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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쓴 물이 단물로! (출 15:1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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쓴 물이 단물로! (출 15:19~27) 

  
옛날에 큰 나라가 작은 나라를 침략하려고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약한 나라에서는 난리가 났습니다. 나라의 운명이 풍전등화입니다. 이때 한 신하가 임금에게 자처하기를 '제가 가서 한번 전쟁을 막아보겠습니다.' 왕이 기뻐하고 그를 사신으로 보내었습니다. 
  
그 사신이 강대국 왕 앞에 서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대왕이시여! 내가 보니 우리 왕은 초생달 같고 대왕은 보름달 같은 왕이십니다. 보름달 같은 왕이 초생달 같은 왕을 쳐서 무엇하십니까? 보나마나 우리가 집니다. 전쟁을 그만 두시지요." 이 말을 들은 대왕은 기분이 좋아서 전쟁을 포기했습니다. 
  
전쟁을 그치게 하고 돌아 온 사신은 자기 왕에게 그대로 보고를 했습니다. 왕은 수고했다고 치하하면서 큰상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조금 있다가 준 상을 빼앗으면서 칼을 빼들고 호령을 합니다. "너는 전쟁을 끝낸 공로로 상을 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나를 무시한 죄는 사형이다. 저 왕을 보름달로, 나를 초생달로 비유하며 내 자존심을 상하게 하였다. 너는 사형이다." 그리고 칼을 빼어 죽이려고 합니다. 
  
그 때 사신이 말했습니다. "마마 내가 분명히 그렇게 말했나이다. 그러나 생각해보십시오. 보름달은 점점 작아지는 달이지만 초생달은 점점 커지는 달이 아닙니까?" 이 말 한 마디에 왕의 노가 풀렸습니다. 그래서 죽이지 않았습니다. 말 한 마디에 전쟁을 그치게 하고 말 한 마디에 노를 그치게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말 한 마디가 쓴 물이 될수가 있고, 말한마디가 단물이 될수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을 떠나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가나안땅을 향하여 전진하게 됩니다. 이스라엘이 430년의 종살이를 청산하고 애굽을 출발, 홍해바다를 육지처럼 걸어서 나온 스릴이 그들의 행진을 더욱 감격스럽게 했습니다. 
  
그때에 그 감격을 모세는 노래를 지어 후손들에게 남긴 장이 본문 1-18절의 내용입니다. 그리고 19-21절에 보면 해방의 감격! 홍해 바다를 갈라주신 하나님의 오묘하신 능력 앞에 미리암과 모든 여인들이 소고를 잡고 춤을 추며 노래하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 당시 유대 풍속은 공식 석상에서 여자의 목소리는 금지시켰습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죄가 여자를 통해서 들어 왔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린 아이와 여자는 인구수에도 빠졌습니다. 그런 풍속의 배경 속에서도 여인들이 나와서 춤을 추고 노래했다는 것은 한마디로 범국민적으로 승리를 주신 하나님께 찬양을 했다는 의미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놀라우신 인도하심으로 홍해바다를 육지같이 건넨 이스라엘이 수르 광야에 들어와서 삼일 길을 걸었으나 마실 물이 없어 또 다시 원망을 하게 됩니다. 그들이 다시 행군하여 '마라'라는 곳에 이르렀는데 드디어 그 곳에서 물을 발견하게 됩니다. 얼마나 기쁜 일인가? 
  
그들은 서로 다투어 그 물을 마시기 시작합니다. 아,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도저히 그 물이 써서 마실 수가 없습니다. 그들이 소리치기를 '마라, 마라' 즉 '쓰다, 쓰다'는 말입니다. 여기서부터 이스라엘은 또 다시 원망이 시작됩니다. 홍해를 건넜던 감격을 잊지 못해 민족의 대 합창을 부른지 3일 만에 그들은 또다시 원망의 대 합창으로 바꿔진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환경을 보며 지도자를 원망하고 하나님을 원망했지만, 믿음의 사람 모세는 그 환경 앞에서 절망하지 않고 능력의 하나님 앞에 부르짖어 기도합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이 해결의 방법으로 한 나무를 지시하여 던지라고 합니다. 그대로 순종하여 던졌더니 쓴 물이 단물로 바뀌어 이스라엘이 목마름을 해결했습니다. 

그 다음에 또 보면 마라를 지나고 나니 엘림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엘림은 샘이 있고 종려나무 숲이 우거진 곳으로 사막의 오아시스입니다. 그곳에 이스라엘 회중이 장막을 치고 잠시 머물러 있었다고 하는 것이 본문의 줄거리입니다. 
  
