면서 찬양을 부릅니다. 제가 이 모습을 보면서 연상되었던 것은 일반 대중 가수들이 노래를 부르던 콘서트 현장이었습니다. 가사 내용만 달랐지 일반 콘서트 현장이나 경배와 찬양 현장이나 무엇이 다를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신나는 반주에 맞추어 열정적인 찬양을 하고 있는 그 목적이 혹시 자기 즐거움을 위한 것은 아닙니까? 

요즘 CCM은 갈수록 비트가 빨라지고 현란해지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부르는 자의 만족을 위한 것은 아닙니까? 물론 예술 형식이 다양화되는 것은 필요합니다. 그러나 찬양의 본질은 하나님에 대한 영광과 감사입니다. 교묘히 자기만족과 즐거움을 취하면서 그것을 찬양이라 미화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노래 소리에 대해서 극단적으로 싫어하시는 이유는 사실 찬양 자체의 문제가 아닙니다. 찬양을 부르고 있는 그 상황이 더 문제입니다. 지금 성밖에서는 수많은 백성들이 굶주림 가운데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불법과 불의로 인하여 가슴에 한을 품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그 성 위에서는 부유한 사람들이 모여 잔치를 벌이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찬양한다면 비파 소리가 높습니다. 이런 상황이라면 하나님이 그 찬양을 받으시겠습니까? 역겹지요. 

찬양이 아름다우면 아름다울수록 더 역겨울 것입니다. 하나님이 찬양을 싫어하시는 것이 아니라 불의와 불법 위에서 행해지는 찬양과 예배를 싫어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삶이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답고 경건하지 못하면 아무리 많은 헌물을 드리고, 예배를 드릴지라도 하나님은 그 예배를 받지 않으십니다. 한국교회가 불의의 기초 위에 서 있다면 그 위에서 아무리 많은 예배를 드린다 해도 하나님은 받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 불의의 기초 위에 선 예배를 얼마나 싫어하시는지는 25절 이하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이스라엘 족속아 너희가 사십 년 동안 광야에서 희생과 소제물을 내게 드렸느냐” 아모스는 이스라엘이 절대적이라고 생각했던 신앙들을 하나하나 그 근저에서부터 무너뜨리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성전과 제사 중심의 사회입니다. 그들은 이 제사가 이스라엘이 처음 부르심을 받던 출애굽과 광야에서부터 기원하고 있다며 자랑스러워했습니다. 

그러나 아모스는 광야 사십년 동안 너희가 희생과 소제물을 내게 드린 적이 있느냐고 반문합니다. 사실 그때는 광야 생활인지라 절기를 지키기가 어려웠습니다. 소제물은 농사를 짓지 않았기에 드리기도 힘들었습니다. 광야에서 동물 희생제를 드리기도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런 희생과 제사는 가나안 땅에 정착해서야 비로소 본격화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은 광야 시절에 제대로 제사 드리지 않았다고 해서 이스라엘을 미워하셨는가? 아닙니다. 오히려 기뻐하셨습니다. 제사는 잘 못 드려도 다른 데 눈을 팔지 않고 온전히 하나님만 신뢰하는 순종의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드리는 것은 없어도 마음만은 순수했던 때였습니다. 하나님은 오늘 한국 땅에서 온갖 품격을 갖추어서 드리는 예배보다 북한의 지하교회에서, 아니면 핍박 가운데서 제대로 된 예배도 드리지 못하는 그들의 예배를 더 받으실 것입니다.

호세아 서에 재미있는 말씀이 있습니다. 가나안 땅에서 바알 우상에 빠져 있는 이스라엘 백성을 향하여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호세아 2장 14절입니다. “그러므로 보라 내가 그를 타일러 거친 들(광야)로 데리고 가서 말로 위로하고 거기서 비로소 그의 포도원을 그에게 주고 아골 골짜기로 소망의 문을 삼아 주리니 그가 거기서 응대하기를 어렸을 때와 애굽 땅에서 올라오던 날과 같이 하리라” 이 말씀은 다시 순순했던 광야로 돌아가자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화려한 건물과 선남선녀가 어우러진 오케스트라의 찬양과 수많은 헌금 봉투보다 가난하고 힘들었지만 하나님을 순전한 마음으로 따랐던 그 가난했던 시절로 돌아가기를 원하십니다. 여러분도 그 때가 그립지 않습니까? 정말 다른 생각 없이 하나님만 좋아했던 시절 말입니다. 우리는 세상에 시달리다 보니 그 순수한 마음들이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신앙은 끊임없이 어린 아이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싸워야 될 싸움입니다.

