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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나라를 침노하는 자 (대하 20:10~11, 마 11: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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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나라를 침노하는 자 (대하 20:10~11, 마 11:12~14)


적이 곧 쳐들어온다는 소식을 들은 마을 모든 사람들은 황급히 피신하였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모두 피신하고 그 마을 수도원의 수도사들만 남아 있었습니다. 침략자들은 힘도 안 들이고 얻은 마을에서 큰 잔치를 벌였습니다. 수도사 중의 한 명이 침략자에게 와서 “당신들은 이곳의 평화를 파괴했습니다. 당장 여기를 떠나주실 바랍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침략자의 두목은 칼을 꺼낸 후 “내가 눈도 깜짝 않고 너를 두 토막으로 만들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을 들은 수도사는 침착하게 “나도 눈도 깜짝하지 않고 두 토막이 될 수 있다”라고 하였답니다. 수도사의 대답에 놀란 두목은 다음 날 그 마을을 떠났습니다. 세상에서 칼이, 무력이 가장 강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참 힘을 압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는 힘으로 얻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아는 것이 참 지혜입니다. 
  
‘킹덤 오브 헤븐’(Kingdom of Heaven)이란 영화의 배경이 된 성을 여러 해 전에 가본 적 있습니다. 영화의 내용에는 사랑도, 용맹도, 전투도 나오지만 이슬람과 기독교의 화해가 마지막에 나타납니다. 십자군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자행된 폭력과 탐욕, 지배욕이 숨어 있는 전쟁이었음을 고발합니다. 십자군은 하나님의 군대가 아니라 당시 교황과 봉건 영주들의 이기심의 충족을 위한 군대였음을 지적합니다. 성지 해방이 아니라 살육과 약탈이 자행되었음을 드러냅니다. 
  
십자군은 유럽인들이 이슬람을 상대로 벌인 군사원정입니다. 1095년부터 1270년까지 8차례 원정을 갔습니다. 역사적 기록으로는 8번이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더 많았다고 합니다. 성지 예루살렘과 그리스도의 성묘(聖墓)를 이슬람으로부터 탈환이려는 싸움이었습니다. 그러나 거룩한 목적의 전쟁이 기독교사의 가장 치욕적인 기록을 남기게 되었습니다. 십자군들은 약탈을 일삼았고, 소년병을 파견하여 이들이 중도에 잡혀 노예로 팔려가기도 했습니다. 결국 십자군 원정은 비참한 결과를 남기고 끝이 났습니다. 이 일로 사회적, 가정적 문제를야기한 것은 사실입니다. 십자군은 의로운 하나님의 군사인가, 아니면 불의한 인간의 무력인가 하는 것은 많은 논쟁을 남겼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결코 억지로, 강제로, 힘으로 빼앗는 나라가 아닙니다. 성경은 온유한 자가 땅을 차지하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도 칼로 정복할 것이 아니라 온유한 자가, 그리스도의 성품으로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성경에는 “세례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라는 말이 있습니다. 세례요한이 활동하던 때에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되었다는 말입니다. 세례요한이 세상에서 그의 사역을 시작하면서 한 선포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는 말입니다. 세례요한이 와서 시작한 것은 하나님의 나라의 선포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심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하게 되었습니다. 학자들은 예수님이 오심으로 종말이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이때부터 하나님의 나라는 침노해야 합니다. 빼앗는 자가 차지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내 힘을 의지하지 않고, 공짜로 가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침노해야 갑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빼앗는 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12절 상반절에는 “세례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노니”라고 합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빼앗으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나라를 빼앗는 법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얻지 못했습니다. 의로운 나라는 의로 얻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무력으로나 칼로는 얻지 못합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칼을 쓰는 자는 칼로 망한다고 하셨습니다. 
  