이 사건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무엇인가? 인생 길에 쓴 물을 만나면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가? 본문을 같이 상고하면서 은혜 받기를 소원합니다. 
 

1. 홍해바다의 감격을 다시 한번 회상하고 있습니다(19).

"바로의 말과 병거와 마병이 함께 바다에 들어가매 여호와께서 바닷물로 그들 위에 돌이켜 흐르게 하셨으나 이스라엘 자손은 바다가운데서 육지로 행한지라"
  
본문에서 다시 한 번 홍해의 기적을 상상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얼마나 멋있고, 통쾌한 장면입니까? 하나님이 홍해를 갈라 육지 같은 길을 여시고 이스라엘을 안전하게 인도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뒤를 바짝 추격해온 애굽의 군대를 어떻게 했습니까? 하나님이 홍해에 다 수장시켜 버렸습니다. 처음에는 이스라엘이 사면초가에 벌벌 떨면서 모세를 원망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 모세는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또 다시는 영원히 보지 못하리라"고 외쳤습니다. 
  
믿음의 사람 모세의 기도는 기적을 일으킵니다. 홍해가 갈라지고, 바로 군대가 수장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인생살이가 사면초가에 부딪힐 때, 하나님의 새 창조의 역사를 소망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안에서는 절대 새로운 길이 있습니다.  

 
2. 홍해를 가르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이스라엘의 여인들!(20-21).

"아론의 누이 선지자 미리암이 손에 소고를 잡으매 모든 여인도 그를 따라 나오며 소고를 잡고 춤추니"
  
미리암이 누구입니까? 모세가 어렸을 때 나일강에 던져졌을 때, 따라갔던 모세의 누이입니다. 미리암을 선지자라고도 합니다. 구약에 보면 이스라엘에 여선지자가 몇이 나옵니다. 그 대표적인 선지자가 삿5장에 나오는 '드보라'입니다. 한때 이스라엘을 다스렸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들어 당신의 백성들을 건져내고 구원 운동을 하실 때에 그의 형 아론을 제사장으로 세워 모세를 돕게 했고, 미리암 누나도 선지자로써 모세를 시중들게 했습니다. 

▶민16장을 보면 당시 3남매가 요긴한 자리를 다 차지하고 설친다하여 고라 일당이 불만을 품고 당을 지어 반역하다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땅에 삼킨바 된 사건이 나옵니다. 
  
모세도 아론도 미리암도 하나님이 세우셨습니다. 하나님이 세운 종은 하나님이 직접 다스리십니다. 미리암이 소고를 잡으며, 모든 여인들도 소고를 잡고 춤추었다고 합니다. 소고는 작은북으로 '덤브링'입니다. 
  
▶21절 "미리암이 그들에게 화답하여 가로되 너희는 여호와를 찬송하라 그는 높고 영화로우심이요 말과 그 탄 자를 바다에 던지셨음이로다 하였더라"
  
"미리암이 그들에게 하합하여 가로되" 구약의 찬송은 화합송입니다. 한쪽에서 '너희는 여호와를 찬송하라'하면, '그는 높고 영화로우심이요, 말과 그 탄 자를 바다에 던지셨음이니라!' 하면서 번갈아 가면서 읊었습니다. 쉽게 이해하면 우리가 예배 시간에 교독문을 교독하는 것과 같습니다. 

 
3. 스르 광야에서 '마라' 쓴 물을 만난 이스라엘!(22-23)

"모세가 홍해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하매 그들이 나와서 수르 광야 로 들어가서 거기서 사흘 길을 행하였으나 물을 얻지 못하고"
  
이제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감사를 끝난 뒤 모세를 따라 3일 길로 남쪽으로 내려갔습니다. 여기 3일 길에는 하나님의 구름기둥과 불기둥의 인도를 받았습니다. 
  
수르 광야는 술 광야로 불렀으며 민33장에서는 '에담 광야'로 불리기도 합니다. 이곳은 메마른 사막입니다. '수르 광야에서 사흘 길을 향하였다'는 말은 하나님의 구름기둥, 불기둥을 따라서 앞으로 사흘 길을 갔다는 것입니다. 
  
여기까지 사흘 길을 간 것이 자기 마음대로 간 것이 아닙니다. 불기둥을 따라 간 것입니다. 무엇을 말합니까? 하나님의 인도하심대로 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봅시다. '물을 얻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어떤 때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 하나님의 지시대로 가는데도 먹을 것이 없고, 마실 것이 없고, 도대체 되는 일이 없는 때가 있습니다. 이때 사람들은 신앙을 포기하고 하나님을 원망하기 일 수입니다. 
  
