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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함께 즐기십시다 (눅 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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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눅15:1~7
제목 : 함께 즐기십시다.

   
인생에 소중한 것이 많습니다. 간직해야 할 마음과 생각들이 많습니다. 그 중에 제일 귀한 것이 ‘감사’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감사하는 마음이야말로 우리를 가장 복되고 아름답게 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행복하고 복되다고 느꼈을 때는 그 일에 대해 감사하고 있을 때입니다. 기독교의 신앙은 감사를 아는 지혜입니다. 하나님을 믿게 되면 감사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왜 사람이 감사를 모릅니까? 
  
첫째는  생각해보지 않아서입니다.
  
영어에 감사한다는 thank와 생각한다는 think는 모음 하나만 다릅니다. 모두 감사하다 입니다. 탁구공이 튀듯이 모든 사건을 반사적으로 느끼고 생각하면 감사한 것이 없습니다.가만히 생각해보면 지난 날의 아픔과 괴로움도 하나님 앞에 감사가 되어집니다.오늘 내가 여기 있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우리가 이 시간에 함께 예배를 드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한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지방에 다녀오다가 서울을 보았습니다. 스모그가 안개같이 자욱해 잘 보이지 않습니다.이 공기를 마시고 산다고 생각하니 끔찍합니다.비가 오고 바람이 불면 시야가 깨끗해집니다.그 때 서울은 얼마나 깨끗한지 모릅니다.우리 마음에 원망과 시기와 불평이 가득 채워지면 마치 스모그 가득한 서울같이 우리마음에 기쁨이 없고 우리 눈이 흐려지고 마음이 거칠어집니다. 감사하는 마음은 모든 것을 맑게 보게 하고 모든 사람을 다 사랑스럽게 보게 하며 모든 일들을 다 귀하게 여기게 합니다. 또한 내가 하는 일만 귀한 것이 아니고 남이 하는 일도 귀하고, 나만 행복한 것이 아니고 다른 사람도 행복해 보입니다. 때로는 시련과 아픔도 하나님 앞에 감사하게 됩니다. 그래서 ‘너희는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기도와 감사로 하나님께 아뢰라’하였습니다. 마음을 열어놓고 감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둘째, 욕심이 많아서입니다. 

사람은 언제나 자기를 특별하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나는, 나는’ 하다보니 우리 마음이 높아지고 눈이 높아지고, 웬만한 것은 우리에게 감사의 조건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제가 늘 시골의 가난했던 때를 얘기합니다만 짧은 일생에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때가 많았습니까? 그 때를 생각하면 지금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옛날에 시골에 짚차 하나 들어오면 온동네 아이들이 차 밑을 들여다 보고 바퀴를 보면서 야단입니다. 자전거 뒤에 태워주면 그 날은 출세하는 날이었습니다. 
 입은 옷들도 생각해 보십시오.명절이 되면 어머니 손들이 빨갛고 퍼렇고 새까맣게 되었습니다. 옷감을 전부 집에서 물들여서, 제가 메고 다니던 책보는 비가 오면 꺼멍 물이 베어 속옷이 시꺼메지는데 그것을 매고 학교에 갔었습니다. 요즘은 좋은 옷을 입고 다녀도 불평이 많습니다. 욕심이 많아서 입니다. 상대적 빈곤은 나도 잘 살지만 너는 왜 나보다 더 잘사느냐, 시기심 때문입니다. 마음과 눈을 낮춰보십시오. 내 마음을 조금 낮추면 모두가 귀해 보이고 모든 것이 다 감사합니다. 
   
셋째는 그럴려니 해서 그렇습니다. 
  
관습에 빠지고 매너리즘에 빠져 감사를 모릅니다. ‘부모가 자식을 낳았으면 공부시켜야지’ ‘내가 너를 낳고 밥 주고 돈 주었으면 공부 잘해야지’ 부모 은혜도,아이들이 무탈하게 잘자라는 것도 감사하지 않습니다. 
  
전직 기자가 쓴 글을 보니 부부가 스킨 쉽으로 애정으로 불태우는 것이 한 2,3년 간답니다. 그 다음에는 결혼은 했고 애도 낳고해서 정으로 사는 것이 4,5년, 그리고는 정으로 사는 것도 아니고 매니지먼트로 산답니다. 젊은 날 하나님의 은총으로 한가정이 되어져 젊음을 잃어버리기까지 한 가정을 이루고 산다는 것이 감사하지 않습니까? 감사하지 않다면 다 욕심이 많고 생각이 많아서 그렇습니다. 
 
