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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라이 임하옵시며 (마 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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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이 임하옵시며 (마 9:10)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 여김 받으시는 것은 성도의 최우선적인 기도제목입니다. 그런데 성도는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히 여기지 않는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실에서 주님은 그분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는 나라가 임하도록 기도하기를 가르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란 ‘하나님의 통치’와 ‘그분께서 통치하시는 영역’입니다. 온 천하 만물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고 그 후에도 그분의 섭리의 손길에 의해 다스림을 받고 있습니다. 이를 성경은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히 1:3)라고 표현합니다.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이든 보이지 않는 것이든 하나님의 통치에서 벗어나는 것은 전혀 없습니다. 하나님을 반역한 사람들과 사탄까지도 그분의 통치 하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조롱하고 모욕하는 사람들조차도 그분의 통치에서 벗어날 수는 없지요. 이러한 하나님의 통치와 통치 영역을 ‘권능의 왕국’(regnum potentiae)이라 합니다.

주기도문에서 주님께서 언급하신 하나님의 나라는 권능의 왕국일 수 없겠지요. 권능의 왕국은 중단되어본 일이 없으며 항상 임하여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이름이 참으로 거룩히 여김을 받을 수 있는 독특한 나라가 이 땅에 임하기를 염두에 두고 계십니다. 그분의 백성으로만 구성되어 있어는 이 특별한 통치의 대상인 나라를 ‘은혜의 왕국’(regnum gratiae)이라 합니다. 

은혜의 왕국을 벗어난 나머지 영역은 사탄이 지배하에 있습니다. 따라서 누구든지 하나님의 특별한 다스림의 대상이 아니면 사탄의 지배하에 있습니다. 은혜의 왕국에 속하지 않으면서 사탄의 지배하에 있지도 않는 사람은 결코 있을 수 없지요.

죄를 범한 인간이 에덴에서 쫓겨난 이후 이 땅에는 항상 ‘반립’하는 두 왕국이 존재했습니다. 가인의 후손은 에덴의 동쪽에서 그들을 위한 성을 쌓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왕국을 만들었고, 셋의 후손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부르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살았습니다. 그 왕국들의 구별됨이 없어졌을 때 하나님께서는 홍수로 인류를 심판하셨고 노아의 가정을 통해 당신님의 이름을 거룩히 보존하셨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바벨에서 또다시 하나님을 대적하는 탑을 쌓는 죄를 범합니다. 그 일로 민족이 나뉘게 되었고, 하나님께서는 그 중에서 아브라함 한 사람을 택하셔서 그로 하나님의 백성의 조상으로 삼으셨습니다.

구약에서 은혜의 왕국은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임하여서 자라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온 세상에 충만한 분이셨지만, 특별히 이스라엘 백성과 더불어 가나안 땅에 함께 계시는 것으로 계시되었습니다. 사사시대든 왕정시대든 하나님께서는 그 나라의 진정한 왕으로 통치하시면서 그들이 제사장 나라요 거룩한 백성으로 구별되기를 원하셨습니다(출 19:6). 그분의 백성이 아닌 자는 그 땅에서 기업을 얻을 수가 없었지요. 이것은 장차 임할 은혜의 왕국에 대한 모형과 그림자였는데, 이와 함께 하나님께서는 언약을 주셔서 원형과 실체로서의 그 나라가 임하기를 갈망하게 하셨습니다.

갈망되었던 은혜의 왕국은 예수님의 오심을 통해 영적으로 성취됩니다. 그 나라는 이제 눈에 보이지 않는 형태로 계시되었습니다. 많은 유대인들이 하나님 나라를 눈에 보이는 ‘지상왕국’으로 오해하는 중에,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 17:20b-21)고 확정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더 이상 눈에 보이는 특별한 지역으로 제한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특정 국가를 하나님께서 특별히 다스리시는 나라로 오해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전혀 성경적인 가르침이 아니고 자기 민족의 우월성을 내세우려는 민족주의에 불과합니다.

마태복음 13장에서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에 관한 비유들을 말씀하셨습니다. 그 중에 겨자씨 비유는 하나님 나라가 자라간다는 속성을, 누룩의 비유는 보이지 않게 영향력을 발하는 속성을 계시해줍니다. 은혜의 왕국은 힘과 숫자로 눈에 보이는 영역들을 정복해나가는 나라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 전파를 통해서 인간의 심령이 하나님의 통치를 받고 복음으로 변화된 영향력을 조용히 확산해나가는 형태로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로 구속함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 공동체인 참교회는 무엇보다 성경 말씀의 바른 선포와 보이는 말씀인 성례의 집행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증시(證示)해야 합니다.

신약의 계시가 이처럼 명확한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구약적인 형태의 하나님 나라를 갈망하며 고집한다면, 이정도면 막가자는 것이지요. 교회는 숫자와 힘을 통해 어떤 영역을 장악하고 지배함으로써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려고 시도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 나라가 확장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하나님 나라를 정치적인 나라로 오해했던 예수님 시대의 유대인들과 같은 모습에서 벗어나지 못한 셈이지요. 그러한 노력 대신에 성도는 복음이 전파되고 말씀을 통해 회심하는 일이 일어나서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어가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은혜의 왕국에 대한 또 다른 오해는 ‘가는 나라’로 여기는 점입니다. 찬송가의 많은 구절들이 천국이란 죽은 뒤에 가는 나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 나라가 “임하옵시며”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성경은 그 나라는 ‘오는 나라’이며 ‘이미’ 임하였으나 ‘아직 아니’ 완성되었다고 가르칩니다. 겨자씨가 이미 심겼지만 아직 완전히 자란 것은 아니라는 셈이지요. 