▶23절 "마라에 이르렀더니 그 곳 물이 써서 마시지 못하겠으므로 그 이름을 마라라 하였더라" 
  
이스라엘이 도착한 곳이 어디입니까? 마라입니다. 이 마라는 처음부터 마라가 아니고 뒤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그들이 그곳에 도착해보니 물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서로 다투어 물을 먹어보고는 소리를 지릅니다. '마라, 마라, 쓰다, 쓰다'는 뜻입니다. 즉 '마라'는 '쓰다, 고통스럽고, 괴롭고, 근심스럽고, 슬프다'는 뜻입니다. 물을 보고도 못 먹으니 정말 기가 찹니다. 오히려 물이 없는 곳보다 고통이 더 큽니다. 
  
마라의 쓴 물은 오늘날 광야 같은 인생 길을 걸어가면서 만나게 되는 우리의 문제입니다. 수천 년 전의 문제로 끝나는 옛날이야기가 아닙니다. 오늘날에도 저와 여러분이 광야 길을 걸어가면서 만나게 되는 마라의 쓴 물이며 환경입니다. 
  
어떤 분은 갑작스럽게 사고로 세상을 떠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마라의 쓴 물을 만납니다. 어떤 사람은 몸이 좋지 않은 것 같아서 병원에 갔더니 청천벽력과 같은 결과가 나왔습니다. 질병의 쓴 물을 만났습니다. 어떤 분은 사업의 실패로 쓴 물을 만납니다. 실직으로 쓴 물을 만납니다. 사기를 당해서 쓴 물을 만납니다. 어떤 분은 이혼의 쓰디쓴 마라를 경험하고 있는 분들도 있습니다. 어느 한 순간에 우리의 모든 웃음을 빼앗아가 버리는 마라를 만납니다. 누구도 예외가 없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세상에 살면서 느낄 수 있는 맛이 어떠합니까? 우리는 계속 단물만 마십니까? 아닙니다. 오늘 이스라엘처럼 우리의 삶에도 쓴 물이 나올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동양의 한 성자는 '인생은 고해와 같다'고 했습니다. 인생을 고통의 바다로 비유한 것입니다. 석가는 인생을 생로병사의 순환이라고 설파했습니다. 
  
룻1장을 보면 베들레헴에 살던 나오미는 그의 남편 엘리멜렉과 함께 두 아들 말론과 기룐을 데리고 베들레헴의 흉년을 피해 풍년이든 모압 땅으로 이민 갔습니다, 그러나 이국 땅 모압에서 남편이 죽고 두 아들마저 죽는 비극적인 일을 당합니다. 맏며느리 오르바는 고향으로 돌아가고 둘째 며느리 룻과 함께 빈손 들고 고향 땅으로 돌아오는 나오미의 심정은 그야말로 '마라', '죽을 맛'입니다 
  
룻1:20절에 나오미가 고향 베들레헴으로 돌아올 때 베들레헴 성읍 사람들이 "이가 나오미가 아니냐" 하고 맞을 때 나오미는 "나를 나오미라 칭하지 말고 마라라 칭하라"고 합니다.  
  
나오미란 이름은 '기쁨, 행복한 여인'이란 뜻입니다. 나오미는 하나님의 말씀의 집 베들레헴을  떠났다가 인생의 기쁨을 잃어버리고 마라 인생이 되어 고향으로 돌아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섭리는 그의 며누리 룻이 보아스를 만나 결혼하게 되었고, 그의 후손 가운데 다윗을 낳는 위대한 할머니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인생 속에 마라의 쓴 물이 있다는 것, 그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를 달게 만들어 주는 관문이 됩니다. 쓴맛을 알아야 단맛을 압니다. '고진감래'란 말이 있습니다. 쓴 것을 모른 혀는 단 것도 모릅니다. 세상이 쓴 줄을 알아야 하나님의 은혜가 단 줄을 압니다. 세상이 허무한 줄 알아야 하나님을 바라보게 되고, 하나님의 은혜가 넘치게 됩니다. 
  
▶제가 좋아하는 영화는 서부영화였습니다. 그 당시 서부영화의 대부 '게리 쿠퍼'라는 배우가 있었습니다. 그는 대학을 졸업한 후에 만화 그리는 일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소질을 인정받지 못하자 무대 뒤에서 배우들의 대사 읽어주는 일을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가 대사를 잘 못 읽는 바람에 공연이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그에게 즉시 감봉처분이 내려졌습니다. 그러나 이 실패가 결국 그에게는 좋은 기회가 되었습니다. 
  