성경말씀에 대한 오해가 더러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세상을 다스리라고 한 말을 지배하라는 말로 이해하여 많이 파괴하였습니다. 얻으라는 말을 오해하여 빼앗으라는 줄로 알고 빼앗았습니다. 가난하라고 한 말을 오해하여 물질만 가지지 않으면 되는 줄로 알았습니다. 침노하라는 말을 오해하여 무력으로 탈취하려고 하였습니다. 
  
‘침노하라’는 말은 헬라어로 ‘비아제타이’입니다. ‘비아’라는 말은 힘이란 말입니다. ‘비아제타이’란 말은 정복하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침노하는 방법은 무력이나 칼이 아니라 간절함과 끈기를 통하여 가능합니다. 
  
세례요한 이후에 세리와 창녀들,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나라에 밀려 들어왔고 그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얻었습니다. 영어성경 NIV에는 이 말씀을 “하나님의 나라가 힘차게 뻗어나가고 있다”(forcefully advancing)라고 번역하였습니다. 적극적이고 역동적으로 많은 사람에게 열려짐으로 열정적인 신앙인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수용하였습니다. 간절함이 있는 민족이나 사람이 하나님의 나라를 얻었습니다. 
  
콜럼버스는 침략자입니까? 지금도 콜럼버스에 대한 논쟁이 있습니까. 콜럼버스는 지배하려고 간 것이 아닙니다. 그의 시도는 넓은 세계를 발견하려고 한 것입니다. 그는 지배하려는 의도 보다 세계를 발견하여 넓은 세계에 살고 싶어 했던 것입니다. 만일에 그의 항해가 아니었더라면 세계는 발전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침략자, 침입자, 침범자, 이런 말들은 다 부정적 의미가 강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긍정적 의미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침입자엔 ‘무단’이란 수식어를 붙여 흔히 ‘무단침입자’라고 합니다. 이전 시대의 식민지주의를 보세요. 영국의 식민지였던 나라들은 지금도 영국에 감사하고 있고, 영국의 식민지였던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식민지였던 나라들이 모여 영국연방을 만들고 탈퇴하자고 해도 항상 탈퇴를 반대하는 편에게 밀립니다. 그런데 일본의 식민지였던 나라들은 지금도 일본을 원망하고 있습니다. 무엇 때문에 이런 차이가 나겠습니까? 침략의 동기와 방법의 차이 때문입니다. 
  
민족의 기질의 차이에 따라서 예수 믿는 것이 전혀 다릅니다. 항상 마음이 느슨한 열대지방에 가면 예수 믿는 것도 느슨합니다. 반면에 열정적 남미에 가면 예수 믿는 것도 굉장히 열정적입니다. 지금은 개신교가 가장 번성한 곳이 남미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우리의 기도는 가장 동적인 기도라고 합니다. 쉴 새 없이 흔들어대는 기도를 합니다. 옛날부터 정한수를 떠놓고 기도하는 습관이 있어 아주 정성이 깊습니다. 절에 가면 쉬지 않고 탑돌이를 합니다. 온몸이 부서지도록 3보1배를 합니다. 산 신앙 때문에 산 기도가 가능합니다. 대형심리 즉 공명심리가 있어 큰 것을 좋아합니다. 이름에도 큰 대(大)자가 많습니다. 대한민국, 대통령, 대학교라고 부릅니다. 거기에다 대예배, 대심방 등의 말도 사용합니다. 이런 대형화의 열정 때문에 기독교 역사 100년에 전 인구의 4분의 1이 예수를 믿게 된 것입니다. 이런 간절함이 하나님의 나라를 얻게 됩니다. 
  
에서는 야곱에게 장자권을 빼앗깁니다. 장자권은 당연히 장자인 자기의 것인데 동생에게 팥죽 한 그릇에 빼앗깁니다. 복 받기를 간절히 구하는 야곱이 빼앗았습니다. 야곱은 얍복강 가에서 천사와 씨름할 때도 끝까지 놓지 않았습니다. 이런 간절한 마음이 하나님의 나라를 차지합니다. 하나님의 복을 받습니다. 
  