여러분 늙는 것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안 늙어보세요, 누가 손자인지 누가 아들인지 영 구별못할 것 아니겠습니까? 좀 늙어야 아들이고 할아버지이고 손자인지 압니다. 늙는 것도 감사해야 합니다. 이 땅에 영원히 살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기가 우리의 최고 종착점이라고 하면 차라리 우리 집에 있는 강아지가 더 행복하지 않겠습니까? 이 땅에 있는 우리는 언젠가 주님이 부르시면 영원한 그곳에 가야하는 소망의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모든 것을 하나님께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너희는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기도와 간구로 하나님 앞에 감사함으로 아뢰라’ 할렐루야! 감사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인생의 소중한 것입니다.
  
‘감사’  그것은 우리의 삶 속에 새로운 에너지와 힘을, 창조적 아이디어를 만들어 내는 샘이 됩니다. 만일 믿음의 척도가 있다면 그것은 감사라고 생각합니다. 그가 얼마나 감사하는가? 그것이 바로 믿음일 것입니다. 
  
오늘도 얼마나 감사한 일이 많습니까?  해바라기이며 여러가지 들꽃이며 얼마나 예쁜 꽃들이 많습니까? 그저 욕심으로 다니면 꽃이 예쁜 것이 안보입니다. 과일도 감 사과 귤 수박 바나나 대추 밤... 종류도 많고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밤하니까 생각납니다. 어떤 사람이 가을에 서늘한 바람이 부는 툇마루에 누워있는데 밤나무를 쳐다보면서 ‘에그 하나님, 밤을 수박만하게 크게 만들어서 온 가족이 밤 한개만으로 충분히 먹을 수 있으면 좋을텐테’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바람이 부니 밤 한 개가 이마에 탁 떨어지더랍니다. 그때 ‘하나님 감사합니다’ 했답니다. 수박만 했다면 죽을 뻔했으니까 말입니다. 모두가 감사한 일입니다. 
  
감사하면 행복해지고 기뻐집니다. 감사하면 새 용기가 솟아납니다. 감사하면 더 아름다운 관계가 되어집니다. 기독교는 축제의 종교이고 기쁨이 넘치는 종교입니다. 먹고 즐기는 종교입니다. 예수님의 첫 번째 기적도 잔칫집에 물로 포도주를 만드는 일이었습니다. 마태복음 25장을 보면 충성된 종들이 두 달란트를  남기고, 다섯 달란트를 남겼습니다. 그 때에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너희가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말씀하셨습니다. 기독교는 즐거워하는 종교요, 하나님 앞에 나오는 것이 감사함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세리들과 죄인들을 영접하고 그들과 함께 잡수셨습니다. 당시 고상한 사람들, 종교적 사람들, 지식이 있다고 하는 사람들은, 세상 사람들이 천히 여기는 직업을 가진 세리들과 그리고 비도덕적이고 불쌍하게 살아가는 천한 사람들이 예수님과 함께 앉아있는 것을 보고 비방했습니다. 그 때에 주님이 비유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자 들어보라, 어떤 사람에게 양이 백마리 있었는데 그 중에 한 마리 양을 잃어버렸다. 그래서 아흔아홉마리를 두고 한 마리를 찾으러 가지 않았느냐, 잃어버린 양을 열심을 다하여 찾고서는 너무 기뻐서 양을 어깨에 매고 돌아와서는 친구들을 모아놓고 내가 잃었던 양을 찾았다 우리가 먹고 즐기자고 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죄인 한 사람이 돌아올 때 더 기뻐하고 하늘나라 천사들과 함께 기뻐하십니다. 우리는 모두가 하나님 앞에 온전한 사람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모르다가 하나님을 믿기 위해서 주의 교회에 나왔다고 하는 것은 엄청난 사건입니다. 우리 일생일대에, 그리고 하나님 앞에 놀라운 일입니다. 한사람이 주 앞에 나왔을 때에 하나님은 아흔아홉의 의인들과 기뻐하는 것보다 더 기뻐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참으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많은 천군천사들과 앞에 간 모든 믿음의 선인들과 힘께 기쁜 잔치를 열고 기뻐하시는 줄 믿습니다.  
  
참 나도 많이 굳어졌습니다.  서울역 앞에 지나갈 때 구름다리 지나갈 때 괴로웠습니다. 적은 동전 하나라도 놓아야지 그냥 지나가면 뭔가 자신이 부끄럽기도 하고 어떤 때는 그곳으로 안 갈려고 돌아가기도 합니다. 요즘은 그리 지나가도 별로입니다, 누가 엎드려있는지 누워있는지 별로입니다. 그때 저는 생각합니다. ‘하나님 내가 많이 굳어졌습니다, 길거리에 있는 걸인들을 다 구하지 못하고 가난하고 힘든 자들을 다 살필 능력이 내게 없지만, 내게 그나마 마음만이라고 아파하고 함께 할 수 있는 사람이 되게 해 주시옵소서’하고 기도합니다.
   