쿠퍼의 처지를 알게 된 감독은 이를 안타깝게 생각하고 그가 엑스트라로 일하도록 해 주었습니다. 이때부터 열심히 노력한 결과 그의 명성이 점점 빛나기 시작했고, 결국은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두 번씩이나 받는 유명한 배우가 된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마라, 즉 쓴 고통을 주었습니까? 고난을 통한 신앙훈련이요 그 고통이 다한 뒤에 기쁨이 온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여러분, 마라 즉 고통과 고난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고통이 두렵다고 자꾸 피하고 도망가지 말고 당당히 맞서야 합니다. 그리고 참고 견뎌야 합니다. 그리고 신앙적인 자세로 '고통은 나에게 유익한 것이다'라고 생각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맞이하면 하나님이 주시는 힘이 생깁니다. 
  
사람들은 누구라도 행복을 향해 현재의 고통을 이기며 살아갑니다. 우리 인생 길에 '배반, 이별, 실패, 질병, 고난' 등 수없이 어려움이 오지만 그래도 참고 견디는 것은 미래의 소망 때문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사실 예수를 믿는 것 때문에 우리가 얼마나 어려울 때가 많습니까? 교회의 핍박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 쓴 물 뒤에 단물이 있다는 것입니다. 
  
히12:11절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달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나니"
  
쓴 것을 모르는 사람은 단 것도 모릅니다. 쓴 것을 경험해야만 단 맛의 가치를 압니다. 그래서 괴테는 '눈물 젖은 빵을 먹어보지 않은 사람과는 인생을 논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에게 마라의 경험은 신앙의 연단입니다. 
  
벧전1:7절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함이라"
  
여러분, 예수 믿고 천성을 향해 가는 성도들에게는 인생의 새로운 맛의 변화를 체험해야 합니다. 전에 달던 것이 이제는 쓴 것으로 느껴져야 합니다. 
  
저도 예수 믿고 교회에 열심히 나가면서도 계속 술을 못 끊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달던 술이 쓴 물로 바꿔지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영적인 원리에 붙잡힌 것입니다. 예수 믿고 은혜 받은 형제들 중에 이런 고백들을 많이 합니다. '이제 조금만 술을 먹어도 속에서 안 받는다'고 합니다. 담배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분들은 지금 단물이 쓴 물로 변화되는 순간입니다. 이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쓴 물을 마셨듯이 우리들에게도 이 쓴 물의 과정이 절대 필요합니다. 
  
어떻게 보면 교회는 '마라'입니다. 여기에서 세상 것을 써야합니다. 아직까지도 세상 것이 달다고 느낀 사람은 홍해를 건넌 사람이 아닙니다. 아직도 애굽에 있는 자입니다. 사실 세상 것에 집착하면 집착할수록 허무는 더 큽니다. 세상의 부귀는 소금물과 같습니다. 그래서 은혜를 체험한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구동성으로 말하기를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마라'와 같다고 합니다. 
  
▶김원식 집사의 간증입니다. 그분의 부인은 샘도 많고 욕심도 많아서 자기의 적은 월급으로는 그 소원을 들어줄 수가 없었습니다. 한번 외출을 하고 오면 온 집안이 난리가 난답니다. 자기 동창 누구는 무슨 옷을 입고, 누구는 어떤 것을 끼고, 이 부인은 남들이 가진 것을 다 갖아야 하고, 남들이 입은 것 다 입어야 하고, 남들이 쓰는 것 다 자기 손으로 쓰고 싶은 그 욕심 때문에 언제나 적은 월급을 받는 남편에게 원망하고 불평합니다. 
  
그래서 집안이 편할 날이 없고, 그녀의 마음에는 평화가 없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친구를 따라 교회를 다니기 시작합니다. 차츰, 차츰 그의 생활이 변화가 옵니다. 그는 사는 목적이 바뀌었습니다. 그토록 나가서 놀기 좋아하던 아내가 가정에 있기 시작합니다. 그토록 동창이니 누구니 세상 친구를 좋아하던 부인이 구역 식구들을 좋아하게 됩니다. 
  
이 여인이 교회에 나와 예수님을 만나고서부터 세상 것은 쓴맛이라고 고백하며, 그 뒤 오직 교회에 와서 단맛을 알았습니다. 어느 덧 부인은 세상 자랑 간 곳 없고, 오직 주님만 자랑하고, 교회만 자랑하고, 목사님만 자랑하는 사람으로 바뀌어 있었습니다. 
  