고린도후서 7:11에는 “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된 이 근심이 너희로 얼마나 간절하게 하며 얼마나 변증하게 하며 얼마나 분하게 하며 얼마나 두렵게 하며 얼마나 사모하게 하며 얼마나 열심 있게 하며 얼마나 벌하게 하였는가 너희가 그 일에 대하여 일체 너희 자신의 깨끗함을 나타내었느니라”고 합니다. 이런 바울의 간절함이 하나님의 나라를 침노합니다. 확장합니다. 지금까지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고 있습니다. 
  
16세기 스페인에 니콜라스라는 엄청난 부자가 있었습니다. 돈이 많다보니 권력이 절로  따랐습니다. 그는 수완이 좋아 돈도 권력도 차지하였습니다. 그의 수완을 알고 있던 대주교가 관구내의 불안정한 재정을 수습해 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니콜라스가 개입한 후 신속하게 관구의 재정은 호전되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왕은 그를 궁중으로 불렀습니다. 왕의 재산을 증식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37살에 사회 최고위층 인사가 되었습니다. 권력을 가지게 되자 다른 권력가들도 그에게 와서 굽신거리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니콜라스는 체격이 왜소하고 대머리인 무일푼의 사람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는 바로 ‘십자가의 요한’이었습니다. 요한은 ‘아빌라의 테레사’ 수녀와 협력하여 금욕, 청빈, 단순한 삶을 규율로 하는 카르멜 수도회를 창립하였습니다. 요한은 신발도 신지 않고 최소한의 옷을 입고 다녔습니다. 니콜라스는 그를 만나자 왕궁을 떠나 자신의 돈을 다 나누어주고 맨발의 카르멜회에 입회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돈으로, 칼로, 힘으로 침노하는 것이 아니라 무소유로, ‘나다’로 침노하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둘째, 하나님의 나라는 침노하는 자가 빼앗습니다. 

12절 하반절에는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고 합니다. ‘침노하는 자’란 ‘강탈자’, ‘난폭한 자’등의 부정적 이미지를 가진 자가 아닙니다. 오히려 이 말은 용기있는 자, 강렬한 집념 지닌 강한 자들이란 뜻입니다. 그 나라를 빼앗는 자는 소심하거나 쉽게 낙담한 자가 아닙니다. 이런 사람은 그 나라를 얻을 수 없습니다. 목적한 바를 쟁취하기 위해 결사적인 노력을 하는 사람이 얻습니다. 지혜를 아끼지 않는 강하고 용기 있는 자가 빼앗습니다. 
  
‘빼앗느니라’는 말은 ‘하파르주신 아우텐’이란 말입니다. 무엇을 취하기 위해 사력을 다해 움켜쥐는 상태를 뜻합니다. 일전에 인터넷 사이트에서 어느 동영상을 보니 독수리가 자기 몸보다 더 큰 염소 한 마리를 그대로 낚아채 가는 장면이 있었습니다. 독수리는 사력을 다해 활강합니다. 힘찬 날개 짓을 합니다. 발로 움켜쥡니다. 그리고는 산 아래로 쏜살같이 내려갑니다. 

이 동영상에 어떤 아이가 글을 올렸습니다. “그래서 독수리 오형제가 지구를 지키는구나.” 호랑이가 토끼 한 마리를 잡기 위해서도 전력 질주하는 것을 아시지요? 이것이 하나님의 나라를 추구하는 마음입니다. 사력을 다해 전력 질주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하나님의 나라를 얻습니다. 이런 사람이 마침내 하나님의 나라의 승리자가 됩니다. ‘되면 되고 말면 말고, 하면 하고 안 되면 말고’라는 식의 마음으로는 절대로 얻을 수 없습니다. 이련 마음으로는 될 수 없고, 할 수도 없습니다. 
  