아모스는 더 나아가 그들이 섬기는 신은 여호와가 아니라 우상임을 밝힙니다. 26절에 너희라는 단어에 주목하십시오. “‘너희가’ ‘너희’ 왕 식굿과 ‘너희’ 우상 기윤 곧 ‘너희가’ ‘너희를’ 위하여 만들어서 신으로 삼은 별 형상을 지고 가리라” 식굿과 기윤은 다 앗수르가 섬기던 별 신들이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여호와 신앙과 주변 나라의 신들을 섞어서 혼합종교를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가장 밑바닥에 있는 동기는 무엇입니까? 26절에 있는 대로 ‘자기를 위하여’ 곧 자기 만족과 자기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였습니다. 자기 필요를 위해서 만든 신은 우상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필요를 위해서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필요와 영광을 위하여 존재합니다.  

정의를 하수같이

그러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 24절입니다. “오직 공법을 물같이, 정의를 하수같이 흘릴지로다” 아모스는 공법을 물같이 정의가 하수같이 흐르게 하라고 합니다. 공법은 ‘미쉬파트’입니다. 이것은 법정에서의 정의입니다. 뇌물을 받지 않는 것, 남을 속이지 않는 것, 공정한 재판을 하는 것 등이 공법입니다. 정의는 ‘체다카’ 인데 이는 인간관계에서 불의가 없는 것을 말합니다. 

다른 사람을 억울하게 하거나 불법한 일을 행하지 않는 것입니다. 특별히 가난한 자나 약자에 대한 보호 의무가 공법과 정의의 바탕에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말하는 ‘정의’는 소극적으로는 하나님의 법에 어긋나지 않는 것이요, 적극적으로는 가난한 자를 돕고 배려하는 것입니다.

정의는 중요합니다. 아모스는 정의를 먼저 물에 비유합니다. 이스라엘은 건조한 곳입니다. 여름철에 비가 오지 않습니다. 그러다 가을철에 비가 오기 시작하면 말랐던 대지가 살아나기 시작합니다. 온 땅이 푸르게 됩니다. 이처럼 물이 온 대지를 살리듯 나라를 살리는 것이 바로 정의입니다. 말라기에서는 하나님을 정의의 태양에 비유하기도 합니다.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발하리니”(말4:5) 고대인들은 태양이 떠오르면서 만물이 다시 소생하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통치는 정의롭습니다. 하나님의 의로움이 있어야 역사에 희망이 있습니다. 그 의로움이 이 땅을 살립니다.

정의는 또한 흐름입니다.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릅니다. 하나님에게서 인간에게로 흐르고, 강한 자에게서 약한 자에게로, 부유한 자에게서 가난한 자에게로 흘러가야 합니다. 그래서 부익부 빈익빈이 위험합니다. 흐름이 막히면 죽습니다. 위는 넘쳐서 죽고 아래는 없어서 죽습니다. 의는 국가에서 백성에게로 흘러가야 합니다. 그래서 옛날 왕들은 정의로우신 하나님을 좇아 의를 행하려 하였습니다. 정의는  약자의 권리를 침해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요, 고아과 과부와 나그네로 대표되는 약자들이 자기의 권리를 지키고 살 수 있도록 해주는 것입니다. 이런 정의가 있어야 나라가 삽니다.

여러분 국가와 강도 집단의 차이를 아십니까? 둘 다 조직과 폭력의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둘을 결정적으로 가르는 것은 정의입니다. 성 어거스틴은 “정의가 없는 정부는 강도 집단”이라 하였습니다. 법도 무시하고 자기 유익만을 위해서 일하면 그들은 강도 집단입니다. 아모스가 보기에 이스라엘 왕국은 온전한 나라가 아니라 강도 집단에 불과했습니다. 

이런 나라는 곧 무너진다는 것이 아모스의 생각이었고 하나님의 역사 법칙입니다. 정부의 힘은 정의에서 나옵니다. 정의로운 정부는 국민들을 설득할 수 있고 국민들을 한 마음으로 모아 발전을 이룰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현대 사회에서는 민주주의를 말하고 민주주의가 된 나라가 발전을 이룰 수 있다고 말합니다. 

아모스는 이 정의를 폭포수와 같이 끊임없이 흐르게 하라고 합니다. 여기 하수는 히브리어로 ‘나하르’입니다. 이스라엘의 강들은 대부분 여름철 건기에는 비가 오지 않아 강이 마릅니다. 이런 강들을 와디라고 하는데 그러나 비가 오기 시작하면 엄청난 기세로 물이 흐르기 시작합니다. 아모스 이 엄청난 기세처럼 정의가 흐르게 하되 더 이상 와디처럼 마르지 않게 하라고 합니다. 

사시사철 끊임없이 정의가 흐르게 하라고 합니다. 그래서 개역개정판에서는 24절을 “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하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영어 NIV는 ‘never-failing stream!’ ‘결코 끊어지지 않는 강물’입니다. 뉴 킹제임스 버전은 ‘mighty stream!’ ‘힘차게 흐르는 강물’입니다. 뉴RSV는 ‘everflowing stream!’ ‘쉼없이 흐르는 강물’입니다. 정의가 이렇게 끊임없이 흐르도록 만들라 말씀하십니다.