그 가정에 불안은 사라지고, 사랑과 화목이 넘쳐나기 시작합니다. 남편을 위해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이제 남편의 모든 것이 잘 되어 갑니다. 직장을 사직하고, 자기 사업을 시작했는데 이제 두 부부가 기도하면서 시작하니 길이 자꾸 열리기 시작합니다. /할/ 먼저 세상의 쓴 것을 버려야 합니다. /아멘!/ 

 
4. 원망하는 사람들!(24)

 "백성이 모세를 대하여 원망하여 가로되 우리가 무엇을 마실까 하매"
  
사람들은 마라가 부딪칠 때, 두 가지 반응이 나타납니다. 하나는 '불평하고, 원망하고, 좌절하고, 낙심에 빠져 모든 것을 포기'하는 자가 있는가 하면, 또 하나는 '이제 올라가는 길 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가는 사람, 즉 기도로 매달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고통 때문에 절망하고 낙심하고 기도를 포기하고 하나님을 떠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고통 때문에 더 기도하고 하나님께로 나와 매달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고통 때문에 하나님을 떠나면 고통과 실패의 종이 되고 맙니다만 고통 때문에 하나님께로 더 다가서고 그 이름을 부르면 응답 받고 승리하게 됩니다. 
  
여러분, 감사와 찬양과 영광은 하나님이 기뻐하는 일이고, 불평과 원망은 사단이 기뻐하는 것입니다. 계속 원망과 불평으로 인생을 살면 그 인생 길에 계속해서 원망과 불평할 일들만 생기게 됩니다. 그러나 감사하면 더더욱 감사할 일들이, 조건들이 열리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원망은 악한 행위입니다. 원망하는 마음을 가지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지고, 이웃과의 관계도 망가지게 됩니다. 기도는 물론 찬송도 끊깁니다. 결국 그러다가 신앙이 시들해져 버려 사단의 밥이 됩니다.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들은 원망하는 버릇 때문에 꿈에도 잊지 못하던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모세를 대하여 원망하여 가로되 우리가 무엇을 마실까 하매" 지금 모세를 보고 원망 불평하는 소리입니다. 여기 '원망하다'는 말은 '불평하다, 수군거리다'는 뜻입니다. 바로 사흘 전 그들은 홍해가 갈라지는 기적을 두 눈으로 보았고 갈라진 홍해를 육지처럼 건넜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원망치곤 너무나 빠른 것입니다.
 
  ▶여러분, 원망하면 어떤 결과가 옵니까? 
  
⑴하나님과의 관계가 악화됩니다. 민14:27절 "나를 원망하는 이악한 회중을 내가 어느 때까지 참으랴 이스라엘 자손이 나를 향하여 원망하는 말을 내가 들었노라" 
  
민14:2절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와 아론을 원망했다고 했습니다. 민20:2절을 보면 "회중이 물이 없으므로 모여서 모세와 아론을 공박 하니라"고 했고, 3절을 보면 "백성이 모세와 다투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민20:13절을 보면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와 다투었으므로"라고 했습니다.  
  
모세와 다투는 것은 하나님과 다투는 것이요 모세를 공박하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원망이라는 사실을 주목해야 합니다. 
  
민21:5절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되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올려서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 고 이곳에는 식물도 없고 물도 없도다."하고 원망, 불평했습니다. 그러자 6절에 "여호와께서 불 뱀들을 백성 중에 보내어 백성을 물게 하시므로 이스라엘 백성 중에 죽은 자가 많은지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뱀도 보통 뱀이 아니라, 가장 독이 많은 불 뱀을 나타나게 하셔서 불평하는 자들을 뱀에 죽게 했습니다. 원망 죄는 뱀을 부르고, 뱀에 물려서 죽게 만듭니다. 원망 죄는 하나님의 심판을 불러일으키고, 원망 죄는 하나님도 용서하지 않으십니다.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이 원망함을 통해서 뱀에 물려 죽은 사람이 많았다고 했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왜 원망합니까? 잠19:3절 "사람이 미련하므로 자기 길을 굽게 하고 마음으로 여호와를 원망하느니라." 미련한 사람이 원망합니다. 무슨 섭리와 뜻이 있는지 장차 무슨 일이 다가올지 미래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면서 원망 죄에 빠진다고 했습니다. 똑똑한 사람은 원망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약5:9절에도 "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라 그리하여야 심판을 면하리라."고 했습니다. 
  
⑵기도가 안 됩니다. 마5:23-24절에서 주님은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은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고 했습니다. 원망 불평 가득한 마음으로 예물을 드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유는 그 마음으론 예배도 기도도 안 되기 때문입니다. 
  