‘워터월드’라는 영화가 있었습니다. 지구 온난화로 온 세상이 물바다가 되었습니다. 어디엔가 마른 땅, ‘드라이 랜드’가 있다는 소문을 들었는데 어느 소녀의 등에 ‘드라이 랜드’를 찾아갈 수 있는 지도가 있습니다. 이 아이를 빼앗는 자는 ‘드라이 랜드’를 찾을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 아이를 빼앗기 위해 처절한 싸움을 합니다. 이 아이를 빼앗는 것은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숨을 걸고 싸움을 하는 것입니다. 영화를 보면 이런 주제들이 많이 있습니다. 목숨처럼 귀한 것들을 한 편은 빼앗기지 않으려고, 한 편은 빼앗으려고 싸우고 죽입니다. 영화가 늘 그렇듯이 결국 주인공이 이깁니다. 선한 쪽이 빼앗습니다. 
  
야곱과 에서를 다시 보세요. 형의 장자권을 빼앗고, 아버지의 축복까지 빼앗은 야곱은 빼앗은 다음에 얼른 도망칩니다. 에서가 뒤에 와서 아버지 이삭에게 복을 달라고 하자 아버지 이삭은 창세기 27:35에 “이삭이 이르되 네 아우가 와서 속여 네 복을 빼앗았도다라고 합니다. 

에서는 창세기 27:36에 “그가 나를 속임이 이것이 두 번째니이다. 전에는 나의 장자의 명분을 빼앗고 이제는 내 복을 빼앗았나이다. 또 이르되 아버지께서 나를 위하여 빌 복을 남기지 아니하셨나이까”라고 합니다. 이에 대한 이삭의 대답은 굉장히 중요한 점을 말하고 있습니다. “다 주었으니 내 아들아 내가 네게 무엇을 할 수 있으랴.” 

하나님의 복을 한번 빼앗기면 다시 얻지 못합니다. 빼앗기고 나면 비참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도 빼앗든지 빼앗기든지 둘 중의 하나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뒤에 다시 얻을 수 있습니까? 죽은 자를 위해 기도하면 다시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까? 절대 그렇게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빼앗고 다시 빼앗기지 않게 해야 합니다. 한 번 잃으면 다시 얻을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출애굽 후에 고라와 같은 사람은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선동했습니다. 돌아간 자는 망합니다. 돌아가면 다시 오지 못합니다. 절대로 돌아가지 않아야 합니다. 빼앗아야지 빼앗기면 안 됩니다. 룻기에 나오는 나오미의 두 며느리를 보세요. 룻은 시어머니 나오미가 그냥 모압에 머물러 있으라고 하지만 따라 나섭니다. 한참 가다가 다시 집으로 돌아가라고 하지만 돌아가지 않습니다. 이런 룻은 예수님의 족보에도 그 이름을 올리고 축복의 대를 이어갑니다. 

반면에 큰 며느리였던 오르바는 어머니가 따라오지 말고 집으로 돌아가라고 하니 돌아갔습니다. 돌아간 오르바는 축복에서 제외되었습니다. 돌아가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어머니가 가라고 한다고 해서 자신은 순종했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안 되는 사람은 꼭 이런 것만 순종해요. 이건 순종의 문제가 아니라 끝까지 축복을 차지하고 빼앗아야 합니다. 
  
엘리사는 엘리야의 제자입니다. 엘리야가 소명을 마치고 떠납니다. 길갈에 왔을 때에 엘리야는 엘리사에게 따라오지 말고 머물러 있으라고 하지만 엘리사는 따라갑니다. 벧엘에 왔을 때도 머물라고 하지만 머물지 않고 따라갑니다. 여리고에서도 그랬습니다. 요단에 왔을 때도 절대로 돌아가지 않고 스승을 따라갑니다. 엘리사는 끝까지 엘리야를 떠나지 않고 있다가 스승의 영감을 배나 달라고 하여 빼앗듯 영감을 받습니다. 이런 간절함과 용기가 하나님의 나라도 차지하게 합니다. 
  