자라는 중에 있기 때문에 이 땅에는 하나님의 백성과 그들을 대적하는 백성들이 공존합니다. 심지어 지역교회 안에서도 공존합니다.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라야 완전한 분리가 일어나지요. 그때에 완성된 하나님 나라를 ‘영광의 왕국’(regnum gloriae)이라 합니다.

제가 천국을 가는 나라로 생각하고 있을 동안에는 구원받은 이후 이 땅의 삶에 대한 의미를 생각하기 어려웠습니다. 저로 말미암아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받을 수 있다면 그것으로 위로를 삼으려 했지만, 마음 깊은 곳에 ‘이제 나는 왜 사는가?’라는 기독교 운명주의를 떨칠 수 없었습니다. 이생의 삶은 천국에 가기까지의 지루하고도 피 말리는 연습에 불과한 것 같아서 애정이 생기지 않았지요. 

천국은 오는 것이며 이미 임하여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비로소 기독교 운명주의를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이생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하나님의 백성답게 구별된 모습으로 살아야 함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은혜의 왕국에서 사는 성도는 두 가지 시민권을 가졌습니다(행 22:28; 빌 3:20). 아직 완성되지 않았기에 그는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면서 이 땅의 한 나라에 속한 시민입니다.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의무와 동시에 이 땅 시민으로서의 의무를 요청받습니다. 하나님 백성의 의무를 거부한다면 하나님의 징계가 있을 것이며, 이 땅 백성의 의무를 거부한다면 세속 정부의 처벌을 받을 것입니다. 세상과 더불어 살면서도 거룩한 나그네로 구별되게 살아야 하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마 10:16)고 말씀하셨습니다.

구별되어야 한다는 말은 격리되어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 땅을 사는 동안 성도는 불신자들의 삶에서 격리될 수 없습니다. 언제나 더불어 살아갑니다. 하나님께서 비춰주시는 따스한 햇살과 그분께서 내리시는 소나기도 함께 공유합니다. 정치적인 고통과 경제적인 위기 속에서 기쁨과 슬픔도 공유합니다. 문화와 지식을 공유하며 잠자리와 밥상을 공유하기도 합니다. 

성도의 구별은 그 모든 것으로부터의 단절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서로 돕고 사랑하며 더불어 살 수 있어야 합니다. 성도가 구별되어야 할 대상은 눈에 보이는 세상이 아닙니다.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과 세상을 의존하고 동화되어가는 삶과 구별되어야 합니다.

세속의 문화는 하나님의 통치를 떠나 스스로 “하나님과 같이 되어”(창 3:5) 살려는 점에서 에덴에서 아담을 유혹한 사탄의 방식으로부터 전혀 변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이름보다 “우리 이름을”(창 11:4) 내려는 바벨탑의 도전은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없이 ‘꿈은 이루어진다’고 외치는 구호 속에서도 발견됩니다. 

세속은 전능하신 하나님을 겸손히 의존하는 대신 ‘나의 사전엔 불가능이 없다’며 전능한 자신의 잠재력과 가능성을 신뢰하도록 부추깁니다(욥 21:15). 성도는 각자 하나님께서 부르신 삶의 현장에서 세상과 더불어 지내면서도,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높여드리고, 그 이름을 위하여 살며, 겸손히 그분을 의존하는 삶의 문화로 구별되어야 합니다.

주의 나라가 임하도록 기도하는 기도자는 세상으로부터 도피하지 않아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오히려 ‘지금 여기’ 내 삶의 자리에 하나님의 나라가 존재함을 적극적으로 드러내어 보여야 합니다. 그것은 전파하는 말씀과 더불어 부끄러움 없는 삶이 뒤받침 되어야 하는 일이겠지요. 성경을 보면 언제나 하나님의 나라는 그 시대 성도들이 기대하는 만큼 충만하게 임하지는 않았습니다. 

교회사를 보아도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시대 어떤 장소에도 흡족하게 임한 일은 없습니다. 어떤 교회도 하나님 나라를 부분적으로만 드러내었을 뿐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백성은 언제나 미완성의 나라에 살면서도 낙망치 않고 완성된 그 나라를 위하여 기도해왔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임하도록 기도하는 가운데 우리는 구약의 성도로부터 역사를 거쳐 지금 나에게 까지 연결되는 거대한 ‘하나 됨’을 의식하게 됩니다. 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동질성과, 한 몸으로서의 정체성을 생각하게 되지요. 그 나라가 임하도록 기도하는 중에 한 마음 한 뜻으로 연합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미래의 어느 역사적 시점에 반드시 그 나라가 완성되도록 역사하실 것입니다. 그 날은 ‘구원’의 완성일 뿐만 아니라 공의로운 ‘심판’도 명확하게 시행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과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 하나도 남김없이 다 평가되고 모두 구별되겠지요.

주기도문은 “나라이 임하옵시며”를 핵심으로 해서 다른 간구들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는 많은 필요를 구하는 우리 기도의 핵심도 하나님 나라가 중심임을 말해줍니다. 하나님의 통치하심이 먼저 우리의 삶속에서 분명하게 드러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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