마6:14-15절을 보면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원한, 앙심, 불평, 원망은 은혜를 가로막고 말씀을 가로막고 기도를 가로막습니다. 이렇게 되면 누가 손해인가? 자신이 먼저 손해입니다. 

 
5. 모세의 기도와 응답!(25)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한 나무를 지시하시니 그가 물에 던지매 물이 달아졌더라 거기서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법도와 율례를 정하시고 그들을 시험하실새"
  
여러분! 마라 앞에서 결코 낙심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참 좋으신 하나님이십니다. '마라가 클수록 축복도 클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 인생을 마라에서 끝나게 하시지 않습니다. 마라가 닥쳤을 때, 믿음의 사람은 모세처럼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이 마라가 모세 때문에 왔다고 공격합니다. 그러나 모세는 이 마라 앞에 하나님께 부르짖는 자가 되었습니다. 
  
사람이 고통에 직면하면 할수록, 마라가 휘몰아 오면 올수록 주께로 가까이 나아가야 합니다. 모세는 마라의 고통에 대하여 하나님을 향하여 부르짖었습니다. 자기를 죽일 듯 달려오는 백성들을 향하여 말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마라를 극복하는 비결입니다. /믿/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오래 전에 노태우 전대통령이 감옥소를 향하는 날 정치인들에게 '갈등과 고뇌를 가슴에 안고 간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본문의 모세의 기도를 보면 '백성들이 불평과 원망과 불신을 고스란히 자기의 가슴속에 담아 두지 않고, 하나님께 가져왔다'는 사실입니다. 
  
▶제가 어렸을 때, 우리 동네에 아들, 딸 5남매를 둔 가정이 있었습니다. 큰아들은 알코올 중독에 노름꾼이었고, 둘째 아들은 좀도둑, 셋째는 정박아, 큰딸은 결혼한 후 소박맞고 물에 빠져 자살했습니다. 그리고 막내딸은 부산으로 도망가 다방 레지로 일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이 죽었습니다. 그리고 6개월 후에 부인도 죽었습니다. 동네 사람들은 두 부부의 죽음을 화병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고통과 절망, 좌절감과 울분, 그리고 인생의 한 같은 것들은 가슴에 묻어 두면 그것이 화근이 되어서 화병으로 번지게 됩니다. 
  
그러나 그것은 모세처럼 큰소리로 하나님께 쏟아버리면 화병이 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지금 화나고 열나는 일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세상 온통 짜증날 일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인생이 해결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변하려고 해도 변화시킬 수 없고 돌파하려해도 돌파할 수 없는 절대적인 상황을 가리켜서 '칼야스퍼스'는 '한계상황'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이 한계상황을 돌파하는 길은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고 부르짖는 기도밖에 없습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교제의 기쁨을 누리게 하는 영적 채널입니다. 기도는 믿음의 사람들에게 힘과 용기와 소망을 줍니다. 기도는 만사를 변화시킵니다. 기도는 지금도 역사를 일으킵니다. 기도는 지금도 기적을 가져옵니다.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기 '부르짖었다'는 말은 '간절히 소리내어 기도했다'는 말입니다. 성경 안에 '소리내다, 소리를 발하다, 소리 지르다, 소리치다'는 구절이 92회, '부르짖다'는 말이 248회 정도 나옵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소리쳐 부르짖어 기도한 사람마다 다 응답을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소리내어 기도하는 통성 기도가 있고 소리 없이 드리는 묵상기도가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보면 부르짖는 기도가 더 많습니다. 성경도 소리내어 읽고 찬송도 소리내어 불러야 하고 기도도 소리내서 해야 합니다. 
  
앞을 보지 못하는 소경 거지 바디메오도 소리쳐 주님을 불렀습니다. 귀신 들린 딸을 둔 가나안 여인도 소리 질러 주님을 불렀습니다. "주 다윗의 자손 예수여"라고 부르짖는 기도를 주님은 결코 외면하신 일이 없습니다. 반드시 걸음을 멈추시고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응답해 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원망 죄에 빠졌으나 모세는 고개를 들어서 하늘을 쳐다보았습니다. 쓴 마라를 바라본 것이 아닙니다. 쓴 물을 본 것이 아니라 민족을 구원하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 앞에 부르짖어 기도한 것입니다. 기도는 반듯이 응답이 동반됩니다. 
  