포도원 품꾼의 비유도 보세요. 마지막에 들어온 사람은 일할 시간이 1시간밖에 안 남았지만 간절함과 끈기로 기다림으로 포도원에 들어가고 종일 일한 사람과 똑같은 품삯을 차지합니다. 달란트 비유에도 그렇습니다. 1달란트 받은 사람은 간절함과 용기가 없어서 결국은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는 저주를 받습니다. 주인은 이 사람에게서 빼앗아서 있는 자에게 주었습니다. 
  
빼앗기는 자와 빼앗는 자의 차이를 아시나요? 하나님의 마음과 일치한 간절함과 의지와 노력이 빼앗게 하고 그렇지 못하면 빼앗기게 합니다. 사무엘하 7:15에 보세요. “내가 네 앞에서 물러나게 한 사울에게서 내 은총을 빼앗은 것처럼 그에게서 빼앗지는 아니하리라”고 합니다. 선지자 나단의 계시로 다윗에게 준 말씀입니다. 사울은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져 하나님의 은총을 빼앗겼습니다. 그러난 다윗에게서는 빼앗지 않는다고 하십니다. 
  
제가 아는 어느 목사님은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많은 고생을 하였습니다. 그 분이 학교에 다니고 신학을 공부할 때도 너무 가난하여 보잘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목사님은 새벽기도 때마다 “주여, 주시옵소서”를 간절하게 부르짖었습니다. 어떤 때는 “뭘 저렇게 달라고 하나”하고 빈정대기도 하였지만 그 분은 복을 받았습니다. 목사가 된 후로 결혼을 잘 해서 미국에 가서 공부도 하고 박사학위도 얻어 목회를 잘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복을 간절한 마음으로 빼앗은 것입니다. 
  
우리말에 ‘어차피 나이 먹는 것이라면 아름답게 늙자’는 말이 있습디다. 유대인들은 ‘어차피 햄을 먹을 바에야 맛있게 먹는 게 낫다’고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어차피 예수를 믿을 거라면 좀 간절하게 눈에 불을 켜고 믿읍시다. 최선을 다해 믿읍시다. 열정으로 축복을 빼앗듯이 구합시다. 믿음에는 욕심이 좀 있어야 믿는 재미가 있습니다. 예배도 앞자리를 탐하고, 훈련한다 하면 열심히 훈련받고, 공부시간에 열심히 말씀 배우고, 모임에는 빠지지 말고, 예배시간에 온 마음을 다 하고, 봉사하는 데는 빠지지 말고, 전도에 목숨을 걸고 열심히 하면 예수 믿는 맛이 있을 것입니다. 

결론 

여러분은 베수비오 산의 폭발을 아시지요? 이 산은 지금도 활화산이라고 합니다. 이 산이 주후 79년에 화산폭발을 하여 그 아래의 폼페이가 완전히 폐허가 되었습니다. 1,700년 후에 고고학자들이 유령도시를 파헤치기 시작하였습니다. 폐허에서 해골이 발견되었는데 손에 동전을 움켜쥐고 있었습니다. 어떤 여자는 보석을 손에 쥔 채로 죽었습니다. 어떤 성당의 사제는 성전의 보물을 담은 자루를 메고 있었습니다. 어떤 부부는 금은보석을 잔뜩 뒤에 쌓아두고 죽었습니다. 또 어떤 이는 작별의 포옹을 하며 죽었다고 합니다. 
  
천만금을 움켜쥐고 빼앗기지 않겠다고 바둥대던 사람들도 사람에게 빼앗기지 않았어도 자연에게 다 빼앗겼습니다. 세상에서 빼앗고 빼앗기지 않는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세상의 권력입니까? 땅입니까? 진기스칸은 그 넓은 땅을 차지했지만 다 빼앗겼습니다. 세상의 재물입니까? 어떤 것도 영원히 빼앗기지 않는 나의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만이 빼앗기지 않고 영원히 나의 것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침노하는 자의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빼앗을 자격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때문에 모두 다 이 자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원한 나라를 빼앗고 빼앗기지 않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성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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