정의는 단순히 나라의 문제만이 아니라 우리 영혼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우리 영혼을 살리는 것도 정의입니다. 정의는 마치 산소와 양분으로 가득한 신선한 피와 같다 할 것입니다. 이 신선한 피가 잘 공급되어야 건강하게 살 수 있습니다. 시편 1편이 그것을 잘 노래하고 있습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시1:1-2) 악인의 꾀, 죄인의 길, 오만한 자의 자리 이것이 곧 불의입니다. 

이런 불의를 마음에 품고 그 길을 가는 자는 곧 바람에 나는 겨와 같고 하나님의 심판을 면하지 못합니다. 반대로 여호와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는 곧 정의의 마음을 품은 자와 같습니다.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처럼 번성할 것입니다. 마음에 의를 품은 사람은 눈이 밝습니다. 의인은 장수합니다. 의는 곧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번 검찰총장 청문회를 보면서 다시 한 번 정의의 소중함을 생각했습니다. 공무원의 월급이 얼마인지 모르겠지만 그는 강남에서 전용면적만 60평인 실제 80평짜리 아파트를 구입했습니다. 그 구입하는 과정에서 석연치 않은 15억이라는 큰 돈을 지인들로부터 차용을 하였습니다. 그 돈을 준 업자와 같이 골프여행도 하고 명품을 받기도 했습니다. 청문회 과정에서 거짓 진술을 하였습니다. 

또 위장전입 사실도 밝혀졌습니다. 호화로운 생활을 하였고 자녀 결혼도 매우 고급 예식장에서 치렀습니다. 공직자는 생활이 깨끗해야 합니다. 옛날에는 청백리라 하여 깨끗한 공직자를 가끔 볼 수 있었는데 요즘은 정말 그런 사람을 찾아보기 힘든 탐욕의 시대가 되어버렸나 봅니다. 요즘 청문회에 나온 대부분의 사람들이 어쩌면 그렇게 재산들이 많은지 모르겠습니다. 

더구나 알고 보니 이번 검찰총장 후보는 매우 독실한 신앙인으로 알려졌습니다. 큰 교회 성가대 회장까지 했고, 2007년에 구성된 검사 신우회 멤버로 활동할 정도로 매우 열성적이었습니다. 그는 검사이기에 다른 사람의 잘못에 대해서는 엄격하게 죄를 물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정작 자신에게는 너무 관대했습니다. 여호와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것은 악인의 꾀를 쫓지 않는 정의로운 삶을 사는 것을 말합니다. 

그에게는 교회에서 신앙생활만 열심히 했지 삶에서의 정의에 대해서는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듯합니다. 결국 이 불의가 그 생명을 추하게 만들어버렸습니다. 장로 대통령인 이명박 대통령도 그가 능력 면에서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정의와 도덕 면에서는 후한 점수를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능력 있는 사람을 원하겠습니까? 아니면 정의로운 사람을 원하겠습니까? 저는 단연코 후자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능력은 없어도 정의로운 사람을 원합니다. 능력이야 하나님이 주시면 되고 이런 사람을 하나님이 잘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가장 위험한 사람은 능력은 있는데 정의롭지 못한 사람입니다. 그는 자기를 해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도 망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정의의 길을 가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동양의 맹자 편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맹자가 말씀하기를 “내가 물고기를 얻고 싶고 또 곰발바닥도 얻고 싶다. 그런데 두 가지를 다 얻을 수 없다면 물고기를 버리고 곰발바닥을 취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생명도 내가 얻고자 하는 바요 또 의도 내가 얻고자 하는 바다. 그런데 두 가지를 얻을 수 없다면 생명을 버리고 의를 취할 것이다.” 물고기보다 곰발바닥이 훨씬 비싸고 맛있습니다. 

그래서 둘 중에 하나를 택하라면 당연히 곰발바닥을 택할 것입니다. 맹자는 자기 목숨과 정의 이 두 가치의 차이가 물고기와 곰발바닥의 차이만큼 크다고 합니다. 자신은 목숨도 소중하지만 정의가 더 소중하기에 정의를 위해서는 목숨까지도 바치겠다는 뜻입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각오가 필요합니다. 정의로운 백성이 많아야 나라가 정의롭게 되고 결국 그 나라가 시냇가에 심은 나무처럼 번성합니다. 요즘 시대는 참 정의로운 사람들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모두 자기 안전과 유익만을 위해서 사는 매우 비겁한 사회입니다. 같이 한솥밥을 먹던 사이도 자기 이익 앞에서는 냉정하게 돌아섭니다. 정의와 생명 사이에서 우리는 무엇을 선택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하나님은 정의가 강같이 흐르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영혼을 살리고, 우리 인간관계를 살리고, 나라를 살리는 것도 정의라고 말씀합니다. 성령 하나님께서는 정의의 영으로 우리 가운데 오셨습니다. 이 분이 거룩함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우리에게 가르치시고 용기와 힘을 주십니다. 이 의의 양식을 먹고 이 의를 이루기 위해 힘쓰는 저와 여러분 되길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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