모세를 보세요! "그에게 한 나무를 지시하시니" 그렇습니다. 기도는 분명히 응답이 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한 나무를 가리키면서 '그 나무를 꺾어 마라 쓴 물에 던지라'는 응답을 주셨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그 나무를 꺾어 물에 던졌습니다. 그랬더니 물이 변했습니다. 어떻게 변했습니까? 쓴 물이 단물로 변했습니다.  실패가 성공으로, 약함이 강함으로 바꿔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삶에 지쳐 괴로워하는 인생들에게 한 나무를 지시하십니다. 본문은 '한 나무를 던졌더니 그 물이 달아졌더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만 쓰디쓴 우리 인생이 아름답고 강한 인생으로 바꿔질 수 있을까요? 우리 인생의 쓴 물을 단 물로 만들 수 있는 길은 나뭇가지를 물 속에 던지는 것입니다. 
  
여기에 중요한 하나님의 메시지가 있습니다. 이 나뭇가지는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나무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 유월절의 어린양을 통하여 예수님을 보여주셨고, 이 쓴 물을 달게 하는 나뭇가지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여주신 사건입니다. 
  
대부분의 주경 학자들은 나무자체에 썩은 물을 고치는 성분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초월적 능력과 그 능력을 믿고 순종하는 믿음이 마라의 썩은 물을 고쳤다고 해석합니다. 모세의 순종이 돋보입니다. 
  
여러분, 오늘 하나님이 지시한 나무는 누구를 상징하는 것입니까? 주님이 지고 가신 십자가를 상징한 것입니다. /할/ 주경 학자 '베이커'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불평과 불만의 쓴 물을 달게 만드는 마라의 나무'라고 했으며, '메투헨리'는 '십자가는 모든 고통을 주는 쓴 물을 달게 하는 나무'라고 했습니다. 주님은 그 십자가상 위에서 '내가 다 이루었다'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나뭇가지를 물 속에 던졌을 때, 물이 달아졌습니다. 우리 인생의 쓴 물을 달게 할 수 있는 분은 오직 예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 인생을 열어보면 모든 쓴 문제, 죄악의 쓴 뿌리가 있습니다. 모든 것이 죄로 말미암아 우리 인생을 쓰게 만듭니다. 그래서 죄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우리는 결단코 쓴 인생을 달게 만들 수가 없습니다. 잠시 돈을 써보고 즐거움을 누려보지만 잠시 있다가 다 사라지는 겁니다. 나뭇가지가 그곳에 던져졌을 때 비로소 물이 달아졌습니다. 
  
우물가의 여인, 다섯 남편을 바꿔보았지만 지금 살고 있는 남자도 내 남자가 아닙니다. 이 사람 품에서 저 사람 품에서 내 인생의 쓴 문제를 해결해보려고 발버둥 쳤지만 그것이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이 누구를 만났습니까? 우물가에서 예수님을 만났을 때 그녀의 인생이 단 인생으로 변화된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변화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심령에 찾아오시고 내 가정에 찾아오실 때, 우리 문제가 해결될 줄로 믿습니다.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위해서 죽으신 예수님, 부활하신 예수님 오시면 우리 죄를 다 깨끗하게 씻어주십니다. 
  
▶우리가 누구인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하나님의 자녀입니다(요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우리에게는 자녀의 권세의 복이 주어졌습니다. 왕의 아들은 나이가 많거나 적거나 왕자입니다. 그에게는 엄청난 권세와 특권이 이미 부여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 권세를 모르면 사용하지를 못합니다.  
  
우리는 조선시대의 철종의 이야기를 잘 알고 있습니다. 강화도 산골짜기에서 촌놈으로 살던 어느 날 조선왕이 자손이 없이 승하하자 당대의 권세 자들이 자기들의 권세를 유지하려고 왕의 먼 핏줄인 강화도령 이 원범을 하루아침의 왕으로 등극시켰습니다. 그가 왕이 되었으나 상궁에게도, 신하들에게도 절을 하며 굽실거립니다. 왜요? 자기가 어떤 권세가 있는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당신의 자녀의 권세를 주었습니다. ▶어떤 권세인가? 
  
⑴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권세입니다. 그러기에 아버지의 것을 내 것으로 누릴 특권이 있습니다. 
⑵하나님께 도움과 보호를 청할 수 있는 권세입니다. 
⑶환경을 이겨낼 수 있는 권세입니다. 아무리 쓴 물도 명하여 단물되게 하는 권세입니다. 
⑷믿음으로 명령하는 것은 이루어지는 권세입니다. 
⑸모든 것을 소유하고 살 수 있는 권세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라는 권세는 대단한 권세입니다. 하나님의 보호를 받을 권세도 있고 하나님의 소유를 상속받을 권세가 있습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달라고 기도하 권세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지금 우리는 빈손이고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을지라도 염려하지 마세요. 하나님이 채우시고 하나님이 공급하실 것을 누릴 권세가 있습니다. 
  