하나님은 어떻게 그들과 함께 하기를 원했던가? 그들을 먼저 영접했습니다. 그들을 받아들였습니다. 우리는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을 거절합니다. 그러나 교회가 부흥될수록 조심할 것은 끼리끼리 모이는 것입니다. 교회에 오면 모르는 사람도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합니다. 꼭 잘해주어서가 아닙니다. 우리가 서로 마음의 문을 연다고 하는 것, 사람이 서로 사람을 대접하는 것이 얼마나 귀중한 것입니까? 마음을 주고 눈길을 주고 손을 내미는 것, 거기에 기쁨과 감사와 하나됨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또한 저들과 함께 앉아 음식을 잡수셨습니다.
예수믿는 사람들 잘 먹는다고 소문났답니다. 구봉서 장로님이 연예인교회를 창립할 때 자기 집에서 성경공부하는데, 너무 잘먹어서 한달에 쌀이 몇가마니 들어가더라고 간증합니다.
먹는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귀한 것인줄 모릅니다.
 
“안녕하세요, 잘 계시지요, 네 편안하시지요, 덕분입니다”며 인사만 나누는 사람 따로,밥 먹는 사람 따로 있습니다. 누가 더 친한 사람입니까? 가족이 소중한 이유는 밥먹다가 그릇뒤엎고 싸워도 같이 먹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귀한 것입니다. 여러분 제발 같이 많이 잡수시기 바랍니다. 
   
우리나라 사람은 그저 찬물이라도 대접하려고 하는데 그것은 참으로 성서적입니다. 손님을 대접하려 하고, 같이 먹으려고 하는 것은 참으로 귀한 것입니다. 
 
요즘 얻어먹으려고 남의 집에 가는 사람 별로 없습니다. 사랑을 나누십시오. 구역예배보라고 하니 짐이 되어서 안 볼려고 하는 분이 계시는데 그러지 마시고 저녁잡수시고 오셔서 차한잔 쿠기하나 먹으면서 함께 모여보십시오. 하나님이 먹는 구멍과 말하는 구멍을 하나로 만들어 놓아서, 먹으면 말이 부드러워지고 말을 부드럽게 하려면 먹어야 하고, 먹으면 말 못해서 요즘 먹어서 말 못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아요. 여러분 함께 잡수시기 바랍니다. 거기에 정이 들고 함께 사랑을 느끼게 됩니다.
  
하나님은 왜 즐거워하셨는가, 왜 함께 먹는가? 
잃었던 양을 찾았고 잃었던 아들을 찾았기 때문입니다. 눅 15장에는 잃은 양에 대한 비유, 그 다음은 잃은 드라크마에 대한 비유, 그 다음에는 잃은 아들에 대한 비유입니다. 별것 아닌 것 같이 생각하다가 잃어버렸을 때에 그 가치를 다시 느끼는 것 아니겠습니까? 아들을 잃은 아버지의 마음이 얼마나 아프겠습니까? 편한 자리에 누운 들 그것이 편하겠습니까? 기름진 음식을 먹은 들 그 음식 맛을 알겠습니까? 아들을 잃어버린 아버지의 마음이 얼마나 괴롭고 아팠겠습니까? 아들이 돌아왔을 때 아버지는 행복했습니다. 아들은 아버지의 재산을 탕진했고 사람들은 탕자라고 비웃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아랑곳하지 않고 소를 잡고 이웃을 불러 함께 먹고 마시고 즐기자고 하였습니다. 잃어버린 아들, 죽었던 아들이 다시 살아났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믿는 것은 종교를 갖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하나님을 내 마음에 모시고 산 생명으로 새롭게 거듭나는 일이요, 새로운 인생을 사는 일이요, 영원히 구원받는 일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보다도 오늘 오신 여러분을 인하여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줄 믿습니다. 우리가 들러리가 될지언정 찬송을 부르고 말씀을 듣고 함께 나누는 우리의 마음에도 기쁨이 충만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교회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잃어버린 양을 찾는 일입니다. 제직회가 모이고 당회가 모이는 것도 모두 죽은 생명을 찾기 위해서입니다. 잃어버린 아들을 찾고자 하는 아버지의 마음을 읽는 것이 교회입니다. 그것이 교회가 할 일이요, 교회가 나아갈 방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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