25절 "그들을 위하여 법도와 율례를 정하시고" 왜 하나님이 법도와 율례를 정했는가? 쓴 물이 변하여 단물이 되게 하여 먹은 후에는 자유 방종한 생활을 하면 안 되므로 하나님의 법도와 율례를 정하시고 그 법대로 살아 갈 것을 명하신 것입니다. 맞습니다. 삶에는 어떤 룰이 있어야 합니다. 

  "그들을 시험하실 새" 여기 시험한다는 것은 계속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는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가?' 그 여부를 시험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왜 시험하는가? 순종하는 자에게는 은혜와 축복과 능력을 주시고, 불순종하는 자는 믿음이 없는 것을 깨닫게 하여 회개시켜서 마침내는 복을 주시려고 시험하십니다. /믿/ 

 
6.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26)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청종하고 나의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의 하나도 너희에게 내 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고 의를 행하며 하나님의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모든 규례를 지키면 하나님께서 모든 재앙을 받지 않게 해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 히브리어로 치료를 '라파'라고 합니다. 그 뜻은 '온전하게 꿰매어 고치다.'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완치하다, 근치하다.'는 뜻입니다. 말4:2절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발하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 
  
우리가 진실로 고침 받고 치료받기를 원한다면 고치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붙잡아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하나님은 '내 영혼을 고치시고 내 병도 고치시고, 내 성격도, 내 습관도 고치시고 환경도 고쳐 주실 것'입니다. /할/ 하나님은 치료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믿/ 
 

7. 엘림에서 장막을 친 이스라엘!(27)

"그들이 엘림에 이르니 거기 물샘 열 둘과 종려 칠십 주가 있는지라 거기서 그들이 그 물 곁에 장막을 치니라"
  쓴 물을 단물로 고치신 하나님의 기적을 목격한 이스라엘이 계속 행군하여 엘림이라는 곳에 이르니 그곳은 실로 아름다운 광경이 펼쳐져 있습니다. 그곳에는 시원하게 솟아나는 물 샘 열둘과 종려나무 70주가 우거져있는 사막의 오아시스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여기 엘림은 마라에서부터 남쪽으로 10km 떨어져 있는 오늘날의 '가란델'로 보는 학자들이 있습니다. 그 곳은 우물이 많은 사막의 오아시스입니다. 물샘 열둘은 이스라엘 12지파를, 종려나무 70주는 이스라엘의 70인 장로를 의미하는 것으로 어떤 경우든 이스라엘을 광야에서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자기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종 되었던 애굽에서 구원한 자기 백성을 위하여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덮었습니다. 밤에는 불기둥으로 밝혔습니다(출13:22). 그리고 아침에는 만나를 주셨습니다. 저녁에는 메추라기가 진에 와서 덮이게 하였습니다(출16:13). 그리고 마라의 쓴 물을 단물로 만들어 마시게 했습니다. 엘림에 있는 열두 물샘과 70주의 종려나무 그늘 아래 장막을 치게 하였습니다. 
  
여기 '엘림'이란 '큰 나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지시하신 나무가 누구를 상징한다고 했습니까? 예수 십자가입니다. 엘림은 하나님이 백성을 위해 준비하신 쉼터였습니다. 물이 있고 그늘이 있는 곳 바로 오아시스입니다. 
  
이스라엘이 조금만 참고 기다렸더라면 하나님께 원망하고 불평하는 죄를 범치 않고도 축복의 오아시스에서 실컷 물을 마실 수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걷는 인생 길에도 마라와 같은 쓴 고통이 있습니다. 쓴 인생이 있고, 쓴 사건이 있고, 결핍과 빈곤도 있습니다. 고통도 있고 근심도 있고 절망도 있고 실패와 좌절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처럼 불신하고 원망하면 안 됩니다. 
  
모세처럼 기도하고 응답 받아 지시한 나무를 던져야 합니다. 그리고 엘림을 향하여 전진해야 합니다. 엘림까지만 가면 그곳엔 시원한 생수가 솟아나는 샘이 있고 나무의 숲도 있었습니다. 
  
마라의 고통을 겪은 사람일수록 엘림의 축복이 더 크고 값지고 감사한 것입니다. 마라는 이 세상의 그림자이며 엘림은 가나안의 그림자이며 더 나아가서 천국의 그림자입니다. 천국은 하나님이 다스리는 나라입니다. 이스라엘이 엘림을 향하여 나아갔던 것처럼 우리도 저 영원한 천국을 향하여 달려가는 순례자들임을 기억하고 원망, 불평하지 말고 감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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